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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 [Paganini, Nicc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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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0.27. 제노바 - 1840.5.27. Niz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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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의 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 최초의 음악교육은 아버지부터 만돌린과 어린이 바이올린을 배운 것이었다. 파가니니의 첫 바이올린 선생은 제노바의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던 세르벳토(Giovanni Servetto 또는 Cervetto)였다. 그 후 그네코(Francesco Gnecco)에게 배웠는데, 이 사람은 파가니니의 재능을 인정하고 더 나은 스승에게로 그를 보냈다. 새로운 스승은 제노바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회 악대장이었던 코스타(Giacomo Costa)이었다. 이 스승을 통해 파가니니는. 1793년 이후 공공연주회에 출연했는데, 특히 교회에서 많이 연주했다. 파가니니의 재능은 이 때 사람들에게 드러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엔나 오페라 극장에서 오랫동안 연주활동을 했던 롤라(Alessandro Rolla)에게 보냈는데, 파가니니가 그에게서 배웠는 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당시 롤라는 파가니니가 더 이상 배울 이유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롤라는 그가 작곡을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파가니니는 기레티(Gaspere Ghiretti)에게서 6개월 동안 작곡을 배웠다. 이것이 파가니니가 음악을 배운 전부였다. 그 이후 그는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1797-1800년 북이태리에서 있었던 전쟁으로 인해 제노바와 리보르노에 머물러 있었다. 1801년 그는 루카 시의 교회축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로 당시 새로 생긴 국립오케스트라단의 제1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1805-10년 그는 루카에서 나폴레옹의 누이였던 바치오키(Elisa Baciocchi)의 궁에서 악대장이 되었다. 그 이후 파가니니는 고정된 직책이 없는 자유로운 연주가로 생활했다. 1813년 있었던 밀라노에서의 대성공은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태리 각지를 돌며 연주 여행을 했다. 1815년 파가니니는 20세의 제노바 처녀인 안지올리나 카반나(Angiolina Cavanna)를 자신이 사는 파르마로 데리고 와 짧은 기간 동거했다. 이 사건은 그를 법률적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했으며 음악가로서의 명성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이 내용은 스탕달의 『롯시니의 생애』(1823)에 소개되어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감옥에서 배웠다는 소문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는 이 소문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하였다.   
1824년 파가니니는 안토니아 비앙키(Antonia Bianchi)와 살았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이 탄생했다. 1827년 파가니니가 이태리 연주여행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둔 후 1828년 비엔나와 독일로 갔다. 
1831년에는 빠리를 거쳐 런던, 스코트랜드, 아일랜드로 갔다가 1833/34년 겨울 빠리에 머무른다. 그는 이태리의 파르마 근교에 살면서 빠리에 자주 왔다갔다 하면서 살았다. 그의 절정기는 1828-1834년으로 그의 명성을 최고조에 달한다. 그의 삶과 관련된 소문들은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에도 널리 퍼져 단지 음악만이 아닌,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1834년 이태리로 돌아왔다. 1837년 그는 망한 빠리의 카지노 사업에 손을 낭패를 보았다. 그는 이미 병자였고, 성대가 결핵에 감염되어 목소리를 상실했다. 그는 결핵 말기의 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카지노 채권자들과 전 재산을 두고 다투어야 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베를리오즈에게 20000 프랑을 주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또한 친구 제르미(Luigi Germi)에게도 50000리라를 주었다.
1839년 12월 그는 니짜로 주거를 옮겼다. 그는 자신의 방을 나설 수조차 없는 몸이었다. 그는 죽어가면서 가톨릭의 교리에 따라 죽음의 예를 갖추라는 교회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 일로 그는 교회식으로 장례를 치루지 못했고, 그의 시신은 상당 기간 동안 정해진 무덤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했다. 1896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파르마의 한 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그는 절정기 때 수많은 명예를 부여받았다.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쎈 왕은 그에게 궁정장인의 칭호를, 교황은 황금박차 훈장을, 그의 고향은 그에게 과르넬리 바이올린을 평생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파가니니의 장점과 단점이 뚜렷이 엇갈리는 성격과 그의 성공은 많은 사람들을 경탄케 만들었고, 반대로 질시하게도 했다. 그의 외모와 튀는 행동 그리고 그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들은 자신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조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 파가니니는 살아있을 때 벌서 신화적 인물이었고, 전형적으로 낭만적인 바이올린 연주가로 온 유럽에 그 이름을 떨쳤다. 
그는 바이올린의 장인으로서 바이올린 음악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반면 그가 바이오린 연주기술에 미친 영향은 자주 거론되는 것에 비하면 그렇게 크지 않다. 그는 몇 종의 새로운 활긋기 방식의 도입, 음역의 확대, 화려한 결줄누름, 플라절렛(하모닉스), 왼손 피치카토, 기타아 효과, 반음계적으로 미끌어지게 하는 연주, 새로운 변칙조율(Scordatura) 등이 그의 업적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무대에서 몰입하는 열정적 연주를 보여주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의 바이올린 콘체르토와 카프리치오 이외에 뒤랑(A.F. Durand, 원래 폴란드식 이름: Duranowski)), 롤리, 로카텔리의 음악을 즐겨 연주했다. 특히 뒤랑의 음악은 그에게 모델적인 것이었다. 당대 사람들이 파가니니의 연주를 평하기를, 기존의 관습을 벗어나는 기법을 보이고, 느린 악장의 단순한 선율에서 대단한 표현력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그는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별 흥미가 없었다. 그는 단지 두 사람만을 제자로 인정했다. 치안델리(Gaetano Ciandelli)와 시보리(Camillo Sivori).

파가니니의 작품은 인간의 목소리와 흡사한 음악을 지향하였다. 그의 G선을 위한 나폴레옹 소나타(Sonata napoleone)와 군대 소나타(Sonata militare)는 연주 테크닉의 개발을 위한 작품들이었다. 또한 그의 24개의 카프리치오(작곡: 1805, 출판: 1824) 역시 바이올린 테크닉의 실험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이올린을 위한 음악회용 연습곡의 시작이 되었다. 이는 그 모델이 된 로카텔리의 카프리치오(수록곡집: L'arte des violino, 1733)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었다. 파가니니의 5개의 바올린 협주곡은 프랑스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 곡들은 그의 즉흥연주적 능력을 발휘하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파가니니 음악은 당대의 작곡가들, 즉 슈만, 리스트, 브람스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전집: Opere di Niccolo Paganini, Edizione Nazionale, Istituto per la Storia della Musica, Roma 1976이후.

등록일자: 200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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