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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게티 [Ligeti Gyö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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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게티(Ligeti Gyögy 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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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음악, 특히 20세기 후반의 중심적 작곡가로서 평가되는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는 딕세스젠트마르톤(Dicsöszentmárton, 오늘날 루마니아에 속해 있는 티르나베니<t&icirc;rn?veni>)에서 1923년 5월 28일 출생하였다. 음악애호가인 부모(은행 전문가인 아버지와 안과 의사인 어머니)밑에서 자란 리게티는 유아기부터 음악을 연상하는 습관을 가졌다. 이러한 습관은 작곡가로서 활동하는 지금까지 그의 예술적 세계 속에 내재해 있는 음악적 상상력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가족에게 음악을 전해준 축음기는 어린 리게티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고 축음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음악은 마술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린 리게티는 이 신비한 축음기를 통해 모차르트(W. A. Mozart)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 또는 그리그(E. Grieg)의 『페르퀸트 조곡』의 「난쟁이들의 행진」, 오페라 아리아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듯한 째즈까지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리스트(F. Liszt)의 『라 캄파넬라 La Campanella』와 쇼팽의 왈츠에 깊은 감동을 받은 어린 리게티는 고모 집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아 곡예와도 같은 몸짓을 하며 그 곡들의 연주를 흉내 내곤 했다. 이러한 음악적 환경을 그에게 제공해준 그의 아버지는 그러나 확고한 사회주의자였고 무신론자였다. 그러므로 리게티의 양육은 종교적 영향이 전혀 없는 사회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영향으로 리게티는 스스로를 종교적 사고보다는 자연과학에 의해 자극을 받은 사회주의자로 여긴다. 종교적으로 어떤 관련도 갖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작곡가 리게티가 『레퀴엠 Requiem』(1965)을 작곡한 것은 부모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그의 어린 세계를 둘러싼 주위 환경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출생지는 전원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천연가스가 나오는 지역이므로 화학 산업형 공장들과 벽돌제조업에 의해 주변이 파괴된 곳이었다. 이러한 벽돌제조업에는 많은 집시들이 있었고, 집시들이 많은 환경은 리게티의 음악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이 집시들은 벽돌제조업에 종사할 뿐만 아니라 포도의 수확,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에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러한 집시 음악은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었고 어린 리게티의 생활 주변에 머물렀다. 또한 그의 엄마가 불러준 오페레타의 노래들은 집시 음악과 함께 어린 리게티가 작곡가로서 성장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할 수 있다. 또한 리게티 집의 요리사에 의해 매주 일요일 카톨릭 예배에 참여한 어린 리게티에게 강압적으로 느껴진 교회의 창문과 오르간 소리는 신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칼뱅파 신부와의 교류와 거짓말을 하게 되면 혀를 자르게 된다는 그 신부의 이야기는 어린 리게티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였다. 어린 시절의 이러한 충격과 두려움은 그의 작품 『레퀴엠 Requiem』(1965)과 오페라 『Le Grand Macabre』 작곡적 구상에 반영되었다.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29년 그의 가족은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고 작센 종족들의 분쟁이 한창인 고향을 떠나 클라우젠부룩(Klausenburg)으로 이주하였다. 문화의 중심지였고 루마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이곳에서 리게티는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오페라 공연을 접할 수 있었다. 일곱 살의 그를 무아지경에 빠트린 작품은 루마니아어로 연주된 무소르그스키(Mussorgsky)의 『보리스고두노프』와 베르디(G. Verdi)의 『라트라비아타』였다.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는 라디오를 통한 음악청취를 시작하였고, 이것은 오랜 동안 지속되는 그의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부모의 음악적 소양과 문화적 도시생활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게티의 음악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첫걸음은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은행인으로서의 직업에 만족을 못 느낀 그의 아버지는 리게티가 자연과학자로서 교육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하는 리게티의 요구를 오랫동안 무시하였다. 그러나 절대음감을 가진 리게티의 동생이 바이올린을 배우게된 기회에 14살의 리게티는 피아노레슨을 받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그 희망을 관철할 수 있었다. 그의 피아노 수업은 빠른 진전을 보았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지 몇 주되지 않아 그는 작곡을 시작하였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은 a 단조의 월츠로 그리그의 스타일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동생의 바이올린 연주에서 음악적으로 자극을 받은 15살의 리게티는 단악장의 현악사중주를 작곡하였고, 그 다음해 라디오를 통해 접한 슈트라우스(R. Strauß)의 음악에 매료된 16살의 리게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고전주의 작곡가에 심취해 있었고 팀파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년 동안 그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팀파니주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17살이 되면서 리게티는 자연과학자 뿐만 아니라 작곡가가 되고 싶은 생각을 나타냈다. 리게티는 수학과 물리를 뛰어나게 잘하기는 하였지만 유아기부터의 음악을 연상하는 습관으로 시작된 환상의 세계로의 몰입은 이러한 학업에 많은 방해 요소가 되었다. 그는 종종 환상의 세계에 빠져 고립되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자아 고립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리게티가 가지고 있는 성격으로 그의 창작생활에 밀접하게 관계되어지고 있다. 리게티에게 있어서 작곡이라는 것은 자신의 사고와 상상을 혼자서 완성된 형태로 이끌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부 유럽의 정치적 상황은 눈에 띄게 나빠졌고, 1933년 무렵부터 루마니아에서는 나찌의 움직임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 학생들은 학교에서 무시당하였고 종종은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음악적 활동을 중단하면서 준비한 졸업시험에서 리게티가 1941년 5월 뛰어난 성적으로 수학과 물리를 전공하기 위해 클라우젠부룩 대학교에 합격하였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이 거절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게티는 유대인들이 급히 세운 "대체대학(Ersatzuniversität)"에서 수학과 물리를 전공하였다. 이와 동시에 리게티는 클라우젠부룩 콘서바토리움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다. 자신의 기본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그의 아버지도 결국에는 리게티의 음악 공부를 승낙하였다. 리게티는 클라우젠부룩 콘서바토리움에서 화성학과 대위법을 파르카스(F. Farkas)에게서 배웠다. 야심에 찬 젊은 리게티는 이러한 이론 수업, 특히 전통적 화성의 규칙적 특성, 바흐 코랄 화성과 카덴차 유형의 연습 등에 온힘을 쏟았고, 그 결과 신경쇠약에 걸리기도 하였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음악 수업의 첫 학기인 1941/42년 겨울에 리게티는 바르톡(Béla Bartók)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그의 작품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당시 헝가리 정부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오케스트라를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클라우젠부룩에서는 신음악(Neue Musik)을 전문적 연주로 공연할 수 있었고, 이 공연들을 통해 접하게 된 바르톡의 『현악사중주 2번』에 리게티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바르톡에 대한 감동과 학업을 통해 얻어진 신뢰는 리게티의 50년대 창작에 하나의 표본으로서 남아있었다. 이시기의 리게티에게 스트라빈스키(I. Strawinsky)의 음악은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쇤베르크의 음악은 미지의 땅에 대한 소문으로만 머물렀다.

   리게티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이론적 수업과 작곡가를 위한 수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연주할 수 있는 전공 악기의 선택으로도 나타났다. 17살부터 타악기를 배우기는 하였지만 리게티는 전공 악기로 오르간을 선택하였고, 연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2년 후에는 바흐 (J. S. Bach)의 『트리오소나타』를 연주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또한 그가 노동 봉사에 징집될 때까지 리게티는 첼로를 연습하였고, 새로운 악기에 대한 공부는 그에게 현악기의 가능성을 신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1942/43년 리게티의 정신적 불안정성의 정신분석적 치료를 위해 가게된 부다페스트에서 리게티는 또 하나의 다른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리게티는 매 여름마다 작곡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팔 카도사(Pál Kadosa)에게 작곡수업을 받았다. 카도사는 리만(Hugo Riemann)의 악곡론(Satzlehre), 특히 형식 분석을 위한 리듬과 박자 개념의 특별한 해석에 대한 신봉자였기에 그에게서 받은 리게티 수업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브람스 작품들을 리만의 악절론(Periodenlehre)에 따라 분석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리게티는 비록 개인적 모임에서였지만 작품 발표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의 고유한 작곡 작업은 그러나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비판이 있던 반면에 파르카스와 카도사의 적절한 격려가 있었고, 그들 선생의 격려는 리게티 창작생활에 강력한 활력소로 작용하였다. 당시 리게티의 창작 작업에 많은 영향력을 준 것은 바르톡과 코다이(Zoltan Kodály)의 작품들이었고 스트라빈스키와 힌데미트의 영향은, 힌데미트의 이론서인 "악곡의 지침서(Unterweisung im Tonsatz)"를 여름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그의 많은 연습문제를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적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1943년 리게티는 네 개의 손을 위한 피아노곡 『Polyphone Etüde』을 작곡하였고, 이 작품으로 인해 리게티는 작곡을 아주 조직적으로 하는 작곡자로서 평가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여름 이후에 리게티는 거주지를 부다페스트로 옮겼고 그곳에서 음악 학교를 찾았다. 부다페스트의 오랜 전통을 가진 이 음악 학교에서 바르톡과 코다이 이후 헝가리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베레스(S. Veress)의 작곡 문하생으로서 리게티는 파르카스와 카로스에게서의 이전의 학업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론적 수업을 받았다. 베레스에게서 팔레스트리나(G. Palestrina)의 대위법을 공부하였고, 바흐 스타일에 의한 인벤션과 푸가 작곡법을 배웠다. 베레스가 1949년 자신의 발레음악 『Terszili Karicza』의 공연을 위해 스웨덴으로 가면서 서유럽에 머무르게 되었기에 베레스에게서의 학업은 중단되었고, 마지막 학기에 리게티는 새롭게 파르카스에게서 작곡과 관현악법을 배웠다. 1949년 여름으로 마무리된 리게티의 작곡가로서의 학업은 전통적 화성학, 대위법, 형식론 그리고 관현악법에 집중되었다. 리게티의 팔레스트리나 양식에 대한 집중적 연구는 바흐가 작곡한 다성적 구성의 장르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보충되어졌다. 리게티는 코랄 변주, 카논, 2성부와 3성부 인벤션과 푸가를 바흐 스타일로 작곡하였음을 1942-1948년간의 스타일 연습을 한 악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이 연습 악보들에는 팔레스트리나 스타일에 의한 많은 모테트, 바흐와 헨델 스타일에 의한 인벤션과 푸가 그리고 파싸칼리아, 비엔나 고전악파 스타일에 의한 소나타형식, 가곡형식 그리고 론도 형식의 연습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슈만(R. Schumann) 스타일에 의거한 성격적 변주의 연곡에 대한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의 양식을 대표하는 작곡가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실습에 의한 이론적 토대는 1947년 작곡된 그의 『카프리치오 제1번』과 『카프리치오 제2번』에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두 곡의 카프리치오에서는 학업에 의한 형식적 측면(소나티나와 세부분의 가곡형식)이 스트라빈스키의 시간적 구절법과 바르톡의 미크로코스모스를 연상시키는 박자 구성(네마디 구성의 5/8+5/8+7/8+8/8박자)과 만나면서 리게티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리잡았다. 카프리치오에서 보여진 것과 같이 리게티의 전통적 이론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창작적 작업에 아주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1948년 리게티는 파리 콘서바토리움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의 첫 여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나, 이 계획은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 기회는 리게티에게는 다음해에 그 기회를 주겠다는 확약만을 준 채 그 보다 한 살 위인 동료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는 리게티에게 정치적 상황에 의해 결코 제공되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게티의 음악적 학업은 오늘날까지 자신의 관현악법의 성경으로서 간주하는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y-Korsakow)의 관현악법에 집중되어있었으며 또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인 『불새』와 『페트루슈카』의 관현악법에 대한 큰 관심 속에서 이루어졌다. 끊임없는 음악 이론에 대한 관심은 모든 음악이론적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를 원하는 리게티의 끊이지 않는 호기심과 야심 속에서 이루어졌다. 리게티의 음악이론에 대한 호기심, 많은 노력을 기울인 연습 과정 그리고 그를 통한 완벽한 경지로의 갈망은 음악어법적으로 바르톡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었다. 베레스의 문하생인 리게티와 죄르지 쿠어탁(Görgy Kurtág) 그리고 프란츠 슈록(Franz Sulyok)에게 제2비엔나악파의 작품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바르톡의 미학적 그리고 작곡적 사고를 자신들의 음악 언어로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바르톡의 조성적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체로 민속음악으로부터 자극을 받은 자유로운 조성과 선법의 경향 안에서 자신들의 음악어법을 발전시키기를 꿈꾸었다.    

   1949년 음악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나서 리게티는 루마니아를 오랫동안 여행하였다. 루마니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는 장학생으로서 리게티의 루마니아 여행은 바르톡과 코다이를 표본으로 한 민속음악의 수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 여행에서 수집한 많은 헝가리 민속 노래를 그는 작곡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루마니아 민속음악의 즉흥적 다성부와 그것의 화성적 원칙에 대한 심오한 취급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는 아주 만족할 만한 결실을 보았다. 리게티는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민속 노래를 모든 가능한 편성으로, 예를 들어 피아노를 위해, 노래와 피아노를 위해, 실내 오케스트라를 위해 그리고 합창을 위해 편곡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루마니아 콘체르토 Román koncert』(1951)라는 제목의 관현악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바르톡과 코다이를 그의 음악적 활동의 모범으로 삼은 그의 음악생활은 1951년을 즈음하여 새로운 방향에 접어든다. 민속음악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또한 바르톡의 후계자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의 의도는 더욱 커졌고, 그 결과 그는 작곡가로서 새로운 방향을 찾기 시작하였다.

   1950년에서 1956년에는 리게티는 모교에서 화성학, 대위법 그리고 형식분석을 가르치며 교수로서 재직하였다. 이 기간동안에 그는 "고전주의적" 화성학 교본을 두 권 집필하기도 했다. 1948년 이래로 헝가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서방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서방 세계에서 신음악(Neue Musik)이라는 이름 하에 무엇이 그 주요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는 완전히 터부시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신음악dl 리게티의 강한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는 그것에 대해 배우기를 열망하였다. 이 시기에 작곡한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상황을 지배하였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미학적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연주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세상에 알려질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서랍 속에 묻힌 이 작품들은 우선적으로 바르톡과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부분적으로 알반 베르크(Alban Berg)의 영향이 보이는 진보적 음악이라 할 수 있다. 1951-53년에 걸쳐 작곡된 11개의 피아노 소품 연곡인 『무지카 리체르카타 Musica Ricercata』와  1953/54년에 작곡된 그의 첫 번째 현악사중주『변형된 녹턴 Metamorphoses nocturnes』는 작곡된 그 당시에 초연 되지 못하고 서랍 속에 깊이 숨겨진 채 남아있었다. 새로운 세계, 다시 말해 신음악에 대해 알고자하는 리게티의 열망은 독일방송국의 심야 방송의 청취로 연결되었고, 이것을 통해 처음으로 메시앙(O. Messiaen)의 『튀랑갈리아 교향곡』과 아이머트(Herbert Eimert)의 전자음악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1956년 초 정치적 개방이 있은 후에 서방세계로부터 들어온 악보와 음반의 구입이 가능해졌다. 리게티는 쇤베르크, 베르크 그리고 베베른의 현악사중주들을 처음으로 구입하였고, 리게티에게 악보와 논문들을 구해주었던 아이머트,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토메크(Otto Tomek) 그리고 제리넥(Hans Jelinek)와 교류하였다. 서방세계의 음악가와 작품들과의 만남은 리게티에게는 커다란 충격인 동시에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였다고 그 자신은 회고한다. 지금까지 밤마다 라디오에서 서방세계의 음악을 접하면서 단지 일부분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던 그 대상에 대해 읽고 듣고 연구한다는 것은 그에게 그 어떤 자유보다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1956년 9월 문화적 개방으로 인한 부다페스트 음악 축제에서 서랍에 머물러있어야만 했던 리게티의 진보적 작품들 가운데 피아노곡인 『무지카 리체르카타』에서 3, 5, 7, 8, 9 그리고 10번째 곡을 관악5중주로 편곡한 『여섯 개 바가텔 6 Bagatell fúvósötösre』(1953)  가운데 다섯 개가 연주되었다. 그러나 이 연주에서도 『여섯 개 바가텔』의 마지막 작품은 극단적인 불협화음으로 인해 연주되지 못했다. 헝가리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는 음악적 상황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는 리게티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교수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활동하던 이시기, 1950-56년에도 리게티의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계속되었다. 그는 코다이의 전기 저자로서 유명한 음악학자인 라오스 바르도스(Lajos Bardos)의 이론 수업을 청강하였다. 바르도스의 음악이론적 사고와 뛰어난 분석은 리게티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방세계로 나와 발표한 리게티의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의 『구조 Ia Structure Ia』에 대한 논문은 바르도스에게서 배운 분석적 방법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1956년 리게티의 진보적 작품들이 연주되기 전까지 리게티는 부다페스트에서 실용음악, 예를 들어 민요편곡, 교육적으로 사용되는 합창 또는 학교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의 작곡가로서 알려졌었다. 1956년 여름 작곡된 관현악 작품 『환상 Víziók』에서 리게티는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위한 자신의 오랜 기간 동안의 독자적 실험의 결과를 표현하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클러스터를 통한 정적인 음향표면의 형성에 몰두하였다. 『환상』과 더불어 리게티는 피아노를 위한 『반음계적 환상곡』, 실내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적 변주곡 Variations concertantes』, 음색작곡의 클러스터 구조를 미리 보여준 관현악곡인 『어두움과 밝음 Sötét és világos』 등의 진보적 작품을 작곡하였다. 이 당시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반음계적 클러스터는 리게티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제리넥의 12음기법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의 일환이었다. 리게티에게 제리넥의 12음에 의한 작업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만, 리게티는 그러한 방법에 의해 작곡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나아가 그에 대응하는 '진보적인' 반음계적으로 쌓아올린 구조로서 작업하였다. 이러한 진보적 사고를 바탕으로 리게티의 오랜 기간동안 존경의 대상이었으면서도 뛰어넘고자 한 헝가리의 거장 바르톡의 음악어법은 동시대적 작곡의 현실적 감각과 그 능동성을 부여하지 못한다는 근거에서 과민할 정도로 거부되었다. 바르톡에 대한 과민한 거부반응은 리게티에게 있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통의 거부로 이어졌다. 그는 선율도 화성도 그리고 리듬도 필요로 하지 않는 미래의 음악을 실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유를 희망하는 기대감을 충만하게 한, 특히 리게티에게는 신음악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준 부다페스트의 반란은 수포로 돌아갔고 1956년 11월 4일 소비에트 군대의 부다페스트 입성은 공포와 혼돈을 야기하였다. 리게티는 이러한 독재 속에서의 삶을 원하지 않았기에 서방세계로의 탈출을 계획하였고, 그의 부인과 함께 그는 실행에 옮겼다. 12월 10일 그는 서쪽을 향해 기차를 탔고 불법적으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제일 먼저 빈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체르하(Friedrich Cerha)와 제리넥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졌다. 그러나 리게티는 비엔나에 정착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쾰른 전자음악 연구소의 창립자인 아이머트와 슈톡하우젠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그들에 의해 리게티는 쾰른으로 초청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전자음악연구소에서 그들과 함께 일 할 기회를 얻었다. 아이머트의 도움으로 리게티는 쾰른에서의 일년 반 생활을 가능하게 해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슈톡하우젠은 그를 여섯 주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해주었고 그 시간 동안 리게티는 신음악에 대한 집중적 토론의 기회를 가졌다. 나아가 쇤베르크, 베르크 그리고 베베른의 음악 그리고 불레즈의 작품을 들을 수 있었고 슈톡하우젠 그리고 그 밖의 작곡가의 작업에 대해 알고자 하는 리게티의 오랜 열망은 마침내 충족될 수 있었다. 리게티는 슈톡하우젠 사고의 논리 정연성에 의해 강한 인상을 받았으나, 그에 비해 슈톡하우젠의 총렬적 원칙의 엄격함은 리게티에게 강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

   쾰른에서의 일년 반 생활동안에 접한 전자음악 연구소에서의 경험, 다름슈타트 음악제(Internationale Ferienkurse für Neue Musik in Darmstadt) 참가를 통한 경험 그리고 쾰른에서 접한 음악 이론들은 리게티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밖에도 쾰른의 음악적 분위기를 배웠고 그 당시의 아방가르드에 대한 경향을 신뢰하게 되었다. 1957년 2월 1일 쾰른에 도착한 이후 리게티는 쾨니히(Gottfried Michael Koenig)와 함께 작업한 전자음악 연구소에서 가치 있는 경험을 쌓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전자음악(『글리싼디 Glissandi』와 『분절법 Artikulation』)들을 구체화하였다. 리게티는 첫 번째 전자음악인 『글리싼디』를 작곡하고 『아트모스페레스 Atmosphères』라는 제목의 두 번째 전자음악인 『전자적 소품 Pièce életronique』를 계획하였으나 1950년대의 부족한 스튜디오 기술로 인해 완성되지 못한 채 『분절법』의 작곡으로 중단되었다. 『글리싼디』가 음향적으로 그리고 형식적으로 구성력을 갖추지 못한 단순한 연습곡으로 평가되는 것과는 달리 4분 정도의 연주시간을 필요로 하는 『분절법』은 리게티의 유일한 가치 있는 전자 작품으로 인정된다. 1959년 리게티는 기술적 가능함의 한계를 인식하게 됨으로 음악적으로 많은 자극을 주었던 전자음악 연구소에서의 작업을 마감한다. 

   1957년 리게티는 처음으로 다름슈타트에서 개최된 신음악을 위한 국제 하계강좌에 참석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불레즈, 노노(Luigi Nono) 그리고 뿌쉐(Henri Pousseur)를 알게되었다. 1959년 이후부터 리게티는 이 하계강좌의 강사로서 여러 번 초청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베베른에 있어서의 형식적- 그리고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세미나를 하였고 또한 베베른의 첫 번째 『칸타타』 분석을 이끌기도 하였다. 점차로 그는 당시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들을 개인적으로 알게되었고, 무명의 헝가리 작곡가 리게티는 유럽의 음악에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곡가로서 그리고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메쯔거(Heinz Klaus Metzger) 등과 같은 음악이론가 집단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또한 리게티는 쾰른에서 이론적으로 50년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총렬음악에 몰두하였다. 리게티의 총렬음악에 대한 연구는 그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슈톡하우젠과 불레즈의 주요 작품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새로운 음악적 기법에 대한 연구는 리게티를 작곡가를 넘어선 이론가로서의 모습으로 유럽의 음악이론가들에게 인식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리게티는 불레즈의 『구조 Ia』를 분석하였고 1958년  『디 라이에 4 die Reihe IV』 에 "피에르 불레즈-구조 Ia에서의 결정과 자동제어"의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을 통하여 그는 유명해졌고, 뒤이어 발표되는 많은 출판물에서는 베베른의 많은 작품들의 분석을 다루었다. 또한 다름슈타트에서 리게티가 강연한 "베베른 칸타타의 화성에 대하여"는 1960년 『신음악을 위한 다름슈타트 논문집』(Darmstädter Beiträge zur Neuen Musik)에 발표되기도 하였다. 많은 작곡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리게티는 1960년 『디 라이에 7』(에 발표된 논문 "음악적 형식의 변화 Wandlungen der musikalischen Form"에』서 총렬음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음색작곡을 선언하였다. 총렬음악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 아주 치밀하게 계산되어진 총렬음악의 구조가 청자들에게는 전혀 인식되어지지 않는다는 음향적 인식의 의문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리게티는 12음기법과 총렬적 원칙은 음색을 음악의 구성을 위한 독립적 요소로서 새롭게 가치 평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음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에서 음색을 중요시하는 음악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환적 과도기에서 "주체를 이루게 하는 토대로서의 보조(Korsettsangengerüsthilfe)" 역할을 하였을 뿐이라 규정하였다.           

   쾰른에서의 시간을 회고해 볼 때 전자음악 연구소에서의 경험, 다름슈타트 음악제의 참가, 이론가로서의 자리 확보 등과 함께 리게티가 만난 작곡가들과의 직접적 교류 또한 새로운 음악세계를 접한 작곡가 리게티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쾰른에서 만난 슈톡하우젠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 가운데 카겔(Mauricio Kagel)은 리게티의 음악세계에 새로운 영감을 준 작곡가로 또한 꼽을 수 있다. 1960년 초연된 카겔의 『아나그라마 Anagrama』에서의 휘파람 소리와 웃음소리를 작곡에 삽입시키는 방법은 리게티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었다. 카겔의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한 대화, 다양한 소음과 악기소리의 겹침과 같은 기법은 리게티에게 특별하게 매혹적인 것이었고, 후에 리게티는 자신의 작품 『아방튀레 Aventures』에서 이러한 기법을 통한 표현을 보여주었다. 쾰른에서 시간은 리게티에게 작곡가와 작품을 통한 직접적인 경험 외에도 시시각각 느껴지는 쾰른의 예술적 분위기, 예를 들어 다양한 문화적 활기, 자극적인 쾰른의 연주 경험, 유럽의 작곡가들과의 교류, 화가와 작가들과의 직접적 만남 등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쾰른의 분위기는 리게티 자신의 예술적 견해를 확고히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리게티는 유럽의 아방가르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는 것이다.

   전자음악의 한계를 경험한 리게티는 부다페스트에서부터 그를 강하게 지배하였고 이미 『환상』에서 시도하였던 선율과 화성을 중립화하고자 하는 그의 작곡 경향을 순수 악기와 목소리를 위한 작곡에서 구체화하였다. 스튜디오의 경험을 관현악에 적용시킨 처음의 작품으로는 『아파리시옹 Apparitions』을 들 수 있다. 『아파리시옹』에 이어 작곡된 『아트모스페레스 Atmosphères』에서는 다섯 옥타브로 확장된 정지된 음향을 클러스터를 통해 구체화하였고, 이 두 작품은 오늘날 리게티의 새로운 스타일의 핵심적 작품으로 간주된다. 1960년과 1961년 성공적 초연을 통해 이 두 작품은 리게티에게 국제적 명성을 가져다주었고 리게티를 이론가로 인정하는 쾰른과 다름슈타트의 인식을 창작적 능력 또한 뛰어난 작곡가로서 인정할 수 있도록 바꾸어 놓았다. 특히 『아트모스페레스』에서 보여준 자신의 초기 작품 경향의 어법적 의존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과 파격적으로 새로운 음악적 세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으로 인해 이 작품은 그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이 두 작품과 다음의 작품들을 통해 리게티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선두주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리게티가 쾰른을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선택한 도시는 비엔나로서 60년대에는 주로 그곳에서 생활하였고 196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국적을 보유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유럽의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였고 객원교수로서 음악이론과 자신의 작곡과정을 강의하였다. 쾰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1959년에 그는 스톡홀름의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개인적으로 초청을 받았고 1961/62년에는 스톡홀름 음악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 스웨덴 방송국의 동인 그리고 작곡가들을 위한 공개 강의의 제의를 받았다. 스웨덴 그리고 스톡홀름 음악학교의 예술적 분위기는 탄탄한 전통 위에 새로운 기법과 음악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기에 리게티는 자신의 작품 연주와 강연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객원교수로서 이끈 스톡홀름에서의 그의 강연은 총렬음악의 발전, 반 총렬적 분위기로 인한 음악적 기법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서의 음색-공간 작곡의 개념의 범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60년대 스톡홀름 음악세계에서의 리게티에 대한 작곡가로서의 인정은 스웨덴의 작곡가인 브롬달(Karl-Birger Blomdahl)과 리드호름(Ingvar Lidholm)과 함께 1972년까지 매년 3번씩 4주에서 6주에 걸친 수업을 이끈 것으로 매우 긍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웨덴에서의 리게티에 대한 인정은 또한 스톡홀름의 음악 연구소의 위촉을 받고 리게티가 『레퀴엠 Requiem』(1963-65)과 오페라 『르 그랑드 마카브레 Le Grand Macabre』(1974-77)를 작곡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톡홀름 필하모닉의 관악5중주의 1967년 청탁에 의해 『관악5중주를 위한 10개의 소품 Zehn Stücke für Bläserquintett』(1968)를 작곡했다는 사실로도 확인되어진다. 십 여년의 스웨덴의 시기는 리게티에게 부다페스트에서의 강의경력을 스톡홀름의 작곡과와의 작업으로 넓히고 차별화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나아가 함부르크에서의 작곡과 교수를 위한 직접적 준비과정을 제공하였다. 리게티의 인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음악인과의 만남으로는 음악적 동료이자 리게티에 대한 첫 번째 단행본을 출판한 노르드발(Ove Nordwall)과의 스웨덴에서의 만남을 들 수 있다.

   비엔나에 거주하며 스웨덴에서 객원교수로서 활발한 활동을 한 60년대에 리게티는 또한 다름슈타트와 마드리드를 비롯한 많은 유럽의 도시에서 작곡과정을 가졌고 강사로서 활동하였다. 1969/70년에 그는 베를린의 독일 교육 교환기관의 장학생이 되었으며, 1973년까지 베를린에 거주하였다. 리게티의 작곡가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활동은 단지 유럽이라는 대륙에 머물지 않고 1972년에는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대학에서 반년동안 객원교수로 강의하기도 하였고 1973년에는 탱글우드(Tanglewood)에 있는 버크셔 음악센터(Berkshire Music center)에서 그리고 1974년에는 씨에나(Siena)에 있는 아카데미 씨기아나(Chigiana)에서 작곡과정을 개최하였다.

   비엔나, 에쎈, 쾰른, 베를린의 음악학교 그리고 유럽의 많은 국가와 미국에서 오랜 기간동안의 활동을 뒤로하고 1973년 함부르크에서 작곡과 교수로 리게티를 임명함으로써 정착하지 못한 그의 생활은 안정을 찾았다. 함부르크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수락할 당시 리게티는 고정적으로 강의할 곳을 원했었고,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작은 그룹, 특히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강의하기를 원했다. 또한 그 당시 그는 12음의 지배적 분위기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이 관심을 가지며 크게 평가한 미분음적 움직임에 우선적으로 집중하고 싶었다. 리게티는 표현주의적, 포스트모던적 그리고 반 총렬적 작곡가들의 복잡하게 만들어진 악보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불필요한 장식이 없는 혼합성(Komplexität)을 좋아하였다. 이러한 음악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리게티는 음악의 다른 여러 방향에 대한 강의를 더 이상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적 사고를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 범위에서 비판과 함께 펼치고 싶었기에 함부르크의 교수직을 수락하였다.

   1979년부터 리게티의 함부르크 작곡과정에는 푸에르토 리코(Puerto Rico) 출신인 씨에라(Roberto Sierra)라는 학생이 있었다. 씨에라는 매주 모임에 카리브 민요의 음반을 가지고 왔고 작곡과 클래스에서는 카리브 민요의 통상적이지 않은 리듬에 대해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지곤 했다. 이미 70년대 초에 브라질의 쌈바 전통에 관심을 가졌던 리게티는 점점 더 카리브 민요의 리듬에 매혹되었다. 그 이후로 리게티는 이러한 음악의 아프리카적 근원에 대해 개방된 자세를 취했다. 이미 리게티가 자신의 『바이올린, 혼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 Trio für Violine, Horn und Klavier』(1982)의 공연을 한 1982년 말에 씨에라는 중앙 아프리카의 폴리포니 기악음악(Polyphonie instrumentale de la Republique Central-Africaine)의 음반을 작곡 클래스에 소개하였다. 음반을 통해 들은 목관악기인 트럼펫 앙상블과 영양의 뿔로 된 혼을 위한 아프리카 폴리포니적 호케투스 음악의 경험은 아프리카 음악에 대한 열광적으로 넘쳐오는 탐구의 길을 감행하도록 리게티를 자극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 리게티는 오스트리아의 종족음악학자인 게르하르트 쿠빅(Gerhard Kubik)의 사하라 지역에 속하는 아프리카 음악, 특히 폴리포니 문화와 그 음악을 구성하는 고유한 패턴 기법에 관한 논문을 접하였고, 패턴 기법에 커다란 매력을 가졌다. 80년대에 들어 리게티가 접한 또 하나의 새로운 충격은 작곡가 냉캐로우(Colon Nancarrow)의 음악어법이라 할 수 있다. 리게티는 베를린 예술학교의 카탈로그에 실린 레네 브록(René Block)이 논문을 통해 냉캐로우의 아주 복잡한 폴리리듬 구조를 접하였다. 냉캐로우 작품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속도로 연주되는 여러 성부들의 동시적 진행과 같은 방법은 이미 1976년 작곡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품』 가운데 첫 번째 곡인 「기념비 Monument」에서 시도하였었다. 이미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도하였었던 폴리리듬 구성은 냉캐로우의 음악세계를 접함으로 더욱 심화된 모습으로 1985년 작곡된 『피아노 에튀드』에 적용되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리게티의 국제적 명성으로 인해 함부르크 음악학교는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를 확보하였다. 다델젠(Hans-Christian von Dadelsen), 코브렌츠(Babette Koblenz), 슈바이니츠(Wolfgang von Schweinitz), 슐츠(Wolfgang Andreas Schultz), 등은 리게티의 제자로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그와 같은 세대의 어느 다른 작곡가들도 리게티와 같은 명예를 갖지 못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상을 받았고, 또한 그는 예술세계에서 주어지는 가장 가치 있는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리게티는 1988년 함부르크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함부르크 음악학교의 명예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작품들이 많은 나라들의 음악축제에서 연주됨을 통해 리게티의 국제적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리게티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은 그가 평가하는 많은 작곡가들, 멕시코 작곡가인 냉캐로우와 루마니아 작곡가인 스테판 니콜레스쿠(Stefan Nicolescu),을 적극적으로 대변한다는 사실이다.

   1989년 명예 퇴직 후에 리게티는 함부르크와 비엔나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리게티가 함부르크에서 전과 다름없이 집중적인 작업을 하는 반면에 비엔나에서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최근에 리게티는 파리로 이주할 것을 결심하였다. 


참고논문:신인선: 죄르지 리게티 작품에서의 클러스터기법의 발전

신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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