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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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성(韓國和聲)
나운영은 자신이 한국음악 특유의 화성을 모색하여 체계화시킨 것을 "한국화성"이라 이름한다(나운영: 현대 화성론. 세광음악출판사 1982). 나운영은 "한국"이라는 이름이 붙을만한 화성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가 한국의 전통음악에 서양식 기능화성을 붙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음악에는 붙이는 화성은 한국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화성학은 선율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선율 자체에서 화성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183쪽)이라고 말한다. 그는 전통음악의 선율에 나오는 장식음까지 화성을 위한 자료로 삼는다. 하지만 기본적 출발은 단순한 음계에서 출발한다. 그가 한국화성을 위해 사용한 음계는 모두 8개이다.
(1)궁조 오음음계: do re mi sol la
(2)평조 오음음계: sol la do re mi
(3)계면조 오음음계: la do re mi sol
(4)궁조 칠음음계: do re mi fa sol la si
(5)평조 칠음음계: sol la si do re mi fa
(6)계면조 칠음음계: la si do re mi fa sol
(7)궁조 사음음계: do re mi sol
(8)평조 사음음계: sol do re mi
여기에서 보는 음계는 기본적으로 3개(오음음계, 칠음음계, 사음음계)이지만, 중심음의 위치에 따라 다시 3개(궁조, 평조, 계면조)로 나뉜다. 사음음계에 계면조가 없는 것은 La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음계의 성격은 화성의 성격을 미리 규정 짓는다. 왜냐하면 제1성부(소프라노) 이외의 성부들도 모두 음계적으로 미리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운영은 위에 제시된 음계의 종류를 "병행법(竝行法)"과 "투영법(投影法)"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여 화성을 붙인다. 병행법은 우선 제1성부(소프라노)와 제2성부(앨토) 선율 사이에서 발생한다. 즉 이 화성체계의 출발점이 되는 제1성부(소프라노) 선율과 거기에 종속적인 제2성부(앨토)이다. 제2성부는 제1성부와 병행관계를 이루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데, 미리 주어진 음계의 순서에 따라 움직인다. 궁조 오음음계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I II III IV V VI
소프라노: c'(do) d'(re) e'(mi) g'(sol) a'(la) c''(do)
얠토 : g(sol) a(la) c'(do) d'(re) e'(mi) g'(sol)
테너 : g(sol) e(mi) d(re) C(do) A'(la) G'(sol)
베이스 : C(do) A'(la) G'(sol) E'(mi) D'(re) C'(do)
오음음계의 음악에서는 제1성부와 제2성부의 음정관계가 4도 간격이 대부분이고, 단 한번 3도 간격을 형성하는 경우(III)도 있다. 그러나 제3(테너)과 제4성부(베이스)에서 위의 두 성부들이 "투영"되는데, 이는 위의 두 성부들이 거울에 비췬 것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함을 뜻한다. 이런 방식은 대위법에서 보는 테마 진행방향을 응용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테마 진행방식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나운영은 위의 두 상성부의 진행방식을 "병행법"이라고 말하고, 아래 두성부의 진행방식을 "투영법"이라 말한다. 병행성부들(두 상성부들)과 두 투영성부들(하성부들)의 구성음 관계는 반대 방향으로 서로 일치한다. 즉, 두 상성부를 I에서부터 VI까지 읽는 것과 두 하성부를 VI에서부터 I까지 거꾸로 읽으면 그 구성음들이 순차적으로 일치한다. 병행과 투영으로 이루어진 그 화성적 연결은 음계의 순서에 따라 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화현들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I(제3음이 없는 5도음정),II(5도음정 + 제2음, 또는 "새야화현"), III(장3화음 + 제2음), IV(장3화음 +제2음), V(5도음정 + 제2음, 또는 "새야화현"), VI(제3음이 없는 5도음정)이 그것이다. 화현들은 I과 VI이, II와 V가, III과 IV가 서로 같은 성격의 것이다. 이에 따르면 나운영이 평소에 지향하는 장단조 화성의 극복이 이루어진다. 삼화음적 요소가 나오는 것은 음계를 구성한 음들이 만들어낸 우연일 뿐이고, 삼화음 자체가 아무 부가음 없이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마도 가장 큰 문제는 연속적인 III과 IV의 화현이 같은 성격의 것이라서 선율이 변할 때에 그 음향적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sol은 항상 같은 화현 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즉 음계가 달라질 때에는 그 아래 오는 화현도 자연적으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오음음계에서는 5 음의 순서에 따라, 칠음음계에서는 7 음의 순서에 따라, 사음음계에서는 4 음의 순서에 따라 화현의 결합이 재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궁조 칠음음계에서는 앨토가 무조건적으로 소프라노의 4도 밑에서 병행하며 위로 올라가고, 테너는 5도 밑에서 반대 방향으로 그리고 베이스는 8도 밑에서 테너와 같은 방향으로 병행하며 아래로 내려간다. 따라서 그 화현들은 시작과 끝에서만 같고 다른 부분에서는 다르다. 그러니까 화현의 구성에서는 음계의 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한국화성 체계에 의해 작곡된 곡들의 진행은 제1성부 선율의 움직임에 의해 그 화성이 좌우된다. 즉 그 곡들은 만화경에 비추인 물체처럼 상성부 선율이 높이 올라가면 하성부도 그만큼 낮게 내려가고, 상성부 선율이 낮아지면 하성부들은 그만큼 높아진다. 따라서 선율이 상승할 때마다 병행성부들과 투영성부들의 음역간격이 넓어져서, 양 성부그룹들 사이에 사용되지 않는 음역이 남게 된다. 따라서 그의 화성학에는 >좁은 진행<이나 >넓은 진행<과 같은 개념도 없다. 선율 음이 낮아지면 좁은 진행, 올라가면 넓은 진행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나운영의 한국화성은 병행과 투영의 원리가 원칙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같이 묶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원리는 실제의 음악에서도 분리되지 않은 경우들이 대부분이지만, 구체적 상황에서는 다른 방식의 적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병행법만이 사용되는 일이 실제의 음악에서 자주 나타난다. 병행법과 투영법은 위에 소개된 일정한 음계들을 전제로 하여 구성되는데, 각 음계들에는 각기 다른 병행과 투영형태가 규정되어 있으며, 일정한 음들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미리 규정하고 있다. 즉 re와 la음은 내림표가 붙여져 화현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그 두 음에 내림표가 붙어 일률적으로 내려진 경우는 조의 명칭 앞에 음(陰)이라는 말이 붙게 되고(예:음계면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양(陽)이라는 말이 붙게 된다(예:양계면조). 나운영의 1100편을 넘는 수많은 찬송가들은 그 상당부분이 이러한 한국화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모두 이러한 원리에만 충실하지는 않고, 보편적인 서양화성을 혼합하는 경우들도 없지 않다. 병행과 투영이 포기되고 일반적 화성이 사용되는 일은 프레이즈의 시작과 끝에서 많다. 이 보편적 화성들은 한국화성과 대조를 이룬다.
나운영은 자신의 한국 화성에 독자적인 기호를 붙여서 이렇게 작곡된 음악을 분석하며 학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한국화성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그의 영향을 볼 수 있는 작곡가들이 없지 않다. 그의 화성학은 소리의 울림이 더 좋은가 나쁜가를 따지는 전통적 서양화성학에 비하면 대단히 현대적인 성격의 것이지만, 20세기의 무조음악에 비해서는 그 울림이 현저하게 부드럽다. 이는 그의 시각이 역사적인 곳에 있지 않고, -동서양을 나누어 보는- 지역적인 곳에 있는 것을 반증한다. 동서양 중에서도 그는 서양음악에 대립된 한국음악을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