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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크로즈 [Jaques-Dalcroze, E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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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크로즈(Emile Jaques-Dalcroze, 1865 비엔나 - 1950 제네바) 

에밀 쟈크 달크로즈는 1865년 7월 6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사업가였던 아버지와 음악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이름은 에밀 앙리 자크(Emile-Henri Jaques)였으나 동명이인의 작곡가와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이름을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크로즈는 6세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비엔나에서 그는 오페라,발레,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접할 수 있었고, 이런 배경은 그가 7세가 되던 해, 1871년에 6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가 10세가 되던 1875년에 스위스인이었던 부모를 따라 고국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해서 살게 된다.  그의 나이가 19세가 되던 1884년에 달크로즈는 파리로 건너가 코미디 프랑세스(Comedie Francaise)에서 비극 작가 탈보(Talbot)와 희극작가 저머인(Germain)등과 함께 연극을 공부하였다.  또한 들리브와 포레에게 작곡을 공부하였다.
그는 유럽과 북미를 순회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연주자이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은 그만의 음악교육방법에 영향을 준 새로운 소리와 리듬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1886년에는 알제리아의 작은 극장에서 지휘자와 음악 감독으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 그는 아랍의 민속음악과 그 음악들에서 사용되는 불규칙하고 원시적인 리듬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리듬 기법들은 훗날 그의 유리스믹스 수업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87년부터는 비엔나 컨서바토리의 학생이 되어 브루크너와 작곡 공부를 하게 된다.  그는 졸업 후 제네바로 돌아가 배우, 가수, 지휘자, 시인, 작곡가, 피아니스트, 민속음악 학자 등 다양한 예술인으로 활동하였다.
달크로즈는 제네바 컨서바토리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1892) 화성학과 솔페이즈 교육을 지도할 때 학생들이 이론과 실제연주의 연관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문제점으로 인식하였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만의 리듬 활동(Rhythmic gymnastics) 시스템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는 기술적으로 연주를 잘 하더라고 학생들이 음악을 그들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다면 음악적인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이에 달크로즈는 그것을 해결하고자 유리드믹스, 솔페이즈, 즉흥연주 의 3대영역을 연계하여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법을 창안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03년부터 공공장소에서 제한된 형식을 가지고 그의 창의적인 달크로즈 교수법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달크로즈는 컨서바토리의 공식적인 뒷받침을 얻지 못하자 후원자 그룹을 등에 업고 컨서바토리로부터 나오게 된다.  1905년에는 그의 학생들과 함께 솔로던 음악제(Solothurn Music Festival)에서의 강연을 통해 처음으로 그의 교수법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  곧 지도자 양성을 위한 훈련코스의 설립을 촉진시키며 그의 교수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세미나를 가졌다.  1909년 독일의 부자 사업가 볼프 도른(Wolf Dohrn)과 헤랄드 도른(Herald Dohrn) 형제는 달크로즈에게 진보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새로운 도시에 학교 설립을 제안했고 10년의 계약을 맺었다.  1911년에는 드디어 독일의 드레스덴근교 헬레라우(Hellerau)에 학교를 세웠고 세계 각지에서 그의 교수법을 배우러 온 학생들은 각기 다른 교육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다양한 전공의 당대 유명한 예술가에는 쇼우(George Bernard Shaw), 디아길레프(Serge Diaghilev), 램버트(Marie Rambert), 브로흐(Ernest Bloch), 니진스키(Vaslav Nijinsky) 등이 포함된다.  수업은 리드믹 움직임,솔페이즈,피아노 즉흥연주였고, 오후에는 개인 악기 레슨과 합창,앙상블 수업이 이루어졌고, 저녁에는 오페라와 연주회에 참석하였다.  
그 후 달크로즈 유리드믹스 학교들은 영국의 런던, 파리, 그리고 베를린, 스톡홀름, 뉴욕 등지에서 앞다투어 개교하는 성과를 올렸다.  1913년 달크로즈가 감독하고 유리드믹스로 훈련된 음악가와 무용가들이 헬레라우에서 공연한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Orfeo)"는 달크로즈 교수법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헬레라우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이하며 활동하던 달크로즈는 제네바로 돌아갔고, 수년 동안 그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달크로즈 교수법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 후 헬레라우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1915년에 달크로즈는 제네바에서 달크로즈 인스티튜트(The Institut Jaques-Dalcroze)를 설립하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달크로즈와 그의 교수법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달크로즈 교수법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의 70세 생일에는 46개국에서 참석한 만 명이 넘는 전수자들의 서명으로 된 특별한 책을 선물 받았다.  그의 교수법은 음악, 무용, 연극, 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효과적으로 교육되며, 음악 치료에도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1925년 11월 21일 명예시민의 영예를, 1929에는 공공 교육자(Officer of Public Instruction)의 명예를, 1947년 불세출의 음악가 상을 받았고, 클레르몽 페랑(Clermont-Ferrand)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코다이, 오르프 등의 음악교육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 85세를 일기로 제네바에서 화려했던 삶을 마감하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왕성한 연구 활동을 벌이며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들에게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리듬, 음악, 교육』(Le Rhythme, la musique et l'education, 1920)이라는 1898년부터 1919년까지 집필하였던 에세이 모음집과 『유리드믹스, 예술, 교육』(Eurhythmics, Art and Education, 1930)이 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기록되었던 기사를 중심으로 엮은 책이 있고, 유리드믹스 클래스와 솔페이즈 학습을 위해 10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하였다.  그는 음악, 연극, 율동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무대를 위한 작곡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작업들은 돈즈(Tibor Denes)에 의해 정리 되었다.
컬드웰(J. Timothy Caldwell)은 달크로즈가 그만의 교수법을 만들어내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친 세 사람을 언급한 바 있다.  페스탈로찌(Johann Heinrich Pestalozzi)는 철학적인 배경, 다시 말하면 관찰(observation), 실험(experimentation), 그리고 추론(reasoning)을 통한 학습에 주안점을 둔 점,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 심정, 기능(head, heart, hand: 사고, 감정, 행위)의 3자 중심점을 우위로 두면서 조화롭게 발전시켜 인간 본성의 조화적 발전을 도모한 점 등을 만들어주었다. 클레퍼리드(Edouard Claparede)는 달크로즈의 가르치는 과정에 관한 조직적인 접근법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고, 마티스 루시(Mathis Lussy)에게는 유리드믹스의 기초를 마련해 준 정통적인 리듬수업을 받았다. 

등록일자: 2005-02-18
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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