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인명
힌데미트 [Hindemith, Paul]
6,398회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 11. 16- 1963. 12. 28). <설명1> <이미지1>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 하나우(Hanau)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고, 일찍이 연주자로서 재능을 보였다. 프랑크프루트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A. Mendelssohn, B.Sekles에게 사사)을 전공하였고, 프랑크프루트 오페라 관현악단의 악장, 아마르(Amar) 현악4중주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본격적으로 작곡에 몰두한 후 20년대에는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음악의 선구적 인물로 명성을 얻었으나, 점차 신고전주의적 경향으로 양식을 전환하였고, 특히 실용음악에 많은 관심을 갖았다. 나찌 정권이 들어선 후 터키로 망명하여, 그곳에 음악학교를 세워 터키 음악교육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 미국을 거쳐 스위스에서 계속적으로 작곡활동 뿐만 아니라, 이론적 저서를 발표하고, 또한 지휘자로서도 활동을 하였다. 힌데미트는 평생 작곡가, 연주자(바이올린, 비올라 등), 지휘자, 이론가, 교육가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전개했고, 그의 활동만큼이나 다양한 음악양식에 의한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급격한 현대적 어법과 조성에 바탕을 둔 전통적 양식을 모두 사용한 작곡가이다. 20년대 초 발표된 힌데미트의 작품들은 전통적 양식을 거부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조성적 작품보다는 표현주의적 무조음악 경향이 뚜렷하고, 낭만적 서정성과 감상성이 배제된 것이 특징이다. 전통적 미학관을 거부하는 반(反)낭만적 경향을 보인 이 시기의 음악을 통해 힌데미트는 독일 아방가르드의 선두 주자로서 명성을 얻었다:「현악사중주」 op.22(1921),「실내음악 1번」(Kammermusik, 1922), 3개의 단막 오페라(1919, 1920, 1921),「피아노 모음곡」 op.26(1922). 힌데미트의 반(反)낭만적 경향은 낭만이전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강화시켰고, 특히 바로크 음악관과 음악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한다. 힌데미트는 전통적 요소를 단순히 수용하지 않고 개성 있게 변화시킴으로써, 전통을 현대적으로 변화시키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성립하게 된다. 그는 음악의 선적(수평적) 흐름을 중시한 대위법을 사용하므로써 기능 화성법칙을 무시하고, 논리적 음악구조, 감정의 극대화, 테마-모티브 발전기법 대신에, 단순하고 간결한 음악 재료와 형식, 곡을 통일적으로 발전시키는 리듬을 강조했다:「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op.11, Nr.3(1921),「실내음악 2번, 5번」(1924.1927),「현악4중주」op.32(1923) 등. 다른 한편 힌데미트는 음악애호가들이 직접 연주할 수 있는 실용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그는 평생 음악활동을 하는 아마추어 그룹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청중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음악을 수용하는 대상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였다: 「현악오케스트라, 플루트, 오보에를 위한 유희음악」op.43, 「관현악 협주를 위한 교육용 음악」(Schulwerk) op.22, 「애호가를 위한 유희음악」op.45 등. 30년대 이후 힌데미트는 전통적 양식으로 복귀하며, 조성이 강조된 "구조적 대위법" 양식에 의한 작품을 발표한다. 특히 1937년 발표된 『작곡지침서』(Unterweisung im Tonsatz)에서 힌데미트는 음악의 자연법칙과 조성을 강조한 독자적인 이론을 확립하고, 이 이론에 따른 16곡의 소나타(1935-39)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조성에 근거한 폴리포니 양식에 의한 전통적 형식의 곡을 쓰면서, <작곡가의 책임의식>, <청중과의 의사소통>을 강조한다. 즉 힌데미트는 "음악은 그것을 노래하고 연주하고 듣고자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표적 작품: 「음의 유희」(Ludus Tonalis, 1942),「마리아의 생애」 수정판(1934-35), 오페라「캐딜락」 수정판(1952),「조화의 세계」(Harmonie der Welt, 1951),「피츠버그 심포니」 (Pittsburg Symphonie, 1958), 「미사」(1963). 등록일자: 2003-08-30 오희숙 <설명2> 1. 힌데미트의 삶 힌데미트는 189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 하나우(Hanau)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로버트 루돌프 에밀 힌데미트(Robert Rudolf Emil Hindemith: 1870-1915)는 마리아 소피 바르네케(Maria Sophie Warnecke: 1868-1949)와 결혼 후 세 자녀를 두었다. 힌데미트의 아버지는 페인트공으로 어렵게 생활을 유지했지만, 찌터를 열정적으로 연주하면서 음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음악교육을 시켰다. 자녀들의 음악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음악을 통한 사회적 신분상승”을 시도한 듯 보인다. 그의 엄격한 감시하에 자녀들은 음악공부를 하였는데, 힌데미트는 바이올린을 그의 동생들은 첼로와 피아노를 배웠다. 자녀들은 “프랑크푸르트 어린이 삼중주단”(아래 사진)으로 활동했다. <이미지2> 1908년 프랑크푸르트 음악원(Dr. Hoch's Conservatorium)에 입학한 힌데미트는 레브너(Adolf Rebner)에게 바이올린을 사사했고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당시 힌데미트의 모습은 <음악원 연보>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15/16년 <음악원 연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연주 클래스에서는 파울 힌데미트가 [...] 성과(현악사중주 제출)를 인정받아 멘델스죤 재단에서 750마르크의 상금을 받았다. 1915년 요하임 콩쿠르에서 힌데미트는 귀중한 바이올린을 수여 받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오케스트라단의 악장으로 활동 중이다.”[Dr. Hoch's Conservatorium, 38. Jahresbericht(1915/16), 47.] 바이올린 주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힌데미트는 스승의 현악4중주단의 단원이 되었으며, 1916년에는 21살의 어린 나이로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의 제1바이올린 주자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힌데미트는 누구보다도 독일 전통 음악을 폭넓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접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음악원에서 당시 대표적 작곡가였던 바그너, 레거, 볼프, 포레, 피츠너, 슈트라우스, 드뷔시의 음악을 들을 기회를 가졌고, 그 스스로는 바하, 비발디, 베토벤, 드뷔시, 레거, 쇤베르크 등의 바이올린곡, 실내악곡, 관현악곡을 연주했다. 즉 힌데미트는 전통적 음악과 당시대의 현대적 음악을 실제적으로 익혔던 것이다. 바이올린을 전공하던 힌데미트는 1912년부터 작곡수업을 받았다. 그는 멘델스죤(Arnold Mendelssohn: 1855-1933)과 제클레스(Bernhard Sekles: 1872-1943)에게 작곡을 배우고, 많은 습작곡을 쓴 이후 1914년 작곡한 『피아노, 클라리넷, 호른을 위한 3중주』에 작품번호 1번을 부여한다. 1916년 학교공부를 마친 이후, 작곡가로서의 자의식이 점점 확고하게 싹트면서, 전통적 음악양식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군대에 입대하면서 사회적 현실과 예술에 대한 깊은 숙고를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3개의 오케스트라 가곡』 op.9, 피아노 작품 『한밤중에... 꿈과 체험』 op.15 등에서 잘 드러난다. 작곡가로서의 공식 출발점은 1919년 첫 작곡 발표회로 볼 수 있다. 이 음악회는 성공적이었고, 이후 힌데미트는 독일의 저명한 음악출판사 쇼트(Schott in Mainz)와의 계약을 체결하고, 평생 이 출판사에서 작품을 출판하게 된다. 1921-1926년 사이 힌데미트의 작곡 활동은 도나우에싱엔 음악제(Donaueschinger Kammermusik Festival)와 관련이 깊다. 그는 이 음악제에서 자신의 작품을 초연함으로써 작곡가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새로운 작품들을 직접 연주했으며, 더 나아가 하스(Joseph Haas), 부르크하르트(Heinrich Burkard)와 함께 음악제 구성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도나우에싱엔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작품 󰡔5개의 관악을 위한 작은 실내음악󰡕 op.24 Nr.2, 『비올라 독주 소나타』 op. 24 Nr. 2, 『현악3중주 1번』 op.34 등의 작품을 헌정하였다. 힌데미트는 작곡가 활동과 함께 연주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스승의 현악4중주단인 레브러 현악사중주단을 탈퇴한 후, 힌데미트는 아마르(Amar) 현악사중주단을 새롭게 창단하고 여기서 비올라를 연주했다. 이에 대해 그는 1922년 한 편지에서 자신감 있게 다음과 같이 썼다: “5월에 나는 깨끗한 현악4중주단을 만들었다. 아마르 현악사중주단이 그것이다. 우리는 단지 현대음악만을 연주하고 있고, 할 일이 아주 많다. 여름에는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와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연주했다 - 물론 성공적으로. 그 다음에 우리는 덴마크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연주할 것이다. 그리고 겨울에는 파리에도 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주에서 나는 다시 한번 다른 많은 작곡가들을 밀어 제쳤다. 그 이후 내 사업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번창하고 있다.”[P. Hindemith, Brief, hg.v. D. Rexroth, Frankfurt 1982, 106] 아마르 사중주단은 주로 현대 작품을 연주하면서, 유럽 각지에서 많은 연주회를 개최하여 그 이름을 높였다. (아래 사진은 아마르 사중주단원들이다: Lucco Amar, Walter Caspar, 힌데미트, Rudolf Hindemith) <이미지3> 1924년 5월 15일 힌데미트는 프랑크푸르트 오케스트라 악장인 로텐베르크(Ludwig Rottenberg)의 막내딸 게르트루트(Gertrud)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아래 사진은 게르트루트와 그녀의 아버지). 소프라노 가수와 연극 배우로 활동했던 그녀는 자신의 모든 활동을 접고 평생 자신의 남편에게 극진한 내조를 하였다. 힌데미트가 남긴 여러 편지와 글들을 고려해볼 때, 게르트루트 힌데미트는 반려자 및 격려자로서 그녀의 남편의 음악적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이미지4> 1927년은 힌데미트 삶에 새로운 장을 여는 시기이다. 베를린 음악대학의 교수로 초빙된 힌데미트는 이제 자신의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히틀러 정권과의 마찰로 일어났던- 1937년까지, 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힌데미트는 교수하는 일 외에도 활발한 창작과 연주활동을 통하여 베를린 음악계의 중심인물로 등장하게 되는데, 중요한 작품발표로는 󰡔실내음악 5번(비올라 협주곡)󰡕의 베를린 초연을 들 수 있다 (클렘퍼러 지휘에 힌데미트가 비올라를 독주).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에 힌데미트는 애호가를 위한 음악(Laienmusik), 유흥음악, 영화음악, 기계적 악기를 위한 음악 등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작곡한다. 1933년 히틀러 정권이 들어선 이후 -많은 다른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함께- 힌데미트의 작품은 “문화 볼세비키적”(kulturbolschewistisch)이라는 평가와 함께 탄압을 받는다. 이에 따라 그의 작품은 점차 음악회 프로그램에서 사라지고, 유태인 음악가인 골드베르크(Szumon Goldberg), 포이어만(Emanuel Feuermann)과 함께 힌데미트가 결성한 현악삼중주단은 외국에서만 연주가 가능했다. 또한 연주자로서도 독일에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미 예정된 음악회마저 취소되는 상황에 이른다. 이러한 모든 것이 어떤 공적인 제재 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힌데미트 자신은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대표작인 오페라 『화가 마티스』 창작에 몰두하는데, 극본 작업에 있어서 시민 항쟁 속에서 고민하는 화가의 모습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그의 작품이 독일 음악계에서 사라질수록, 몇몇 되지 않는 그의 작품 공연은 권력자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는데, 그 대표적 예가 『화가 마티스 교향곡』의 초연이다. 1934년 3월 12일 푸르트뱅글러 지휘하에 베를린 필하모니에 의해 초연된 『마티스 교향곡』의 초연은 당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휘자 프루트뱅글러는 “힌데미트의 경우”(Der Fall Hindemith)라는 글을 독일 일반 신문(Deutsche Allgemeine Zeitung)에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예술이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무조음악을 비롯한 현대음악에 대한 제재는 계속되었다. 당시 계속해서 힌데미트를 지원했던 쇼트 출판사는 힌데미트에게 망명을 권유하게 된다. 출판사도 힌데미트 및 현대음악 작곡가와의 관계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에 처할 지경이었다. 1935-37년 힌데미트는 매해 오랜 기간 동안 터키를 방문하여 앙카라에서 터키 음악 교육체계 개혁에 동참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또한 이 시기에 힌데미트는 자신의 음악이론을 집대성하여 『작곡지침서』(Unterweisung im Tonsatz)를 출판한다. 1937년 힌데미트는 베를린의 교수직을 사임하였고,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여행을 거쳐 1938/39년 스위스에 일시 정착한 후, 1940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힌데미트는 자신의 모든 삶과 음악적 기반을 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매우 주저하였고 가능한 한 뒤로 미루려고 하였지만,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로 결단을 내리게 했다. 힌데미트의 미국 생활은 여러 대학의 강의로 시작되어 예일대학의 교수로 정착한다. 그는 1940-53년까지 예일대학의 교수로서 작곡, 화성학, 이론 등을 가르치며, 작곡과 연주활동을 전개한다. 1946년 힌데미트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 1949/50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초청되어 “음악시학”에 대한 강의하였는데, 힌데미트의 후반기 음악관을 잘 보여주는 이 강연은 책으로 발간되었다: 『자신의 세계 속의 작곡가』(Komponist in seiner Welt). 힌데미트는 예일 대학교에서 자신의 수업 방식을 다양하게 변형시켰다. 미국 학생들이 베를린의 학생과는 다른 배경을 갖고 있음을 인식한 그는 미국에서의 수업을 위하여 몇몇 책을 출간하였다: 『전통적 화성학 집중 코스』(A Concentrated Course in Traditional Harmony, 1943), 『음악가를 위한 기본 연습』(Elementary Training for Musicians, 1946), 『고급 학생을 위한 화성연습』(Exercises for Advanced Students, 1948). 영어본과 함께 모두 독일어로 출간된 이러한 교재는 많은 경우 전통적 음악 이론 체계를 다루고 있다. 작곡 레슨에 있어서 힌데미트는 매우 엄격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과 어느 정도의 동료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칭찬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힌데미트는 1947년과 1948/49년에 연주여행을 통해 다시 유럽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연주 여행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49년 11월에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서 교수로 초청까지 받는다. 1951년 힌데미트는 취리히 대학의 교수직을 수락하였고, 당분간 미국과 스위스를 오가며 생활한 뒤, 1953년에 완전히 스위스로 이주한다. 이 곳에서 힌데미트는 교수, 작곡, 연주 활동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1953-63년에 지휘자로서 베를린(베를린 필하모니), 런던 또는 비엔나(비엔나 필하모니) 등 유럽 음악의 중심지에서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이태리 등지의 소도시에서도 연주하였고, 더 나아가 남미(1954), 일본(1956) 등지까지 연주 여행을 하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교향곡(예를 들어 1953년 바이로이트 연주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회 프로그램에 넣었으며,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미요, 오네게르, 무쏘르그스키, 모차르트, 레거의 작품을 선호하였고, 20세기 음악으로는 바르톡, 베르크, 달라피콜라,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베베른 등의 작품을 지휘하였다. 이와 함께 힌데미트는 옛 음악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옛 악기로 옛 음악을 연주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지휘활동을 통해 힌데미트는 자신의 개성적 지휘 양식을 확립하였다. 스위스 시절 힌데미트는 새로운 작품의 창작보다는 옛 작품의 새롭게 수정하거나, 출판되지 않은 초기 작품의 발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가곡 『죽음의 죽음』(Des Todes Tod, 1922)이 별다른 수정 없이 처음으로 발표되었고, 『클라리넷 오중주』 op.30(1923)은 많은 수정을 거쳐 출판되었다. 특히 많은 수정 작업을 한 작품은 오페라 『카르딜락』과 『오늘의 뉴스』(Neues vom Tage)이다. 새롭게 개정된 『카르딜락』은 1952년 힌데미트의 지휘로 초연 되었고, 1953년 솔티(Georg Solti)의 지휘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연주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힌데미트 말년에 발표된 새로운 작품 가운데 대표작은 천문학자 케플러를 테마로 한 오페라 『세계의 조화』(Harmonie der Welt)이다. 힌데미트는 먼저 이 작품의 교향곡을 1951년 완성한다. 이 작품의각 악장은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 무지카 후마나, 무지카 문다나”로 제목을 붙여 중세의 대표적 이론가 보에티우스의 음악관을 수용한 것이다. 1957년에 이 대규모 오페라를 완성한 후 다만 오페라, 칸타타, 교향곡, 오르간 협주곡, 마드리갈 등 전통적 장르의 음악을 완성한다. 힌데미트 생애의 마지막 해인 1963년에도 그의 활동은 활발했다. 이 해에 그의 마지막 작품 『무반주 혼성 합창을 위한 미사』를 마무리하고, 6월 독일 본의 한 학술 심포지엄(Ordens pour le merite)에서 그의 마지막 강연 「고갈되는 호수」(Sterbende Gewässer)로 자신의 음악 이론적 입장을 재정립한다. 지휘자로서 9월에는 이태리의 여러 도시에서, 11월에는 비엔나에서 연주하고, 11월 12일에는 그의 『미사』의 초연을 지휘한다. 11월 14일 집으로 돌아온 그는 병세가 악화되고 12월 28일 세상을 떠난다. 2. 음악양식 힌데미트 음악의 양식적 흐름은 매우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여러 문헌에서 연구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구분된다: 켐프(Ian Kemp)는 그로브 사전에서 1918-23년, 1924-33년, 1933-63년의 세 시기로 그의 작품을 구분하여 설명하였고[Ian Kemp, Grove‘s Dictionary]; 힌데미트 음악 전반에 나타난 대위적 기법을 방대하게 연구한 메츠[G. Metz, 1976, 460.]와 힌데미트 음악을 그의 개별적 삶, 창작의 심리적 측면, 미학과 연결시켜 연구한 보리스[S. Borris, 1965, 65]는 1921년까지, 1921-27년, 1927-34년, 1935-56년, 1956-63년의 다섯 시기로 힌데미트 음악양식을 구분하였다. 이 글에서는 작품의 특성, 음악관의 변화 등에 따라서 힌데미트 양식을 <초기양식-반낭만적 신음악-신고전주의-조성적 폴리포니>의 네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이를 시대와 연결시켜 살펴보겠다. 먼저 힌데미트가 대외적으로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시점을 1920년으로 보고, 그 이전의 초기 양식을 그의 작곡 양식의 첫 발달시기로 보았고, 당시 독일 신음악의 선두주자로서 전통을 거부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 23년까지의 음악을 두 번째 시기로, 『마리아의 생애』를 기점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면서 전통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한 23년부터를 세 번째 시기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이론을 확고히 하면서 폴리포니 기법과 전통적 조성을 접목한 1935년부터를 네 번째 시기로 나누었다(그의 대표적 이론서 『작곡지침서 Unterweisung in Tonsatz』는 약1935년부터 시작하여 1937년에 완성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분이 절대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서로 연관성을 지니는 면이 있으며(예를 들어 신고전주의와 조성적 폴리포니), 특히 연도 구분은 보는 관점에 따라 변화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1) 초기 양식(-1919) 힌데미트는 정식 작곡 수업을 받기 이전부터 작곡을 다양하게 시도하였고(피아노 트리오,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가곡, 현악사중주 등), 1912년 작곡 수업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실내음악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실내음악 연주자로서의 경험이 뒷받침 된 듯하다. 대부분 분실된 초기 작품에는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대규모 론도 B-장조』(1912/13),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d-단조』(1912/13) 등이 있고, 힌데미트가 자신의 습작들과 구분하여 정식으로 작품 번호를 붙인 작품은 -분실된- 『피아노, 클라리넷, 호른을 위한 삼중주』 op.1이며, 이어 『현악사중주 C-장조』op.2가 1915년 작곡되었다. 실내음악에 대한 초기의 관심은 줄곧 지속되어 20세기 실내음악 분야에서 그의 작품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힌데미트가 처음으로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해 쓴 작품 『첼로 협주곡』 op.3(1916)은 19세기 낭만주의의 비르투오조적 협주곡의 전통을 따르면서, 동시에 R.슈트라우스 등으로 대표되는 후기 낭만적 모더니즘의 특성이 드러난다. 반면 이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우스꽝스러운 신포니에타』 op.4는 첼로 협주곡과 같은 대규모 장르에 대한 패로디로 볼 수 있다. 신포니에타는 우선 소규모 오케스트라의 편성으로 구성되었고, 모르겐슈테른(Ch. Morgenstern)의 시를 각 악장의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전통적인 형식을 왜곡시키고, 익숙하지 않은 음향효과 등을 사용함으로써 후기 낭만적 음악의 감정적 세계를 “조롱”하고 있다. 1917년 음악원을 졸업한 후 전통적 양식 모델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적 음악 양식을 찾으려는 힌데미트의 시도는 먼저 한 악장으로 구성된 『피아노, 2개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오중주』op.7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분실되었지만, 스케치 노트에 작품 전체를 개관할 수 있는 형식표 등이 기록되어있다. 음악학자 스트로벨(H. Strobel)은 3개의 주제로 구성된 소나타 형식의 이 작품이 브람스와 레거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각각의 형식 부분에서 드러나는 “랩소디적 독립성”에서 힌데미트의 독자적 시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평가한다.[H. Strobel, 1948, 17]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3개의 노래』 op.9는 힌데미트 초기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그가 프랑크프르트 음악원을 졸업한 직후 작곡한 곡이다 (Nr.1: 1917년 4월 8일, Nr.2: 4월 19일, Nr.3: 5월 27일). 졸업한 후에도 힌데미트는 스승인 제클레스에게 계속 작품을 보였는데, 이 작품은 젊은 작곡가와 스승 사이의 가장 큰 갈등을 보여준 예에 속한다. 제클레스는 “매우 자유스럽고, 전통적 가곡 형식과는 전혀 유사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이에 대한 힌데미트의 반응은 강경했다: “그러나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음악일 뿐이다. 가곡 형식이나 소나타 형식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나는 내 음악을 만들 것이다. 그것이 누구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진실되고 진정한 음악이어야 한다.”[Paul Hindemith Briefe, hrsg. v. D.Rexroth, 1982, 60] 이러한 힌데미트의 입장은 이 작품 앞에 인용한 베르펠(Franz Werfel)의 시 “시인”의 시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제 나는 내 자신이기를 시작할 것이다.” 이 가곡은 표현주의적 문학의 이정표가 되는 세 작품에 근거하는데, 회의주의적 첫 번째 시와 혁명적 내용의 세 번째 시를 사용하고 서정적인 두 번째 시로 연결하면서 “사랑”을 처절한 절망을 이겨나는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세 노래는 체계적인 발전관계를 맺는다. 1. 나의 밤들은 산산이 부서졌다.(Ernst Wilhelm Lotz) 2. 세상의 종말 (Else Lasker-Schüler) 3. 젊은이의 개벽 (Lotz) 즉 힌데미트는 표현주의적 문학의 전형적인 모델인 “인간의 파멸과 소생”을 주제로 택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젊은 힌데미트가 문학적으로 수준 높은 당시대적 작품을 적절하게 선택한 것과 함께, 이를 연결하여 연곡으로 구성하는 기술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문학적 재료를 대규모 오케스트라 노래로 만들면서, 힌데미트는 한편으로 서정적 내용에 폭 넓은 윤곽을 부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분화된 표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즉 이 작품에서 대규모 오케스트라는 매우 섬세하게 다루어지면서, 또한 거대한 음향효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의 대규모적 편성은 힌데미트의 작품양식 전체에서는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이 이후에 힌데미트는 거대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거부하고 점점 더 소규모 편성을 선호하며, 20년대에는 단지 실내음악만을 작곡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op.9는 당시의 음악적 조류를 젊은 작곡가가 직접적으로 수용한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첫 번째 노래 “나의 밤들은 산산이 부서졌다”는 운율 없이 길이가 다른 시구 10행으로 이루어진 시에 기초한다. 이러한 산문시를 힌데미트는 무지개형의 3부분으로 만들어 음악적 완결성을 부여하였고, 여기서 폭풍우 치는듯한 전주는 노래의 끝에 다시 후주로서 나타난다. <이미지5> 이 노래는 커다란 제스추어를 보이면서 거대한 효과를 내는 전주의 선율이 특징적이다: 급속하게 상승하는 음진행과 계속저음처럼 작용하는 트릴이 ff로 현악기의 유니존으로 나타나고, 이를 배경으로 호른에 의해 강조되어 선율이 흐르면서 반주와 대조를 이룬다. 이 모든 요소는 -R.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또는 바그너의 󰡔발큐레󰡕에서 처럼- 오페라의 서주와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전체 작품에서 느린 중간악장의 역할을 하는 두 번째 노래에도 관현악 전주가 나타나고 이것이 후주로 반복된다. 전주(a:1-7, b:8-15마디)의 두 번째 부분에는 부점 리듬의 옥타브 도약이 나타나는데 이 모티브는 작품 전체에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이 노래의 가사는 3연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음악 형식은 4부분(A-B-B'-A)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를 통하여 시는 원래의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동시에 각각의 부분이 대조적으로 나타나면서 특정한 내용적 요소가 한 단계 더 고양되는데, 예를 들어 “사랑이 질식할 듯한 절망에 대항하는” 부분의 시구는 음악적 클라이맥스로 나타난다: pp로 단순한 리듬과 함께 시작하는 독창성부는 마디30부터 점차적으로 절정을 향해 상승하고, 이때 선율은 점점 여려지는 다이내믹스와 함께 반음계적으로 하강한다. 다시 나지막하게 시작하는 독창성부는 전주에 나온 모티브의 변형으로 또 한번 다이내믹스의 상승을 경험하고, 마침내 53마디에서 “그대여! 우리 깊게 입맞추자”라는 가사에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낮은 부분을 상징하는- 깊게(tief)라는 단어에서 선율은 극적으로 상승한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작품에서 힌데미트는 세기말에 지배적이었던 모든 수단과 표현방식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는 물론, 거대한 악기배합과 섬세한 편성, 또한 선율의 계속적 발전, 형식적 구성원칙, 행진곡의 수용 등에서도 말러의 영향이 나타난다. 또한 빈번한 혼합음향, 섬세한 편성, 선율의 장식 등에서는 R.슈트라우스의 교향시를 연상시키며, 특히 선율의 흐름을 여러 종류의 악기로 합치는 혼합 음향이 눈에 띈다. 하지만 빈번한 성부의 교차 속에도 세분화된 다이나믹의 효과는 개성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형식에 있어서도 힌데미트는 학교에서 습득한 전통적인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으며, 가사의 선택과 연결에서, 선율의 구성에 있어서도 개성적인 언어를 보여준다. op.9를 완성한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군대로 징집된 힌데미트는, 1918년 12월 제대와 함께 작곡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재기한다. 1919년에는 드뷔시의 음향에 많은 영향을 받은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op.11 Nr.4, 바로크 음악적 특성들을 수용한 『비올라 독주 소나타』 op.11 Nr.5, 반낭만적 특성과 인상주의 경향이 종합된 피아노곡 『한 밤중에... 꿈과 체험』op.15, 몇 개의 가곡 그리고 그의 첫 번째 오페라 󰡔살인자, 여인의 희망󰡕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힌데미트가 op.1을 쓴 때부터 20년대 작곡가로서 확고한 양식을 갖기 이전까지 초기의 작품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젊은 힌데미트가 자신의 음악 양식을 확립하는데 세 가지 경향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난다.[Oh Heesook, 1992] 첫째로 힌데미트는 낭만주의와 20세기 사이에 나타난 “음악적 모더니즘” 경향에서 영향을 받았다. R.슈트라우스, 말러, 초기 쇤베르크 등에 의존한 이 시기는 “외적 대형화”와 “내적 세분화”를 추구했다. 즉 이 시기의 작품은 말러의 교향곡,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쇤베르크의 관현악 작품이 보여주듯이, 대규모적 편성을 특징으로 했고, 동시에 매우 복잡한 화성과 리듬 체계, 양식의 복합성 등을 보여주었다. 슈트라우스의 영향은 op.1과 󰡔첼로협주곡󰡕 op.3등에서 (관현악법이나 복합적 형식) 발견되고, 형식의 대형화는 -이미 언급되었듯이- op.9에서 나타나며, 이 작품에서는 말러의 관현악법과 선율구성 양식의 영향도 보여진다. 둘째로, 힌데미트의 작품에는 드뷔시의 영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힌데미트가 입대한 후 드뷔시의 작품을 많이 연주한 이후에 나타난다. 건축적 악곡구조에 의존하지 않고 목적을 향하지 않은 선율구성, 섬세하게 세분된 선율의 끝없는 연속성 등은 바이올린 소나타 (op.11, Nr.1, Nr.2)에서 나타나며, 온음계의 사용과 세분화된 리듬 사용은 비올라 소나타에 반영되었다. 모호한 음향 속에서 음색의 효과를 강조하는 기법은 가곡에서 (op.13, Nr.2 멜랑콜리) 특징적이다. 피아노 작품 op.15에서도 병행화음의 사용을 통한 독특한 피아노 양식이 사용되었다. 예14-2) 피아노작품 op.15 중 Nr.2 마디 1-4 <이미지6> 셋째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힌데미트 양식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전(前)고전적 전통이다. 특히 바로크적 음악양식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바하 음악에 대한 선호는 이미 힌데미트의 연주 프로그램에서 드러났다. 그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작품보다 바하의 독주 소나타 또는 파르티타를 즐겨 연주했다. 바로크 양식에 대한 관심과 선호도는 바하의 작품과 더불어 레거의 작품에도 집중되었다. 선적 흐름을 중시한 『현악사중주』op.10에서는 레거의 현악사중주와 세레나데 op.95가 모델이 되었고, op.11, Nr.5에는 파사칼리아를 사용했으며, 바하의 『d-단조 샤콘느』와 레거의 『바이올린 소나타』op.91, Nr.7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이 많이 있다. 그 외에도 op.11, Nr.3에서는 오스티나토 기법을 집중적으로 사용했다. 즉 그는 주제적-변주기법 보다는 대위법적 성부진행을 선호했다. (2) 반(反)낭만적 신음악(1920-1923) 20년대 초반 힌데미트는 놀라운 속도로 많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무엇보다도 힌데미트의 이름을 대내외적으로 알린 작품은 1921년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초연 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둔 『현악사중주』op.16(1920)이다. 이 작품은 아마르 현악사중주단에 의해 연주되었는데, 힌데미트는 여기서 비올라를 연주했고, 그의 동생 루돌프가 첼로를 연주했다. 이 작품의 리듬이 주는 강렬한 에너지, 단순하게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형식 구성은 청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작곡가 자신이 연주에 직접 참여한 것도 특이했다. 베를린의 비평가 바이스만(Adolf Weissmann)이 이 작품을 “음악의 근원”(Urquelle der Musik)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평한 것처럼, 음악계에서는 그 동안 갈망했던 어떤 새로움이 이 작품을 통해 표출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아코디언을 포함한 12개의 독주악기가 풍부한 불협화음을 창출하는 『실내음악 Nr.1』(1922)은 특이한 편성뿐만 아니라 독특한 리듬, 대위법적 양식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마지막 악장 “피날레 1922”에서는 Wilm-Wilm의 “여우의 춤”이라는 폭스트로트를 수용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더 나아가 『여인의 살인자, 희망』에 이어 『누쉬-누쉬』op.20(Das Nusch-Nuschi, 1921), 『상타 수잔나』op.21(Sancta Susanna, 1922)라는 두 개의 단막 오페라를 더 작곡·발표하여 주제의 구성, 무조적 음악 등의 특성을 통해 프랑크푸르트와 슈트트가르트에서 힌데미트의 이름은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계속해서 짧은 시기에 발표된 다양한 작품들은 젊은 작곡가 힌데미트의 열정을 대변한다: 『피아노 모음곡 1922』 op.26(1922), 가곡 『죽음의 죽음』op.23, Nr.1(1922), 『젊은 하녀』op.23 Nr.2 (1922), 『5개의 관악기를 위한 소규모 실내음악』op.24 Nr.2(1922), 발레음악 『악마』 op.28(1922), 『비올라 독주 소나타』op.31 Nr.4(1923). 이러한 작품들은 전통적 양식을 거부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조성적 작품보다는 표현주의적 무조음악 경향이 뚜렷하고, 무엇보다도 낭만주의적 서정성과 감상성이 배제된 것이 특징이다. “나의 모든 존재의 의미와 목적은 단지 하나이다. 즉 항상 새로운 것을 공개하는 것이다”[G.Schubert, 1981, 26]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전통적 음악세계는 이제 그가 벗어나야 할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힌데미트는 소위 독일 아방가르드 음악의 대표적 주자로 등장하게 되었고, 20년대 초반 그 어느 작곡가가 따를 수 없는 명성을 얻었다. 전통적 음악세계에 대항하는 이 시기 힌데미트 음악의 양식 경향은 『피아노 모음곡 1922』에서 잘 나타난다. 현대음악 전문가인 슈투켄슈미트(H. H. Stuckenschmidt)는 이 모음곡에 대하여 “시민을 경악시키는 선동적인 도전적 성격”을 가졌으며, “신성박탈을 목표로 한다”라고 평했고,[H.H.Stuckenschmidt, 1981, 179] 피아노 음악 개론서에서는 “과장되고 난폭한 음악 소리로 의문적인 매력을 지녔다”라고 기술되어 있다.[K.Wolters, 1985, 532] 이러한 평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곡은 전통적 음악을 벗어나서 무엇인가 혁신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 작곡가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우선 구성의 측면에서 특이하다. 행진곡(Marsch)-쉬미(Shimmy)-야상곡(Nachtstueck)-보스톤(Boston)-랙타임(Ragtime)으로 이루어진 구성은 전통적인 모음곡(Suite) 형식을 20세기적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쉬미, 보스톤, 랙타임은 당시 유럽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춤곡으로 20년대 미국에서 유럽으로 전래되었다. 2박자 계통의 재즈춤 쉬미는 원래 Shimmy-shivered, 즉 여인의 속옷이 떨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이름은 춤추는 사람이 셔츠의 먼지를 털어 내듯이 어깨를 진동하면서 춤을 추는 동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보스톤은 3박자의 느린 왈츠에서 유래한 가볍고 빠른 춤곡이며, 랙타임은 정통 미국 재즈의 선구자였던 뉴올리안즈 재즈에서 유래한 음악으로, 규칙적인 비트와 이에 대항하는 싱코페이션 선율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재즈음악의 특징을 힌데미트는 자신의 모음곡에 대거 수용하였다. 여기서는 첫 번째 「행진곡」과 마지막 「랙타임」의 양식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행진곡」은 전주(前奏)와 A-B-A 형식으로 구성되었고, 세 번째 부분은 첫 번째 A부분을 전혀 변화 없이 그대로 반복함으로써, 매우 단순한 악곡구조를 갖고있다. 매우 규칙적인 박절로 구성되어 있는 A 부분에 비하여 (24마디 = 3 x 8마디), B부분은 자유로운 리듬의 진행을 보여준다. B부분에서는 박자가 두 번 변하는데, 이 부분을 제외하고 이 곡 전체는 행진곡 성격에 어울리는 아래의 리듬유형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면서 <이미지7> 안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 외에 각각 악구의 종지에서 모든 음에 악센트가 주어져서 생동감 있는 행진곡 분위기를 더 강조한다 (10-11마디, 26-27마디, 46-49마디, 72-75마디). 이때 A부분의 종지 형태가 B부분에 변화 없이 재인용된 것은 매우 특이하다. 이 곡에서는 특히 3마디로 이루어진 전주는 조성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구성되었다. <이미지8> 이 부분은 동음 유니즌으로 시작하지만 바로 불협화음이 추가되어, 언뜻 연주자가 피아노 건반을 잘못 누른듯한 인상을 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조성적 화음이 동시에 울리면서 이중조성 (오른손은 B 장조, 왼손은 D♭ 장조)을 이룬다. 이렇게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것은 당시 힌데미트 화성의 특징이었다. 더 나아가 이 곡 전체에서는 수직적 화성(Akkordsatz), 특히 3도 구성이 많이 나는데, 흥미 있는 것은 이 3도가 일반적인 3화음이나 7화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협화음적으로 결합된다는 것이다. 즉 조성적인 3도에 한음이 첨가됨으로서 불협화음적으로 되거나, 증3화음을 구성하거나, 3도가 이중으로 겹침으로서, 조성적인 3도음정은 불협화음으로 결합되어 나타난다. <이미지9> 이렇듯 이 작품에는 불협화음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불협화음이 쇤베르크적 자유 무조성 음악에서와는 다르게 조성적 화음에 비화성음을 첨가함으로써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빈번한 불협화음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종지는 e-조성, 즉 3음 없는 e-단조로 귀결된다. 또한 A 부분에서는, 특히 왼손에서 중심음으로 C를 설정할 수 있는데, 이 음은 13-24 마디에서 베이스음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조성적 연관성은 조성의 틀을 와해하는 불협화음의 의도적인 사용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응집력을 구축하는데, 이는 힌데미트의 의도, 즉 “혼란의 뒷면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질서”가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는 의도적인 불협화음과 아주 평범한 리듬, 박자 구조를 통하여 “정리된 카오스”가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힌데미트의 피아노 모음곡의 마지막 악장인 랙타임은; 무엇보다도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사용설명서 Gebrauchsanweisung”을 통하여 명성을 얻었다. “사용설명서 (이 곡을 연주할 때) 너는 피아노 개인 지도시간에 배운 것을 전혀 생각하지 말라. 네가 레#을 네 번째 손가락으로 칠 것인지 여섯 번째 손가락으로 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 곡은 단지 매우 거칠게, 그러나 기계처럼 모든 리듬이 반짝이게 쳐라. 이때 피아노는 재미있는 타악기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다루라.” 이러한 악상기호만큼이나 작픔 자체도 유모어 있고 극단적으로 거칠고 공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식적으로 볼 때 이 모음곡의 구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없다. 왜냐하면 이 곡은 단순한 <반복기법>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은 힌데미트의 초기 피아노곡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 곡에서 특징이라면 반복이 점차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인데, 이것은 랙타임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것이다. 외형적으로 이 곡은 A+B+A+Coda의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이때 마지막 A는 매우 축소되었다. 세 부분은 전주의 끝을 표시하는 신호적인 화음으로 구분된다. 유흥음악에서 익숙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시그널 화음은 앞의 곡 「쉬미」에서도 이미 볼 수 있었다. <이미지10> A와 B 부분은 계속해서 작은 구성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서도 반복기법이 지배적이다. 아래 도표에서 소문자로 표기된 부분 또한 반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b2에는 7마디로 구성된 프레이즈가 4번 반복된다. 코다는 전주부분의 요소들과 a1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즉 모든 부분들은 동일한 음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서로 서로 연결된 것이다. 전주 ................... (1-3) A .... .......... a1 (4-12) ............... a2 (13-18) ............... a1 (19-30) B ............... b1 (31-42) ............... a1 (43-51) ............... b2 (52-77) 연결구 .................. (78-81) 전주 ................... (82-85) A' ................... (86-92) 코다 ................... (93-118) 예술음악으로서의 힌데미트의 랙타임은 재즈 춤곡으로써의 랙타임의 특징인 싱코페이션적 리듬을 대거 수용했지만, 여기에는 랙타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비트가 빠진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기계적인 연주방식, 즉 속도의 변화 없이 강한 텃치의 음악은 재즈 랙타임 모델에 상응한다. 이 곡이 주는 첫인상은 강세, 리듬, 템포등등 모든 작곡 기법적 영역에서 외형적인 가능성의 한계를 도달하려는 작곡가의 노력이다. 선율은 항상 화음으로 나타나고, 다이나믹은 거의 대부분 ff에 머물러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ffff로 상승한다. 이러한 장대한 음량이 거칠게 돌진하는 16분 리듬과 연결되면서, 기계적이고 급진적인 운동을 보여줄 때, 음악은 숨쉴 수 없을 정도의 긴장감을 보여준다. 여기에 악센트와 sf로 강조된 규칙적인 싱코페이션, 그리고 모티브 전체를 악센트로 강조하는 기법등이 첨가된다. <이미지11> 이때 수직적 화음은 화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에 <타악기적 효과>가 난다. 또한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연주를 가능하기 위하여 화음은 단지 <병행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즉 음색보다는 손 모양의 기능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도 G#은 중심음 구실을 하지만, 곡 전체에는 불협화음이 지배적이다. 또한 이 곡에서는 매우 흥미 있는 옥타브 프레이즈가 4번 나타난다: 16분 음표로 구성된 5잇단음표는 오른손에서는 온음계적으로 하얀 건반만 올라가고, 이에 반해 왼손에서는 검은 건반을 누르며 내려간다. 선율이나 화성을 무시한 흰건반과 검은 건반의 대조는 재즈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즉 “사용방식”에 표현된 힌데미트의 의도는 여러 측면에서 거의 완벽하게 음악자체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곡은 전통적인 피아노곡에서처럼 아름다운 선율이나 섬세한 화성의 음색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힌데미트가 이 작품에서 “예술음악”에 “유흥음악”을 수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20년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재즈는 힌데미트 외에 많은 예술음악가의 관심을 끌었는데, 전통적 고전음악의 법칙에 얽매여있던 이들에게 재즈는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힌데미트 또한 재즈를 전통적인 낭만 음악의 대항수단으로 이해하였고, 무엇보다도 재즈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롭고 힘차고, 서구문명이 갖지 못한 원초적인 요인”을 자신의 음악에 수용하였다. 엄숙하고 조용한 피아노 독주회에서 재즈 춤곡 (물론 이것인 어느 정도 양식화되었다 하더라도)을 연주한다는 것은, 기존의 전통과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반항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작품의 양이 보여주듯이 힌데미트는 깊이 숙고하고, 스케치하고, 교정하면서 창작하는 작곡가의 유형이 아니었다. 그의 20년대 자필악보를 보면 뚜렷하고 굵은 선으로 그려진 악보가 특징적이며, 거의 교정을 한 흔적이 없다. 즉 힌데미트의 스케치 노트는 단지 기억을 위한 것이었다. 힌데미트의 특이한 작곡방식은 비올라 소나타 op.25 Nr.1의 창작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1922년 5월 17일 힌데미트는 출판사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내일 나는 쾰른에서 나의 새로운 비올라 소나타를 연주할 예정입니다. 이 작품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내일 기차를 타고 가면서 두개의 악장을 더 작곡해야 합니다. 혹시 이 작품을 출판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H. Danuser, Abschied vom Espressivo? Zu Paul Hindemiths Vortragsstil in den zwanziger Jahren 미발표 논문]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힌데미트가 당시 작곡가로서는 물론이거니와 연주자로서도 자신의 능력에 대한 뚜렷한 확신을 가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방식은 작품의 성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작곡을 비밀스럽고 신비한, 영감을 갖은 천재의 비범한 작업이라고 여겼던 낭만시대의 작곡가와는 다르게, 일상적 삶 속에서 시대의 템포에 맞추어 일했던 힌데미트는 깊은 심사숙고나 고민을 뒤로한 채, 작곡이라는 자신의 일을 해 나갔고,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작품은 당연히 반낭만적 경향을 보였다. 이 작품의 4악장에는 “돌진하는 속도로. 거칠게. 음을 아름답게 내는 것은 부수적 요인임 Rasandes Zeitmass. Wild. Tonschönheit ist Nebensache”이라고 써놓았다. 이 작품에서는 -이미 독주 현악소나타라는 장르가 말해주듯이- 낭만주의 시대의 화성의 우위가 사라지고, 선율중심의 음악적 진행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선율의 진행은 서정적이고 섬세한 흐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속도감과 운동감이 중심을 이룬다. 리듬이나 다이나믹의 변화 없이 ff로 계속 움직이는 4분음표의 진행은 “운동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화성보다는 선율이 위주이며, 다시 선율보다는 리듬이 중요한 음악적 요소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3) 신고전주의(1923-1934) 20년대 초부터 나타난 반낭만적 경향은 그의 음악에서 지속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힌데미트는 점차 20년대 초기의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경향에서 벗어나, 낭만 이전의 전통에 한층 더 관심을 보이면서 고유의 음악양식 확립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1923년 발표한 가곡 『마리아의 생애』에 대한 힌데미트의 회고에서 뚜렷해진다: “이 작품의 초연은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강한 인상을 청중에게 주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음악가로서의 실존에서 음악의 윤리적 필연성과 음악가의 도덕적 책임감을 느꼈다.”[『마리아의 생애』 수정판 서문. 1988, 207] 젊은 혈기의 저돌적 태도로 전통적 음악을 정면 비판했던 힌데미트는 음악가로서 숙고하는 태도와 함께, 새로움과 전통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우리는 힌데미트의 “신고전주의” 음악을 만나게 된다. 그의 20년대 중반 이후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힌데미트와 연관하여 자주 언급되는 개념들에는 “신고전주의”와 함께 “신즉물주의 Neue Sachlichkeit”, 또는 “신바로크주의”등이 있다. 이 개념들은 서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간단하게 정의를 하자면- “신고전주의”는 낭만 시대 이전의 전통적 음악에 접목한 음악경향을 지칭하고, “신즉물주의”는 낭만시대 음악의 과다한 감정표현을 거부하는 객관적인 경향의 음악을 의미하며, “신바로크주의”는 낭만시대 이전의 전통적 음악 가운데 특히 바로크 시대의 음악에서 이상적 모델을 찾는 음악을 말한다. 즉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양식과 사상을 거부하고 그 이전의 전통적 음악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들은 힌데미트의 음악양식과 모두 관련되지만, 보통 힌데미트의 중반기 음악은 가장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신고전주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힌데미트가 옛 음악양식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있다. 우선 힌데미트의 스승인 멘델스존과 제클레스는 옛 전통음악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작곡가였다. 스승의 영향으로 힌데미트는 대위법적 다성 음악양식으로 대표되는 바로크 음악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고, 이 음악양식을 음악적 자원으로 받아들였다. 바이올린 연주가로서 힌데미트는 다수의 전통적 작품을 연주했지만, 특히 바하의 현악곡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바하의 모든 바이올린 작품을 연주했다고 한다.[Oh Heesook, 1992. 14] 이러한 음악적 배경을 토대로 힌데미트는 작곡가로서 자신의 양식을 찾아나가면서, 반(反)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였고, 이는 낭만 이전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강화시켰으며, 특히 바로크의 음악관과 음악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은 힌데미트 창작 전반에 -물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즉 초기 양식에 나타난 바로크적 양식, 20년대 초반의 반낭만적 신음악도 “신고전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30년대 이후 힌데미트가 조성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옛 형식과 장르를 재수용했던 것은 당연하게 “신고전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이러한 경향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갖기 때문에, 여기서는 초기 양식, 반낭만적 양식, 신고전주의, 그리고 - 뒤에 설명될 - 조성적 폴리포니를 구분 지었다. 확실하게 인정해야 할 사실은 30년대 후반 이후의 폴리포니 양식은 분명하게 “신고전주의” 음악이며, 전통적 양식과 힌데미트의 개성이 잘 조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의 “신고전주의” 양식은 진보적 의미의 신고전주의, 즉 전통을 수용하지만 현대적 어법이 강하게 수용된 양식이다. 그러니까 신고전주의가 20세기의 “복고적” 경향을 대변한다는 일반적 견해는 여기서 언급될 힌데미트의 신고전주의적 양식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힌데미트는 혁신적인 20세기 음악에서 “거부되고 파괴되어야 했던” 전통을 새롭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보적” 전통의 수용의 예는 이미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힌데미트는 엄격하게 규정된 바로크의 대위법적 악곡 양식을 현학적인 것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바로크의 대표적 형식인 푸가를 자신의 작품에 매우 자주 도입하면서도 전통적 푸가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패로다 기법을 사용하여 재미있게 변화시켰다. 초기 작품인 『우스꽝스런 신포니에타』 op.4에서는 단순한 푸가 주제가 특색 있게 관현악화 되었고, 피아노 모음곡 『어느날 밤에 - 꿈과 체험』 op.15에서는 대규모적 푸가 구성을 통하여 전통적 형식이 풍자되었다. 또한 1921년 작곡된 『랙타임』에서는 바하의 평균율의 c-단조 푸가를 재즈 풍의 오케스트라 작품으로 편곡하였다. 즉 힌데미트는 전통을 지나가 버린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 양식에 수용하려 노력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았다. 전통의 풍자, 패로디는 이러한 힌데미트의 신고전주의적 음악관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바로크 음악양식의 영향은 새로운 음악장르, 즉 “현악 독주곡”의 현대적 도입에서도 두드러진다. 바하의 『무반주 첼로 조곡』,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파르티타』등 바로크 시대에 성행하던 이 장르는 낭만시대 이후 점차 사라졌다. 20세기에 들어 레거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모음곡』(op.42, op.91)을 작곡함으로써 다시 이 음악 장르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 넣은 이후, 힌데미트는 집중적으로 현악 독주곡에 관심을 보이는데, 그는 이 장르를 새로운 화성, 멜로디, 기법을 통해 현대적으로 부활시켰고, 이를 자신이 직접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다: 바이올린 (op.11 Nr.6, op.31 Nr.1,2), 비올라 (op.11 Nr.5 op.25 Nr.1 op.31 Nr.4), 첼로 (op.25 Nr.3). 힌데미트가 자신의 초기 음악에 영향을 주었던 -후기 낭만적, 인상주의적, 그리고 전(前)고전적 - 음악들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자신의 음악 언어를, 즉 20년대 힌데미트를 특징짓는 신바로크적 음악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준 첫 작품으로는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op.11 Nr.3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919년 작곡되었고 1921 수정되었다. 1919년에 작곡되어 수정판에 재수용된 2악장은 “느린” 부분과 “매우 생기 있는”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박자 표시 없이 자유로운 리듬이 등장하는 느린 부분의 주요 특징으로는 오스티나토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다섯 가지 종류의 오스티나토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첼로 파트든 반주 파트든- 곡 전체에 번갈아 나타나면서 곡 진행의 중심을 이루고, 작품의 연속성을 형성한다. “매우 생기 있게”(82마디부터)의 부분에서는, 낭만음악에서 볼 수 있는 서정적 멜로디나 섬세함이 아주 사라지면서 바로크 음악적 요소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첫째로, 멜로디 부분에서의 다섯 음 모티브는 계속적으로 기계적인 운동을 하면서 오스티나토 역할을 하는 반면에, 반주부 역시 화성적 측면을 무시한 채 세 개의 4분 음표로 이루어진 모티브가 규칙적 운동을 계속한다. 이에 따라 이 작품에는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계속 생겨나게 되며, 장단의 조성체계가 더 이상 작품구조의 내재적 원리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미지12> 두 번째로 이 악장을 형성하는 요소는 - 때때로 - 쉼표와 연결된, 4분음표의 규칙적인 운동이다. 또한 빠른 박절에서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음형이 힘차게 진행하면서 바로크 시대의 토카타를 연상시키는 1악장도, 4분 음표와 8분 음표 등 몇몇의 음가와 삼도 화음이나 옥타브 같은 몇몇의 음정 등 단순한 모티브로 구성되었다. 즉 이 작품은 단순하고 간결한 음악적 재료,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진 음형의 계속적 반복 등이 이 작품의 근본 모티브이다. 이러한 작곡 방식을 통해 힌데미트는, 낭만주의적 “감정격앙”, 섬세한 음색, 음의 서정성들이 사라지고, “객관주의적, 절제된 힘”, 심지어는 “기계적인 운동”으로부터 이끌어 나가는 음악을 추구한 것이다. 이렇게 바로크적 음악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수용한 예는 다양한 작품에서 드러난다. 1923년 작곡되어 힌데미트를 포함한 아마르 현악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된 󰡔현악사중주󰡕 op.32는 바하의 양식적 영향과 힌데미트의 개성이 잘 혼합된 작품으로 꼽힌다: 전 4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의 1악장은 푸가이며, 4악장은 파사칼리아로 구성되었다. 대위법적 작곡기법의 완숙한 기교가 선적으로 연결된 푸가는 거칠고, 공격적인 음향의 악곡 구조를 보여주며, 종결적인 파사칼리아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악장으로서 1악장 푸가 주제가 다시 등장하는 푸가토로 마무리한다. 여기서 힌데미트는 특이한 대위적 완벽성으로, 실내음악에는 오히려 낯선 격렬한 음향을 만들어 냈다. 또한 1악장과 마지막 악장의 토카타 부분에서는 리토르넬로 주제에 의한 구분을 통하여, 아주 거친 템포에서 각각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콘체르티노가 연주된다. 이로써 힌데미트는 -풍성하거나, 화성적, 도취적이지도 않으며, 음향적으로 넘쳐나거나 형식적으로 뒤섞이지도 않은- 개관적이며, 간결하고, 명확한 실내음악을 창출하게 된다. <이미지13> 『실내음악』 Nr.3(= 첼로 협주곡 op.36, Nr.2, 1925)에서는 모든 성부가 균일하게 연주되는 가운데, 첼로 독주 성부가 지배적이다. 이 협주곡의 2악장에서는 3개의 주제가 각각 특성 있게 구성되었다: 리토르넬로적이며, 오케스트라 총주에서 유니즌으로 연주되는 주제, 그 다음 스스로 발전하며, 다양하게 모티브 테마적으로 작업된 주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빼듯이, 반복하는 8분음표에서 진행하는 모티브(이는 동시에 제2주제의 음형적 반주 체계에서 이미 등장했었다). 이 악장의 계속적인 진행에서 제2주제의 반주체계가 단계적으로 제3주제로 대치되면서, 악장의 진행은 발전부를 재현부와 연결시킨다(몇몇의 부분은 반복된다). 2년후 작곡한 『실내음악』Nr.5(= 비올라 협주곡 op.36 Nr.4)에서는 모든 음악적 현상은 대위적 구성으로 규정되었다. 예를 들어 1악장에서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는 계속 두드리는 오케스트라 총주 위에 나타나는 독주 비올라의 음형으로 특징 지어지는데, 이는 계속적으로 악센트가 미루어지면서 새로운 마디를 구성된다. 두 번째 유형은 비올라 성부가 계속 모방적으로 카논을 이루며 반주된다. 이러한 두 가지 기본적인(elementar) 유형으로 음악이 펼쳐지면서, 발전적 구조가 나타나지 않고 리타르단도에서 단순하게 뻗어나간다. 『오케스트라 협주곡』 op.38(1925)에서 힌데미트는 이 『실내음악』의 테크닉을 일반적 교향악단에 활용하였다: 1악장에서 오보에, 파곳, 바이올린의 콘체르티노는 리토르넬로적 주제를 통해 나뉘어졌다; 2악장에는 무엇보다도 현악기가 특이하게 번쩍이는, 금속적 색채를 부여한다; 3악장은 목관악기의 건조한(düster) “행진곡”이며, 마지막 악장은 마침내 바소 오스티나토 위에 모방적 성부삽입에서 오케스트라 총주를 전개시킨다. 이 시기 힌데미트의 작곡적 경험의 종합으로서는 오페라 『카르딜락』 op.39(1925-26)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힌데미트는 자신의 기악음악에 나타난 특성, 즉 본질적인 요소로 축소된 악장 유형을, 즉 유흥음악(주막음악), 서정적 야상곡(숙녀의 노래), 콘체르티노(1막의 판토마임, 딸의 노래), 파사칼리아, 푸가토, 바소 오스티나토 등을 다시 사용했다. 이러한 절대음악적 형식의 우위를 통해서 이 오페라는 완전히 음악에서 출발하는 <음악오페라>의 예로 간주된다. 이 오페라의 다음의 특성을 통해 20세기 오페라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줄거리를 독립된 번호로 나눈 것, 절대 음악적 형식의 드라마적 가치평가, 표현의 명확성, 선율의 말하는 듯한 운동성, 타악기와 피아노로 확대된 실내 오케스트라로 받쳐지고 관악의 선호를 통해 <모험적>으로 울리는 오케스트라 색채의 간결함, 잘못된 감상성(Pathos)의 삭제, 묘사적 음악의 전반적인 거부. 이 오페라의 장면, 텍스트, 음악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복합적이고, 다양하다. 판토마임에서와 같이 음악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부분과 함께 장면의 진행과 일치하는 음악적으로 개방된 형식이 공존하고, 단순한 레치타티보적 묘사로부터 극적 절정의 긴장된 순간에 음악이 제외되는 부분까지 포함한다. 힌데미트는 이러한 독립적 번호들에서 각각 드라마적 상황의 유지를 포착하고 -예를 들어 서로 유사한 1막의 카발리어의 아리아와 3막의 장교의 아리아- 이를 거시적 관점에서 건축적으로 구성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래서 -중요한 특징만을 언급하자면- 중요한 합창 부분에 있어서 1막과 3막이 상응하며, 반면 2막은 스스로 재현부적으로 구성되었다. 종합적으로 이 시기의 작품들에 나타난 힌데미트의 일반적인 음악의 경향은 기능 화성중심의 종래 음악에서 벗어난 “수평적 선율”, 즉 대위법적 다성음악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크 시대의 음악 양식의 수용이란 관점과 함께, 낭만시대 음악의 주요특징의 “포기” 또는 “의식적인 거부” 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