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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러 [Eisler, Han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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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아이슬러 (Hanns Eisler 1898 Leipzig 출생 - 1962 Ostberlin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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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아이슬러는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의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알반 베르크 (Alban Berg)와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의 수준에서 스승의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격동하는 1920년대의 진보적인 젊은 예술가로서 예술사에 그리고 문화사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때문에 오랫동안 20세기 서양음악사에서 서자취급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한스 아이슬러는 1898년 독일의 라이프찌히에서 칸트 철학의 대가인 유태인계 아버지 (Rudolf Eisler) 와 정육점 딸인 어머니(Maria Ida Fischer) 사이에서 세 자녀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제일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9년 가을에 화성학등 음악 이론을 잘 가르치기로 소문이 난 쇤베르크를 찾아가 그 제자가 된다. 엄격하기 그지없는 스승에게서 철저하게 음악이라는 예술을 배웠으며 이로 인해 일생동안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었다. 이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동독에서 아이슬러는 자신의 음악관과 스승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정치간부들의 비난을 받을 때에도 스승을 옹호했다. 그 당시 쇤베르크는 사회주의 체제하의 동구권에서 자본주의 예술, 즉 형식주의 예술의 대표자로 맹렬한 지탄을 받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1925년에는 스승과 그리 유쾌하지 못한 형태로 결별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슬러가 수학을 끝내고 쓴 첫 작품 "피아노 소나타 1번" (Klaviersonate op.1)은 스승의 추천으로 프라하에서 연주가 되고 비인의 유니버살 출판사에서 출판이 되어 아이슬러는 음악계에 성공적인 첫걸음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스승 쇤베르크가 자신의 제자 중 뛰어난 제자로 아이슬러를 인정하였으나 아이슬러의 음악적 회의는 점점 깊어 갔고 스승의 12음계 음악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갔다. 스승은 제자가 그를 배신했다고 비난했지만 아이슬러의 비판은 일차적으로 음악 외적인 것이었다. 고통받는 다수의 인간을 도외시하고 소수 몇몇 사람들을 위한 어려운 음악을 작곡하는 행위에 그는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고독한 음악' 또한 예술을 위한 예술 (l'art pour l'art)을 거부하고 가능한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이해하기 쉬운 음악을 창조하기를 소원했다. 스승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가려고 노력한 초창기의 작품으로 "한스 아이슬러의 일기 (Tagebuch des Hanns Eisler op.9)"와 "신문조각 (Zeitungsausschintte op.11)"을 들 수 있다. 당시 활발했던 독일의 노동운동에서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정한 후에는 많은 노동가 및 정치성을 띤 노래를 작곡하는데 그 중 "연대가 (Solidaritätslied)", "붉은 결혼식 (Der rote Wedding)", "비밀스런 행진 (Der heimliche Aufmarsch)"등이 아이슬러의 대표적인 정치적 노동가에 속한다.  라디오음악인 "시대의 속도 (Tempo der Zeit)"와 무대음악 "베를린의 상인 (Der Kaufmann von Berlin: Walter Mehring작품임)"이나 "조치 (Die Massnahme: Brecht작품임)", 그리고 영화음악 "무인국 (Niemandsland: Victor Trivas감독)", "쿨레 밤페 (Kuhle Wampe: Slatan Dudow감독)"등의 실용음악의 예에서 보여주듯이 그는 혼자 방에 앉아 사람들이 자기음악을 듣게 될런지 고민하는 고독한 음악인형이 아니라 항상 다른 예술인 (극작가나 영화인 또는 방송인)과 같이 공동 작업하는데 뛰어난 음악인이었다.  

1933년 독일의 나치정당이 정권을 잡게 되자 유대인일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인 그리고 음악적인 활동 때문에 나치의 원수로 낙인이 찍혀 독일을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망명생활은 아이슬러에게 자신의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새로이 고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독일의 노동운동과 단절된 외국에서는 노동운동보다는 히틀러 정권의 붕괴를 위해 투쟁하는 일에 더 주력하게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에 국한하지 않고 망명한 지식인 문인 음악인을 막론하고 넓은 지반의 모든 저항세력을 모아야 했다. 그러므로 이제 아이슬러에게는 노동음악보다는 문화적 지식층에게도 호감을 줄 수 있는 정치성을 띤 예술음악을 작곡하는 일이 더 급선무였었다.  그리고 일반인의 음악에 대한 무관심은 즉 음악을 무조건 어렵게만 작곡하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음악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사고에 기인하여 12음계 음악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1934년부터 1940년까지 그가 작곡한 12음계 음악을 보면 어린이를 위한 노래와 피아노 곡뿐 만 아니라 칸타타, 교향곡, 가곡 (Klavierlieder), 영화음악 등 다양한 쟝르에 다양한 수준의 곡들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주로 기악곡에만 선호되던 12음 기법을 성악곡에 집중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매우 주목할 일이다. 1937년 아이슬러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망명생활을 하던 덴마크에 6개월 이상 거주하면서 12음 기법으로 10여 곡의 실내악 칸타타 (Kammerkantate)와 "독일 교향곡"(Deutsche Sinfonie) 그리고 "레닌 레퀴엠"(Lenin Requiem)등 집중적으로 성악곡을 작곡했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12음계 성악스타일 (zwölftönige Vokalstil)을 개발하려고 하는 아이슬러의 실험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곡들은 모두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가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음악의 진실성과 진보성을 정치적인 진보성과 접목시키고자는 그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1938년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고 몇 년이 지나면서 (1942년부터) 아이슬러의 음악에는 또 다시 점차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동안 집중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던 12음기법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망명생활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걸작 "헐리우드 노래집 (Hollywooder Liederbuch)"에서는 12음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조성음악재료를 불협화음적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전환이 있기 전에는 12음기법을 사용한 영화음악"비의 14가지 종류 서술하기 (Vierzehn Art den Regen zu beschreiben op.70)"나 "15 독주악기를 위한 실내악심포니 (Kammersymphonie fuer 15 Soloinstrumente)", "5개의 오케스트라 곡 (5 Orchesterstuecke)"등을 작곡하였고 "비가 1939년 (Elegie 1939)", "망명의 지속에 대하여 (Ueber die Dauer des Exils)"등의 12음계 리트도 썼다.

또한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망명예술인에게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고 알려진 록펠러 장학금을 받아 12음기법이 영화음악에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비젠구른트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도 함께 참가하여 이 두 사람의 공동저서 "영화를 위한 작곡 (Composing for the film)"이 탄생하게 되었다. 

아이슬러는 자신이 작곡한 대부분의 영화음악을 정리하여 실내악등 콘서르트 음악으로 (다수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곡 "Suite fuer Orchester"나 칠중주와 구중주 실내악등) 작품번호를 달았는데 이는 실용음악과 예술음악의 경계를 좁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아이슬러에게 예술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던 미국망명시기는 1946년 미국정치의 노골적인 반소련노선으로 끝을 내리게 된다. 헐리우드의 진보적인 세력과 독일망명가들을 소련의 첩자로 몰아 감시 심문하는 일이 전개되었다. (이때의 눈부신 활약으로 닉슨은 후에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아이슬러는 (특히 공산주의자인 그의 형 때문에) 채플린과 피카소와 같은 세계적인 유명인사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제 일의 희생타로 미국에서 쫓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1947년 2월 뉴욕에 있었던 그의 환송연주회에는 번슈타인을 비롯해 유명한 예술가들이 후원 참여하여 아이슬러의 예술적 명성을 증명하였다.  

그후 비엔나에서 일자리를 찾아보았으나 그의 정치성뿐 아니라 진보적인 예술관 때문에 거절을 당한 아이슬러는 브레히트의 권유로 동독에 정착하게 되었다. 동독의 애국가를 작곡하는 등 외적으로는 동독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인정을 받는 듯 했으나 실제로는 그의 음악과 진보적인 예술관은 소외를 당하였고 동독의 문화생활에서 그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했다. 그 한 예를 소위 "파우스트 논쟁"이라는 1953년의 동독지식인들과 문화간부들의 열띤 토론에서 잘 볼 수 있는데 바로 아이슬러가 스스로 쓴 오페라 대본 "요한 파우스트 (Johann Faust)"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었다. 새로운 비판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고자 한 아이슬러의 시도는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문화적 자세를 가진 대다수의 동독 지식인들과 간부들에 의해 맹렬한 지탄을 받고 그 싹마저 짓밟히는 결과를 낳았다. 실망과 허탈감에 오페라 파우스트의 음악은 씌어지지 않게 되고 그 대본만 남게되었다.

 1962년 아이슬러는 그의 유언과도 같은 음악 "진지한 노래들 (Ernst Gesaenge)"을 남기고 6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경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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