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2.17. Ravenna 근교 Fusignano -1713.1.8. 로마)
설명1
이태리 작곡가, 바이올린 주자, 교사, 파엔차(Faenza)에서 음악의 초보를 익히고, 1666년 (13세)부터 볼로냐에서 4년을 수학하면서 볼로냐 거장들에게서 바이올린 기법을 배웠다. 1671년 이후 로마에 머물면서 교회와 극장에서 바이올린 주자를 담당하였고, 1681년 그의 첫 실내악곡인 12개의 트리오 소나타 op. 1을 작곡하고 그를 후원했던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헌정했다. 1682년 이후 로마의 생 루이 드 프랑스(Saint-Louis-des Francais) 교회의 수석 바이올린주자로 재직했고, 1684년 팜필리(B. Pamphili) 추기경이 설립한 아카데미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면서 악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12개의 실내 소나타 op. 2를 작곡하여 그에게 헌정했다. 1690년부터 사망하기까지 옷토보니(P. Ottoboni) 추기경의 수석 연주자와 악장으로, 그리고 음악편찬의 책임자로 일했다. 1712년 건강이 악화되어 1713년 로마에서 사망
코렐리는 당대 눈에 띄게 활동한 기악작곡가로, 그리고 음악적 표현력과 표정이 풍부한 바이올린주자로 활약했다. 그는 이태리에서 바이올린학교를 세우고, 로마 악파를 확립하였으며 카르보넬리(Carbonelli), 카스트루치(Castrucci), 가스파리니(Gasparini), 제미니아니(Geminiani), 소미스(Somis)와 같은 유수한 제자를 두었다. 17세기 이태리 전통에 고전적인 아름다움, 견고한 구조, 신중한 기교를 잘 보여주는 예는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이다. 코렐리의 트리오 소나타는 17세기말 이태리 실내악의 최고의 업적이며, 독주 소나타와 협주곡은 50년 이상 계속 작곡되었다.
그의 대표적 업적은 콘체르토 그로소의 양식을 완성하고 보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성악곡을 쓰지 않았다.
작품목록:
op. 1(1681) (12) Sonate a tre for 2 Violins, Violone or Archlute, and Organ
op. 2(1685) (11) Sonate da camera a tre for 2 Violins, Violone or Harpsichord (1) Caconne
op. 3(1689) (12) Sonate a tre 2 Violins, Violone or Archlute, and Organ
op. 4(1695) (12) Sonate a tre 2 Violins and Violone
op. 5(1700) (12) Sonate for Violin and Violone or Harpsichord
이 곡은 당시 어렵지 않은 겹음주법과 음형들을 보여주므로서 19세기까지 모든 바이올린주자들의 표준적 모델이 되고 있다.
op. 6(1714년 인쇄) (12) Concerti grossi: 8개는 교회소나타(8번은 성탄절 콘체르토), 4개는 실내 소나타이다
등록일자: 2005-01-25
이화병
설명2
코렐리는 아마도 당대의 다른 음악가들과는 다르게 성악곡과 거의 무관한 유일한 작곡가였다. 그는 바이올리스트로서 작곡에서도 거의 현악과 관련된 것만을 남겼다. 그리고 작품 수도 많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비하면 당대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했다. 그는 “음악의 대가”(Maestro della musica)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명사들만이 묻히는 판테온에 묻혔다.
코렐리는 바이올린을 볼로냐에서 벤베누티(G. Benvenuti)와 브루뇰리(L. Brugnoli)에게서 배웠다. 1671년경 로마로 가서 그 곳의 카프라니카 극장(Teatro Capranica)에서 1679년 일했다. 그 시기 시모넬리(M. Simonelli)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670년대 말 로마에서 종교적 이유로 망명 생활을 하던 스웨덴 왕녀 크리스티나(Christina)의 궁정에서 일했다. 그는 크리스티나에게 자신의 작품 1번을 헌정했다. 1684-90년 그는 팜필리(B. Pamphilj) 추기경 밑에서 일했다. 1690부터 죽기까지 그는 옷토보니(P. Ottoboni) 추기경 밑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악대장으로, 악곡모음 서고의 책임자로 일했다. 옷토보니에게서 일한다는 것은 당시 로마에서 가장 명망이 있는 음악가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1707년 헨델은 로마에서 코렐리와 함께 같이 일했다.
무파트(Georg Muffat, 701)는 코렐리가 콘체르토 그롯소의 본래적 창시자라고 말한다. 코렐리가 1682년 로마에서 콘체르토 그롯소를 가지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것이 토렐리에게 모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코렐리는 48개의 트리오소나타를 작곡했다. 그의 작품 1-4는 각각 12개의 소나타를 포함하고 있다(로마 1681, 1685, 1689, 1694). 교회소나타인 작품 1과 3에서는 베이스를 비올로네(첼로)와 오르간으로, 교회소나타인 작품 2와 4번에서는 비올로네와 쳄발로로 연주하게 되어 있다. 또한 그는 작품 5번 바이올린과 비올로네 또는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Sonate a violino e violone o cimbalo, 로마 1700)를 12곡으로 만들었는데, 이 중 각각 6곡씩 교회소나타와 실내소나타로 작곡했다. 작품 5번의 마지막 작품은 유명한 라 폴리아(La folia) 변주곡이다. 폴리아는 팟사멧쪼 안티코(Passamezzo antico)나 로마네스카(romanesca) 춤곡과 유사한 것인데, 이 춤을 바탕으로 수많은 변주곡이 16 이후 20세기까지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의 소나타들은 17세기의 바이올린 음악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알비노니(op.4, op.6), 비발디(op.2), 제미니아니(op.1, op.4), 베라치니(op1-2), 타르티니(op.1-2), 로카텔리(op.6) 등의 음악에서 그의 소나타는 모델적 역할을 했다.
코렐리의 작품 6번은 12개의 콘체르토 그롯소로 되어 있다(암스텔담 1714). 콘체르토 그롯소는 그에 의해 창시되었지만, 거의 동시에 다른 곳에서도 이 장르의 음악이 많이 작곡되었다. 코렐리는 당시 즉흥연주에 많이 의존하던 관행을 버리고 일정한 규격을 이 장르에 부여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작품 6번이다. 그의 콘체르토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4성부와 독주자 그룹을 위한 3성부로 되어 있다. 당시 코렐리의 콘체르토를 위해 150명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콘체르토 1-8번은 교회콘체르토이다. 그중 8번째 곡은 "성탄절을 위한 것"(fatto per la notte de Natale)이라는 글이 붙어 있는데, 이 곡의 끝에는 목가(牧歌, pastorale)가 온다. 콘체르토 9-12번은 여러 가지 춤곡을 묶은 것이다.
그는 작품번호가 없는 곡들도 남겼다:
루리어(Giovanni Lorenzo Lulier)의 오라토리오 『산타 베아트리체 데스테』(Santa Beatrice d'Este, 1689)의 서곡으로 쓴 콘체르토 그롯소
사중주 콘체르토 2곡(Concerti a quattro, 암스텔담 1699)
트럼펫과 현악을 위한 사중주 소나타
6개의 삼중주 소나타(Sonate a tre, 암스텔담 1714)
바이올린 독주와 비올로네를 위한 소나타
사중주 푸가(Fuga a quattro)
전집:
Les oeuvres de Arcangelo Corelli, op. 1-6, 전3권, 편찬: FR. Chrysander, 런던 1888-91,
Historisch-kritische Gesamtausgabe der Werke Arcanglo Corellis, 편찬: Musikwissenschaftkiches Institut der Universität Basel unter der Leitung von H. OESCH, Köln 1976ff.
참고문헌:
Brockhaus-Riemann Musiklexikon, Mainz 1979.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Corelli, Arcangelo, 또는 Digitale Bibliothek Band 60: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S. 14838, Bärenreiter-Verlag 1986.
Arno Feil: Metzler Musikchronik, Stuttgart 1993.
등록일자: 2005-10-11
홍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