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인명
안익태
3,484회
안익태(安益泰 1906. 12. 5 평양 ~ 1965. 9. 16 바르셀로나)



977803507_1521532822.779.jpg



애국가의 작곡자. 작곡가 활동은 미약한 편이다. 그보다는 지휘자 활동이 더 많았다. 
평양 종로보통학교(입학:1914년)에서 코르넷과 바이올린을 배웠다. 평양 숭실중학교(입학:1918년)에 들어가 첼로를 배웠다. 평양 숭실학교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했고, 퇴학당했다. 일본에 건너가 중학을 마치고 일본고등음악학교(현: 구니다치음악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했다(1926-30). 미국 신시내티 음악학교(입학: 1930)에서 배우며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첼로 주자를 지냈다. 커티스음악학교(입학:1932 또는 1933?)와 템플대학 대학원(입학연대 미상)에서도 수학했다. 필라델피아 심포니 클럽 보조지휘자로서 지휘활동을 시작했다(1934). 1936년 유럽 순회연주 중 지휘자 바인가르트너(Felix von Weingartner)를 만나 그에게서 배우고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그는 템플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1937. 6). 1937(또는 38)년을 즈음하여 안익태는 유럽의 주요 교향악단들을 지휘했다. 이 시기  R. 슈트라우스를 알게 되었다. 그는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Lolita Talavera)와 결혼하였다(1946. 7. 5). 이 해에 그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1955년 일시 귀국하여 지휘활동을 했다. 1960년대 초에는 한국에서 국제음악제를 주도했다(1962-64).
안익태의 음악은 단순한 한국민요적 선율을 사용하는가 하면 악기 특징에 따른 표현적 부분들도 보인다.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표제적 내용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억센 행진곡적 성격의 음악을 흔히 곡의 절정부분에 둔다. 단순한 화성의 연속을 통해, 역시 단순한 리듬의 도움으로 곡을 마무리하여 무기교한 인상을 주는 경우도 흔하다.     

작품목록
1. 모음곡 {한국의 생활} (1934 ~ 1935)
2. {애국가} (1935)
3. 교향시 {강천성악}(降天聲樂, 1936년 추정)
4. {한국환상곡} (1938)
5. 교향시 {마요르카} (1948)
6. 교향시 {퍼르멘토르의 로 피} (1951)
7. 교향시 {논개} (1962)
8. {애국지사 추도곡} (1962)
9. {흰 백합화} (1962)
10. {한국무곡} (1963)

참고문헌
허영한: 미주 한인학생회보를 통해 본 안익태의 미국유학시절, 낭만음악 1988 가을 제40호 5-37.
허영한: 자료기록에 의한 안익태의 유럽 활동 재구성, 낭만음악 73호 겨울, 2006,  5-31.
전정임: 안익태, 시공사, 1998.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의 숨겨진 삶을 찾아서-, 휴머니스트, 2007.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안익태(安益泰, 1906-1965)

-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숙박업을 하던 부친 안덕훈과 모친 김정옥 사이에서 출생.
- 8-9세에 바이올린과 코넷을 배우기 시작함.
- 1918년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시작함. 마우리(E. M. Mowry)에게 사사.
- 숭실중학교 시절 첼로를 배우기 시작함. 첼리스트 그레그(G. Gregg)에게 단기 교육을 받음.
- 1926-1930년 동경고등음악학교에서 다데 사브로(伊達三郞)에게 첼로를 사사.
- 1930년 신시내티(Cincinnati) 음악원 입학, 신시내티 교향악단 수석 첼로주자로 활동함.
- 1932년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Curtis Institute of Music) 입학.
- 1932년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 입학.
- 1934년 필라델피아 심포니클럽 보조지휘자로 활동함.
- 1935년 ⪡한국의 생활≫ 모음곡 출판(엘칸-보걸사). 작곡가로 데뷔함.
- 1935년 11월 ≪애국가≫ 작곡.
- 1936년 유럽 순회연주. 베를린에서 힌데미트(P. Hindemith)와 만남.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바인가르트너(F. Weingartner)에게 3개월간 지휘법을 사사.
- 1937년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
- 1938년 더블린 방송교향악단 객원지휘(≪한국 환상곡≫ 초연).
- 1938-1944년 6월 유럽에서 지휘자로 활동함.
- 1938-1941년 부다페스트 국립음악원에서 코다이(Z. Kodály)와 도나니(E. Dohnáhyi)에게 사사.
- 1943년 슈트라우스(R. Strauss)를 만남.
- 1946년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백작의 딸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함.
- 1946-1959년 마요르카(Mallorca) 교향악단 창설 및 상임지휘자 역임.
-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객원지휘 활동을 재개함.
- 1955년 첫 번째 한국 방문. 
- 1962-1964년 3회에 걸쳐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함.
- 1964년 동경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
- 1965년 런던 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
- 1965년 간경화증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사망. 

  안익태는 삶의 근거지가 많이 바뀌고, 또한 근거지에 따라 그의 역할도 상당히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의 내용 또한 많은 변모를 거친다. 안익태의 작품 시기는 그의 정착지에 따라 4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미국 시기(1930-1937)로, 이 시기 동안 안익태는 고국의 향수를 가득 담은 곡들과 애국적인 작품들을 내놓는다. 그의 첫 번째 출판물인 ⪡한국의 생활≫모음곡(1934/1935)은 한국의 민요를 독창곡으로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이팔청춘>, <아리랑고개>, <전원>, <백합화> 등 총 4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한국의 아악을 모체로 한 ≪강천성악≫(1936)과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의 역사를 서사적으로 엮은 ≪한국 환상곡≫(1936/1937)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를 대한민국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한 ≪애국가≫(1935) 역시 이 시기의 작품이다.
  제2기는 유럽 시기(1938-1944)로, 이 시기 동안 안익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유럽 악단에서 지휘봉을 들게 되기 때문에 일본과 관련된 작품들을 작곡하게 된다. 일본 아악곡을 테마로 한 ≪에텐라쿠≫(越天樂, 1940)와 악보가 소실되어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일본어 제목으로 된 심포니적 판타지 제2번 ≪교쿠토≫(極東, 1940),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한 ≪만주국 축전곡≫(滿洲國 祝典曲, 1942)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제3기는 마요르카 시기(1950-1961)로, 안익태는 이 시기에 마요르카 오케스트라단의 상임지휘자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마요르카와 관련된 작품들을 작곡하였으며, 많은 수의 편곡작품들을 남긴다. 마요르카 섬의 풍경과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한 교향시 ≪마요르카≫(1948)와 마요르카 섬의 한 지역인 포르멘토르의 절경을 소재로 한 ≪포르멘토르의 로 피≫(Lo pi de Formentor, 1951)가 이 시기의 작품이다. 또한 마요르카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로 사용하기 위해 안익태가 이 시기에 편곡한 작품으로는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B단조≫, ≪푸가 G단조≫, ≪토카타와 푸가 D단조≫를 비롯하여, 드뷔시의 ≪월광≫, 쇼스타코비치의 ≪전주곡 E단조≫ 등이 있다.
  제4기는 한국교류 시기(1962-1965)로, 한 동안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멈추고 지휘자의 역할에만 전념하던 안익태는 서울 국제음악제를 주관하게 되면서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한다. 그가 조직한 국제음악제에 사용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작품들은 한국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의기 논개의 일대기를 담은 ≪논개≫(1962),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이라는 부제가 붙은 ≪애국지사추도곡≫(1962), 한국적 리듬을 특성으로 하는 춤곡들을 묶은 ≪한국무곡≫(1963) 등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으며, 성악곡 ≪흰백합화≫(1962)와 그 작품의 첼로독주를 위한 편곡작품도 이 시기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그밖에 한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교가나 사가(社歌) 등의 작곡 의뢰도 많아져 ≪서강대학교가≫, ≪적십자의 노래≫, ≪유한의 노래≫ 등이 이 시기에 작곡된다. 
  그의 관현악 작품들 대부분은 교향시 형식으로 구성된다. 안익태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내용을 담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그가 경험했던 정치적ㆍ사회적 환경들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하에서 억압을 받아왔고, 그 이후에도 많은 난관과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은 안익태로서는 자연히 음악을 통해 무엇인가를 전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의 교향시 작품들 중에는 서사적 줄거리를 가진 작품들이 많다. 그의 최초의 관현악 작품으로 알려진 ≪강천성악≫(降天聲樂)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노래’라는 뜻으로, 안익태 자신의 음반해설을 토대로 한다면 세종대왕이 영감을 받아 아악을 작곡하는 과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플루트가 무참하게 상처 입은 영혼으로 등장하여 죽음을 찬미하고 현세를 저주하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아름다운 천국의 소리를 통해 현세를 초월하게 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이 작품이 안익태의 유럽 체류 시기 작품인 ≪에텐라쿠≫와 동일한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위한 ≪한국 환상곡≫도 서사적 줄거리를 특징으로 한다. 이 곡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개국을 알리는 서주로 시작하여 신비롭고 아름다운 조국 산천과 조국의 위엄을 묘사하는 부분이 나온 후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민속선율들을 통해 흥겹게 그려진다. 2부에서는 일제의 압박과 백성들의 암울함이 묘사되고, 3부에서는 조국의 광복이 묘사된다. 4부는 1953년판 이후에 첨가된 부분으로 6․25전쟁으로 인한 고난과 그것의 극복, 조국의 영광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음악적 완성도 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논개≫도 이러한 서사적 줄거리를 가지는데, 애수에 찬 논개의 비화를 담고 있는 촉석루→평화로운 시절의 논개→적군의 침략→논개의 장렬한 최후→옛 추억으로 남은 논개의 비애라는 줄거리가 곡 전체에 걸쳐 펼쳐진다. 또한 마요르카 섬에 정착한 후 작곡한 ≪마요르카≫와 ≪포르멘토르의 로 피≫도 서사적 줄거리를 갖는 작품들이다.
  교향시 형식을 취하지 않는 관현악 작품으로는 1960년대 이후에 작곡된 ≪애국지사추도곡≫, ≪한국무곡≫ 등이 있다. 1962년에 작곡되어 1963년 5월 제2회 국제음악제 때 초연된 ≪애국지사추도곡≫에는 ‘변형’이란 의미의 ‘메타모르포젠’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국제음악회 프로그램에서는 이 작품을 ≪레퀴엠≫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총 56마디밖에 되지 않는 짧은 곡으로, 작품 구성 방식은 어떤 주제적인 선율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음형을 반복하면서 그 중간 중간에 독립된 선율의 조각들이 간헐적으로 삽입되는 독특한 방식이다. ≪한국무곡≫은 곡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러 가지 춤곡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각 부분을 형성하는 춤곡들은 특정한 선율을 가지기보다는 특정한 리듬형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안익태의 성악곡으로는 그의 첫 출판물인⪡한국의 생활≫모음곡과 1963년 5월에 개최된 제2회 서울 국제음악제에서 알토 윤을병에 의해 초연된 ≪흰 백합화≫가 있다. ⪡한국의 생활≫모음곡 중 악보가 남아있는 <이팔청춘>과 <아리랑고개>를 토대로 살펴보면, 이 작품들은 당시 많이 불리던 한국의 민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짧지만 상당히 완성도 있는 작품들로, 곡의 분위기 자체는 우수에 찬 곡이 아닌 매우 활발하고 명랑한 분위기를 갖는다. ≪흰 백합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두 부분 모두 민요와 관련을 가지며, 첫 번째 부분은 3/4박자의 느린 템포로 애상적인 느낌을 주며, 두 번째 부분은 3/8박자의 경쾌한 리듬으로 첫 부분과 대조된다. 
  실내악곡으로는 첼로 독주곡 ≪흰 백합화≫(1962)와 피아노 독주곡 ≪명상≫(연도 미상) 두 곡만이 남아 있다. 첼로 독주곡 ≪흰 백합화≫는 성악곡 ≪흰 백합화≫의 성악 부분을 첼로가 연주하도록 바꾸어 놓은 작품이고, 피아노 독주곡 ≪명상≫ 역시 같은 성악곡 ≪흰 백합화≫의 피아노 부분을 약간의 변화만을 주어 피아노 독주곡으로 바꾼 작품이어서 두 곡 다 새롭게 창작된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안익태는 한 번 작곡을 한 후, 끊임없이 그것을 수정하고 삭제하고 보충하는 작업을 했다. ≪한국 환상곡≫만을 보아도 남아있는 친필악보들 간에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한국 환상곡≫ 악보 중 가장 오래된 1944년판과 최후의 악보인 ‘안익태 기념 사업회판’ 사이의 차이는 대단히 커서,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마치 두 곡이 서로 다른 곡 같은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강천성악≫도 남아있는 두 개의 친필악보가 서로 다르다. 또한 1962년에 작곡된 ≪논개≫의 악보도 작곡된 지 2년만인 1964년에 다시 사보되면서 여러 부분이 수정된다. 안익태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토록 추고를 거듭하게 된 것은 그가 작곡가이면서 지휘자라는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곡을 직접 지휘하다보면 작품의 흐름상 삭제하고 싶은 부분이나 좀 더 보충하고 싶은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것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음 번 연주 때에는 그 부분을 수정하여 연주하는 습관을 안익태는 갖고 있는 것 같다. 추고를 거듭할수록 그의 작품은 더욱 정제된 모습을 갖추게 되며, 곡 전체로 보면 통일성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안익태는 자신의 작품에 항상 한국적인 요소를 넣으려고 노력한다. 그의 첫 번째 출판물로 기록되어 있는 ⪡한국의 생활≫모음곡에 실린 네 곡이 모두 한국 민요의 편곡이었으며, ≪한국 환상곡≫, ≪강천성악≫, ≪논개≫, ≪한국무곡≫ 등의 작품들에서도 한국적 선율과 리듬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가 한국음악에 정통하고 있었다거나 한국음악적인 요소를 다루는 수법이 매우 뛰어났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가 사용했던 한국적 선율이라는 것은 대부분 신민요를 그대로 차용한 것에 불과하고, 또 한국적 리듬을 사용했다고 해도 한국적 리듬이 주는 분위기만을 따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안익태는 한국음악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안익태는 늘 자신의 음악이 서양음악이 아니고 한국음악을 서양음악으로 번역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왔으며, 한국적 오페라에도 관심을 갖고 ≪춘향전≫을 작곡하기 위해 판소리 ≪춘향전≫에 나오는 창들을 수집하여 채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한국음악을 향한 열정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참고문헌

김경래. 『안익태』(위대한 한국인 15). 서울: 태극문화사, 1972, 1976.
      . 『애국가와 안익태』. 서울: 성광문화사, 1978.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또록: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그리고 애국가』. 서울: 현암사, 1991.
백성현. “세계에 한국 음악혼을 심은 거성(특집: 안익태 음악을 재조명한다. ①생애와 음악세계).” 『객석』, 1997년 11월호.
송병욱. “안익태의 민족 정체성-어느 음악가의 정당한 평가를 위하여.” 『객석』. 2006년 4월호.
      . “안익태의 알려지지 않은 두 작품.” 『객석』. 2006년 3월호.
송봉희.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에 관한 분석 연구』. 서울: 연세대 교육대학원, 1982.
숭실중고등학교 편. “안익태.” 『숭실 인물사』, 서울: 도서출판 아카데미, 1989.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서울: 휴머니스트, 2007.
이남재. “음악으로 담아낸 한민족의 수난사(특집: 안익태 음악을 재조명한다. ③안익태의 작품세계).” 『객석』, 1997년 11월호.
이유선.『한국양악백년사』. 서울: 음악춘추사, 1985.
이장직. “국제무대에서 각광받은 한국음악의 선구자 안익태 그의 삶과 예술.” 『음악동아』, 1991년 10월호. 
전정임. 『안익태』. 서울: 시공사, 1998.
진화영. “한국인 최초 베를린 필 지휘,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 『객석』, 2000년 5월호.
한상우. “안익태.” 『선율, 온 영혼의 불꽃: 음악가의 생애와 작품』, 서울: 청한, 1992.
      . “안익태.” 『한국인의 재발견 1』, 문화체육부 편, 서울: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94.
허영한. “미주 『한인학생회보』를 통해 본 안익태의 미국 유학시절.” 『낭만음악』, 통권 제40호, 1998년 가을호.
      . “자료 기록에 의한 안익태의 유럽활동 재구성.” 『낭만음악』, 통권 제73호, 2006년 겨울호.
      . “철저한 자료수집, 가감 없는 정확한 접근 절실(특집: 안익태 음악을 재조명한다. ②안익태연구의 현황과 당위성).” 『객석』, 1997년 11월호.
安益泰ㆍ八木浩. 『R. シュトラウス』. 東京: 音樂之友社, 1964.
Ahn, Lolita Talavera(장선영 역). 『나의 남편 안익태』. 서울: 신구문화사, 1974.

등록일자: 2010.7.22
[전정임]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