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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모짜르트 [Mozart, Wolfgang Amad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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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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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차르트의 생애

모차르트는 살츠부르크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레오폴드 모차르트(1719-1787)와 안나 마리아 페르틀(Anna Maria Pertl, 1720-1778)의 사이에서 1756년 1월 27일 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해인 1756년은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이후 레오폴드라고 칭함)에게 매우 특별한 해이기도 했다. 매우 지적이며 학구적이었던 레오폴드는 자신의 바이올린교육서 (Versuch einer gruendlichen Violinschule)를 아욱스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모차르트와 그의 누나 난네를(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은 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모차르트는 어린 나이에 음의 높낮이와 강약의 차이를 매우 정확하게 인식할 뿐만이 아니라 뛰어난 기억력을 소유하여 일찍부터 심도 높은 음악교육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모차르트와 난네를은 일찍부터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을 공부하였는데, 모차르트는 7세 때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있었고, 14세에는 영어와 이태리어에 능숙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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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어린 나이에 시작된 연주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역의 문화를 접하게 되고 여러 음악가들을 만나면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유년시기의 교육은 한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불안정한 측면이 있었지만, 여행을 통한 다양한 경험은 또 다른 장점이 되어 그의 음악에 스며들었다. 잦은 여행과 살츠부르크로의 귀향, 그리고 또 다른 연주 여행으로 점철된 모차르트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삶과 작품을 간략하게 살펴보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의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크게 1) 유, 소년시기의 음악활동 (1762년 첫 번째 연주여행부터 1773년 마지막 이태리 연주여행까지), 2) 청년시기의 음악활동 (1773년부터 살츠부르크 활동시기부터 1781년 살츠부르크를 떠나는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3) 비엔나 시기의 음악활동 (1781년부터 1791년까지)으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유, 소년시기의 음악활동 (1762-1773) 

모차르트는 1762년에 그의 나이 6살 때 누나 난네를 (당시 11세)과 아버지 레오폴드와 함께 뮌헨으로 첫 번째 연주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뮌헨에서의 연주 여행에 대한 자세한 활동은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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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모차르트 가족은 1762년 9월 18일 파싸우(Passau)와 린츠(Linz) 등지를 거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향해 두 번째 연주 여행을 떠났다. 당시 비엔나는 빠리, 런던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으며 당대 저명한 음악가들이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1762년 10월 6일 비엔나에 도착한 모차르트 가족은 쇤부른 궁정에서 황제 가족을 만나기도 하고, 어린 모차르트는 저명한 음악가 바겐자일(Georg Christoph Wagenseil, 1715-1777)의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여 대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 연주여행 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고,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면서 모차르트 가족은 1763년 1월 5일 살츠부르크에 도착하였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1763년에 살츠부르크에서 궁정 부악장(Vicekapellmeister)이 되는데, 당시 그곳의 궁정악장(Kapellmeister)은 요셉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Michael Haydn, 1737-1806) 이었다. 레오폴드는 두 번째 연주 여행의 성공에 고무되어 1763년 6월 9일 세 번째 연주 여행을 시작한다. 이 연주 여행의 규모는 지난 연주여행에 비해 매우 긴 3년간의 여행이었다. 모차르트 가족은 뮌헨을 거쳐 아욱스부르크, 루드비히스부르크, 슈베칭엔(Schwetzingen)에 이르게 된다. 슈베칭엔에는 당시 독일 남부에 위치한 팔츠 지방의 선제후 칼 테오도르(Karl Theodor)의 여름별장이 있는 곳 이었다. 선제후 칼 테오도르의 궁정 만하임 에는 당대 최고를 자랑하는 만하임 궁정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모차르트 가족은 슈베칭엔 궁정에서 환대를 받고 당시 유명한 음악가 이그나츠 홀츠바우어(Ignaz Holzbauer), 크리스티안 카나비히(Christian Cannabich), 칼 요셉 토에스키(Karl Joseph Toeschi)와 친교를 가지게 된다. 모차르트 가족은 다시 하이델베르크, 마인츠,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코플랜츠, 본, 쾰른, 아헨, 뷔뤼셀을 거쳐 프랑스 빠리에 1763년 11월 18일 도착하였다. 모차르트는 빠리에서 후원자 그림 남작(Fr. M. Grimm)을 만나게 되고1763/64년 빠리에서 독일 출신 음악가 요한 곧트립 에카르트(Johann Gottlieb Eckard)와 요한 쇼베르트(Johann Schobert)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 빠리에서 약 5개월을 머물고 난 후 모차르트 가족은 빠리를 떠나 1764년 4월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 영국에서 모차르트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막내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하 (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를 만나 음악형식과 내용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되고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 (KV.16-19b)들을 구상하고 작곡하였다.  
모차르트 가족은 1765년 7월 24일 살츠부르크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들은 켄터베리, 도버를 지나 릴레(Lille), 겐트(Gent), 안트베르펜 (Antwerpen)을 거쳐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1766년 초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 4주를 머물고 우트레흐트(Utrecht), 멕헬른(Mecheln)을 거쳐 1766년 5월 10일 다시 빠리에 당도하였다. 다시 리옹(Lyon), 제네바, 로잔, 베른, 취리히, 돈나우에슁엔(Donaueschingen), 울름(Ulm) 그리고 뮌헨을 거쳐  1766년 11월 30일 3년 만에 살츠부르크에 돌아오게 된다. 
살츠부르크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다시 대위법 등 여러 가지 음악수업을 받았으며, 당시 살츠부르크의 대주교 지기스문트(Sigismund)에게 경의를 표한 작은 규모의 오라토리오 "제1계명의 책무"(Die Schuldigkeit des ersten Gebotes) 중 한 악장을 작곡하고 대학 축제를 위한 학교희극(Schulkomdie) "아폴로와 히아킨투스"(Apollo et Hyacinthus)를 작곡하였다. 
지난 여행의 성공에 크게 고무된 모차르트 가족은 1767년 9월 11일 오스트리아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카롤리나와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트의 결혼식에 맞추어 비엔나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전염병 천연두가 갑작스럽게 창궐하여 모차르트 가족은 급히 병을 피해 비엔나를 벗어났으나 어린 모차르트와 난네를은 병에 감염이 되고 말았다. 1768년 1월 10일 병이 회복되자 모차르트 가족은 다시 비엔나로 가 그곳에서 1년 동안 체류하면서 황제 가족과 많은 귀족들을 만났다. 1768년 10월 1일 모차르트의 징슈필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는 음악애호가이자 당대에 유명한 의사였던 프란츠 안톤 메스머 박사(Dr. Franz Anton Mesmer)의 집에서 공연되었다. 장기간의 여행으로 살츠부르크 궁정악단에서는 레오폴드의 급료 지불을 중단하기에 이르고, 모차르트 가족은 1769년1월 5일 살츠부르크에 돌아오게 되었다. 
1769년 12월 13일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모차르트는 이태리로 연주 여행 겸 음악을 배우기 위해 떠났다. 모차르트는 이 여행을 통해 이태리의 오페라를 익히고 대위법을 학습함과 동시에 연주회와 작품발표를 통해 명성을 쌓으려고 했다. 이태리어에 매혹된 모차르트는 자신의 두 번째 이름을 라틴어로 바꾸어 이후 모차르트 아마데우스 (Amadeus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 불리게 된다. "아마데우스"란 그가 태어났을 때 받은 이름 "테오필루스"를 이탈라아식으로 바꾼 것으로 그전에는 "고트립"(Gottlieb)이라는 독일 이름으로 바꾼 적도 있었다.  베로나, 만토바를 거처1770년 1월 23일 밀라노에 도착한 모차르트 부자는  보케리니의 음악을 듣고, 삼마르티니(G. B. Sammartini)와 피치니(N. Piccinni)를 만나 많은 영향을 받고, 볼로냐에서는 작곡가와 수학자이며 당대 최고의 음악 이론가 중 한명인 마르티니 신부(Padre Martini)에게 음악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요한 크리스티안의 스승이기도 했던 마르티니 신부는 모차르트에게 엄격한 형식의 대위법과 푸가 기법 등을 가르쳤다. 모차르트는 로마에 위치한 시스티나 성당에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 Allegri)의 9성부 음악 "미제레레"(Miserere)를 듣고 외워서 악보에 기록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나폴리에서는 오페라 작곡가 마요(Gian Francesco De Majo)와 파이지엘로(G. Paisiello)를 만나고, 욤멜리(Jommelli)와 피치니(Piccinni)의 오페라 세리아 와 오페라 부파를 접하기도 하였다. 로마를 거쳐 1770년 7월10일 다시 볼로냐로 돌아와 마르티니 신부에게 공부를 하면서 당시 전통적이며 권위가 높고 매우 엄격한 시험을 통과하여 아카데미아 데이 필아르모니치(Accademia dei Filarmonici)에서 회원으로서 "compositore"(작곡가)로 인정 받기도 한다. 밀라노에서는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아테"(Mitriate, r di Ponto)를 작곡하여 20여 차례 재 공연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태리 연주 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오페라 "루치오 실라"(Lucio Silla)에 대한 작곡 제의와 1771년 밀라노에서 거행될 페르티난트 황태자와 마리아 베레니체 공주의 결혼식에 사용될 곡들에 대한 작곡요청도 있었다. 모차르트 일행은 다음을 기약하고 1771년 3월 28일에 다시 살츠부르크에 돌아왔다. 살츠부르크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궁정악단 수석연주자(Konzertmeister)의 임무에 충실해야 했다. 그는 몇 개의 종교작품과 다수의 교향곡을 작곡하였으나 이태리에서의 연주약속 때문에 약 5개월 동안 살츠부르크에 머물고 1771년 10월 15일 이태리 밀라노에서 거행되는 결혼 축하연주 준비를 위해 모차르트는 8월 13일 살츠부르크를 떠나 8월 21일 밀라노에 도착했다. 결혼 축하공연에서 모차르트의 극세레나데(Serenade teatrale)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는 크게 성공하였다. 레오폴드는 아들 모차르트가 밀라노에서 보다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구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1771년12월 13일 다시 살츠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771년 12월 16일 모차르트 가족의 잦은 휴가와 연주여행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용서하던 살츠부르크의 대주교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가 사망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이태리 문화와 음악에 조예가 깊은 새로운 대주교 히로니무스 콜로레도 백작이 선출되었다. 사망한 전 대주교 지기스문트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상냥하고 아량이 넓은 반면 새로운 대주교 히로니무스는 계몽주의 사상에 경도되고 보다 개혁적이었으며 주관이 확실하며 엄격하였다. 모차르트는 1772년 4월 29일 거행되는 새로운 대주교의 즉위식에 단악장 구성의 극세레나데(Serenata drammatica) "쉬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을 공연하고, 여섯 곡의 교향곡 등을 작곡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지난 이태리 여행 때 약속된 오페라 "루치오 실라"(Lucio Silla)의 초연을 위해 휴가를 얻어 1772년 10월 이태리 밀라노로 떠나 12월 26일 오페라 "루치오 실라" 를 초연하였다. 모차르트는 이번 이태리 여행에서도 보다 나은 조건의 직장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커다란 수확은 얻지 못했지만 모차르트는 오페라 "루치오 실라" 외에도 여섯 곡의 "현악사중주"(KV. 155-160)를 작곡하고 1773년 3월 13일 다시 살츠부르크로 돌아갔다. 
이 여행 후 모차르트는 다시는 이태리를 방문하지 않고, 또한 이태리로부터도 더 이상의 작품의뢰가 없었다. 그러나 3번째 이태리 연주 여행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모차르트가 내적, 외적으로 성장하였다는 것과 이태리 지역의 음악분위기와 요구 사항을 철저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살츠부르크로 돌아온 모차르트 부자는 일단 살츠부르크 대주교와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17세의 젊은 모차르트는 독자적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했으며, 한편으로는 이시기에 모차르트의 음악세계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청년시기의 음악활동 (1773-1781)

1773년 살츠부르크 대주교 히로니무스 폰 콜로레도는 모차르트를 150 fl(플로린)의 월급을 주고 수석연주자로 정식 임명하였다. 모차르트는 이 시기에 다수의 크고 작은 종교음악을 대주교의 성당을 위해 작곡하고 또한 관악기를 위한 디베르티멘토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 등을 작곡했다.  
1773년 7월 레오폴드와 모차르트는 당시 대주교 히로니무스가 머물고 있던 비엔나로 가게 되어 이곳에서 모차르트는 피치니, 안포시, 갈루피(Galuppi), 가스만(Gassmann) 그리고 살리에리의 오페라 부파를 듣고, 또한 요셉 하이든의 음악과 현악4중주 스타일을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아 여섯 개의 "현악사중주" (KV. 168-173)를 작곡하였다. 
1773년 7-9월 비엔나를 다녀온 모차르트는 마지막 몇 달 동안 교향곡 25번(KV. 183)과 26번(KV. 200) 등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의 피아노 협주곡 제 5번(KV. 175)은 젊은 작곡가의 자신만만한 약동감과 생명력이 넘칠 뿐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선율을 사용하고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크게 증대되는 등 새로운 작품경향이 시도되었다.
모차르트는 1774년 12월 20일 초순 레오폴드와 함께 뮌헨에 가서 자신의 오페라 부파 "거짓 여자 정원사"(La finta giardiniera)를 12월 29일 초연하였다. 1775년에는 살츠부르크 대주교 히로니무스의 위탁으로 메타스타지오의 대본에 축전극 "목자의 왕"(Il Re pastore)을 작곡하였으며 1777년 살츠부르크에 머무는 기간동안 5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밤의 세레나데 제 6번", "세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제 7번 (KV. 242)", "피아노 협주곡 제 8번 (KV. 246)", "세레나데 제 7번 하프너",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제 9번 (KV. 271)" 등을 작곡하였다.
살츠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모차르트는 또 다른 연주여행을 계획하였으나 대주교 히로니무스가 허락을 하지 않는 등 많은 갈등이 발생하여 살츠부르크 궁정악단을 떠나기로 결정하였고 마침내 1777년 8월 1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1777년 9월 23일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함께 다른 곳에서 직장을 구하기 위해 살츠부르크를 떠났다. 이번 여행은 아버지 레오폴드 없이 떠나는 최초의 여행이었다.  
1777년 9월 24일 뮌헨, 아욱스부르크를 거쳐 1777년 10월 30일 모차르트는 음악의 도시 만하임에 도착하였다. 독일 남부에 위치한 만하임은 당시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많은 우수한 음악가들이 활동하고 있던 곳 이었다. 1740년대부터 요한 슈타미츠를 시작으로 맘하임의 궁정 오케스트라는 연주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미학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움직임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 고전주의 교향곡의 태동에 크게 기여했다.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크리스티안 카나비히, 칼 요셉 토에스키와 그의 동생 요한 밥티스트 토에스키(Johann Baptist Toeschi), 이그나츠 홀츠바우어, 요한 밥티스트 벤들링 (Johann Baptist Wendling)등 많은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만하임의 독특한 음악경향을 익히고, 특히 클라리넷의 연주법과 그 기능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만하임 궁정에서 일자리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만하임의 영주 칼 테오도르는 바이에른으로 이주하게 되어 모차르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소프라노 가수로 있는 알로이지아 베버에게 매혹되어 연정을 느끼지만, 살츠부르크에 있던 아버지 레오폴드의 엄한 명령에 따라 만하임을 떠나 1778년 3월 23일 빠리에 도착하였다. 당시 빠리는 굴룩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피치니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오페라 논쟁이 가열되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모차르트는 더 이상 관심을 끄는 "음악신동"이 아니었다. 빠리에 머무는 동안 개인교습 등을 하면서 어려운 생활 중에도 "플루트와 하프협주곡 C장조 (KV.299)", "플루트와 오보에, 호른과 바순을 위한 협주교향곡 (KV.299b)" 그리고 "교향곡 제 31번 (KV.297)" (빠리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1778년 6월 중순경, 어머니 안나 마리아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마침내 7월 3일 사망하게 되어 1778년 9월 빠리를 떠나 1779년 1월 16일에 살츠부르크에 도착하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다시 수석연주자와 궁정오르가니스트로 임용된다. 그러나 멀리 여행을 다녀온 그에게 살츠부르크는 매우 협소하게만 느껴졌다. 살츠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대관식 미사", "교향곡 제 33번 (KV.319)", "세레나데 (KV.320)",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협주교향곡 (KV.364)" 그리고 1780년 8월 29일자 "교향곡 제 34번 (KV.338)" 작곡하였다. 
1780년 당시 뮌헨의 선제후 칼 테오도르는 1781년 사육제를 위한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를 모차르트에게 작곡의뢰를 하여 1781년1월 29일 초연 되었다. 당시 비엔나에 머물고 있던 살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는 뮌헨에 있던 모차르트에게 비엔나로 올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대주교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1781년 6월 8일 모차르트는 해고되어 살츠부르크로 돌아가지 않고, 음악의 고장 비엔나에 계속 남아 음악 활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교회나 궁정에 예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음악가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자유로운 음악가로 남아야 하는 긍지와 부담을 동시에 안게 되었다.

비엔나 시기의 음악활동 (1781-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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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는 모차르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의 생활은 여유롭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개인교습과 자신의 작품들을 아카데미에서 연주하기도 하고, 피아니스트로서 즉흥연주를 하는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모차르트는 1782년 8월 4일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콘스탄체 베버 (Konstanze Weber, 1762-1842)와 결혼하였으며, 끊임없이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낭비로 인한 것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음). 비엔나에서 모차르트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던 요셉 하이든과 친교를 맺게 되어 나이 차이를 넘어 예술적으로 서로 교류하였다. 1782년부터 모차르트는 바하와 헨델의 작품이 주로 연주되는 슈비텐 남작 (Baron van Schwieten)의 집을 자주 방문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바하의 프렐류드와 푸가 등을 자신의 현악4중주에 접목을 시키고 헨델의 오라토리오 작품을 다른 악기로 변화시키는 등 과거의 대위법, 푸가 기법들을 자신의 작품에 흡수하는 작업을 했다. 
1782년 7월 16일에는 황제 요셉 2세의 주문으로 작곡된 징슈필 "후궁으로부터의 탈출"(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이 초연 되고, 같은 시기에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소나타(KV.376, 377, 379, 380)", "교향곡 제 35번" (하프너 교향곡)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제 11 (KV.413), 12(KV.414), 13번(KV.415)"등을 작곡했다. 
1783년에는 모차르트와 그의 부인 콘스탄체는 약 3개월 가량 살츠부르크를 방문하여 머물렀다. 이시기에 아들 라이문트가 사망하는 등 매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교향곡 제 36번 (KV. 425)" (린체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제 14번 (KV. 449), 제 15번 (KV. 450), 제 16번 (KV. 451), 제 17번 (KV. 453)"등 많은 곡을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비엔나에서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과 만나고 특히 디터스도르프, 하이든, 반할 (Vanhal)등과 함께 현악사중주를 연주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785년경부터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단원이 된다. ( 1784년 12월 14일 프리메이슨 단원이 된다는 설도 있다). 이 모임의 영향은 징슈필 "마술피리"(Die Zauberfloete)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1785년과 1786년 사이 "피아노 협주곡 제20번(KV.466), 제21번(KV.467), 제23번(KV.488), 제24번(KV.491)"을 작곡하고 1786년 모차르트는 아무런 위탁도 없는 상태에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을 작곡하여 그 해 5월 1일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성공적으로 공연하였다. 1787년 1월 11일 모차르트 일가는 툰 백작의 초청으로 프라하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공연하고 "교향곡 제38번 (KV.504)"을 작곡하였다. 
1787년 5월 28일에 아들 모차르트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던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사망하여 모차르트는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되었는데, 이러한 시기에도 작품 활동은 계속되어 1787년 10월부터 프라하에서 오페라 "돈 지오반니(Don Giovanni)" 리허설을 지도하고 같은 해 10월 29일 초연하였다. 비엔나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1787년 11월 중순 글룩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황실 실내악 작곡가로 임명되었다. 
1788년경 모차르트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 1788년 5월 7일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비엔나 공연마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6주라는 짧은 시간에 "교향곡 제39번 Eb 장조 (KV.543)", "교향곡 제40번 g 단조(KV.550)" 그리고 "교향곡 제41번 C 장조(KV.551)" (쥬피터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1789년 4월 영주 칼 리흐노프스키(Fuerst Karl Lichnowsky)와 함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를 경유해서 베를린으로 연주여행을 하고, 1789년 4월 25일 포츠담 궁에 도착해서 프로이쎈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로부터 현악4중주 작곡의뢰를 받았다. 1790년 1월 26일 오페라 "코시 판 투테" (Cosi fan tutte, 여자란 모두 그런 것) 초연 되었고 생애 마지막 여행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거행된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1791년 3월 비덴 극장(Wiener Theater auf der Wieden)의 감독직을 맡고 있는 쉬카네더 (E. Schikaneder)의 위촉으로 징슈필 "마술피리"를 작곡하여 그 해 9월 30일 초연 되었다. 같은 시기 익명의 레퀴엠 의뢰가 있었는데, 의뢰인에 대한 무수한 억측이 나돌았지만, 스스로 작곡가라고 자부하던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Graf Franz von Walsegg)이 자기 아내를 기리기 위해 레퀴엠을 비밀리에 위촉한 것으로 밝혀졌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레퀴엠"은 죽기 전 날까지 완성을 하지 못하고 제자 쥐스마이어에 의해 완성되게 되었다. 
모차르트의 병세는 1791년 11월 말 급속도로 악화되어 12월 5일 새벽 1시 영면하였다. 살리에리에 의한 독살설 등의 여러 가지 억측이 난무하였던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은 아마도 "신장부전증"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잦은 여행으로 인한 과로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된 정신적 무리가 그 원인으로 추정된다. 당시 황제칙령으로 강화된 절약정책과 장례와 묘지에 대한 엄격한 규정으로 추운 12월 가족들이 묘지에 가지도 못한 상태에서 모차르트는 공동묘지에 묻혀 그의 무덤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고 있다. 
모차르트는 부인 콘스탄체와의 사이에 6명의 아이를 두었으나 생존한 아이는 칼 토마스 모차르트(Karl Thomas Mozart, 1784-1858)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원래 이름은 Franz Xaver Wolfgang, 1791-1844)가 있다.


2. 작품세계 

서양 음악사가 낳은 최고의 음악가 중 한 명인 모차르트는 독주곡, 실내악곡, 협주곡, 교향곡, 오페라 그리고 교회음악 등 전 분야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가로서의 삶은 18세기 중반, 후반까지 지속된 귀족에게 종속된 음악가가 아니고, 계몽주의와 시민계급의 등장과 성장에 힘입어 더 이상 귀족에게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음악가, 즉 사회적으로 독립된 예술가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삶을 후대 독일 낭만주의의 많은 저서들은 "시대에 인정 받지 못한 고독하고 불행한 천재"로 묘사하기도 했으나, 모차르트는 당시대에 고립되고 소외된 음악가가 아니었으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높게 평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정이나 교회에 귀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음악가로서 간난의 길을 걸었던 그의 삶과 사회의식은 작품에 스며들어 자유로운 사상과 시민의식이 표현되기도 했다. 혹자는 모차르트의 천재성만을 크게 부각하여 천부적으로 쉽게 음악을 창조하였다고 묘사하기도 하지만,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천부적인 천재성과 유, 청소년기 때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온 노력과 능률적인 작업의 결과였다. 그는 당구놀이를 하거나 이발소의자에 앉아 있거나 시간, 장소에 관계없이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음악을 창작하는데 몰두했다. 그러한 작업이 부단히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그의 음악은 악보에 쓰이기 전에 이미 그의 머리 속에서 완성되었으며, 그러한 까닭으로 그의 자필 악보는 매우 정갈하고 오류가 적으며 매우 빠른 시기에 완성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모차르트는 매우 다양한 지역과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다채로운 양식과 형식을 사용하였으며, 새로운 것을 빨리 습득하고 모방하여 자신의 것으로 내화하며, 나아가 통합적이고 독창적인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1. 독주악기

18세기 후반 피아노는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중심악기로 각광을 받았다. 모차르트는 역사적으로 피아노 음악에 많은 기여를 한 작곡가 중의 한명이며,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작곡가들로는 도메니코 스칼라티,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바겐자일 , 쇼베르트, 요한 크리스티안 바하, 레오폴드 모차르트 그리고 요셉 하이든 등이 있다. 
스스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위해 많은 곡을 작곡하였으며, 당대의 다양한 형식과 기법을 사용하였다. 모차르트의 피아노곡은 일반적으로 3악장 구성이며, 제1악장에는 주로 3개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당시 새롭게 등장한 "소나타 양식"을 사용하였다. 제시부에서는 2개의 주제가 사용되고 "노래하는 알레그로"(singende Allegro)라는 기법이 즐겨 나타나며 발전부에서는 앞서 제시된 주제들이 전조와 다양한 기법에 의해 변화하고 마지막 재현부에서 처음 제시된 주제들이 다시 반복된다. 
모차르트의 현존하는 피아노 소나타로는 19개가 있으며, 1766년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되는 4개의 소나타는 유실되었고, 이 유실된 곡들은 독일 브라이트코프(Breitkopf) 출판사의 카탈로그에만 그 기록이 남아있다. 1775년 (또는 1774년)경에 5곡의 피아노 소나타 (KV. 279-283)와 소나타 D장조 (KV. 284, 1775) 등이 뮌헨에서 작곡되었다. 만하임, 빠리, 뮌헨 그리고 비엔나 등지에서 많은 곡들이 작곡되었으며, 1781-1783년 사이 뮌헨 (또는 비엔나)에서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V.330), F장조 (KV.332) 와 더불어 A장조 (KV.331)에는 "터키 행진곡"이 포함되어 있어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1788년 비엔나에서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V.545)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이다. 모차르트는 피아노소나타 이외에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과 네 개의 손을 위한 곡 그리고 변주곡 등 많은 피아노 작품을 작곡하였다.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아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 하였던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35곡에 이른다. 초기의 작품은 피아노가 중심이었고 바이올린은 임의로 삽입되는 형태였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 바이올린은 반주의 기능에 머물렀으므로 피아노 소나타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1777~1778년 사이에 만하임과 빠리에서 작곡된 E단조(KV.304)와 빈 시대에 작곡된 Bb장조(KV.454), Eb장조(KV.481), A장조(Kv.526) 등에서는 바이올린이 피아노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면서 고전주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2. 실내악곡

모차르트는 이태리 연주여행 시기 (1772-1773년)에 6개의 현악4중주를 작곡하였다 (KV.155-160). 당시 모차르트의 실내음악 모델은 이태리 작곡가 삼마르티니였다. 1773년 이후 비엔나에서 작곡된 실내음악에는 요셉 하이든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당시 작품에는 비엔나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악장구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3악장에 미뉴에트를 첨가한 4악장 구성이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이 사용하였던 작곡유형을 따라 우아한 양식 (갈랑 양식)과 디베르티멘토 양식을 대위법과 함께 적절하게 혼합하여 작곡하였다. 모차르트의 현악4중주는 1782년까지 한동안 휴지기를 가진 후 1785년에 요셉 하이든에게 헌정된 현악4중주 (소위 하이든 현악4중주)를 발표하였다. 1789년과 1790년 사이에 작곡된 3개의 현악4중주(KV. 575, 589, 590)는 프로이쎈의 왕에게 헌정 되었으며, 모차르트는 당시 첼로를 직접 연주 하였던 프로이쎈 왕을 위해 첼로부분을 특별히 유념해서 작곡하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현악4중주 뿐만이 아니라 플루트4중주, 오보에4중주, 현악5중주, 클라리넷5중주, 현악3중주, 그리고 수 많은 2중주 등 다양한 형태의 실내음악을 작곡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는 형식상으로 실내음악과 교향곡 그리고 협주곡 사이에 위치한 다수의 디베르티멘토와 세레나데를 작곡하였다. 이 양식은 많은 악장으로 구성된 유흥적 음악이었으며, 행진의 처음과 마지막에 사용되거나, 인물이 등장하고 퇴장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이 음악양식은 세레나데, 디베르티멘토, 카자치온 등 다양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1776년에 작곡된   "세레나데 D장조(KV.250)" (하프너, Haffner)와 1787년에 비엔나에서 작곡된 "세레나데 G장조" (KV.525) (Eine kleine Nachtmusik)가 널리 알려졌다.

3. 협주곡

25개의 피아노 협주곡과 11개의 현악기를 위한 협주곡들 중 대부분은 모차르트 스스로 연주 할 목적으로 작곡한 반면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등 다양한 악기를 위한 협주곡은 주로 작곡의뢰를 통해 작곡되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협주곡에서 협주악기와 오케스트라의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교차 뿐만이 아니라 음악의 형식과 기능을 매우 폭넓게 설정하여 규정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과거 협주곡 양식과 새로운 기법 (교향적 주제 발전, symphonische-thematische Arbeit)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여러 악기군과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된 "콘체르탄테적 교향곡" (Sinfonia concertante)은 과거 합주협조곡 (Concerto grosso)을 계승한 양식이다. 
모차르트는 1773년 "피아노 협주곡 D 장조 (KV.175)"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특히 179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거행된 레오폴드 2세의 황제대관식 때 연주된 "피아노 협주곡 D 장조 (KV.537)" (대관식 협주곡 제2번, Kroenungskonzert Nr. 2)와 베토벤이 카덴차를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d 단조 (KV.466)"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아버지 레오폴드의 영향을 받아 상당한 수준의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 그는 자신이 연주하기 위해 많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였으며, 1775년 살츠부르크에서 작곡된 KV.216, 218, 219와 1779-1780년 사이에 작곡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심포니아 콘체르탄테 (KV.364)"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4. 교향곡

1764년 런던에서부터 작곡하기 시작한 교향곡은 그 수가 50여 곡에 달한다. 1772년까지 나타나는 모차르트의 교향곡에는 다양한 유형과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중에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하, 비엔나, 이태리 그리고 다시 비엔나의 특징이 순차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모차르트가 각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곳의 음악가들 뿐만 아니라 지역적 특징을 빨리 소화하여 자신의 작품세계에 활용하였음을 반증한다. 
1773년부터 나타나는 모차르트의 교향곡에는 이태리 형식의 악장구성이나 선율선들이 사용되기도 하면서 대위법 기법 등이 혼합하여 나타난다. 동시에 요셉 하이든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1773년 말부터 1774년 초에 작곡된 g단조(KV.183)와 A장조(KV.201)에는 질풍노도 양식의 강한 감정표현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만하임에서의 경험은 "빠리 교향곡" (KV.297)에 만하임 기법을 사용하고 클라리넷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악장 수는 3악장 구성과 4악장 구성이 혼재되어 있다. 대표적인 곡으로 "하프너 교향곡", "린츠 교향곡", 그리고 "프라하 교향곡" 등이 있으며, 1788년 한 해에 나타난 마지막 3개의 교향곡에는 이전 작품과는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확연히 대비되는 경향을 나타난다. 교향곡 제39번 Eb 장조(KV.543)는 전형적인 고전주의 형식으로 우아하면서도 경쾌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교향곡 제40번 g단조(KV.550)는 1773년 작곡된 작은 규모의 g단조 (KV.183)와 함께  즐겨 연주된다. 교향곡 제41번 C장조(KV.551)는 스케일이 크고 장려하여 "주피터"라는 부제와 함께 널리 알려졌으며, 새로운 유형의 화성과 과거의 기법인 대위법을 잘 조화시키면서 모차르트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5. 교회음악

모차르트의 초기 교회음악은 오스트리아 교회음악의 전통에서 성장하여 합창-대위법 기법과 옛 기법이 합창-푸가기법이 사용되는 이태리-남부독일 양식과 혼합된다. 모차르트의 미사곡은 교향곡이나 오페라처럼 대규모의 관현악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나폴리의 오페라 요소가 가미된 오페라미사곡기법을 수용하여 미사곡에 아리아가 사용되기도 했다. 
살츠부르크에서 활동하던 시기였던 1773-1777년 사이에 대주교 히로니무스의 요구에 의해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와 미사 롱가(Missa longa), 그리고 두 양식이 혼합된 미사 브레비스 롱가 (Missa brevis longa)등이 많이 작곡되었다. 당시 작곡된 미사 브레비스는 짧은 형식이면서도 다채로운 악기로 편성되어 있었다. 당시 모차르트는 볼로냐의 마티니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주교 히로니무스의 익숙치 않은 음악 취향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1781년 이후 비엔나 생활에서는 교회음악이 적게 작곡되었지만 교회음악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바하와 헨델에 대한 모차르트의 깊은 인상은 후기 교회음악에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미완성으로 남은 "c단조 미사곡" (KV.427, 1782/83)과 레퀴엠 d단조 (KV.626)등이 있다. 유작 레퀴엠 d 단조 (KV.626)는 모차르트의 제자 쥐스마이어 (F. X. Suessmayr)와 아이블러 (J. Eybler)에 의해 완성되었다.

6. 오페라 

모차르트는 오페라에서 새로운 전통과 개혁을 추구하였던 글룩과 달리 전통적인 기법을 선호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부파 그리고 징슈필 양식을 사용했으며 그 안에서 다양한 변화를 추구했다. 모차르트는 1781년 이전까지의 작품에서는 주로 메타스타지오의 대본을 단순히 수용하였다. 그의 중심 된 관심은 대본이 아니라 노래와 성악가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25세에 작곡한 오페라 세리아 "이도메네오" (Idomeneo, 1781)에서 처음으로 음악과 드라마, 작곡가와 대본가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모차르트는 직접 대본작업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후 모차르트는 글룩이 추구하였던 것과 같이 이태리풍의 획일화된 형식주의를 탈피하고 자유로운 극적묘사를 추구하였다. 
한편으로는 초기 오페라 부파의 경우 현실적이면서도 희화화되고 풍자된 인물과 내용이 등장하는 전통적인 유형을 따랐으나 후기작품에는 약간 진지한 묘사를 첨가하기도 했다 (세미세리아, semiseria). 후기 작품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증가하고 아리아에 비해 중창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1786년 작곡된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  1786)에서는 이태리풍의 오페라 부파 형식이 사용되면서 새로운 극중 인간유형이 창조되기도 했다. 또한 아리아와 중창의 대비가 균등(14:14)한 특징을 나타내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이 작품에서 독창 아리아 뿐만 아니라 중창을 이용하여 등장인물의 성격을 세밀하게 표현하였으며, 중창은 성격 묘사 뿐 아니라 극의 진행과 통일성을 가져오게 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지오바니" (Don Giovanni, 1787)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유형을 창조하였다. 이 오페라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독창 아리아가 아닌 중창들이 연달아 서로 교차하여 연주 발전되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여자란 다 그런 것"(Cosi fan tutte, 1790)은 대표적인 오페라 부파이다. 이 작품은 고전주의의 단순하고 명료한 형식감을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음악 요소들로 표현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새롭게 등장한 무대공연예술의 형태는 징슈필이었다. 징슈필은 대사를 사용하고 중간 중간에 음악을 사용하는 연극에서 기원하여 오페라의 레치타티브를 사용하지 않고 연극적인 대사를 통해 극 내용이 전개되고 그 사이에 성악이 연주되었다. 징슈필 작곡가들은 작은 규모의 아리아와 가곡형식을 즐겨 사용하였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의 기본요소가 가미된 새로운 기법을 자신의 작품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Die Entfuehrung aus dem Serail, 1782)에 사용하여 이전까지의 징슈필에서 표현하지 못한 생동감 있는 인물묘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중요한 시발점이 된 징슈필 "마술피리" (Die Zauberfloete, 1791)에서는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줄거리로 등장인물 파파게노와 파파게나를 통해 재치와 유머가 풍부한 희극을 구성하면서 짜라스트로를 통해 사랑과 인류애를 표방하는 프리메이슨 모임의 근본사상이었던 성실, 신의, 형제애를 표현하기도 했다.

7. 모차르트 작품번호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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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2005-03-07
이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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