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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시니||로씨니 [ROSSINI, Gioachino Anton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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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시니(ROSSINI, Gioachino Antonio , 1792. 2. 29 페자로 - 1868. 11. 13 빠리 근교 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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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의 작곡가. 당대의 사람들은 그를 "음악의 나폴레옹"(마찌니)이라 불렀다. 그와 나폴레옹을  비교하는 것은 그에 관한 최초의 전기(Vie de Rossini, 1824)를 썼던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부터일 것이다. 스탕달은 그 책에서 나폴레옹의 별이 떨어지자 롯시니의 별이 유럽의 하늘에 떠올랐다고 말한다. 이러한 평가는 그가 32세 되었을 때에 얻은 것이었는데, 이러한 일은 음악사에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걸맞게 당대의 문헌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작곡가가 바로 롯시니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음악사에서는 그의 위치가 그리 높이 평가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심각한"음악보다는 "즐거운" 음악과 더 관련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벼워 보이는 그의 음악 때문에 "위대한" 작곡가로 "숭배" 받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19세기의 음악미학은 음악을 외경스럽게 우러러보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는 우러러보기에는 적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관악 연주가(트럼펫과 호른 연주자)였던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00년 가족이 모두 로마로 이주하면서 롯시니는 최초의 음악 수업을 받는다. 1802년 아버지의 고향 루고로, 그리고 189년에는 다시 볼로냐로 이주한다. 볼로냐 음악학교(Liceo musicale)에서 첼로와 피아노를, 조금 후에는 대위법 교육을 마테이(Stanislao Mattei)에게서 받는다. 음악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하이든, 모차르트, 치마로자의 음악을 많이 접한다. 재학 시절인 1802년에 그는 현악사중주(Sonata a quattro)를 써서 이미 견고한 자신의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오페라 『데메트리오와 폴리비오』(Demetrio e Polibio)를 작곡한다(1809). 음악학교를 졸업하던 1910년에는 베니스의 모이제(Moisè) 극장을 위해 오페라 『결혼수표』(La cambiale di matrimonio)를 작곡했는데,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12년에는 밀라노 스칼라 극장을 위해 『시금석』(La pietra del paragone)을, 그 다음 해에는 베니스의 극장을 위한 『탄크레디』(Tancredi)와 밀라노 극장을 위한 『알제리의 이태리 여인』(L'italiana in Algeri)을 작곡하여 명성을 높여갔다. 『탄크레디』의 초연에 참관한 스탕달은 "우리의 치마로자가 되돌아왔다"고 환호했다. 이 음악의 강점은 콜로라투라 부분이 없는 아리아에 있었다. 콜로라투라는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는 아주 중요해지지만, 초기의 롯시니는 이를 사용하지 않은 아리아를 가지고 성공적일 수 있었다. 또한 이 오페라는 갈등을 상승시키고 해결하는 방식이 대단히 능숙했다. 그리고 큰 장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명확하게 구분시키는 그의 특징도 이 오페라에 잘 나타난다.  1815년에는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를 썼는데, 이 작품과 더불어 그의 작품은 성숙기에 접어든다. 1816년에는 로마의 토레 아르젠티나 극장(Teatro di torre argentina)으로부터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여 오페라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는 보마르쉐의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evillia)를 선택하여 작곡하여 부대에 올린다. 첫 공연은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같은 소재로 작곡한 파에지엘로의 추종자들은 그의 오페라를 못 마땅하게 생각할까봐 처음에는 제목도 다르게 붙였다(『알마비바, 또는 소용없는 신중함』 Almaviva, ossia l'inutile precauzione)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둘째 날부터 대성공을 거둔다. 이 오페라가 파에지엘로 것보다 더 유명해지자 본래의 제목 『세빌리아의 이발사』로 바꾼다. 이어서 작곡된 『오텔로』(Otello), 『신데렐라』(La Cenerentola), 『도둑까치』(La gazza ladra), 『이집트의 모세』(Mose in Egitto), 『호수의 여인』(La donna del lago, 영국 작가 월터 스코트의 낭만적 소설을 극화한 내용)도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1822년 그는 성악가 콜브란(Isabella Colbran)과 결혼한다. 그녀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주역을 맡으면서 롯시니와 알게 되었다. 결혼한 해에 그는 당시 유럽을 쥐고 흔들던 비엔나의 정치가 메테르니흐의 위촉으로 4개국 회의를 위한 칸타타를 작곡하게 되면서 비엔나를 방문한다. 거기에서 그는 베토벤을 방문한다. 베토벤은 그에게 오페라 세리아를 쓰지 말고 더 많은 『이발사』를 쓰라고 말한다. 베토벤의 말년은 롯시니 열풍?가린다. 그만큼 롯시니는 더 대중적인 음악가였다. 1823년에 쓴 『세미라미스』(Semiramis) 작곡을 끝으로 그의 이태리 시대는 마감한다. 1823년부터 그는 빠리의 이태리 극장의 감독 직을 맡게 된다. 그는 1825년 칸타타 『랭스로의 여행』(Il viaggio a Reims)을 작곡하면서 본격적인 프랑스 시대를 연다. 『오리 백작』(Le comte Ory), 『윌리엄 텔』(Guillaume Tell)이 뒤따른다. 1930년 이후 그는 오페라를 전혀 쓰지 않는다. 다른 음악도 아주 드물게 쓴다. 이는 그가 대단히 많은 돈을 벌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그는 말년에 음악세계를 많이 등지고 살았다. 이렇게 그가 작곡생활을 멀리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신경 때문에 육체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18세부터 37세까지 40개의 오페라를 작곡하는, 힘겨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당대의 가장 유명한, 37세의 작곡가가 작곡을 중단하는 상황은 음악사에서 그가 유일한 케이스로 보인다. 그가 오페라 작곡을 다시 하지 않지만, 교회음악작품은 말년에 작곡한다. 그는 1831년에 주문을 받아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를 1835년 불만족한 상태에서 발표한 후, 1842년에 새롭게 작곡한다. 그 후로 조그마한 성악과 기악 작품들도 몇 개 썼으나 이런 것들은 "노인의 망령"(정확하게 번역하면 "늙은이의 죄"Péchés vieillesse)이라는 이유로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장엄미사』(Petit messe solennelle 1864)를 작곡했다.  1836년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종신연금을 받게 되며, 이태리로 되돌아간다. 그는 1839년부터 1848년까지 자신이 공부했던 볼로냐의 음악학교의 명예고문(Consulente onorario)을 지냈고, 1845년부터 48년까지는 교장의 일을 맡기도 했다. 1937년에는 부인 콜브란과 이혼하고, 이혼한 부인이 죽은 후인 1845년 펠리씨에(Olimpe Pélissier)와 재혼한다. 1855년 다시 빠리 근교 빠씨(Passy)로 돌아가 거기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낸다. 그의 집은 많은 예술인들이 교류하는 이름난 살롱이 된다. 바그너, 리스트, 토마, 마이어베어, 오베르, F.다비드, 알렉잔더 뒤마와 같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이름난 미식가였는데, 그의 이름이 달린 음식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온다: Tournedos Rossni("롯시니 등심").  1868년 그는 빠리의 한 묘지에 묻혔다가  1897년 이태리로 이장된다(플로렌스의 산타 크로체 교회). 그의 고향 페자로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음악원이 세워지고, 이 학교는 1940년 이후 "롯시니 음악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롯시니의 음악세계의 중심에는 오페라가 자리한다. 그는 이태리의 오페라 전통을 이어받아 승계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오페라는 여전히 성악 중심의 오페라였고, 언어보다는 음악에 더 치우치는 전형성을 보여준다. 그의 음악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리듬 속에 담겨진다. 정해진 리듬들이 연속적으로 지속되면서 음악을 만들어 가는 특징은 가장 두드러진 면이다. 그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이후부터 성악 선율을 위해서 모든 부분을 정확하게 악보로 기록하여 성악가가 즉흥적으로 음악적 장식을 섞어가며 노래하던 것을 금한다. 그의 레치타티보는 오케스트라가 주도하면서 성악선율은 빠르게 같은 음을 반복하거나 좁은 음역 사이에서 움직이며 낭송한다. 그리고 잦은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의 활용 역시 그의 음악이 가진 뚜렷한 특징이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세빌리아의 이발사』이다. 이 오페라와 함께 부파 오페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을 갖게 된다. 웃음과 유모어의 면에서 비교될 만한 음악작품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두드러진 음악이다. 이 작품의 서곡은 원래 『팔미라의 아우렐리노』(Aurelino in Palmira, 1813)를 위한 서곡으로 작곡된 것이다. 롯시니는 이것을 조금 변형시켜 오페라 세리아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를 위해 사용하다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위해 사용한다. 이 서곡은 오페라 부파 서곡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청중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음형들로 된 느린 도입부가 나오고, 거기에 목관악기로 연주하는 서글프고 꿈꾸는 듯한 선율이 나온다. 뒤이어 나오는 중심부는 전개부가 없는 소나타악장형식으로 제2테마에서 불가피하게 크레셴도가 솟아오르는 방식으로 음악이 진행된다. 이런 형식 가운데 고조시키는 방식으로 작은 모티브들을 반복 사용하고, 갑작스러운 변화를 가져오는 리듬을 사용하여 오케스트라 음악에 특유의 활기를 부여한다. 이런 특징은 그의 성악곡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롯시니는 당대의 사람들로부터는 오페라 세리아의 대가라는 평을 받았다. 『오텔로』, 『이집트의 모세』, 『호수의 여인』이 바로 이 장르에서 그의 솜씨를 보여준다. 특히 『호수의 여인』은 극적, 편성적, 무대적 측면에서 다음에 오는 오페라 세리아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그의 오페라 세리틈?베르디와 같은 후대 작곡가의 음악을 준비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또한 그는 『윌리암 텔』과 함께 프랑스적 그랑 오페라 전통에도 큰 기여를 한다. 

오페라 이외의 작품들은 한동안 별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스타바트 마테르』는 매우 자주 연주되는 음악에 속한다. 이 곡은 그의 오페라와 음악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작은 장엄미사』도 점차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가 되어 가고 있다.

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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