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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니제티 [Donizetti, Gaet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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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니제티(Donizetti, Gaetano. 1797  Bergamo- 1848 Berg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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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의 작곡가. 다른 이태리의 작곡가들처럼 주로 오페라 작곡가였다. 70개의 오페라를 썼으며, 교회음악, 로만스, 아리아, 실내악, 피아노 음악을 남겼다.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음악적 재능이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어 10세 때부터 베르가모의 마이르(Simon  Mayr) 음악학교에서 교장이자 작곡가였던 마이르에게 성악, 쳄발로, 비올라를 배웠다(1806-15). 그리고 볼로냐에서 마테이 신부(Padre Mattei)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1815-17). 그는 처음에 심포니와  현악사중주를 작곡했으며, 교회음악과 오페라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의 음악은 선율의 아름다움을 풍부한 화성으로 옷 입히는 방식의 음악이었다. 그가 쓴 초기 오페라 중에는 1816년에 작곡한 『피그말리옹』(Pygmalion, 초연: 1959 베르가모)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다작의 결과로 생산된 그의 작품들은 많은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내심 벨리니와 롯시니처럼 많이 작곡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심포니 하나를 1시간 15분만에 썼노라고 말할 정도로 빨리 작곡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그는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827년 도니젯티는 당시 막강한 흥행사였던 바르바야( Barbaja)와 3년간 12개의 오페라를 쓴다는 계약을 맺었고, 실제로 작품들을 써냈다. 이 계약은 그가 나폴리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특히 희극적 오페라에서 상당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1832년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을 써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오페라는 스크리베(E. Scribe, 원작: Felice Romani)의 대본을 작곡한 것인데, 오늘날까지도 오페라 극장의 지속적 레퍼토리로 남아 있다. 짧은 노래와 간간히 나타나는 합창으로 이어지는 이 오페라는 격정적인 줄거리 전개와 평화롭고 낭만적인 세계를 교차하며 진행된다.   
그는 1835년 람메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를 작곡하는데, 이 오페라는 전형적인 성악 오페라로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들이 유명하다(예:「광란의 아리아)」). 18세기의 스코트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오페라는 낭만적 줄거리보다는 성악가들을 위한 아리아들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다. 
1834년 도니젯티는 나폴리 음악학교의 대위법 교수가 되었다. 그는 오페라 『폴리우토』(Poliuto)가 검열 당하여 원래 작곡한대로 공연되지 못하자 빠리로 이주했다. 빠리에서 그는 『폴리우토』의 프랑스어본인 『순교자들』(Les martyrs)을 공연했다. 그리고 그의 걸작 오페라 『군대의 딸』(la Figlia del Regimento 1840)을 작곡하여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이 오페라와 『총애받는 여인』(La Favorita)은 처음에 청중을 사로잡지 못했다. 하지만 점차 이 오페라들은 호응을 얻기 시작하여 명실상부한 이태리 오페라의 간판 작곡가로 떠올랐다. 그는 로마, 밀라노, 비엔나로 이주했는데, 오페라 『린다 디 샤무니』(Linda di Chamounix, 1842)는 비엔나에서 작곡되었다. 그는 1842 비엔나 황제로부터 황제의 궁정작곡가(Kaiserlicher  Hofcompositeur)라는 칭호를 받았다. 1843년 그는 빠리에서 자신이 대본을 손수 쓴 희가극 『돈 파스쿠알레』(Don Pasquale)를 작곡했다. 이 걸작 오페라는 오파라 부파의 전통에 따라 여러 가지 역할을 분배한 것이다. 흔히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비교되는 이 오페라는 10일만에 작곡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오페라를 쓴 직후 그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는 1847년 이후 고향 베르가모에서 투병하면서 보냈다. 

도니젯티는 51년을 살았으나, 그가 이태리 오페라에 영향을 끼친 것은 1930년의 『안나 볼레나』(Anna Bolena 1830) 이후부터였다. 이 오페라가 벨리니의 『몽유병 여인』(La Sonnambula)과 밀라노의 오페라 극장에서 거의 같은 명성을 누림으로써 그는 하루 아침에 전 이태리에서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1835년 그의 오페라『마린 팔리에로』(Marin Faliero)가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들』(I Puritani)에 눌리자 그는 『람메무어의 루치아』를 작곡했다. 그와 롯시니의 계승자라는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리던 벨리니가 1835년 죽은 이후에는 이태리 오페라계의 대표자로 군림했으나, 그 기간은 짧았다. 1845년 그 자신이 병약해졌고, 베르디라는 새로운 별이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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