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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카뮈 생상스 [Charles Camille, Saint-S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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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호성
저자: 차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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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카뮈 생상스 [Charles Camille, Saint-S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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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카뮈 생상

샤를르 카뮈 생상은 1835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1921년에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도중 12월 16일 알제리의 한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파리로 옮겨졌으며,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뤄졌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생상은 음악가이었던 그의 큰고모에게서 첫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어릴 때부터 이미 천재적인 면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11세 때인 1846년에 생상은 첫 번째 공개연주회에서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의 협주곡을 협연하였으며, 1848년에 파리 음악원을 찾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청강생으로 그리고 나중에 오르간 전공으로 정식입학을 하였다. 부분적으로 독학을 하기도 하였지만 어릴 때부터의 그의 지칠 줄 모르던 학구열로 인하여 생상은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의 음악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그가 전공한 피아노와 오르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생상은 기악음악의 형식과 더불어 성악음악의 형식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1851년에 오르간으로 파리 음악원을 1등으로 졸업한 생상은 파리의 성 마들렌느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하였다(생상은 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1877년까지 일하였다). 그리고 1861년 6월부터 3년간 그는 니더마이어(Niedermeyer)의 후임으로 음악학교의 피아노교수로 있으며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1845-1924)와 같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1852년 이후 생상은 두 번에 걸친 로마콩쿠르 도전의 실패와 안 좋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교향곡 내림마장조 (op. 2, 1853), 바장조, 라장조(1856/1859), 가단조(op. 55, 1859), 미사곡(Messe solennelle, 1856), 오라토리오(Oratorio de Noel, 1860)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op. 17, 1858) 등을 작곡하였다. 1864년 이후 생상은 "삼손과 데릴라"(Samson et Dalila, 1868) 등과 같은 10여 개의 오페라와 극음악 등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가지고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와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많은 음악회를 가졌다. 생상의 음악을 접한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이나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1830-1894),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 프란쯔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그리고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 등은 그의 음악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쿠프랭(Francois Couperin, 1668-1733)이나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 이후 19세기의 중엽까지 프랑스에서는 이웃나라인 독일의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나 멘델스죤(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 혹은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등과 같은 뛰어난 음악가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프랑스의 음악은 거의 외국의 음악가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생상은 낭만주의시대의 프랑스음악을 부흥하는데 있어서 선구자적 역할을 한 작곡가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1871년에 생상은 프랑스의 음악계에 '국민음악회'(Societe Nationale de Musique)를 창립하였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새로운 음악 진흥에 노력하였으며, 젊은 작곡가들을 육성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까지 음악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던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신하려는 교향악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생상 자신도 이 시기부터 20여년 동안 리스트의 영향을 받은 교향시 "옹팔르의 물레"(Le Rouet d'Omphale, 1872), "파에통"(Phaeton, op. 39, 1873) "죽음에 무도"(Dance macabre, op. 40, 1875), "헤르쿨레스의 청년시대"(La Jeunesse d'Hercule, 1877) 등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교향곡 다단조(op. 78, 1886)를 작곡하였다. 제3번 교향곡으로 알려진 이 다단조 교향곡은 생상의 작품 가운데 최대의 관현악곡으로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넣은 화려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리스트에게 헌정된 이 교향곡은 그의 제4번 피아노 협주곡이나 바이올린 소나타처럼 두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각 악장을 다시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일반적인 교향곡의 형식처럼 네 개의 악장을 가진 곡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생상은 피아노 협주곡으로는 사단조(op. 22, 1868), 내림마장조(op. 29, 1869), 다단조(op. 44, 1875)와 바장조(op. 103, 1896) 등의 작품과 두 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동물의 사육제"(Le Carnaval des animaux, 1886) 그리고 환상곡 아프리카 (Africa, op. 89, 1891)를 남기고 있다. 이밖에도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1880), 첼로 협주곡 제1번(1873), 피아노 삼중주곡 그리고 피아노 사중주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동물의 사육제"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Introduction et Rondo Capriccioso) 그리고 "하바네라"(Havanaise) 등은 아직도 음악회장에서 지속적으로 연주되며 사랑 받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와 같은 작품들을 통하여 생상의 이름은 전 유럽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가지고 유럽을 순회하며 연주여행을 하였다.

생상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음악가이었다. 그는 또한 뛰어난 기교를 가진 피아니스트겸 오르가니스트이었다. 생상은 당시에 음악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독일의 고전파와 낭만파의 음악에 이해가 깊었으며, 이러한 이해와 관심은 자신의 뛰어난 음악성이 잘 다듬어진 구성미를 갖추고 배어나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음악성과 낭만주의적인 자유스러운 기법은 그의 오페라나 교향시 등과 같은 작품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생상은 자신의 음악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하도 아니고 베토벤도 아니며 바그너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예술 그 자체이다."

   이와 같이 생상은 자신의 음악에서 어떤 특정한 주의나 작곡가의 경향을 추종하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음악적 사상을 표출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기법적인 면에 있어서 고전적인 경향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음악적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낭만적이었다. 이러한 면을 통하여 그의 음악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다. 생상은 낭만주의 음악가들 가운데 특히 프란쯔 리스트의 음악을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다. 리스트의 음악 가운데 특히 교향시에 대하여서 생상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생상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고전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예술적 사고를 드라마틱하게 처리하는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많이 절충하고 있다. 이렇듯 생상은 모든 기법이나 양식적인 면을 떠나서 순수하게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작곡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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