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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하인리히 [Isaac, Hein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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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Heinrich Isaac, 1450 네덜란드 출생? ­- 1517  피렌체)


[이삭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Heinrich Isaac 또는 Henricus Ysaac, H. Ysac, H. Yzac, H. Yzach 그 밖에 16세기 독일어권 간행물에 Henricus Isaac 또는 Henricus Isac로 기록되어졌고, 후에 독일어권 음악학 문헌에 Heinrich Isaac로 사용되었다,] 

이삭의 초년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의 서간을 근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1474년 이전 이삭은 피렌체 산 지오반니 성당에 임용된 스콰르치아루피(Squarcialupi: 1416-1480)에게 오르간  수업을 받았다. 그 후 1480년경 이삭을 신임한 피렌체의 로렌쪼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귀족은 이삭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삭은  로렌쪼 저택에서 일을 했고, 그의 아들들에게도 음악을 가르쳤다. 또한 이삭은 그의 스승 스콰르치아루피가 죽은 후, 로렌쪼의 후원으로 먼저 산 지오반니 성당에서, 다음으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1494년 메디치가의 몰락으로 이삭은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몇 해 동안 머물다가, 1496년  피렌체 출신 정육업자였던  피에뜨로 베로(Pietro Bello)의 딸 바르토로메아(Bartolomea)와 결혼을 하고, 독일의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의 부름을 받고 1497년부터1514년까지 비엔나와 인스부르크에서 궁중작곡가로 일했다. 16세기까지 그럴듯한 작곡가를 갖고 있지 않았던 독일은 외국인었던 그의 활약으로 음악이 상당한 정도로 활성화 되었다. 또한 많은 독일 노래와 교회음악도 그에 의해 나타났다.그는 이태리와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츠로 여행했으며, 여행 중 작센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와 친분도 맺고, 그 관계는 1497년부터 1500년까지 유지되었다. 이삭은 마지막 삶을 이태리로 다시 돌아가 피렌체에서 보냈다.        
  
이삭은 당시 다방면의 작곡기법을 지닌 다작의 작곡가이며, 전형적인 르네상스 음악가였다. 또한 네덜란드, 이태리, 독일의 음악적인 특징을 습득한 그는 –비슷하게 국제적으로 활약한 네델란드의 작곡가- 오를란도 디 랏소(Orlando di Lasso: 1532-1594)의 음악적 선배이기도 했다. 또한 이삭의 다양한 언어적 재능은 그의 작품세계를 국제적으로 만드는데 한 몫 했는데, 이는 그의 노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네덜란드 샹송, 이태리 프로톨라, 독일어 노래들이 있다. 널리 분포된 그의 테노르 노래 『세상 도처에 나의 행복뿐』(Mein freud allein in aller Welt) 외에도 독일어 가사를 가진 다성부 노래인 『인스부르크, 나는 너를 떠나야 해』 (Innsbruck, ich muss dich lassen)도 잘 알려진 작품이었다. 
이삭의 종교곡으로는 약  40여곡의 통상미사가 전해온다. 약 절반 가량이 세속노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네델란드 양식을 따라 통일성에 주안점을 둔 음악이었다. 미사의 가사들은 부분적으로 다성음악으로 작곡되었다. 단성부 부분은 합창, 제창, 오르간으로 불리거나 연주되었다. 그의 카르미나 미사(missa carminum)는 여러 개의 독일노래와 샹송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예를 들어 christe II 부분은 그의 유명한 인스부르크 노래를 가공한 것이다. 
거의100여곡의 고유미사 연곡은 독일식의 것이 아니고 오스트리아 전통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사용하던 방식을 따랐다. 왜냐하면 막시밀리안 황제가 콘스탄츠 측의 주문을 받아 오스트리아 식으로 작곡하는 것에 양해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유미사 연곡은 대단히 창의적인 대위법을 보여준다. 고정선율로 주어진 성가 선율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된다. 리듬적 변화, 장식적 변화, 카논, 좀 더 자유로운 가공, 대단히 긴 음표로 늘리기 등 실로 다양하다. 그는 작곡에서 멘수라 음표의 차이를 이용하는 구식의 음악을 사용하는가 하면, 가사를 두드러지게 하거나 일관모방을 하는 새로운 방식도 사용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콘스탄츠 교회로부터 위촉받은 16세기 초의 작품으로, 교회력을 위한 모테트의 첫 모음집인 『콘스탄츠 성가집』(Choralis Constantinus)이 꼽히며, 이 작품은 이삭의 제자인 루드리히 젠플(Ludwig Senfl: 1486년경-1542년 12월과1543년 8월 사이)에 의해 완성되고 3권으로 출판되었다.      
50여개의 그의 모테트들 역시 다양한데,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들이다. 특히 가사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 밖의 인쇄된 작품들: 

전집(Opera Omnia), Roma 1974ff.
콘스탄츠 성가집 I (Choralis Constantinus I), Wien 1898
콘스탄츠 성가집 II (Choralis Constantinus II), Wien und Leipzig 1909
콘스탄츠 성가집 III (Choralis Constantinus III), Michigan 1950
세속곡집(Weltliche Werke), Wien und Leipzig 1907
에피파니에 도미니 성무일과(Officium Epiphaniae Domini), Kassel 1948
5곡의 다성부 미사(Five Polyphonie Masses), Michigan 1956
입당송집(Introiten I), Wolfenbüttel 1961
4곡의 마리아 모테트 (Marienmotetten), Wolfenbüttel ca. 1965

참고문헌: 

K. AMELN: Beitr.zur Geschichte der Melodien »Innsbruck, ich muss dich lassen« und »Ach Gott, vom Himmel sieh darein«, Diss. Freiburg i. Br. 1924 
H. OSTHOFF: Die Niederländer und das deutsche Lied, = Neue deutsche Forschungen Bd. 196, Abteilung Musikwissenschaft VII, Berlin 1938, Nachdruck Tutzing 1967
J. WOLF: Zur Isaac-Forschung, ZIMG VIII, 1906/07
M. JUST: Studien zur Heinrich Isaacs Motetten, Dissertation Tübingen 1960.
M, STAEHLIN: Die Messen Heinrich Isaacs, 3 Bde, 1977.
 
등록일자:: 2005-02-28
조연숙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이삭, 하인리히(Isaac, Heinrich, 1450경-1517)

- 1450년경 플랑드르에서 출생.
- 1474년 이전에 스콰르치아루피(Squarcialupi)에게서 오르간 수업을 받음.
- 1480년경 플로렌스의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가의 음악가로 고용됨.
- 1485년부터는 플로렌스의 대성당과 세례당(Baptisterium), 그리고 성 아눈치아타(St. Annunziata) 성당에서 성악가로 활동함. 
- 1490년 이전에 플로렌스 출신인 바르톨로메아(Bartolomea I)와 결혼한 것으로 보임. 
- 1494년 메디치가가 몰락한 이후에는 얼마동안 로마에 머무름. 
- 1496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의 부름을 받고 합스부르크 궁정으로 가서, 그곳에서 궁정작곡가로 활동함. 궁정에 머무르는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로 자주 여행함. 이때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와 친분을 가짐. 
- 1514년 궁정작곡가의 직분에서 물러나 플로렌스로 돌아가 여생을 보냄. 
- 1517년 3월 26일 플로렌스에서 사망.

  이삭의 작곡기법은 그의 국제적인 활동의 영향을 받아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의 다양한 음악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 결과 그의 음악스타일은 구조적으로 약간 거친 면에서부터 매끈하고 우아한 면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나중에 활동한 랏소(O. d. Lasso)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삭의 가장 큰 음악사적 공로라고 한다면, 지역적인 전통들을 폴리포니적인 네덜란드 양식과 결합하였다는 것과 비록 독일인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독일을 유럽의 음악무대로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로는 레너(A. Rener)와 레지나리우스(B. Resinarius), 트리토니우스(P. Tritonius), 센플(L. Senfl) 등이 있으며, 호프하이머(P. Hofhaymer, 1478년부터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동)와도 음악적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필사본과 인쇄물 형태로 도처에 유포되었으며, 그 후 약 한 세기 동안 음악의 기본 레퍼토리에 속하였다.
  이삭의 음악장르는 크게 종교적 작품과 세속적 작품 두 종류로 나뉘는데, 전자에는 미사(고유미사와 통상미사)와 모테트, 그리고 후자에는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 샹송, 이탈리아어 프로톨라(Frottola), 그리고 독일어 노래가 속한다. 이것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08년에 이삭은 콘스탄츠(Konstanz)의 대성당 참사회로부터 전례개혁과 관련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들을 다성부적 고유미사의 연곡으로 작곡해 달라는 위촉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고유미사곡집인 ≪콘스탄츠 성가집≫(Choralis Constantinus)이다(이는 제자인 센플에 의해 3권으로 완성되었으며, 이 책의 출판은 이삭과 센플이 세상을 떠난 후인 1550-1555년에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15-16세기에 나타났던 모든 기법과 양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런 방대한 고유미사집은 레오냉(Leonin)과 패로탱(Perotin) 이후 처음이었으며, 르네상스 시기에서도 16세기후반의 버드(W. Bird)를 제외하면 유일하다. 거의 100여 개에 달하는 고유미사 연곡은 대위법적인 기교에서부터 판타지적인 구성까지 음악적으로 다양하다. 그레고리오성가의 고정선율은 리듬적으로나 선율적으로 장식된다든지, 카논으로 가공된다든지, 아니면 모티브적으로 약간 가공된다든지 하는 방식의 4성부로 다양하게 편곡된다. 작곡기법도 보수적인 복잡한 박자의 사용에서부터 현대적인 텍스트 표현이나 일관모방적인 악곡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제한이 없다.
  그의 이름으로 전해오는 통상미사는 거의 40개에 달하는데, 그 중의 절반 정도가 다른 사람의 선율에 기초한다. 이삭은 한편으로 네덜란드 음악스타일에 따라 연곡적 구조의 종합과 통일을 중요시하고 세속적인 노래재료를 선호하였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독일어 지역의 전례상황에 어울리는 작품들도 작곡하였다. 통상미사의 텍스트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다성부로 작곡되었는데, 단성부로 쓰여진 텍스트는 합창에 의해 유니슨으로 노래되거나 또는 오르간으로 연주되었다. 대표적인 통상미사로는 ≪카르미나 미사≫(Missa carminum)가 있는데, 이것은 여러 노래와 샹송을 고정선율로 사용한 것이다. 예로서 <christe ii="">에서는 세속노래(Lied)인 ≪인스부르크여, 나는 너를 떠나야만 한다≫(Innsbruck, ich muss dich lassen)가 고정선율로 사용된다.
  이삭의 모테트는 50여 개에 달하는데, 이것들은 매우 수준 높은 다양한 양식을 보여준다. 축일 모테트와 국가기념일 모테트는 이삭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작곡되었다. 예로서 ≪누가 포로들을 나에게 줄 것인가≫(Quis dabit capiti mea), ≪누가 두려워하는 백성에게 평화를 줄 것인가≫(Quis dabit pacem populo timenti)는 그를 후원했던 메디치의 죽음(1492)을 애도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이들 곡에서는 낮은 음역, 하행하는 선율, 그리고 지속음과 호모포니적 단락에 의한 명확한 텍스트낭송을 통해 죽음의 슬픔이 잘 묘사된다. 그런가 하면 ≪가장 총명한 동정녀≫(Virgo prudentissima)는 콘스탄츠 의회(Reichstag)를 위해 작곡되어 마리아 승천일에 연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는 9개의 천사합창과 3박자형의 박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많은 숫자 상징이 내포되어 있다.
  이삭의 세속 노래들은 일부는 텍스트와 함께, 일부는 텍스트 없이 전해져 온다. 그리고 일부는 태블러추어 악보로 그려져 있다.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로 된 샹송은 우수에 찬 전통적인 샹송과는 달리 생기발랄하고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부르고뉴 샹송인 ≪나는 사랑에 빠졌네≫(J’ay pris amours)가 그 예이다. 총 25개에 달하는 독일어 노래는 샹송과는 달리 다양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분위기도 다양하다. 그것들은 핑크(H. Finck)와 호프하이머의 작품들과 함께 16세기의 독일어 다성부 노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삭이 끼친 영향은 그의 제자이며 후임 궁정작곡가인 센플에게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이삭의 대표적인 독일어 노래로는 테노르 노래인 ≪모든 세상엔 나의 행복뿐≫(Mein Freud allein in aller Welt)과 ≪인스부르크여,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에 기초한 다양한 악곡들이 있다. 이삭은 현대적인 이탈리아 음악장르인 프로톨라도 작곡하였는데, 그것은 형식적으로 단순하며, 노래성부가 소프라노에 위치한 3-4성부의 호모포니 양식으로 된 민속적 악곡이다. 그것들은 사랑이나 운명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것이 특징인데, 예로서 ≪이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네≫(Ne più bella di questa)가 있다.

참고문헌

Ameln, K. Beitr. zur Geschichte der Melodien “Innsbruck, ich muss dich lassen” und “Ach Gott, vom Himmel sieh darein.” Diss. Freiburg I. Br., 1924.
Dunning, A. Die Staatsmotette 1480-1555. Utrecht, 1970. 
Funkhouser, S. A. H. Isaak and Number Symbolism: An Exegesis of Commemorative Motets Dedecated to Lorenzo de’ Medici and Maximilian I. Diss. Kansas City, 1981.
Just, M. Studien zu H. Isaaks Motetten. Diss. Tübingen, 1960. 
Osthoff, H. “Die Niederländer und das deutsche Lied.” Neue deutsche Forschungen Bd. 196, Abteilung Musikwissenschaft VII, Berlin 1938, Nachdruck Tutzing, 1967.
Schuler, M. “Zur Überlieferung des Choralis Constantinus von H. Isaak.” AfMw 36(1970), pp. 68-76, pp. 146-154. 
Staehelin, M. Die Messen H. Isaaks. 3 Bde., Bern, 1977. 
Wolf, J. “Zur Isaac-Forschung.” ZIMG VIII, 1906/1907.

등록일자: 2010.8.3
[나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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