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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
김미영: 뷔히너의 드라마 보이체크와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 [Berg, Wozzeck]
8,212회
김미영

저자: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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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뷔히너의 드라마 보이체크와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 [Berg, Wozzeck]

 

서양음악학 9-1, 2006, 43-73.

 

들어가는 글


   게오르그 뷔히너(1813-1837)는 정치적으로 낙후된 19세기 전반기 독일 3월 혁명 이전 시기의 학생 운동가이며 극작가이다. 그 당시의 이상주의 관념론과 고전낭만주의의 문학 흐름을 거부하는 냉철한 사실주의적 시각을 가졌던 그는 기존의 윤리관과 사회적 관습의 철폐를 반목적적 자연의 원리에 입각하여 주창하였다

   2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까지 그가 남긴 3편의 드라마( <당통의 죽음>, <레옹스와 레나>, <보이체크>)와 단편소설<렌츠>는 자연주의와 표현주의의 선구적 작품들로 오늘날 독일 문학사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뷔히너 자신이나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음악과의 특별한 연계성이 발견되지 않지만 그의 작품이 모두 20세기에 극장음악(Musiktheater)으로 음악화 되었다는 것이다.  

   뷔히너의 유작이기도 한 <보이체크>는 그 당시 실제로 일어난 유명한 범죄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독일 문학사상 최초로 억압받는 제 4계급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완성 작품이다. 형식면에서도 전통적 고전주의 미학을 탈피한 이 작품에서 뷔히너는 인간이 처한 상황과 그 실존적 위기를 다각적인 면에서 투시하고 있다

   뷔히너의 <보이체크>20세기 초반의 작곡가 A. 베르크에 의해 표현주의적 시각에서 무조음악으로 음악화 된다. 8여년의 긴 세월을 걸쳐 완성된 오페라의 제목은 그러나<woyzeck>가 아닌 <wozzeck>이다. 베르크로부터 의도적으로 바꾸어진 철자의 이유와 의미는 작품의 성립 배경을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또한 드라마와 오페라사이의 100여년의 긴 시간을 이어주는 정신사적 배경도 무조의 의미와 함께 조사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연구의 동기가 된 것은 종교, 철학, 사회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새로운 사고의 방향전환을 꾀한 뷔히너의 혁신적 사상이 어떻게 음악으로 해석되고 표현되어져 있는가이다. 한 세기를 관통하는 작가와 작곡가의 정신적 교류를 오페라의 음악 상징적 의미를 통해 추적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이 두 예술영역에서 각각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손꼽힐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논문이라는 한정된 지면의 성격상 여기서는 두 작품을 이어주는 몇 가지 중요한 논지에 그 범위를 한정하려 한다.

 

 

1. G. 뷔히너의 보이체크

 

1.1 G. 뷔히너의 생애와 사상

 

  뷔히너(1813.10.17-1837.2.19)가 활동 했던 시대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지는 유럽 자유주의의 물결이 비인 회의(1814-1815)에 의해 좌절당하는 왕정복고시대였다. 빈 회의의 결과 나폴레옹에게 지배당했던 독일은 수십여 개의 군소 군주국으로 나누어진 독일 연맹으로 재편성된다. 뷔히너가 태어난 헤센 대공국도 이러한 봉건 체제적 작은 입헌 군주국 중 하나였다. 다름쉬타트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뷔히너는 1831년 프랑스 엘사스 지방의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의사인 그의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의학과 자연과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며, 이 곳에서의 2년간의 유학 생활은 그의 진보적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뷔히너가 이 도시에 오기 1년 전인 18307월 파리에서는 부르봉 왕조의 복고적 전제정치에 대항하여 새로운 시민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봉건적 귀족정치가 몰락하고 시민 계급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새로이 세력을 잡은 자본주의적 시민 사회가 성립하였다. 뷔히너는 여기서 자유주의자와 가난한 민중이 합세하여 왕정 귀족정치에 대항한 결과가 부르주아지 왕국 즉 금력정치(Geldaristokratismus)로 귀결되는 것을 보았고대다수 민중들의 경제적 궁핍은 외면당하여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와의 대립이 심화되는, 물질이 지배하는 사회적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즉 보편성과 이성을 앞세운 계몽주의적 이상의 귀결이라 할 수 있는 시민혁명은 중산계급의 이기주의로 인해 또 다른 형태의 전제정치를 가져오게 되고, 대다수 가난한 민중의 생활은 더욱 악화됨을 발견한다

  헤센공국의 유학기간 제한 규정에 따라 1833년 오버헤센지역의 기센대학으로 돌아온 뷔히너는 의학과 더불어 역사와 철학도 공부했으며, 한편으로는 독일의 정치적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 당시 정치적으로 낙후되어있던 독일은 아직 봉건제도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에 대항하는 주체는 재산과 교양을 갖춘 시민계급이었다. 이미 물질이 또 다른 권력으로 등장하는 프랑스 시민 사회의 모순을 경험한 뷔히너는 이들 정치적 이상주의를 꿈꾸는 시민계급 자유주의자들과 입장을 달리한다. 뷔히너의 생각에 순전히 물질적인 시대에 교양을 갖춘 계급이 이념을 가지고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1)  그는 다수의 가난한 민중이 혁명의 주체이자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834년 소규모의 비밀 조직인 인권협회를 기센과 다름슈타트에서 조직한 뷔히너는 하층민을 선동하기 위해 헤센 급전을 작성하였다. 이는 헤센의 정치적 상황과 지배계급의 부패를 고발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활동은 밀고를 당해 동료들은 체포되고 자신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함으로써 좌절되고 만다

  뷔히너의 자연과학 연구와 문학 창작은 이러한 그의 정치적 활동이 좌절된 이후에 이루어진다. 그의 자연이론과 문학 작품에는 인간의 역사와 사회적 현실에서 깨달은 냉철한 시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뷔히너는 지금까지 인간이 신봉해 왔던 더 높은 현실로서의 형이상학적 질서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그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 더 큰 의미에 관여하지 않는다. 즉 자연의 존재 위에 어떤 목적이나 이념도 인정치 않는다. 이러한 반 목적론적 세계관을 뷔히너는 183611월에 취리히 대학에서물고기의 신경조직에 관하여라는 테마로 한 강연 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자연은 목적들로 엮여져 있지 않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의 목적이 되는 끊임없는 연쇄의 고리 속에 마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자체로서 부족함이 없이 충분하다. 모든 것은 그러니까 그 존재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다”2) 목적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모든 만물은 어느 최후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그러한 완전을 향하여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뷔히너가 이를 인정치 않고 자연을 생명 그 자체로만 해석한 다는 것은 곧 자연위에 군림하는 별도의 정신세계를 인정함으로써 세계사가 세계정신에 의하여 최후의 절대적 목적을 향하여 변증법적으로 단계적 발전을 한다는 헤겔의 목적론적 역사관과 그리고 독일 고전주의, 낭만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이상주의/관념론 Idealismus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 것을 의미한다.”3)  뷔히너에 의하면 역사는 숭고한 이념, 즉 형이상학적 필연성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소산일 뿐이다. 그는 역사에서 단지 물질적 삶에 의해 지배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 고리를 발견한다. 또한 개체로서의 인간의 성향과 행위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가 처한 물질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어진다고 본다. 그의 유물론적 시각에 의하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어떤 높은 이념이나 천재의 숭고한 행위가 아니다. 즉 자연과 역사는 인간에 의해 완성을 향해 더 높은 단계로 만들어져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Determinismus)을 주장한다

  그의 첫 희곡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뷔히너의 비판적 분석을 내용으로 한다. 주인공 당통은 여기서 더 이상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당통은 자신이 더 이상 역사의 주체가 아님을 자각 한다. 역사는 인간의 이상과는 달리 굳건한 철칙을 가지고 있고 어떤 천재가 그것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통이 관념적 혁명이데올로기에 회의를 품고 적나라한 자연과 삶을 추구했다면, 그의 단편 소설의 주인공 렌츠“4)는 같은 이유에서 사실주의 예술관을 피력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당연히 그렇게 존재해야 될 그대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려고 멋대로 뜯어 고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그 분의 일을 약간 모방 하는 것일 뿐입니다. 나는 모든 것에서 삶, 존재의 가능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곤 그것이 아름다운가, 추한가하는 물음을 제기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만든 작품에 살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내재되어 있다는 느낌은 미와 추의 이분법을 능가하는 것이고, 그것만이 예술작품에서 유일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5)

 

  뷔히너는 여기서 렌츠의 입을 빌어 자신의 반전통적인 예술관을 토로하고 있다. 우선, 그는 반이상적, 반 목적적 관점에서, 전통적으로 예술의 표현 영역이었던 의 범주를 거부한다. 고전적 미학에서 는 인간을 진리와 선으로 이끄는 중재의 기능을 하게 된다. 미적 예술작품의 내용과 형식에는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질서가 상징적으로 나타나야 했다. 뷔히너에게 그러나 실질적인 삶과 동떨어진 이러한 이상주의적 형상들은 나무인형들에 불과하다”6).  선별되어지고 이상화되어진 자연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기획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에 나타나야 할 것은 이런 인위적으로 미화된 현실이 아니고 왜곡되지 않은, 즉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그는 예술의 표현 영역을 로 까지 확대시킨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 영역을 현존재의 아름다운 면으로만 국한시키는 이상주의는 인간 자연성에 대한 가장 치욕적인 경멸”7)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상주의 예술가들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주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질적 결핍으로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불완전한 인간세계와 한 현실은 은폐되는 것이다. 그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부분 이런 불완전한 현실의 극복을 위해 끊임없이 높은 세계로 고군분투하는 파우스트적인 거대한 주체였다. 이에 반해 뷔히너는 지금까지 예술세계에서 변방에 머물렀던 한 인간에 그의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그의 작품에서는 정신적 결함을 지닌 자, 살인자, 창부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존재도 비극이나 그와 같은 진지한 묘사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동일한 물질적, 사회적 환경에서 모두 동일하기 때문이다. 뷔히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 통일의 원칙 및 신분규정과 같은 보편적 원칙을 거부하고 독일 문학사상 최초로 미적 또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대상이나 주제를 다룬 작가”8)이다

  ’보잘 것 없는 삶의 묘사와 그 고통의 표현으로까지 영역을 확대시킨 그의 예술론에서 특이한 점은 바로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인간의 마음 (Mitleid)이 중시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동정과 연민은 전통적 시학에서의 정화와는 다른 의미이다. 고통과 공포를 몰아내고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함께 느끼고 깨달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렌츠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인간을 사랑해야합니다. 개개인의 고유한 본질을 정확히 알려면 말이죠, 그러면 틀림없이 그 누구도 그렇게 보잘 것 없거나, 추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9) 이와 같이 뷔히너가 추구하는 사실주의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요청한다. 즉 사랑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그러한 예술창조의 조건이며, 또한 그 예술작품을 접하는 인간에게 전파되는 궁극적인 작용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예술론이 현실을 베끼는 듯이 모방하는 사실주의와 구별되는 이유이다. 사랑과 동정에 근거한 그의 미학은 휴머니즘과 연결된다. 또한 그는 이러한 감정의 자극을 통해서 현실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렇듯 뷔히너의 시작활동은 그의 정치적 활동의 연장에서 파악될 수 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의 목표였던 고통 받는 가난한 자의 구제는 그의 시작활동에서도 실천적 의지로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슈트라스부르크로 망명한 이후 뷔히너는 시작활동이외에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했다. 1836<돌 잉어의 신경조직에 관하여>란 논문을 취리히대학에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그 해 10월 취리히로 이주하여 두개골 신경에 관하여라는 테마로 취리히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렌츠>, <레옹스와 레나>, <보이체크>는 이러한 자연과학 연구와 더불어 쓰여 졌다. 18371월 뷔히너는 폐혈증이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리게 되고  한 달 후 2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2 미완성 유고 작 <보이체크>

 

  1.2.1 성립과 출판

 

  <레옹스와 레나>를 제외한 모든 뷔히너의 작품은 실제로 생존했던 인물들을 소재로 한다. 프랑스 혁명의 영웅이자 패배자인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정신질환에 시달렸던 질풍노도시대의 시인 렌츠가 그들이다. 이 중 그의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인 보이체크는 그 당시 실제로 애인을 살해하여 교수형에 처해진 이발사 크리스티안 보이체크10)를 모델로 하고 있다. 뷔히너는 이 사건을 <국립의학 학회지>에 실린 클라루스박사의 법의학 감정서를 통해 알게 된다. 사건당시 보이체크의 정신상태에 대한 의문에 박사는 그의 감정상태와 통제능력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따라 그는 1824827일 라이프찌히 광장에서 공개처형 되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건당시 보이체크의 정신상태에 대해 학자들 간에 거센 논쟁을 낳게 했다. 보이체크사건 이외에 1817년과 1830년에 일어났던 그와 비슷한 살인사건11)에 대한 재판기록도 작품의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

  뷔히너의 보이체크의 내용은 클라루스의 감정서를 기초로 하고 있으나 그 관점을 달리한다. 클라루스가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행동주체로서 파악하는 시민계급의 인간상의 기준에 따라 죄의 유무를 판단하였다면, 뷔히너는 한 인간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동기와 상황, 즉 사회적 환경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4개의 자필본의 성립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보이체크>는 완성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4개의 서로 다른 초안들이 단편적인 상태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들은 각각 뷔히너 연구에서 H1, H2, H3, H4로 불린다. 1원고( H1)21장면으로 구성되었고 주로 살인사건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장면들이 짤막한 스케치형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9개의 장면으로 된 제 2원고( H2)에서는 주인공의 주변인물들이 다양하게 확대되어, 살인으로까지 이르게 되는 주인공의 사회적 환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12) 3원고는 단지 2장면뿐이어서 다른 원고에 삽입하기위해 쓰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에 쓰인 제4원고 (H4)17장면으로 구성되었고 H1H2의 종합적인 경향을 보여 잠정적 최종원고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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