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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루드비히 반 [Beethoven, Ludwig v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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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차호성, 홍정수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목차>
• 설명1
• 설명2
•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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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링어(Max Klinger)의 베토벤 조각상, 1902



설명1

1770년 12월 17일, 베토벤이 본에서 태어났을 때는 이미 신동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명성이 전 유럽에서 걸쳐 퍼져있을 때이었다. 이러한 신동에 대한 동경을 가진 베토벤의 아버지(Johann van Beethoven, 1740-1792)는 본의 궁정악단의 테너가수로 있으면서 베토벤을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1779년 10월부터 베토벤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평균율 악보를 가지고 있던 궁정악단의 오르간주자인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로부터 음악적인 기초지식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본에 계속 거주하며 모차르트에게 배우기 위하여 잠깐씩 빈을 방문하였으며, 모차르트가 죽은 이듬해(1792)에 하이든(Joseph Haydn, 1731-1809)에게 작곡을 배우기 위하여 빈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하이든에게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음악사적으로 베토벤 음악의 초기시대라고 구분되어지는 비엔나시대(1802년경까지)가 시작된다. 이때에 베토벤은 그의 음악에서 전통을 따르고 있었으며, 균형적인 멜로디의 구성을 추구하고 완숙한 악곡 구조를 가진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초기의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삼중주곡, 현악 사중주곡 그리고 교향곡 1번과 2번 등이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청각장애로 인한 자살결심을 했던 1802년부터 1814년경까지를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기로 보는데, 이 시기에 그의 음악은 음악외적인 내용을 증가시켜 새로운 구조와 형식에 이르고 있다. 베토벤은 이 시기에 자신의 음악을 고전적 형식으로부터 탈피시키려 하였으며 더욱 자유로운 주제의 취급과 선율이나 화성에 있어서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관현악법에 있어서의 변화 등도 추구하였다. 교향곡 3번 『영웅』이나 5번 『운명』, 6번 『전원』과 바이올린 협주곡이 작곡되었으며, 피아노 협주곡 5번 일명 『황제』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에서 후기시대는 1814/15년부터 1827년 3월 26일 그가 비엔나에서 사망할 때까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특히 1819년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후 그는 자신의 영감에만 의존하여 창작하였는데, 이상적인 인간성을 위한 발언을 하고 시적인 내용과 섬세한 구조, 집중력 등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설명 2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플랑드르(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의 뤼티히와 메헬른 사람들이었다. 그는 베토벤과 똑같이 루드비히라 불렸다. 그는 뢰벤과 뤼티히의 합창단원으로 일했고 1733년 독일의 본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1771년 이후 선제후의 카펠마이스터로 일했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은 할아버지가 일하던 악대의 테너 가수로 일했다. 베토벤은 일곱 자녀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곱 중 세 명은 일찍 죽었고, 베토벤은 남은 형제들 가운데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베토벤은 일찍부터 음악성을 보였는데, 이것이 아버지로 하여금 대단한 욕심을 품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는 어린 베토벤에게 열심히 쳄발로를 연습하도록 강요하였다. 어린 베토벤의 주요 선생으로는 궁정 오르가니스트였던 에덴(Gilles van den Eeden)이 있었다. 물론 주위의 친지 음악가들도 베토벤을 가르쳤다. 그 덕에 베토벤은 6세 때에 처음으로 청중들 앞에서 공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베토벤의 나이를 두 살이나 줄여 사람들에게 알릴 정도로 신동 모차르트를 의식했다. "신동 베토벤"을 시도한 행사는 무참히도 실패했다. 강요된 연습은 연주 실력을 대단하게 만들지 못했다. 1781년부터는 궁정의 다른 오르가니스트였던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에게 쳄발로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은 베토벤의 연주 기량을 크게 발전시켰을 분만 아니라 친구처럼 지냈고 베토벤의 앞날을 위해 동분서주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베토벤이 베토벤이 된 것은 "신동 베토벤"을 기획한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이 네페였다. 베토벤은 그 다음 해에 궁정의 보조 반주자로 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바하의 {평균율}과 칼 필립 에마누엘 바하의 쳄발로 곡들을 가르쳤다. 베토벤은 또한 루케지(Andrea Lucchesi)를 악장으로 하는 궁정 악대에서 당대의, 여러 가지 음악을 섭렵했다. 1783년 베토벤의 정상적인 음악교육은 끝나고, 그는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네페?베토벤에게 궁정의원이었던 브로이닝(Helene von Breuning) 여사를 소개했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베토벤의 앞길을 열어 주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베토벤은 브로이닝 집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집으로부터 환영을 받는 손님이기도 하였? 브로이닝을 통해 베토벤은 바이올리스트 리스(Franz Anton Ries)를 알게 되어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다. 그 대신 베토벤은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Ferdinand)에게 음악을 가르친다. 또한 그는 발트슈타인(Ferdinand Ernst von Waldstein) 백작을 알게 된다. 발트슈타인은 네페와 함께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를 움직여 베토벤을 비엔나로 보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은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1787년 비엔나로 간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만난다. 하지만 베토벤의 어머니가 위독한 상태라서 후일을 기약하고 다시 본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본에 돌아와 스스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하는 하는 새로운 임무에 직면했다. 그의 아버지는 "신동 베토벤" 기획이 좌절된 후 술에 빠져서 가정을 추스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베토벤은 다시 본에서 궁정 오케스트라, 교회, 아카데미의 일을 하며, 작곡도 한다. 그가 본에서 쓴 작품들은 많다고는 할 수 없다. 1792년 이미 국제적인 인물로서 잠깐 본에 들른 하이든에게 소개된다. 이 때에 하이든은 비엔나에서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베토벤은 -발트슈타인의 주선으로- 다시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재정 지원을 받아 다시 비엔나로 가게 된다. 이 때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공부한 후에 다시 본에 돌아와 음악가로서 일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하지만 이런 계획은 후에 프랑스 군대의 라인 지역 점령과 그로 인한 선제후의 폐위로 인해 무산되고 만다). 하이든에게서 작곡 공부를 시작한 베토벤은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 별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틀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 하이든의 가르침에 대해 내적으로 저항했다. 그 대신 그는 하이든 모르게 쉥크(Johann Schenk)에게 가서 배운다. 하이든이 2차로 런던을 여행할 때에 베토벤은 알브레흐츠베르거(Albrechtsberger)에게 대위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는 엄격한 대위법의 규칙들에 대해 못마땅해 했다. 또한 그는 살리에리(Atonio Salieri)에게서 이태리 성악 작곡 방식을 배웠다. 푀르스터(Emanuel Aloys Förster)에게서는 실내악 형식을 배운다. 이러한 음악공부는 베토벤의 음악을 더욱 다양하고 성숙하게 한다. 

베토벤의 비엔나 생활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재정적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1794년 프랑스 군대에 의해 쾰른의 선제후 제도가 없어지면서 그의 지원은 끊기고 만다. 비엔나는 각 궁정에 오케스트라가 있어서 음악가로서 활약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그는 작곡과 연주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다. 그는 비엔나에서 새로운 후원자들을 확보한다. 리히노브스키(Lichnowvsky) 공과 에르되디(Erdödy) 백작 같은 귀족들의 집에서 거하면서 그들 가족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러시아 대사 라주모브스키(Rasumowsky)백작, 에스테르하지(Esterhazy)공, 루돌프(Rudolf) 대공 등 당대의 귀족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 귀족들과 일반 시민들은 베토벤에게 수많은 작곡 주문을 통해 그가 음악가로서만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베토벤은 분주한 음악가 생활을 비엔나에서 보낸다. 열정적인 음악활동을 통해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미래는 무지개빛처럼 보였다. 그의 후원자들(루돌프, 로브코비츠, 킨스키)은 그를 위한 재정 부담을 약속했고(1년에 4000굴덴의 종신연금), 악보출판사는 높은 작곡료를 지불했다. 그는 원하는 곳에서 음악회를 열 수 있었고, 그가 음악을 가르칠 마음이 생길 때면 많은 상류층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 왔다. 그는 그 이전의 음악가들이 겪어야 했던 재정적 곤란을 거의 몰랐다. 그를 일컬어 최초의 자유로운 작곡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1796년 그의 귀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1802년 그는 비엔나 근교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쉬면서 그 유명한 유서를 쓴다. 그 내용은 절망 가운데서 동생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절망적인 기분에 잠겨 살면서 주위 사람들과 자주 다투었고, 그의 가장 친한 후원자들도 그를 멀리하게 된다. 1808년에는 음악회를 전혀 열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음악사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연서인 {불멸의 연인에게}(An die unsterbliche Geliebte)라는 편지를 1812년에 쓴다.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였는지는 호사가들의 엄청난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아직도 명확하게 누구를 향한 편지인지 알 수 없다. 한때 요세피네 폰 브룬스빅(Josephine von Brunsvik)을 위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등장했으나, 그녀에게 보내진 E雅??편지가 발견되면서 이 설은 시들해지고 말았다. 1810년대에 그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한다. 그는 밀려드는 작곡 주문에 다 응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해인 1815년에는 분위기가 반전한다. 그의 후원자들은 죽거나 비엔나를 떠났고, 음악계는 롯시니 열풍에 빠진다. 1819년 그는 완전한 귀머거리가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작곡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825년 그는 병마와 싸우다가 2년 후인 1827년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온 유럽의 지식층은 애도를 표했다. 20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례했다. 시인 그릴파르쳐는 그를 위해 조사를 낭독했다. 횃불을 들고 행진하던 젊은이 가운데는 슈베르트도 있었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세 시기로 나뉜다:

①초기 비엔나 시대, 1802년경까지.
비엔나의 전통을 따르는, 주로 하이든 식의 작품들을 작곡한다. 교향곡 1번, 2번, 피아노 소나타 작품 2, 7, 10, 13(비창), 14, 22. 베토벤은 스승으로서의 하이든에게는 별로 만족하지 못했으나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하이든으로부터 형식적인 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②중기, 1802-12/14
이 시기는 베토벤의 창작의욕이 가장 왕성할 때이다. 그는 밀려드는 주문을 다 받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주문을 받았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다른 시기의 것들보다는 더 많이 연주된다. 교향곡 3번-8번. 피아노 소나타 작품26, 27, 28, 31, 49, 53(발트슈타인), 54, 57(열정), 78, 79, 81a(고별), 90. 32피아노 변주곡(WoO. 80)피아노 협주곡 3번-5번. 현악사중주 작품59, 74, 95. 삼중주 작품70, 97. 첼로 소나타 작품 69.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 90. 합창 판타지(작품 80). C장조 미사(작품86). 에그몬트 서곡. 

③후기, 1820년대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들을 수 없을 때에 작곡한 것들이다.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사중주들은 한 때 귀머거리 베토벤의 작품으로 정상을 벗어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오늘날은 베토벤의 작품들 중 가장 심각하고 진지한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교향곡 9번. 피아노 소나타 작품101, 106, 109, 110, 111. 장엄미사(작품 124). 현악사중주 작품 127, 130, 131, 132, 135. 

○베토벤의 테마 모티브 가공 기법:
베토벤은 아주 작은 구조의 모티브를 선호했다. 이 모티브는 연속적으로 이어져 나와 주로 음악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작은 모티브들은 더 큰 테마의 일부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작은 모티브가 테마의 균형감각을 잠시 잊게 하고 계속적인 "추구"와 "돌진"의 회오리로 향하게 한다. 이 모티브는 잠시 휴식도 하고, 길게 늘려지기도 하고, 축소도 되고, 다른 테마 모티브 음형들에 의해 잠시 가려지기도 하지만, 곧 다시 새로운 힘을 가지고 나타난다. 특히 그의 모티브들에서 많이 보는 치는 박을 비우는 경하양은 셈하는 박을 강하게 의식해야 정확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엇갈린 박(싱코페이션)의 모티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셈하는 박과 함께 고안된 것들이다. 

○심포니
베토벤 심포니 1번(1799)과 2번(1802)은 그의 초기에 속하는 곡으로 하이든적인 차분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심포니는 3번(1803, {영웅})에서부터 본격적인 "베토벤적" 특징들을 드러낸다. 끈질긴 테마 모티브 작업을 통하여 극적이고 긴장이 넘치는 거대한 음악을 형성하는 것, 극적인 성격이 강한 전개부에 비중이 오는 것(제시부 150마디, 전개부 250마디)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긴장을 불러오는 효과는 모티브의 리듬적 특징과 그 변형을 통해 이루어진다. 
테마 모티브 작업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5번 심포니(1807)이다. 이 작품의 1악장은 짧고 강력한 <4음 모티브>를 통해 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긴박감 있는 음악적 과정을 보여준다. 5번의 마지막 악장은 행진곡적 C장조로 음악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면서 끝난다.  
-4, 7, 8번은 1, 2번과 마찬가지로 기악의 형식적 측면을 따르는 절대음악 작품이다. 
-6번 심포니({전원})는 프로그램 음악이다. 전원적 F장조의 테마가 울리다가 새소리, 폭풍우 소리 등이 울린다.  
-9번({환희})은 심포니와 오라토리오를 합성시킨 곡. 마지막 악장에 성악(독창들, 합창)이 온다. 대위법의 사용이 다른 심포니들에서 보다 많이 증가했다.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개는 오늘날 연주장의 핵심 레퍼토리에 속한다. 그의 피아노 작품 역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뉠 수 있다. 소나타악장 형식이 올 곳에 변주곡, 판타지, 푸가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초기: 작품 2의 1 가량은 표면적으로 하이든과 아주 유사하지만, 모티브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극적인 성격을 형성시키는 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 13번({비창})은 어둡고 "무겁게"(Grave) 시작하는 느린 첫머리를 통해 감정과다적이고, 주관적인 성향을 표출한다.

-중기: 이 시기는 작품 26부터 시작된다. 첫 악장에서 소나타악장 형식을 쓰지 않고 변주곡을 사용했다. 느린 악장에서 유명한 장송행진곡이 나온다. 작품 27, 1-2번(E 장조, C 단조 {월광})은 "거의 판타지처럼"(Quasi una fantasia)이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다. 고전적 형식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판타지 형식을 쓰게 했다. 작품 31의 2번({템페스트}) 1악장은 끊임없는 모티브 가공 작업을 보여주지만, 레치타티보에 흡사한 테마는 고전적인 소나타악장 형식과는 다른 음악을 만들게 한다. 작품57({열정})은 제1테마 자체가 두가지 상반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유니즌/화음, 하강/상승, pp/ff). 이 "갑작스러운" 성격의 테마 뒤에 부드러운 제2테마가 따라온다. 
-작품101(1816) 이후의 5 작품들은 후기의 것에 속한다. 모두가 폴리포니적 요소를 사용한다. 

○현악사중주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들도 그의 작품 시기구분에 따른 초기, 중기, 후기의 흐름을 같이 보여주고 있다. 중기의 것들은 베토벤적이면서도 대중적이다. 그런데 후기 현악사중주는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작품127(1822-25), 132(1824-25), 130(1825-26), 131(1825-26), 135(1826). 후기 현악사중주들의 중심적 기법은 푸가이다. 푸가의 한 테마로부터 다른 여러 테마들이 발생하며, 이를 소나타악장의 극적인 성격과 결합시킨다. 또한 후기 소나타들은 당시의 생각으로는 지나치게 불협화음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작품132 a단조 아다지오 악장에는 "치유받은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감사찬송, 리디아 선법"이라는 말이, 작품135 종악장의 중심 테마에  "꼭 그래야 하나?"(Muss  es sein), "꼭 그래야 해!"(Es mu  sein!)라는 말이 선율에 맞추어져 붙어 있다. 이는 베토벤에게서 흔히 보는 비음악적인 내용을 넣어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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