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Weber, Carl Maria Friedrich Ernst von, 1786.11.18 또는 19, 세례일: 20. Eutin/ Holstein - 1826.6.5. London)
독일의 작곡가. 열 살 이후부터 여러 도시에서 피아노를 배웠다(힐드부르크하우젠: Johann Peter Heuschkel, 1796), (살츠부르크: M. Haydn, 1797, 뮨헨: J. N. Kalcher 1798-1800)). 그의 작품 1, 6(1798)은 작은 푸게타들을 모은 것이고, 작품 2, 6(1800)은 변주곡들인데 모두 살츠부르크에서 작곡되었다. 1801년 베버는 다시 한번 살츠부르크에서 미하엘 하이든(M. Haydn)에게 배웠다. 1803년에는 비엔나에서 포글러 수사(Abbé Vogler)에게 배웠다. 포글러의 추천으로 베버는 1804년 브레슬라우 시립극장의 카펠마이스터가 된다. 1806년 뷔르텐베르크의 왕자 오이겐은 그를 자기 궁정의 음악감독의 명칭을 부여한다. 베버는 1807-10년 슈트트가르트에서 루드비히 공작의 비서가 된 후 만하임으로 간다. 그 곳에서 베버는 다름슈타트에 사는 포글러에게 다시 공부를 하러 다닌다. 베버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특히 그의 즉흥적 연주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베버는 1813년 프라하 시립극장의 오페라 감독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1817년에는 성악가 카롤리네 브란트(Caroline Brandt)와 결혼한다. 1816년 드레스덴의 독일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 된다. 이 시기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으로부터서도 오페라를 써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가 1826년 4월 12일 『오베론』을 지휘하기 위해 영국 여행에 올랐을 때에 이미 결핵병에 걸린 상태였다. 그는 영국의 궁정음악가 스마트(George Smart)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바그너의 활동에 힘입어 그의 주검은 1844년 드레스덴에 되돌아와 안장된다.
베버의 음악사적 위치는 특히 그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를 통해 두드러진다. 독일의 음악문화에서 이 오페라는 거의 "국가적" 또는 "국민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베버의 음악적 업적이 바로 이 한 작품으로 설명되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작이 여타의 작품들을 제치고 이렇게 극단적으로 하나만 부각되는 경우는 음악사에서 흔치 않은 현상이다. 이 작품은 흔히 두 가장 방향에서 해석된다. 하나는 "독일적"(또는 "민족적")인 면에서, 다른 하나는 "낭만적"인 면에서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이 오페라가 지배적인 이태리 오페라와 -그리고 부차적으로 프랑스 오페라와- 다른 점을 강조하는 해석이다. 소재도 독일의 민속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음악도 이태리의 것과는 달랐기에 그러한 해석이 가능했다. 특히 독일의 징슈필 전통을 이었지만 그 이전의 징슈필이 갖지 못한,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음악을 성공시킨다. 또한 독일민요적인 노래들(예: 「신부 친구들의 노래」, 「사냥꾼의 합창」)은 19세기에 거의 유행가처럼 독일 전역에서 널리 불렸다. 이태리적 콜로라투라 아리아와 프랑스의 노래 장르 로망스와 근접한 음악도 보이지만, 이 오페라는 전반적으로 더 새롭고 극적인 음악의 창출에 성공한다. 이 오페라가 일본인들에 의해 『마탄의 사수』라고 번역된 것은 단순히 줄거리 전개를 나타내는 면에서 그렇게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이 나폴레옹의 지배에 대한 독일민족의 "자유"를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라는 면에서 보면 『자유의 사수』라는 원제목의 직역이 더 낫다.
이 작품은 그가 죽은 후에도 민족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작곡가들로부터 독일 오페라의 모델로 받아들여졌다. 그에 걸맞게 이 오페라는 독일적인 설화에 바탕을 둔 대본에다가 독일의 민속적 노래와 춤을 담고 있다. 이 오페라의 극적인 면을 더 상승시킨 것은 다양한 음색을 내는 오케스트라 편성에 있었다. 그는 당시까지 잘 사용되지 않았던 음역들이나 음색들을 악기들에게 요구하여 새로운 음향을 만들어냈다. 이 일에는 호른, 클라리네트, 파곳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한 것과 오케스트라를 "반주용"으로만 쓰지 않고, 거의 "교향적"으로 사용한 것이 큰 효과를 낸다. 또한 극적인 내용과 음악적 내용이 함께 가는 데에는 시각적 효과와 음향적 효과(긴장도 높은 화현, 감7도 등을 이용한 반음계적 진행, 그림음악적 효과 등)까지 같이 작용하게 하여, 관객을 양쪽 면에서 사로잡는다. 또한 일정한 인물을 라이트모티브적으로 묶어 등장인물의 성격을 음악적으로 두드러지게 한다.
베버는 노래집 『리라와 칼』(Leyer und Schwerdt 1814), 칸타타 『싸움과 승리』(Kampf und Sieg 1815)와 같은 애국적 음악을 써서 그것들이 널리 연주되었고, 그가 애국적 작곡가라는 명성을 안겨 주었다.
그의 기악은 박절적으로 균형 잡혀있고, 형식적으로 명료한, 비교적 접근이 쉬운 것이다. 그가 남긴 두 개의 심포니는 하이든/모차르트와 가까운 종류의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에서도 그는 피아노 음악적 바탕을 자주 드러냈다. 줄기차게 반복하는 부점 붙은 리듬의 위에 선율적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들이 그런 점이다. 그 예로 그의 대중적인 『무도에의 권유』(Aufforderung zum Tanz op. 65, 1819)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협주곡에서는 연주자들이 자기들의 연주기술을 화려하게 발휘할 수 있는 곡들을 보여준다(피아노 협주곡: C장조, Es장조, f단조 Konzertstück. 클라리네트 협주곡: f 단조, Es장조, Es장조 concertino). 이러한 곡들에서는 후기로 갈수록 극적이고 서정적인 면이 증가한다. 이는 그가 단지 절대음악적으로만 작곡하지 않고, 음악과 줄거리를 관련시키는 경향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스스로 피아니스트였던 관계로 자신의 조건에 맞는 피아노 음악을 추구한다. 아주 흔히 보는 삼도와 옥타브 음정의 동시적 울림과 더불어 옥타브를 넘는 음정(12도)을 한 손으로 치게 한다. 또한 작은 피아노 소품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낭만주의적 성격소곡의 초기적 단계를 보여 준다. 또한 그의 피아노 소나타들이 형식적 측면이 아니라, 개성적 표현을 더 중시한 것이었는데, 이것 역시 고전주의 음악과 거리가 있는 낭만적 성향이라 할 수 있다.
베버는 『오이뤼안테』와 『오베론』의 오페라 개혁을 통해서도 기억해야할 작곡가이다. 『오이뤼안테』에서는 처음으로 번호 오페라가 아닌 일관작곡된 형식을 선보인다. 그는 별개의 분리된 곡들을 하나로 묶는 번호 오페라보다는 일관작곡된 것이 극적으로 더 효과적인 오페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오베론』은 각 장면들의 시각적 측면과 음악적 측면을 연결시켜 줄거리를 전개하는 식의 새로움을 시도한 오페라였는데, 그의 의도는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했다.
베버는 문필활동을 통하여서도 자신의 새로운, 민족적, 낭만적 음악관을 피력하였다. 또한 지휘자와 오페라 극장의 운영자로서도 성공적인 사람이었다.
베버는 후대에 오는 음악가들, 예를 들어 베를리오즈, 바그너, 말러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바그너에게는 음악적 모델 역할을 했다.
주요 작품들
오페라
『숲에 사는 벙어리 소녀』(Das stumme Waldmädchen, 1800),
『페터 슈몰』(Peter Schmoll, 1803),
『실바나』(Silvana 1810),
『하부 하싼』(Abu Hassan 1811),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 1811, 1817-20, 초연: 1821.6.18),
『세 사람의 핀토』(Die drei Pintos, 1820. 미완성 작품. 말러에 의해 1888년에 완성됨),
『프레치오자』(Preziosa 1821),
『오이뤼안테』(Euryanthe 1823),
『오베론』(Oberon 1826).
무대음악
『투란도트』(Turandot op. 37, 쉴러의 극본을 위한 무대음악 1809).
심포니
No.1 C장조 op.11(1810),
No.2 C장조, 작품번호 없음(1807).
관현악곡
투란도트 서곡(Ouvertüre zu Turandot 1809),
경축 서곡(Jubel-Ouvertüre 1819).
협주곡들
플루트(Romanza siciliana g단조, 1805),
호른(Concertino e단조 op. 45, 1806, 수정본:1815),
첼로(Grand potpourri D장조 op. 20, 1808),
바이올린(Andante e rondo ung. c단조, 1809, 파곳을 위한 수정본: op. 35, 1813),
파곳(F장조 op. 75, 1811, 수정본: 1822),
풍금(Adagio und Rondo F장조, 1811),
클라리네트(Concertino: op. 26, 1811 // Konzert: f단조l op. 73 그리고 Es 장조 op. 74, 1811 // Konzertstück f단조 op. 79, 1821),
피아노(C장조 op. 11, 1810, E장조 Dur op. 32, 1812).
실내악
클라리네크 오중주 op. 34 (1815)
클라리네트 사중주 (1809)
플루트, 첼로, 피아노르 위한 삼중주 op. 63 (1819)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9개의 변주곡 op. 22 (1808)
기타아와 피아노를 위한 디베르티메토 op. 38 (1816)
클라리네트와 피아노를 위한 Grand duo concertant op. 48 (1816)
피아노 음악
변주곡(op. 2, 1800 // op. 5, 1804 // op. 7, 1807 // op. 9, 1808 // op. 28, 1812 // op. 40, 1815 // op. 55, 1817),
Momento capriccioso op. 12 (1808),
Grande polonaise Es 장조 op. 21 (1808)
소나타: C장조 op. 24 (1812), As장조 op. 39 (1816), d단조 op. 49 (1816) und e단조l op. 70 (1822),
Rondeau brillant E장조 op. 62 (1819), 」
『무도에의 권유』(Aufforderung zum Tanz op. 65, 1819)
Polacca brillante E장조 op. 72 (1819)
『여섯 개의 소품』(6 kleine leichte Stücke op. 3, 1801),
『네 손을 위한 6개의 소품』(6 Stücke op. 10, 1809),
『네 손을 위한 8개의 소품』(8 Stücke op. 60, 1818/19).
미사
『큰 청소년 미사』(Große Jugendmesse E장조, 1799)
Es장조 1818,
G장조 op. 76, 1819)
미사 이외에 두 개의 봉헌음악(Offerorium)도 있다.
칸타타
『첫 소리』(Der erste Ton, 낭송, 합창, 관현악 사용, op. 14, 1808),
『주는 자신의 질서대로 일하신다』(In seiner Ordnung schafft der Herr, op. 36, 1812),
『싸움과 승리』(Kampf und Sieg op. 44, 1815),
『경축 칸타타』(Jubel-Kantate, op. 58, 1818). 가사가 미사의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미사"라 불려도 상관 없음.
『자연과 사랑』(Natur und Liebe op. 61, 1818)
『테오도르 쾨르너 노래집 리라와 칼』(Gesänge aus Theodor Körners Leyer und Schwerdt, op. 41, 42, 43, 1814-16)
기타 수많은 가곡(피아노 반주, 기타아 반주), 이태리 아리아 등의 성악곡들이 있다.
참고문헌
작품전집: Musikalische Werke. H. J. MOSER(편찬), Augsburg. Braunschweig 1926-39,
문필전집: Sämtliche Schriften, G. KAISER(편찬), Berlin, 1908.
작품목록: W. Jähns: Carl Maria von Weber in seinen Werken, Chronologisch thematisches Verzeichnis, Berlin, 1871.
Blume, Friedrich: Classic and Romantic Music, A Comprehensive Survey, M. D. Norton/Herter Norton(번역), Norton & Company, 1970.
Einstein, Alfred: Music in the Romantic Era, W. W. Norton & Company,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