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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반츠 [Quantz, Johann Joac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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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 1697.1.30. 괴팅겐 근교 Oberscheden -1773.7. 12. 포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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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C. Ph. E. Bach), 칼 하인리히 그라운(C. H. Graun), 요한 고트프리드 그라운(J. G. Graun), 프란츠 벤다(Franz Benda)와 함께 베를린 악파의 일원으로 평가되는 작곡가. 이들 베를린 악파는 음악에서 갈랑트(우아한) 양식을 표방했다.  

크반크는 1714년 이후 시립악대의 일원으로 라데부르크(Radeberg)와 피르나(Pirna)에서 일했다. 1716년 드레스덴의 시립악대원이었던 하이네(Gottfried Heyne)의 악대에 입단했다. 1717년 비엔나로 가서 ㅤㅉㅔㄹ렝카(J. D. Zelenka)와 푹스(J. J. Fux)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1718년 드레스덴과 바르샤바의 왕립 폴란드 악대에서 오보이스트로 일했고, 뷔파르댕(Pierre-Gabriel Buffardin)에게 플루트를 배운 후 플루트 주자로 일했다. 1724-27년 그는 이태리, 빠리, 런던으로 공부를 위해 여행했는데, 로마에서는 가스파리니(Fr. Gasparini)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1727년 그는 드레스덴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1728년 그는 프로이쎈의 세자인 프리드리히 2세 왕자 앞에서 연주했고, 왕자는 그에게 배우기 위해 매년 자신을 두 번씩 방문하여 음악을 가르칠 것을 청하여 이를 수락하였다. 그 후 그는 프리드리히 2세를 가르쳤다. 1740년에 왕이 된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이듬해 그를 궁정음악가와 궁정작곡가에 임명했다

크반츠는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전에 있을 때 300여개에 달하는 비발디식의 콘체르토와 플루트를 위한 200여개의 실내악을 작곡했다. 그의 플루트 콘체르토는 악장의 길이, 테마, 구조가 비발디 그대로였다. 그는 플루트 악기에 제2의 덮개를 달아 악기의 기능도 개선했다. 그가 드레스덴에 있을 때는 프랑스 서곡풍의 곡을 더 많이 썼었다. 이는 그가 프로이쎈의 음악가가 된 후로는 베를린 지역의 취향에 적응했다는 것을 뜻한다

음악학자들은 프리드리히 2세의 취향이 변하지 않은 것이 크반츠의 작곡경향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부드럽고 매끄럽고 경쾌한 성향의 음악을 좋아했고, 극적이거나 서글픈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크반츠의 음악은 특히 트리오소나타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쓴 것보다는 더 많이 가공되어 있고, 엄격한 양식에 더 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우아한양식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방향에서 그는 베를린의 주요한 기악 작곡가로 자리 잡았다. 그는 플루트 연주자로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버니(Burney)1773년 그의 음악이 이미 낡고 진부하다는 말하고 플루트 연주도 썩 좋지 않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의 책가로플루트 연주법(Versuch einer Anweisung die Flöte traversiére zu spielen, 베를린 1752)19세기까지 영향을 준 유명한 플루트 교육서였다. 이 책은 단순히 연주방법에 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연주실제, 취향교육, 감정이론, 양식론까지도 포함했다. 이 책은 많은 다른 음악교육서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크반츠의 음악미학은 우아한 양식에 부합한다. 그 내용은 크라우제(Chr. G. Krause)의 책 음악적 시에 관하여(Von der musikalischen Poesie. 1752) 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는 크라우제처럼 대위법적 음악을 폐해야한다는 하지는 않았고, 그것을 큰 편성과 큰 장소(교회)에 국한하여 연주할 것을 말했다. 그는 감정”(Affekt)표현”(Ausdruck)을 구분하였는데, 이는 각각 우아한 양식”(galanter Stil)가공된 음악”(gearbeitete Musik)에 맞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우아한 양식은 분명하고, 단순하고, 우아하고, 쉽게 마음을 사로잡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 음악은 리듬, 화성, 멜로디 장식 등이 바로크적 복잡성을 배제하고  단순화 되기를 원한다. 여기에는 2, 3성부의 파악되기 쉬운 성부작성이 많으며, 단순한 호모포니 구조이다. 반면 가공된 음악은 대위법적인 것을 의미했다. 크반츠는 <표현><감정>에 맞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테죤처럼 음악을 수사학에 비교하고 연주에서 말과 같은 명확성과 표현이 있어야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음악에 들어있는 생각을 드러내야 된다는 것이었다. 알레그로는 활달하게, 아다지오는 섬세하게 등의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음악에 담겨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에 합당한 연주, 작곡자의 의도 등도 고려해야 할 것을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음악적인 것은 거부하였다. 그는 작곡에서는 감정변화를 반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플루트를 아주 잘 연주할 수 있으려면, 악곡론과 계속저음을 배울 것을 권하면서, 성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플루트 주자는 연주를 배우기 전에 노래를 배워야 하고, 그것이 안 되면 플루트와 노래를 동시에 배울 것을 주장했다. 성악을 배움으로써 악기를 더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아다지오를 장식하는 일에 성악적 장식기법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태리 음악이 점차로 기악곡화하는 변화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성악가와 기악가의 취향이 뚜렷하게 갈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다. 이태리 민족이 음악적 취향이 성악과 기악으로 나뉘어 통일된 취향을 보이지 못한 것은 연주에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취향분열이 음악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성악 위주의 사고는 단순한 노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성악이란 예술적 기교가 높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혼합취향>(vermischter Geschmack)을 바람직한 독일음악의 목표로 보았다. 혼합취향이란 독일이태리프랑스의 음악을 혼합시킨 형태를 뜻한다. “여러 나라 사람들의 음악적 취향으로부터 적절한 판단을 하여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혼합취향일 것이다.” “독일 사람이 이태리와 프랑스 사람들의 취향을 모방하듯이, 그들도 독일 사람들의 취향을 모방한다면, 이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면, 점차적으로 음악에서 보편적이고 좋은 취향이 자리잡을 것이다.”   

 

참고문헌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Quantz, Johann Joachim(MGG Bd. 10, S. 1797-1798) (c) Bärenreiter-Verlag 1986] 또는 [Digitale Bibliothek Band 60: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S. 61169] 

Brockhaus-Riemann Musiklexikon, Mainz 1979. 

홍정수, 오희숙: 음악미학, 음악세계, 1999.

 

 

등록일자: 2005-10-06

홍정수

 

 

<font color="#fefe00" size="4"><b>작곡()사전</b></font><font color="#fefe00" size="2"><b> 한독음악학회</b></font>

 

 

크반츠, 요한 요아힘(Quantz, Johann Joachim, 1697-1773)

 

- 169726일 괴팅엔 근처의 오버쉐덴(Oberscheden)에서 출생.

- 편자를 제작하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대장간 일을 배움.

- 부모의 사망(어머니: 1702, 아버지: 1707) 후 메르제부르크(Merseburg)에서 시() 음악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던 삼촌 유스투스 크반츠(J. Quantz)로부터 교육을 받음

- 1708년 삼촌의 사망 후에는 그 후임자였던 플라이쉬하크(J. A. Fleischhack)로부터 교육을 받음. 5년에 걸친 이 기간 동안 크반츠는 바이올린, 오보에, 트럼펫은 물론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루게 되었고, 오르가니스트였던 키제베터(J. F. Kiesewetter)에게 건반악기 연주법을 배움.

- 1714년 라데베르크(Radeberg)와 피르나(Pirna)에서 비발디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처음 접함. 하이네(G. Heyne)를 알게 됨.

- 1716년 하이네의 도움으로 드레스덴(Dresden)으로 가서 시() 음악가로 고용됨

- 17173개월간의 여행 중 비엔나에서 첼렌카(Zelenka)에게 대위법을 배움. 새로 조직된 폴란드 군악대의 오보에 연주자로 고용되면서 여러 차례 바르샤바를 방문함

- 1718년 시의 음악가에서 오케스트라 연주자로 승격되면서 뷔파르댕(P. G. Buffardin)에게 4개월 동안 플루트 연주를 배우고 동시에 작곡 시작. 피젠델(J. G. Pisendel)에게 음악연주와 양식에 대해서도 배움.

- 1724-1726년 수학을 목적으로 여행. 로마에서 가스파리니(F. Gasparini)에게 대위법을  배웠고, 나폴리에서는 스카를라티(A. Scarlatti)와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Farinelli)를 만남. 이후 베네치아에서 비발디의 연주를 체험함.

- 1726년에는 파리를, 1727년에는 런던과 네덜란드를 여행. 이 여행은 크반츠에게 여러 지역의 모든 음악을 접하고 흡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후 플루트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얻는데 발판이 됨.

- 1728년 드레스덴으로 돌아와 군악대의 플루트 연주자로 고용되었고, 당시 프로이센의 황태자였던 프리드리히(Friedrich)를 만나면서 몇 달 후 그의 플루트 가정교사가 됨. 이후 규칙적으로 1년에 두 차례 베를린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수업함

- 1741년 프리드리히 2세가 프로이센의 왕으로 즉위(1740)하면서, 프로이센의 실내악작곡가 겸 왕의 음악 교사로 베를린에서 활동. 프리드리히 2세에게 플루트 연주와 작곡을 가르쳤고 제자를 위해 협주곡과 소나타를 작곡하면서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음.  

- 1752년 저서 플루트 연주법에 대한 시론(Versuch einer Anweisung, die Flöte traversiére zu spielen, 1752)을 출판함.   

- 177376세의 나이로 포츠담(Potsdam)에서 사망.

 

  크반츠는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플루트 연주자이며 플루트 제작자, 그리고 작곡가였다. 따라서 크반츠의 작품 가운데 대부분은 플루트를 위한 것이다. 그는 200곡이 넘는 플루트 독주소나타와 300여 곡의 플루트협주곡, 45곡의 트리오소나타, 9곡의 호른협주곡을 작곡했다. 이외에도 플루트를 위한 2중주, 3중주, 4중주가 있으며, 약간의 세속노래와 교회음악을 남겼다. 이렇게 플루트에 편중된 그의 활동과 작품은 플루트 음악의 초기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초기 플루트 음악은 플루트라는 악기를 위해 작곡된 최초의 음악문헌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또한 그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플루트를 독주악기로 대중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크반츠의 플루트 작품들은 장르, 양식, 그리고 악기 편성에 있어서, 작곡가로서 경력을 쌓고 발전해 나가는 동안 처해 있던 상황과 여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정확한 시점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크게 드레스덴 시기(1728-1740)와 베를린 시기(1741-1773)의 작품으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크반츠는 드레스덴 궁정에 고용되어 있을 때 일군의 트리오소나타와 2개의 독주악기를 위한 협주곡들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베를린에서 작곡된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악기편성을 가지며, 양식적으로도 작곡가 자신이 유럽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쌓은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종합하려는 발전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드레스덴에서 작곡된 2대의 플루트, 현악기와 계속저음을 위한 협주곡 G장조(QV 6:5)는 프랑스 서곡풍의 도입부를 가진 제1악장(푸가)과 느리고 우울한 성격의 제2악장, 그리고 비발디 풍의 밝고 명랑한 알레그로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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