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레거(Max Reger, *1873 브란트 켐나트, †1916 라이프치히)
독일 작곡가. 레거는 어머니(피아노)와 아버지(오르간, 바이올린, 첼로)로부터 첫 음악수업을 받음. 그리고 학교선생 겸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달베르트 린드너로부터 오르간을 배워 13세 때부터 그를 대신해 바이덴의 시물탄교회에서 주일 예배시에 오르간을 연주함. 1888년에 그는 바이로이트를 방문해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와 「파르시팔」을 듣고 그 영향으로 작곡을 정식으로 시작하게 됨. 아버지의 권유로 1889년 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치루나 결국은 포기하고 음악가가 되겠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킴. 그는 린드너를 통해 후고 리만의 책들에 기초한 작곡공부를 하였으며, 후에는 리만으로부터 직접 수업을 받음(1990-93).
1890-96년에는 비스바덴에 있는 콘서바토리오에서 이론, 피아노, 오르간 선생으로 활동. 1898년 이후에는 바이덴과 뮌헨을 중심으로 자유작곡가로서 창작생활에 전념. 1905년에 그는 뮌헨 왕립 음악아카데미에서 작곡과 오르간을 가르침. 이 시기에 레거는 칼 슈트라우베의 연주를 통해 오르간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음. 1907년에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선생으로 부름받아 한동안 대학음악학장으로 재직하기도 함(당시 슈트라우베는 콘서바토리오의 오르간선생 겸 토마스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 1908년에 예나대학교에서, 그리고 1910년에는 베를린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음. 1911년 레거는 마이닝겐의 궁정악장이 됨. 수많은 연주여행과 라이프치히 콘서바토리오에서의 교수활동으로 인한 신경마비로 인해 1914년 악장자리를 포기. 1916년 사망.
레거는 일찍부터 동시대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한스 피츠너와는 완전히 달리 신독일악파 전통의 오페라 심포니, 교향시, 프로그램음악을 멀리하고 브람스를 모델로 하는 순수 절대음악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브람스를 모델로 하는 작곡스타일은 그가 23살에 『오르간 모음곡』 op. 23을 브람스에게 헌정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레거의 음악은 무엇보다 화성적 성격이 강하다. 그의 화성은 조성의 모호함에서부터 확장, 빈번한 이동, 두드러진 섭도미난트(특히 단조-섭도미난트)의 사용, 장조도 단조도 아닌 조성변화 등에 이르기까지 기존하던 기능화성의 마지막 한계에까지 이른다. 이 이외에 가장 두드러진 레거의 음악적 표현기법은 요한 세바스챤 바하로 거슬러 올라가는 화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대위법적인 기악폴리포니이다. 그의 이러한 화성적이며 폴리포니적이고 내면적인 음악은 감각적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었다("내게는 브람스적 안개가 바그너나 슈트라우스 또는 그 외 다른 사람들의 뜨거운 열기보다 더 좋다"). 그 결과 오르간음악, 실내음악이 레거의 실질적인 작곡영역을 이룬다.
레거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을 즐겨 편곡한 작곡가로도 유명한데, 예로서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오케스트라 조곡,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오르간 파싸칼리아 c단조, 슈베르트, 슈만, 바그너, 브람스, 그리그, 볼프, 슈트라우스의 작품들(이 외에도 수많은 민요들)이 그에 의해 편곡되었다. 레거는 여기에서도 자신의 독특한 작곡스타일을 유지하는데, 이는 그가 원곡을 자신의 작곡스타일에 맞게 수없이 변형시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그는 해당 작품들에서 기법적이며 화성적, 리듬적인 변화는 물론 다이내믹적 구조에도 커다란 변화를 주곤 하였다. 레거 작품들에 나타나는 세밀한 레가토나 피아니시모 연주, 다채로우며 다양한 타건 요구, 수많은 연주지시어들 역시 표현양식에 대한 레거만의 독특한 시도를 보여준다.
주요 작품들: 시편 100편 op. 106, 모차르트변주곡 op. 132, 종교적인 노래들 op. 138 등. [나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