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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장르
샹송 [cha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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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송(프. chanson은  라. cantio로부터 파생) 

프랑스어 "샹송"이란 우리말의 "노래"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매우 일반적인 말이다. 따라서 이를 어떤 음악용어라고 의식하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하는 경우들이 많다. 음악용어로 사용할 경우는 시기에 따라 각각 다음과 같은 의미로 달리 사용된다. (1)11-14세기, (2)14-15세기, (3)16세기, (4)19-21세기의 대중음악으로서의 샹송

(1) 11세기 말-14세기

이 시기의 샹송은 단성부의 노래였다. 물론 이 노래들은 악기로 반주되었을 것인데, 기록에만 그렇게 나와 있고 실제상의 악보에는 반주 기록이 없다. 남프랑스어와 북프랑스어로 샹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각각 트루바두르(Troubadour)와 트루베르(Trouvère)로 불렸다(독일에서는 비슷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민네젱거라 했다). 이들은 시인이자 음악가였고 자신의 노래를 직접 노래하기도 했지만, 직업적 광대였던 종글뢰르(프.Jongleur)나 가우클러(도.Gaukler)를 시켜 노래하기도 했다. 샹송은 당시에 son 또는 sonet라고 불리기도 했다. 트루바두르에게서는 샹송이 캉소(canso)라고(독일의 민네젱거들은 liet) 불렸다. 이 시대의 샹송은 약 4000여편이 전해오는데, 그 중 절반이 악보로 기록되어 있다. 가사의 내용은 다양했다. 가사의 주제는 주로 여성숭배적인 사랑이며, 도덕과 정치, 십자군과 영웅의 무훈에 관한 것 등도 있다. 주제에 따라 샹송은 다음과 같이 불렸다. 

/캉소(canso): 사랑의 시, 
/플랑(planh): 죽음을 추모하는 시
/에뉘(enueg): 풍자적 시. 플랑과 에뉘는 시르방트 (sirventes), 즉 하인의 노래에 속한다.
/탕소(tenso): 또는 죄 파르티(jeu parti), 논쟁의 시 
/파스투렐르(pastourelle): 기사와 양치기 소녀 사이의 대화 
/알바(alba): 날이 밝아올 때의 연인들의 이별 노래 
/샹송 드 제스트(chanson de geste), 서사적 이야기,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가 유명하다. 
/레(Lai), 이야기식의 노래
/샹송 드 트왈르(chanson de toile), 남편이나 연인에 대한 불평의 노래.

샹송은 당시의 종교적 노래와는 음악형식적으로 유사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교회음악과 같은 형식을 사용하는 ①리타니아형(낭송 형식), ②세쿠엔치아형, ③찬미가형(장절 형식)과 비슷한 음악이 있는가 하면 춤곡으로부터 온, 반복구를 가진 발라드(ballade), 비를레(virlai), 롱도(rondeau)와 같은 것들도 있다.

대표적인 시인음악가들로는 트루바두르로서  베르나르 드 벤타도른(Bernard de Ventadorn, 1127경-95), 기로 드 리퀴에(Guiraut de Riquier, 1294 사망) 등과, 트루베르로서 티보 4세(Tibaut IV, 1201-53), 아당 드 라 알(Adam de la Hale, 1235경-85) 등이 있다. 

(2)14-15세기

이 시대에는 샹송이 다성음악으로 나타났지만 그 형식은 옛 트루베르의 것을 취했다. 즉 롱도, 비를레(14세기에는 샹송 발라데[Chanson balladée]라고도 함). 발라드 형식을 취했다. 다성부로 만드는 방식은 모테트와 콘둑투스 작곡 방식을 취했다. 1250년경 이후부터 트루베르들이 모테트의 제3성부와 제4성부에 사랑의 노래와 권주가의 가사들을 붙였다. 그리고 테노르 성부들에 세속음악의 선율을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콘둑투스 양식으로 쓰여진 아당 드라 알의 롱도들은 다성부 칸틸레나(cantilena 또는 carmen이라고도 함) 선율음악 방식으로 쓰여진 걸작으로 평가된다. 칸틸레나 선율음악은 가사를 노래하는 최상성부에 선율(superius 성부)이 오게 하고, 선율과 대립하는 성부로 고안된 테노르는 선율보다 약간 덜 분주하게 진행하고, 최하성부인 콘트라테노르는 성부를 채우는 역할을 한다. 테노르와 콘트라테노르는 악기로 연주되어 반주의 기능을 갖는다. 성부의 수는 단성부부터 4성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마쇼의 대부분의 샹송은 이런 형식으로 쓰여졌으며, 이 형식은 15세기에도 그대로 지속된다.  

1400년이 막 지나면서 프랑스의 샹송은 그 이전 시대의 복잡한 음악 양식을 버리고 단순화된다. 이는 화성에 바탕을 두고 작곡하는 뒤파이 식의 작곡적 흐름과 같이 가는 경향이었다. 15세기의 부르고뉴 악파에서는 롱도 형식이 특히 선호된다.  15세기 후반으로 가면서는 베르쥬레트(Bergerette)라고 불린 한 절로 된 비를레도 새롭게 나타난다. 

뒤파이와 뱅슈아의 멜로디와 삼화음 중심의 작곡 방식은 당시 사람들의 귀에도 신선한 것으로 들렸다.  

뒤파이는 대략 80여곡의 샹송을 작곡했는데, 그 대부분이 롱도이다. 그의 샹송들도 대부분 칸틸레나 선율음악 형식이다. 하지만 예외적인 것들도 많다(모테트 양식, 모방양식 등). 대표적인 곡으로는 「내 얼굴이 창백하다면」(Se la face ey pale), 「이 해의 이 날」(Ce jour de l'an), 「그리운 이여 잘 있으오」(Adieu m'amour) 등이 있다. 

뱅슈아의 샹송은 감정적 표현력이 강하여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리운 이여 잘 있으오」(Adieu m'amour)와 같은 노래가 잘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노래들이 상성부 선율 칸투스와 거기에 반주 역할을 하는 테너와 콘트라테너가 붙어 있다(칸틸레나 선율음악).

15세기 후반에 새롭게 등장하는 유형으로는 모테트샹송이라는 것이 있다. 모테트샹송은 근본적으로는 샹송으로 볼 수 있지만, 테너에 고정선율이 차용되고 심각한 내용의 가사를 갖는다 예: 오케겜의 「애도가」(Lamentation, 1460). 

15세기말의 샹송은 그 음악적 구조가 모테트와 유사다. 이는 모든 성부들이 노래로 불린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음악은 모테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스럽고 리듬이 경쾌하다. 음악이 대체로 일관모방의 연속으로 되어 있지만, 호모포니적 진행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 미사나 모테트보다는 단순하게 들린다. 오케겜에 의해 샹송의 맥이 이어졌다. 그의 샹송은 매우 보수적이었는데, 이는 부르고뉴 양식을 답습하고 이미 옛것이 되어 가는 롱도 형식을 선호한 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오케겜의 샹송에서는 부르고뉴 음악양식(예: 「내 입술이 웃네」[Ma bouche rit]) 뿐만 아니라 간혹 그의 교회음악에서 사용된 복잡한 카논이나 수적 비율도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교회음악에서는 카논기법으로 된 것 외에는 모방이 별로 쓰이지 않은 반면, 샹송에서는 성부간의 모방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예: 「나의 애인」[Ma maitresse]). 물론 이 점은 부르고뉴의 샹송과는 구분되는 점이다.

뷔누아의 샹송 중에는 일부(대략 18/70)가, 오브레흐트의 샹송과 이태리 노래(약 30곡)는 전부가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기법도 매우 다양하다. 그의 샹송 중 일부는 짧은 카논이나 모방 또는 빠른 리듬 등이 효과적으로 도입되어 매우 활달한 음악을 보여주기도 한다. 

오브레흐트의 샹송은 뷔누아의 샹송보다 화성진행에 더 중점을 두지만, 둘 다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며 또 공통점도 많이 갖고 있다: ①유행가 선율의 차용, 다양한 가사 종류. ②넓은 음역, 4성부로 쓰인 것도 있다 ③성부들이 리듬적으로 동등하게 취급되는 경향, 흔히 3-4성부 중 2성부가 3도 또는 10도 병진행을 이룬다. 

죠스깽의 샹송에서는 카논(이중, 삼중 카논도 포함), 기존 선율의 차용, 모테트 양식의 모방 등 다양한 기법이 나타난다.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에게 바친 것이라는 「왕 만세」(Vive le roi)는 "이끌린 주제"(sogetto cavato) 기법으로 선율을 만든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고정형식에서 벗어나 작곡가 임의대로 여러 형식이 쓰였다 (aba, aab, aabbc, aa, 통절형식 등). 그의 걸작품으로는 「천 가지 슬픔」(Mille regretz), 「잘 있거라 친구여」(Adieu m'amour) 등이 있다. 「돈이 없으면」(Fault d'argent) 이삭의 샹송은 우수에 찬 전통적인 샹송과는 달리 생기 발랄하고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15세기 말, 즉 플랑드르 악파의 전성기 시대의 작곡가로서 샹송을 쓴 사람들로는 피에르 드 라 뤼, 장 무통, 콩페르, 악렉산더 아그리콜라 등이 있다.  

1520년대에 플랑드르 샹송과 구분되는 프랑스적인 샹송(일명 "빠리 샹송" 또는 "르네쌍스 샹송")이 탄생한다. 빠리 샹송은 호모포니로 되어 있고 선율은 발랄한 무곡풍의 리듬을 가진 경우가 많다. 이 시기의 샹송은 빠리의 출판업자였던 아떼냥(Pierre Attaingant, 1494경-1551/1552)의 악보출판이 널리 대중화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1550년경 그가 죽음으로써 이 샹송 종류의 전성기가 끝날 정도로 그의 악보출판과 이 음악의 성쇠는 같은 길을 갔다. 그가 1528-51/52년에 걸쳐 출판한 빠리 샹송은 약 50곡집(약 1500곡; 중판 제외)에 달하여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태리, 스페인, 독일에서도 애창되고 기악곡으로 편곡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빠리 샹송은 단순한 구조와 함께 가사도 주로 서민생활의 작은 즐거움을 그리고 있지만, 귀족스러운 것도 있다 (궁정용). 리듬은 흔히 2+1+1박자로 시작된다.

대표적 작곡가는 클레망 쟈느깽(Clément Janequin, 1485-1558), 클로댕 드 세르미시(Claudin de Sermisy, 1490경-1562), 피에르 세르통(Pierre Certon, 1510경-1572)이다. 쟈느깽은 특히 긴 서술적인 노래 또는 새소리나 대포소리 등을 의성적으로 표현한 노래(프로그램 샹송)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종달새」(L'Alouette)와 「전쟁」(La Guerre)이 있다. 반면, 세르미시의 샹송은 더 점잖은 편이다. 랏소는 프랑스 태생은 아니지만 150곡에 달하는 많은 샹송을 남겼으며, 그것들은 대체로 세르미시 스타일로 쓰여진 것들이다.  

1550년대부터는 빠리 샹송과 매우 흡사한 노래가 보드빌(Vaudeville, 또는 Voix de Ville)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한다. 보드빌은 16세기 후반으로 가면서는 류트 반주를 가진 독창노래로 발전하는데, 이런 변화와 함께 궁정의 노래(Air de cour)라는 이름을 얻어 바로크 시대까지 존속한다.

16세기 후반에 가장 다양하고 재치 있는 샹송 작곡가는 랏소였다. 그는 르 죈과 함께 샹송 모음집을 같이 출판하였는데, 그는 다양한 작곡방식으로 샹송을 작곡하였다. 17세기에는 샹송이 쇠퇴한다.

(4)19-21세기의 대중음악으로서의 샹송

대중음악적 청중을 위한 샹송은 대단히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유행가 가수일 수도, 배우일 수도, 또는 다른 예술가일 수도 있다. 흔히 강조적 의미로 샹송을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샹송에 문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이들이 샹송이라고 말할 때에는 고급화된 대중문화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샹송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chansonnette 또는 chansonnièr라 불린다. 가장 전문화된 사람들은 작곡, 작사, 노래를 혼자서 한다. 하지만 뛰어난 시인들이 작사를 하는 일이 자주 있다. 거의 모든 종류의 내용의 가사들이 있다. 청중이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중음악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독일의 대중음악에서도 샹송이라 할 경우 프랑스적 샹송을 이해하는 것과 거의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두 나라가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샹송이 모든 대중적 노래를 뜻하기도 하지만, 독일에서는 '고급화된 또는 인텔리적인 대중노래'라는 의미로만 사용된다.

현대적 의미의 샹송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했다. 이 때에 빠리에서는 카페 음악회가 열렸는데, 음식이나 음료수를 들면서 노래를 즐길 수 있는 형태의 음악회였다. 1881년 몽마르트 언덕의 "검은 고양이"(Chat noir)라는 카페에서 브뤼앙(Aristide Bruant)과 길베르(Yvette Guilbert)가 사회참여적 노래를 불렀다. 길베르는 프랑스, 스위스, 미국에 연극학교를 세우며 자신들이 지향하는 샹송을 전파하였는데, 사회참여적 방향의 노래들은 아직도 이들 음악을 그 모델로 하고 있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사람으로는 미스팅궤(Mistinguett)와 펠릭스 마욜(Felix Mayol)이 있다. 최초의 "노래하는 피아니스트"로는 프라그송(Harry Fragson)이 있었다. 음악회를 여는 카페들 중 큰 것들은 곧 영국의 영향을 받고 music hall이라 이름하였다. 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재즈가 샹송에 영향을 주는데, 이는 2차대전 중 잠깐동안을 제외하고는 지속적 현상이었다. 한편으로 "프랑스어"와 "문학성"을 강조하는 샹송도 활발하였고, 해외에도 소개되기 시작한다. 줄리엣트 그레코,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탕, 샤를르 아주나부르와 같은 대중적 스타도 나타난다. 이 시기에 프랑스샹송에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는 작사가 프레베르(Jacque Prévert), 작곡가 코스마(Joseph Kosma) 등을 들 수 있다. 

 [김미옥/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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