리스트(Franz Liszt, *1811 라이딩, †1886 바이로이트)
음악적 재능을 가졌던 아버지에게서 6살 때부터 피아노 지도를 받음. 빠른 학습진도로 이미 8살 때부터 연주회를 가짐. 바이마르의 훔멜에게서 피아노지도를 받으려 했으나 실패(비싼 교습비 요구 때문). 1822년 비엔나에서 체르니의 제자가 됨. 동시에 살리에리로부터 이론수업을 받음. 비엔나와 부다페스트에서의 성공적인 피아노연주회. 1823년 파리로 이주. 음악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케루비니에 의해 거절(어린 천재들에 대한 케루비니의 반감 때문). 파에르(Paer)와 라이카에게서 개인적으로 화성학 수업 받음. 프랑스의 여러 지방과 런던에서의 성공적인 연주회. 롯시니, 벨리니, 마이어베어, 쇼팽, 베를리오즈, 파가니니 등에 매료됨. 특히 베를리오즈와 파가니니의 작품들을 피아노로 옮기면서 그는 화려한 양식에서 장인적 양식으로 넘어감. 다굴 백작부인과 만남(그녀를 통해 3명의 자녀를 얻음, 그 중 둘째는 뷜로와 바그너의 부인이었던 코지마, 1838/39년에 부분적으로, 1866년에 완전히 관계 단절). 1838년부터 유럽 전역에서 연주회 (헝가리 1840, 베를린 1841/42, 쾨닉스부르크 1842). 1847년 키에프에서 영주부인인 카롤리느 폰 자인 비트겐슈타인을 만나 연주가 생활 청산.
1848-59년 바이마르에서 궁정악장 역임. 이 시기에 그의 교향시들과 중요한 피아노 작품들이 작곡됨. 또한 동시대인들(슈만, 베를리오즈, 바그너)의 작품들이 그에 의해 무대에 올려짐. 1841년 처음 만난 바그너와는 지속적으로 우정을 지속(1859-72년에는 바그너가 코지마와 결혼함으로 인해 관계가 멀어짐). 바이마르 시기에 수많은 제자들과 추종자들에 의해 신독일악파가 형성되었고, 전독일 음악협회가 구성되었으며, 브렌들 주도하에 신음악잡지(NZfM)가 발행됨. 반면에 힐러, 슈만 부부, 요아힘, 브람스 등과는 사이가 멀어짐. 카롤리느와의 정식 결혼을 위해 그녀를 뒤따라 1861년에 로마로 이주(교황 피우스 9세의 반대로 결혼 무산). 1865년에 저급 사제직을 받음. 그 후 치칠리아주의와 그레고리오성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 예전적 작품들을 다수 작곡(Missa choralis 1865). 1875년 부다페스트 음악아카데미의 학장. 그는 생애 말년에 바이마르, 로마, 부다페스트를 옮겨다니며 생활. 1886년 바이로이트에서 축제기간 중 사망.
작곡가로서의 위치와 다르게, 리스트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위치는 역사에서 한번도 부인되거나 교정되지 않았다. 그의 피아노 선생으로서의 위치 또한 확고하여 약 400명 이상의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형식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교습법으로 유명했다. 그의 피아노 작곡기법 역시 연주기술의 난이도 등에서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예, 쇼팽, 탈베르크)을 능가하였다. 그는 선율성을 위해서 테너음역을 선호하였고, 그만의 독특한 연주음형, 장식, 카덴짜 등을 작품에 이용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의 변주기술에서 출발하여, 고전적 소나타기법을 많이 활용하였고 바그너의 지도동기기법과도 유사한, 그러면서도 매우 독특한 '테마변형기법'을 발전시켰다. 이 기법은 바이마르 시기의 작품들에서 집중적으로 쓰여진다.
몇개를 제외하고 그의 오케스트라작품들은 모두 프로그램음악이다. 여기에서 음악과 프로그램의 관계는 매우 다양하다. 즉, 「프렐류드」에서처럼 매우 느슨하기도 하고, 「이상들」에서처럼 프로그램과 음악을 단락별로 일치시킬 수 있을 정도로 밀접하기도 하다. 프로그램이 두 부분으로 나뉠 경우 음악은 대조와 긴장고조의 일반적인 형식원리를 따른다. 곡의 마지막에는 리스트 특유의 절정이 이루어진다.
리스트에 의해 주로 쓰여진 장르는 피아노음악과 교향시이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파우스트심포니」와 「헝가리 라프소디」를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교회음악과 오르간음악, 그리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가곡들이 있다.
나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