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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창: 에세이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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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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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성당의 세례책에는 그의 이름이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볼프강우스, 테오필루스(Johannes, Chrysostomos, Wolfgangus Theophilus)라고 적혀 있다. 이 중 그는 오직 볼프강과 테오필루스를 사용했다. 그리스어 "테오필루스"는 "신이 사랑한"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 단어를 뒤에 프랑스어 형태인 아마데(Amade')로 대체했다. 오늘날은 라틴어 형태인 "아마데우스"를 주로 쓴다.

아버지 레오폴트와 어머니 안나 사이에서 7남매가 태어났다. 그러나 볼프강과 5살 많은 누나 나네를만이 살아남았다. 나네를 역시 음악적으로 매우 뛰어나서 피아노 천재아이로 알려졌다. 보다 큰 기적은 그러나 볼프강이었다. 이 아이는 매우 빨리 배우고 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가 5살이었을 때, 바이에른의 영주 앞에서 그리고 비엔나의 황제 가족 앞에서 연주시킬 용기를 가졌다. 이 나이에 그는 이미 제대로 작곡하는 것을 시작했다. 그의 초창기의 소품들인 안단테, 알레그로, 몇 개의 미뉴에트들을 그의 아버지는 난네를의 악보 책에 기입했다. 이들 중 미뉴에트 하나가 후에 쾨헬 작품목록 번호 1을 받게 된다. 

◀KV 1 <미뉴에트>(프레이즈 구성과 화성)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이 책에 또한 꼬마 볼프강의 학습상황에 대해서도 기입했다. 예를 들어 다른 작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작품을 볼프강은 5살이 되기 하루 전날 밤 9시 반 경 반 시간만에 배웠다."

꼬마 볼프강은 모든 것을 큰 의욕을 가지고 배웠다. 샤크트너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에게 계속 배울 것을 주면 그는 완전히 거기에 매달려서 다른 것들은, 심지어 음악까지도 팽개쳐둔다. 예를 들어 그가 계산을 배웠을 때, 책상이건 의자건 벽이건 심지어 바닥까지 온통 분필로 쓰여진 숫자 천지였다..."

어버지가 누나를 가르치고 있으면 볼프강은 주의를 기울여 그것을 따라했다. 이 꼬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지만, 아버지에게서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 또한 읽기와 쓰기, 계산, 그리고 여러 가지 언어들을 배웠다: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라틴어.

꼬마 볼프강은 매우 민감하고 정확한 청음력을 가지고 있었다(절대음감). 비범한 기억력을 가졌고, 핵심에 대한 직관적 파악 능력이 뛰어났다. 성격이 예민하여 악기의 깨끗치 못한 연주에 너그럽지 못했으나, 감성이 여리고 순진하여 너무 큰 소리의 음들을 싫어했다. 그는 거의 10살 때까지 다른 음악 없이 독주로 연주되는 트럼페트 앞에 순진한 겁을 먹고 있었다.

◀꼬마 볼프강 모차르트

아버지 레오폴트는 스스로 매우 뛰어난 음악가였다. 그는 자식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출세를 포기했으며, 그들의 양육과 공부에 헌신했다. 아버지의 양육은 매우 세심했고 목적이 분명했으며 또한 엄했다. 그럼에도 매우 사랑이 넘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꼬마 볼프강이 매일 저녁 그가 자유롭게 떠올린 자장가를 아버지에게 불러 달라고 졸랐으며, 그 다음 아버지의 코 끝에 키스를 하고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볼프강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하나님 다음에 바로 아버지가 있다."

잘츠부르크 궁정 트럼펫 연주자이며 모차르트 가족과 친했던 샤크트너(Johann Andreas Schachtner)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작곡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해준다. 4살부터 작곡을 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편지글에서 연유한 것이다.

샤크트너가 모차르트의 누나에게 보낸 편지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목요일 일과가 끝나고 당신 집에 갔어요. 우리는 4살박이 볼프강이 펜으로 무엇을 쓰는 데에 열중해 있는 것을 보았어요.

아버지: 너, 뭐하니?

볼프강: 피아노 협주곡, 첫번째 부분은 곧 끝나요.

아버지: 보여다오.

볼프강: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버지: 보여다오, 대단한 것인 모양인데.

아버지는 그에게로부터 그것을 가로채서 나에게 지저분하게 쓰여진 음표들을 보여주었다. 그 악보의 많은 부분은 비벼진 잉크 얼룩 위에 쓰여 있었다 (꼬마 볼프강은 펜을 잉크병 바닥까지 집어넣는 바람에 펜을 종이 위에 드는 순간 잉크 방울이 그 위에 떨어졌고, 그것을 그는 손바닥으로 문질러 없애고 그 위에 다시 써내려 갔다. 우리는 처음에 웃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다음 주요 내용, 그 음표들, 즉 작품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오랫동안 거기에 심취해 있더니 마침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놀라움과 기쁨의 눈물이 그의 눈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보세요, 샤크트너 씨, 그가 말했다.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그리고 법칙에 맞게 넣어져 있는지, 오직 이것은 쓸모 없어요. 이것은 아무도 연주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어려워요."

사랑하는 아빠에게,

"나는 시적으로 작곡할 수 없어요. 나는 시인이 아니예요. 나는 표현방식을 빛과 어두움으로 두드러지게 하는 기술이 없어요. 나는 화가가 아니예요. 나는 또한 움직임이나 제스처로 나의 생각을 나타내지 못해요. 나는 무용가가 아니예요. 그러나 나는 음들을 통해서 그것을 할 수 있어요. 나는 음악가예요. 1777년 11월 8일 만하임에서"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

볼프강은 6살부터 22살에 이르기까지 반 이상을 여행 중에 있었다. 당시에 마차나 배로 여행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모험적인 일이었다. 거친 길과 엉성한 마차, 추위와 나쁜 날씨, 또는 사고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의 강도의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여행은 건강, 재산, 또는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여행은 자신의 천재 아이들을 유럽의 영주나 황제의 궁정에서 연주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오스트리아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연주할 수 있었다. 통치자나 귀족들의 궁이 있고 부자들이 살고 있는 수도나 주교도시에는 잘 교육받은 음악가와 애호가, 궁정 작곡가, 전문가들이 있었다.

첫번째 이태리 여행 때 볼프강은 14살이 되었다. 난네를은 동행하지 않았다. 18세가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천재 아이가 아니었다. 14살의 볼프강은 연주회장, 교회, 영주들의 살롱에서 흥분에 들떠 있었다. 이태리 사람들은 그에게 "비바 마에스트로"(Viva Maestro)를 연창했다. 가장 어려운 곡이 그 앞에 놓이면 그는 "초견에" 통달했고, 이태리 음악가들은 놀라워 했다. 

로마의 교회에서 모차르트 가족은 당시에 유명한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들었는데, 이 곡은 아홉성부로까지 작곡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당시에 비밀로 되어야 했기 때문에 사보하는 것이 엄격히 금해져 있었다. 볼프강은 이 작품을 듣고 기억하여 다시 썼다. 볼프강은 어린 시절 당시 자기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엄청나게 많이 그리고 번개처럼 빨리 배웠다. 그는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에게 제공된 것들을 흡수했다. 여행은 그에게 음악적 경험 외에도 언어와 예절, 지리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것들을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장성한 볼프강은 여행에서 수많은 교양인들과 사귀었고, 중요한 유럽 언어들을 듣고 말했다. 또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했다. 런던에서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찬 바하(Johann Christian Bach)한테서 수업을 받았다. 볼로냐에서는 뛰어난 스승 파드레 마르티니(Padre Martini)한테서, 비엔나에서는 요셉 하이든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하이든은 그를 매우 높이 샀다. 나폴리에서는 마요(Majo)와 파이지엘로를 알게 되었다.

그가 성인이 되자 그는 유럽 궁정에서 더 이상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궁정에서 자주 연주되었지만, 그는 명성과 명예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주에게 고용되고 싶어하는 수많은 작곡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뒤에 한 여행에서는 (아버지는 잘츠부르크에서 일해야 했다) 약간의 성공만을 얻었다. 21살 때 그는 어머니와 함께 만하임으로 여행해서 거기서 몇 달 간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빠리로 갔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병들어 죽고, 결국 혼자 실패하고 의욕을 상실한 채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야 했다. 유럽의 유명한 궁정에서 자리를 받고자 한 모든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그가 여행하지 않은 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한시적으로 궁정의 악장이나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다. 여기서 그는 대주교를 위해 교회음악, 피아노 소나타, 교향곡들을 작곡했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세레나데, 그리고 다른 많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에게 잘츠부르크는 너무 좁게 느껴졌다. 자신의 상관과, 교회 지도자들과 다툼이 있었고, 마침내 계약이 깨졌다. 

1781년 25살된 모차르트는 대주교와의 불화로 인해 사표를 쓴다. 그때부터 그는 자유로운 작곡가로 비엔나에 가서 산다. 당시에 그곳은 만하임과, 빠리와 더불어 중부 유럽의 중요한 음악도시였다. 이전에 그는 일정한 봉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수업이나 연주회 그리고 작품 판매로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자유를 느꼈고 행복했다. 

모차르트는 여러 번 사랑에 빠졌다. 21살의 그는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어머니랑 같이 있을 때 삼촌의 딸인 19세의 마리아 안나 테클라(Maria Anna Thekla)를 좋아했다. 그는 매우 강한 표현과 여러 가지 언어로 익살맞게 대화하고 편지를 썼다. 만하임에서는 악보 사보가의 딸인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를 짝사랑했다. 대주교 궁정의 일자리를 사임하고 비엔나에 왔을 때, 만하임에 살던 베버 가족이 그곳에 이사와 살고 있었고, 이듬해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Constanze)와 결혼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사랑이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어지는데 그 성격이 매우 섬세하고 청초하게 그려진다. 그가 아마 이러한 여성상을 선호한 것으로 풀이된다. 

비엔나에서의 첫 몇 년은 그에게 매우 힘들었지만 곧 비교적 돈을 잘 벌게 되었다. 그의 오페라 악보에 대해 황제 재정부는 450 굴던(Gulden, 당시의 화폐 단위)을 받았다. 500굴덴이면 보통의 한 가족이 1년 동안 살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다장조(KV 467)의 작곡과 연주는 그가 비엔나에서 인기를 누리던 때의 수입원의 예를 잘 보여주는데, 오늘날 뮤지컬이나 영화의 개봉에 비교할 수 있는 선전 포스터도 만들었다.

  

알림

1785년 3월 10일 목요일

카펠마이스터 모차르트 씨는 영광스럽게도 

국립 시민극장에서

대 음악회를 

자신의 수입을 위해

개최하게 되었습니다.(2악장)
거기에서 그는 이제 막 작곡을 끝낸 피아노 협주곡뿐만 
아니라 특별히 큰 피아노 페달을 
즉흥연주에 사용하게 됩니다. 다른 연주곡목들은 
그곳의 큰 포스터에 제시될 것입니다.

이 협주곡의 탄생일은 정확히 1785년 3월 9일이다. 그리고 작곡을 끝낸 다음 날 비엔나의 시민극장에서 연주되었다. 피아노 협주곡은 당시 비엔나에서 귀족이나 부유층이 즐겨 듣는 매우 고급스런 대중음악이었다. 초대장에서 보듯이 이 작품의 초연은 모차르트가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 스스로 개최하였다. 전체 수입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대략 1,500만원이었다. 시민극장은 무료로 빌릴 수 있었으므로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료와 포스터나 입장표 등의 인쇄비만 지불하면 되었다. 모차르트에게는 적어도 1000만원 가까운 돈이 순 이익으로 남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가정부가 일 년에 100만원 정도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이것은 대단한 수입이었다. 

그러나 결혼한 모차르트 가족에게 비엔나의 생활은 잠깐만 여유가 있었다. 그는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항상 돈이 부족했다. 더욱 큰 문제는 비엔나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 대해 점점 관심을 잃어가고 있는 점이었다. 자기의 양식을 굳혀가고 있던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에게 돈을 대는 사람들에게 너무 수준이 높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갔다. 자신의 예술 세계와 청중의 기호가 점점 큰 간격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더 큰 성공을 바랬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더 많은 빚을 져야 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모차르트의 절제없는 오락활동(내기 당구)이 한몫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는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9시까지 작품을 쓰고, 13시까지 레슨을 했다. 어디서 초대받은 일이 없으면 식사를 하러 갔고, 18시부터 21시까지 작곡을 했다. 저녁에는 자주 음악회를 열었는데, 한 달에 20번을 한적도 있었다. 연주회 후에는 자주 밤늦게까지 작곡에 몰두했고, 심지어는 지쳐 쓰려지듯이 침대에 누울 때까지 했다. 경제적인 어려움 뿐만 아니라 건강의 문제도 그를 위협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작곡에만 몰두했다. 

그의 마지막 해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모아 음악에 쏟고 자신은 여위어 죽는 전형적인 예술가 모습을 만들어 낸다. <요술피리&gt;를 한참 작곡하고 있을 때 -그 해 여름으로 추정된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한다. 그 사람은 돈이 궁했던 모차르트에게 많은 돈을 주고 간다. 그리고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 위촉 작품인 오페라 <티투스>역시 급히 써야 할 작품이었다. 기일에 쫓기면서 가장 먼저 끝낸 오페라 <티투스&gt;의 리허설을 돕기 위해 1791년 8월에 부인 콘스탄체와 제자를 데리고 프라하로 갔다. 또 거기서 자신의 오페라 <돈지오반니&gt;를 지휘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를 매우 환영했다. 9월에 <티투스>때문에 작곡이 늦어진 <요술피리&gt;의 초연이 비엔나에서 있었고, 그 후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를 클라리넷 연주자인 친구 안톤 스타들러(Anton Stadler)를 위해 작곡했다. 11월 15일 <작은 프라이마우러-칸타타&gt;의 작곡을 끝내고 18일 이 연주회를 지휘했다. 그리고 그 달 20일 병들어 눕는다. 12월 14일 미완성인 레퀴엠의 검토를 병석에서 했으며 다음 날 새벽 1시에 죽었다. 그는 평범한 공동묘지에 묻혔고, 일꾼 외에는 그의 장례를 아무도 배웅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비참한 말년과 관련하여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이후 대부분 부정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심지어 단순한 여자로서 모차르트의 성적 충족 대상에 불과했고 또 제자 슈스마이어(Suessmayr)와 삼각관계에 있었다고도 한다. 그녀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그래서 모차르트가 청탁받은 작품을 빨리 쓰도록 재촉한 것은 짐작이 되나, 그녀의 이미지에 대한 것은 대부분 추측에 불과하다. 

그의 죽음을 재촉할 정도로 시간에 쫓기게 했던 레퀴엠은 뒤에 -영화 <아마데우스&gt;에서는 다르게 각색되었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한 귀족의 위촉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귀족은 이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출판하려 했고, 자신의 부인의 기일에 자신의 지휘로 연주하려 했던 모양이다. 미완으로 남은 이 작품을 제자인 슈스마이어가 완성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다. 모차르트가 이미 완성했던 것인지, 아니면 작곡 메모를 토대로 짜 맞춘 것이지, 아니면 정말 많은 부분을 새로 썼는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된다. 그의 죽음만큼이나 이 작품은 의문을 많이 가지고 있다.

모차르트는 식물이 물을 필요로 하듯 주변 사람들의 정을 필요로 했다. 그는 부모의 인척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정말로 확인하고 싶어할 정도로 마음이 순수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친구인 궁정 트럼페트 연주자 샤크트너 씨는 모차르트의 이러한 면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나는 그 곁에 있었고 ... 매우 다정스러워서 그는 하루에도 열 번이나 내가 그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내가 재미로 대답을 머뭇거리면 그는 곧 어색해지며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 그의 선한 가슴은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동시대의 작곡가들이 전하기를 모차르트는 자주 악기 없이 "머리로만" 작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면서 동시에 작곡했다. 또 그는 자주 매우 촉박한 시간에 작품을 썼다. 예를 들어 2대의 호른을 위한 열 두 이중주(KV 487)를 그는 볼링을 치면서 작곡했고, <볼링 트리오>(KV 498?) 역시 그러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부리나케 써야만 한다. 모든 것이 작곡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 쓰지 못했다." (1780. 12. 30)

모차르트는 자신을 불사르는, 죽음을 각오하는 작업 속에서 주옥같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의 작품들은 윤리적인 내용을 가지는 경우에도 목적없는 내적표현을 지향하는 순수한 예술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그 황금 발자국이 반짝였다. 나는 영원함, 모차르트, 그 별을 상기했다. 나는 다시 한 시간 숨을 쉴 수 있었고, 살 수 있었고 거기 머물 수 있었다. 나는 어떤 고통에도 시달릴 필요가 없었고, 두려워할 필요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었다." 헷세 

모차르트는 당대나 후대의 사람들에게 주로 세속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로 간주되어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의 교회음악 작품은 오랫동안 본인이 속했던 카톨릭 교회에 의해 연주가 금해지기도 했다(체칠리아주의의 영향). 그의 음악이 가진 달콤하고 가벼운 면은 교회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티보와 같은 사람은 그의 음악에서 "천재적 경박성"을 지적한다. 그런가 하면 20세기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음악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섭리를 본다.  이 두 가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평가들은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의 교회음악들은 실용적 면을 많이 고려했다.  수많은 C장조가 이를 증언한다.  예외적으로 D단조 레퀴엠은 야심적 걸작이다.  많은 미사들은 짧은(작은) 미사(Missa brevis)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이는 악곡의 수 때문이 아니고, 곡의 전체 길이 때문에 붙은 말이다.  이는 잘츠부르크의 주교 히로니무스(Hieronimus)가 그렇게 요청한 때문이다. 많은 경우 합창보다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주의를 기울인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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