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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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1. 의미
"종묘"는 조선조 임금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제례악"은 제사음악을 말한다. 그러니까 "종묘제례악"이라 함은 조선조 임금들을 위해 종묘에서 연주되는 제사 음악이다. 하지만 종묘에서 제례가 거행되지 않고 영녕전(永寧殿)에서 드리는 제사를 위해서도 종묘제례악을 사용하였는데, 이 곳은 태조 이성계의 선조 4대 그리고 정당성이 없었던 왕들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종묘제례악은 크게 보아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라는 두 연곡 형식의 음악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2.역사와 기능
지금 사용되는 종묘제례악의 음악은 세종조에 만들어졌지만 당시에는 제례악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회례악(會禮樂), 즉 대신들의 모임을 위해 사용된 것이다. 세종조의 제례악은 중국식 아악이었다. 회례악인 정대업과 보태평은 당시 조선에 전래된 음악을 바탕으로 했고, 태조의 무공(武功)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세종 28년, 1446년).
“우리 태조께서는 뛰어난 무용(武勇)으로 천운(天運)에 응하여 나라를 세웠으며, 태종께서는 이를 계승하여 문치(文治)로서 태평을 이루어, 지금은 정치가 안정되고 공업이 이루어졌으며, 예(禮)가 갖추어지고 악(樂)이 조화되었습니다... 태조의 무공(武功)을 노래하여 무무(武舞)로 만들고, 태종의 문덕(文德)과 지금의 성덕(盛德)을 노래하여 문무(文舞)로 만든다면, 거의 여러 사람의 기대에 합할 것입니다.”(세종 14년 9월 1일)
이렇듯이 이 음악은 원래 무용과 결합된 것이다. 무용은 열을 지어서 추어지기 때문에 "일무"(佾舞)라 이름한다("일"은 열'列'을 뜻함). 보태평에서는 약(약, 구멍 셋이 뚫린 대나무 악기)과 적(翟, 긴 막대에 꿩 깃털을 장식한 것)을 손에 쥐고, 정대업에서는 나무창과 나무칼을 들고 춤춘다. 음악은 왕들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의 가사를 가진 성악곡이었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의식(儀式)적으로 음악적으로 확인하는 장치였다. 왕조의 정통성에 시달리던 새로운 나라 조선은 초기에 새 왕조를 위한 음악의 확립을 위해 고심했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문묘제례악처럼 중국식 아악을 써야한다는 주장이 세종조까지 상당히 있었으나 결국 향악을 토대로 마련되었다. 향악을 쓴 것은 -시용향악보에 내려오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간주되는 음악과 같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증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리듬의 측면에서는 당시의 고취악(鼓吹樂)을 취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까 조선조의 궁중음악은 새로 작곡되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이미 있었던 음악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노래말은 새로운 왕조를 칭송하는 한문 정형시로 되어 있어서 자유스러운 글자수의 한글 가사와는 현격하게 달라진다. 조선조의 다른 음악과 마찬가지로 보태평과 정대업 역시 세종조 시대에 제 모습을 갖추지만 세종조 시대의 음악은 상당 정도로 실험적 성격이 많아서 아직 정착된 음악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음악은 지나치게 방대하여 번거롭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조 때에 이르러 더 간략하게 다듬어지고 제사의 순서에 맞는 가사를 만들어서 비로소 실제적인 음악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세조9년, 1464년. 가사의 재정리자: 최항'崔恒'). 이는 세종 대의 보태평과 정대업이 만들어진지 불과 18년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그 다음 해인 세조 10년부터 비로소 보태평, 정대업이 종묘에서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즉 이 두 음악은 비로소 종묘제례악이 된 것이다. 세종 대의 보태평은 15곡, 정대업 11곡이었으나 세조 때에는 이를 모두 11곡으로 줄이고, 곡과 가사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였으며, 제사의 음식을 드리는 순서를 위해 진찬악(進饌樂)을 더 첨가했다.
종묘제례악이 세조 때에 변한 것 중에는 음악적으로 매우 예민한 문제도 있다. 즉 조성의 변화가 그것이다. 보태평은 임종궁 평조(세종)인데 황종궁 평조(세조)가 되고, 정대업은 남려궁 계면조(세종)인데 비하여 황종궁 계면조(세조)가 되었다. 이는 세조 때에 편종, 편경과 같은 아악기가 함께 편성되면서 황종음정의 불일치가 있게 된다. 즉 아악기가 황종을 연주할 때에 향악기가 무역을 연주하게 된다.
종묘제례악은 세조 때의 것이 그 이후 시대에서 기준적인 역할을 하였다. 종묘제례악은 선조 때 한 곡이 첨가되기는 하였지만, 기타의 것들은 세조 시대의 것들과 똑같았다. 이는 악보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①세종실록 악보(세종 즉위연대: 1419-1450), ②세조실록 악보(세조 즉위연대: 1455-1468), ③대악후보(大樂後譜, 1759), ④시용무보(時用舞譜, 영조시대 1724-1776의 것으로 간주되나 확실치 않다), ⑤속악원보(俗樂原譜, 重修日: 1892). ⑥김기수 편찬의 오선 악보로 기록된 보태평과 정대업 ↗한국음악2(전통음악연구회, 1981).
세조악보의 {보태평}은 희문(熙文), 기명(基命), 귀인(歸仁), 형가(亨嘉), 집녕(輯寧), 융화(隆化), 현미(顯美), 용광(龍光), 정명(貞明), , 대유(大猷), 역성(繹成) 11곡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후에, 즉 대악후보 이후에는 세조실록 악보에 없었던 중광(重光)이 정명 다음에 들어온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세운 공("빛을 다시 보게함": 重光)을 기리기 위해 인조 4년(1626)에 삽입되었는데, 가사만 다를 뿐 음악은 역성의 것을 가져다 썼다. 이렇게 한 곡이 더 첨가됨으로써 12곡이 되자, 원래의 11곡을 맞추기 위해 원래 서로 다른 곡이었던 용광과 정명을 하나로 만들었다.
세조악보의 정대업은 소무(昭武), 독경(篤慶), 탁정(濯征), 선위(宣威), 신정(神定), 분웅(奮雄), 순응(順應), 총유(寵綏), 정세(靖世), 혁정(赫整), 영관(永觀) 11곡으로 되어 있고 그 이후로 변화가 없다.
종묘제례악은 제사의 음악적 부분으로 착안되었기 때문에 단지 음악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까다로운 제사적 순서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조상 신을 불러 술을 따르고, 음식을 바치는 제기(祭器)를 옮기고, 축문을 읽고 태우는 것 등의 순서와 음악이 함께 간다. 그러니까 음악이 자체로 감상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행사의 일부였다. 또한 제사를 위한 악대의 배열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하나는 등가(登歌)라 하여 댓돌 위에 배열된 악대이고, 다른 하나는 헌가(軒架)라 하여 댓돌 아래에 위치한 악대이다.
세조 시절의 헌가는 노래, 박, 도고, 노고, 편종, 편경, 방향, 월금, 가야금, 당비파, 향비파, 현금, 장고, 피리, 태평소, 화, 우, 생, 퉁소, 당적, 대금, 중금, 소금, 교방고로 되어 있고, 등가는 노래, 박, 특경, 특종, 축, 아쟁, 대쟁, 어, 편경, 편종, 방향, 현금, 가야금, 화, 생, 절고, 당비파, 향비파, 절고, 월금, 장고, 훈, 당적, 대금, 해금, 피리, 퉁소, 대금, 당적, 호(호)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 거론된 악기 중 상당수가 현재에는 연주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세조 시대의 대편성은 오늘날 작은 규모의 편성으로 축소되어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종묘제례악은 속악원보 이후부터 원래의 리듬과 매우 달라졌다. 그 이전의 악보들은 대강 중심의 악보들이었으나 속악원보부터는 정간 중심의 악보로서 리듬 기록이 그 이전 것과는 현저히 다르다. 그런가 하면 현재 실행되고 있는 음악과도 편차를 보인다.
종묘제례악은 오늘날 왕조의 음악이 아니라, 중요무형문화재로 살아남아 있다. 이것은 세조 때에 제례악으로 도입된 이후 1946년까지는 춘하추동 사계절에 행하는 종묘의 제사에서 연주되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때에는 가사가 없이 기악으로만 연주되었다. 언제부터 노래가 다시 불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현재에는 1946년에 중단되었다가, 1971년부터 해마다 5월 첫 일요일에 행하는 종묘대제(宗廟大祭)에서 음악, 가사, 일무가 행해지고 있다.
3.현행의 종묘제례악
현행의 종묘제례악에서는 박자 구조를 정확하게 느낄 수 없다. 김기수 편찬의 오선 악보는 "절주"가 "무정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애매한 박의 입장을 표현하는 말로 추측된다. 김기수 편찬 악보는 보태평과 정대업 첫 곡에 각각 사분음표 하나가 메트로놈 단위 50을 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음악은 조금 느린 편에 속한다. 그리고 마디를 나눌 때에 수시로 변하는 박자기호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냥 구분을 위한 것일뿐 실제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악보에 적힌 것과 귀로 듣는 것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그 이유는 '박'을 늘려 연주하는 것이 상당히 유연하기 때문이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날카로운 박의 소리와 둔탁한 절고(또는 역시 둔탁한 소리의 축도 함께)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보태평 음악은 원래의 멜로디 음들을 철제 몸울림악기(방향, 편경, 편종)가 연주하고, 같은 음을 해금, 아쟁, 대금, 당피리가 연주한다. 철제 몸울림악기는 소리를 길게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긴 음을 여러번 끊어서 낸다. 대금과 당피리는 선율음에 시김새를 첨가한다. 당적은 대금과 당피리보다 한 옥타브 높은 음으로 같은 선율을 더 많은 시김새를 사용하여 소리낸다. 가장 많은 시김새를 갖는 것은 성악이다. 노래는 선율이 사용하는 오음음계의 틀 내에서 시김새를 사용하면서 마치 악기들의 소리 위에 떠서 더 분주하게 음계를 오르내린다. 성악은 떨기도 하며 높은 음에 올라가면 목소리가 뒤집히기도 한다. 그리고 한문 가사는 해체되고 모음이 첨가되는 방식으로 발음되어 원가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 예를 들어 "歸附日衆"이라는 말은 "구이- 부--- 이 ㄹ ?----- 주---ㅇ" 식으로 발음된다. 성악, 관악기, 현악기의 흐름 사이사이에 박, 절고, 장고 소리가 섞인다. 정대업 음악은 태평소와 징이 더 첨가되어 보태평에 비해 더 요란한 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