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세페 베르디(Guiseppe Verdi, 1813 레 론콜레 -1901 밀라노)
베르디
이태리 작곡가. 부자상인 바렛찌의 도움으로 부쎄토와 밀라노에서 기본적인 음악교육을 받음. 밀라노에서 음악원 낙방 후 파이지엘로의 제자인 라비냐에게서 개인수업을 받음. 1836년 부쎄토 시립오케스트라와 음악학교의 지휘가가 됨. 같은 해 후원자 바렛찌의 딸과 결혼. 주로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 그의 교회관련적 음악들은 오페라가 갖는 극적인 요소들을 포용. 미사, 작은 합창곡등도 남김. 1839년 그의 첫 번째 오페라 「오베르토」를 밀라노에서 상연하여 성공을 거둠. 하지만 불행한 사건들(부인과 아이의 사망) 속에서 쓰여진 부파소재의 두 번째 오페라인 「왕궁의 하루」(1840)는 실패.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1842)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의 심각하고 극적인 양식은 이후 베르디 작곡방식의 모델로 정착한다. 또한 이 작품의 애국적인 소재는 한동안 지속되어 10여 개가 넘는 작품들에서 계속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베르디는 문학적 소재에도 관심을 가져 「멕베드」, 「루이자 밀러」 등을 작곡한다. 「루이자 밀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오페라는 특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나 그의 드라마 발전과정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르디는 1849년부터 부쎄토 근교에 산타가타 농장을 구입하여 여가수 스트렙포니와 함께 생활한다(결혼 1859).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50년대에 서로 다른 성격의 세 오페라를 통해 절정에 도달한다: 「리골렛토」(성격극), 「일 트로바토레」(성악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성격극과 성악오페라의 합성). 원래 1858년 나폴리를 위해서 쓰여졌으나 검열을 피해 1859년 로마에서 상연된 「가면무도회」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이후 긴 시간 간격들을 두고 세익스피어의「멕베드」제2판과 쉴러의 「돈 카를로스」 등이 쓰여졌다. 이들 작품에서 실험적으로 준비되던 것들은 1870년 수에즈운하의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쓰여진 「아이다」에서 결정체로 나타난다. 지금도 이 오페라는 창의력, 구성, 음악적 긴장, 형식을 가장 잘 조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1873년에는 「현악4중주 e단조」가, 그리고 1873/74년에는 소설가 만죠니의 추모를 위해 「레퀴엠」이 작곡된다. 이 레퀴엠의 초연 이후 오랫동안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중단된다. 1879년이 되어서야 베르디는 보이토의 권고로 다시 오페라를 쓰기 시작하여 「오텔로」를 작곡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에는 서정코믹작품인 그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1893)를 작곡한다. 아내의 죽음(1897)을 전후에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테데움」과 「스타바트 마테르」도 쓰여진다.
베르디는 밀라노에 음악인들의 양로원인 '휴식의 집'을 설립하고,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모든 수입을 그 기금으로 사용했다.
베르디는 로씨니, 벨리니, 도니제티의 음악스타일을 따르면서도 단순하면서 힘있고 긴장감 있는 자신의 음악스타일을 발전시킨다. 일찍부터 반(半)대본가로도 활동해 그가 원하는 대로 운율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의 대본들의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 대오페라의 요소인 청각적이며 무대적인 효과들도 그의 오페라에 적용시켰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 내적인 감정들에 대한 표현과 상황에 맞게 세밀하게 구성되는 멜로디에 있었다. 그의 가장 개성적인 오페라 스타일의 하나는 복합선율적인 앙상블로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에서 서로 대립되는 선율들을 대치시켜 동시에 울리게 하는 것이다.
점차 베르디에게서 음향기법이 다소 풍부해졌다 해도 그의 오케스트라는 한번도 극의 전체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요소로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작품들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