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 보케리니 (Luigi Boccherini 1743. 2. 19 - 1805. 5. 28)
보케리니는 이태리의 Lucca에서 성악가와 콘트라베이스 주자였던 아버지 레오폴드 보케리니(Leopold Boccherini)의 일곱 자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나 아버지 밑에서 기초적인 작곡과 첼로를 배웠다. 1757년 공부를 위해 로마에 가 코렐리와 팔레스티나 음악을 접하고 감동을 받는다. 1761년 다시 루카로 돌아와 시 관현악단의 첼로주자로 일하며 당시 바이올린 주자였던 만프레디(Filippino Manfredi)와 같이 빈, 파리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녔다. 그들의 연주는 노래하듯한 아름다운 소리라는 반응을 얻으며, 작곡가로서도 명성을 얻는다. 두 음악가는 1769년 스페인의 Madrid로 갔고, 보케리니는 스페인 왕자의 후원을 받게되어 그를 위해 실내악 곡을 남긴다. 왕자의 죽음(1785년) 이후 그는 몇 년간 스페인 왕의 오르간 주자로 일하나 1787년부터 첼로를 연주했던 독일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 밑에서 궁정작곡가란 칭호를 받으며 1797년까지 봉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 그는 궁핍한 환경에서 작곡생활을 하며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친다. 그의 유골은 1927년 출생지인 루카로 옮겨졌고 성 프란체스코(Francesco) 교회에 영예롭게 안치되었다.
그의 작품양식은 전형적인 이태리 기악음악과 당대의 표현 양식을 보여준다. 그는 갈랑 양식의 선율과 비르투오스한 기법을 잘 융합하고 섬세한 다이내믹 기법을 살렸다. 그의 선율은 단순하고 우아하면서도, 힘있고 격정적인 표현도 지니고있다. 그는 하이든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현악4중주 기법을 이루었으며, 첼로 부분이 자주 테너 음역에서 부각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후기 현악 4중주는 오케스트라 적으로 확장되고 형식과 조성에서 비관습적인 어법을 보여준다. 그의 현악5중주는 특히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6개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Op.5(1768)는 주제적 소재가 두 악기의 성부에 균형 있게 분포되어 서로 대화하듯 진행한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널리 애호되었으나, 빈의 기악음악 양식의 발전과 이태리에서의 오페라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의 그늘에 가려져 잊혀지다 20세기에 들어와 올바른 평가를 받게되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지고있다.
그가 남긴 대략 400개에 이르는 작품은 소수의 오라토리오, 칸타타, 미사와 드라마 등의 성악곡을 제외하고 대부분 기악곡을 위해 썼다. 기악곡 중에서도 실내악을 위한 작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대략 30개의 심포니, 2개의 8중주, 16개의 6중주, 약 125개의 현악5중주, 18개의 풀룻 혹은 오보에 5중주, 6개의 피아노 5중주, 약 100개의 현악4중주, 약 50개의 현악3중주, 12개의 현악2중주, 6개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나타 등이 있다.
오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