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만(Georg Phillip Telemann 1681 - 1767)
텔레만은 1681 3월 14일 막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의 목사였다. 그는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그 곳의 교회음악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 독학으로 악기와 음악을 공부했다.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작품은 오페라 『시기문두스』(Sigismundus, 약 1693년경)였다. 하지만 이 유년 작품은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다. 1694년에는 젤러펠트(Zellerfeld)로 학교를 옮겨 지리, 라틴어, 음악을 배웠다. 이 때에 그는 교회음악과 시립 음악가들을 위한 작품을 몇 곡 썼다. 1697년에는 힐데스하임으로 옮겨 안드레아 학교를 다녔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작곡활동은 계속 되었다. 그의 작품은 학교 학생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 기악과 이태리 오페라를 접했다.
1701년 고향 막데부르크에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텔레만은 당시의 많은 음악가들처럼 법학 공부를 위해 1701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법학 공부는 음악활동 때문에 곧 중단된다. 그는 대학에서 음악반(Collegium musicum)을 지도하면서 오페라를 지휘하기도 하고 가수로 오페라에 참여하기도 했다. 1704년 그는 노이에 교회(Neue Kirche)의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는 거기에서 토마스 교회를 위한 칸타타들을 작곡하기도 했다(이 교회에는 바하가 1723년부터 음악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는 라이프치히 시와 바이쎈펠스 시를 위한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1701년 할레에 들렀을 때에 헨델을 만났고, 상호 방문하며 작곡 공부를 같이 하기도 했다. 헨델과의 교우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705년 소라우(Sorau)의 백작 에르드만 폰 프림니츠(Erdmann von Primnitz)의 악장으로 임명되었다. 프랑스 식 음악을 선호하던 이 곳에서 그는 주로 프랑스식 모음곡을 작곡했다. 1708년 텔레만은 아니제낙 시의 악장이 되었고, 뒤이어 요한 빌헬름 공작의 악장이 된다. 그는 여기에서 공작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음악과 교회음악을 작곡했다. 또한 트리오 소나타와 라이프치히 시를 위한 오페라도 작곡했다. 아이제낙 시는 자신의 음악을 성장시켰고,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성숙한 계기를 가졌다고 그 스스로 말한바 있다.
1712년 텔레만은 프랑크푸르트(마인) 시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그는 두 교회의 악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시의 주도적 인사들의 모임인 프라우엔슈타인(Frauenstein) 협회의 총무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있을 때에 수많은 교회음악 작품들과 오케스트라 음악, 실내악을 썼다.
1713년 프라우엔슈타인 협회의 음악팀을 이끌며 수많은 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들은 공개적이거나 반공개적인 것들이었다. 1714년 그는 바하의 요청에 의해 그의 아들인 칼 필립 에마누엘의 대부가 되었다. 1715년에는 그의 인쇄된 첫 작품집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여섯 소나타(Six sonates a Violon seul)가 나왔고 그 후로 40여 작품들이 인쇄되어 나왔다.
1716년 18세기 초반의 독일 수난곡 중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오라토리오 『세상 죄를 위해 고통 당한 예수』가 작곡되었다. 그 밖에도 이 시기에 오라토리오 『신자들이여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라』(Auf Christenheit, begeh ein Freudenfest)와 세레나타 『독일이여 평화 속에 자라고 번영하라』(Teutschland gruent und blueht im Friede)가 작곡되었다. 1717년 텔레만은 아이제낙의 악장이 된다. 1718년 그는 자신의 첫 자서전을 집필했다. 하지만 이 글은 1731년 마테존의 『계속저음 학습서』(Große Generalbaßschule)에 비로소 발표되었다.
1721년 텔레만은 함부르크의 요한 학교와 5개의 주요 교회의 음악감독이자 교회음악가로 임명된다. 그는 이 교회들을 위해 정규적으로 칸타타를 써야 했고, 해마다 한 편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해야 했다. 그는 1740년까지 여기에서 많은 음악회를 개최하였고, 악보출판업자로서 -자신의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악보까지도 출판했다. 그는 교회를 위한 칸타타와 수난곡들을 작곡하였고, 동시에 함부르크의 오페라 극장을 위한 오페라도 작곡했다. 또한 학교에서 필요한 음악들도 작곡하였다. 그는 왕성한 사회활동을 통해 당시 독일과 유럽 사회에서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많은 편지들은 매우 활발한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전해준다. 1737년 프랑스 친구들의 초청으로 8개월간의 빠리 여행을 했는데, 이 때에 그의 국제적 명성이 시작되었다.
1755년부터는 텔레만의 중요한 후기 작품들이 쓰여졌다:
『예수의 죽음』(Der Tod Jesu 1755), 『천둥 찬가』(Die Donner-Ode 1756), 『하루의 시간들』(Die Tageszeiten), 『예수의 부활과 승천』(Die Auferstehung und Himmelfahrt Jesu 1760), 『심판의 때』(Der Tag des Gerichts 1765),
텔레만은 1767년 6월 25일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테레만은 음악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아직도 다 정리가 못된 상태이다. 그는 40세 이후부터 대단한 -전 유럽적- 명성을 누린 작곡가이기도 했다. 당시의 통념으로는 그가 바하보다 월등하게 훌륭한 음악가였다. 당시의 많은 독일인들은 음악가라고 하면 텔레만을 떠올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음악은 학자풍의 바하의 음악과는 다르게 전문적 음악가를 위해 작품을 쓸 때에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 비교적 손쉬운 작품들이 많았다. 그는 청중들에게 금방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을 원했다. 이러한 원칙은 수많은 그의 음악 장르와 기법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음악은 교회음악이든지 오케스트라 음악이든지 간에 일반적 청중을 의식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 때문에 혹자들은 그를 고전주의 음악의 선구자로 보려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 그는 쉽게 잊혀졌다. 칸타타만 1700여곡 이상을 쓴 그는 거의 “작곡공장”이라 칭할 만한 작품 양을 남겼으나, 후에까지 연주되는 작품은 많지 않은 편이다. 최근에 텔레만 연구가 다시 활기를 얻으면서 일군의 작품들이 새롭게 세상에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바하의 그림자에 가려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역사적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더 친근할 수 있는 음악의 작곡가라는 점에서 그는 단연코 바하를 앞선다. 그의 음악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고, 어떤 곡들은 거의 대중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곡들이 대단히 많다.
등록일자: 2009.3.1
홍정수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텔레만, 게오르그 필립(Telemann, Georg Philipp, 1681-1767)
- 1681년 3월 14일 독일 북부 막데부르크(Magdeburg)에서 출생.
- 작곡과 연주의 능력을 독학으로 깨우침.
- 1701년 어머니의 반대로 음악공부를 포기하고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공부를 시작함.
- 교구 감독의 허락 하에 악기연주와 계속저음을 독학함.
- 힐데스하임(Hildesheim)의 김나지움(Gymnasium)에 다니는 동안 이탈리아 오페라와 프랑스 기악곡을 접촉하게 됨.
- 라이프치히로 가는 도중 할레에서 헨델(J. G. Händel)을 만나 작곡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음악적 교제를 시작하였음.
- 170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을 결성하고,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을 지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오페라 하우스가 폐쇄될 때까지 주작곡가로 활동함.
- 1704년부터 노이에 교회(Neue Kirche)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으며 음악적 행사가 없었던 교회에 콜레기움 무지쿰을 동원하여 활발한 음악활동을 전개함. 이는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인 쿠나우(Kuhnau)와의 빈번한 갈등을 초래함.
- 1705년 소라우(Sorau)의 궁정악장에 임명됨.
- 1712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시(市) 음악감독이 되어 자신의 의지대로 도시의 공적 음악행사를 구상하였으며 정기적인 공식 연주회를 개최함.
- 1721년 함부르크(Hamburg) 음악감독, 요한네스(Johannes) 교회 칸토르로서 5개의 교회음악을 책임자가 되고, 매주일 설교 전후로 새로운 칸타타를 연주함.
- 1722년 함부르크 오페라 하우스 지휘와 음악책임을 맡음.
- 1737년 파리로 여행을 갔으며 그의 연주는 성공을 거둠.
- 1755년 이후로 후기작품 오라토리오를 쓰기 시작함.
- 1767년 6월 25일 함부르크에서 사망.
18세기 당시 텔레만의 명성은 서로 왕래가 있었던 바흐의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19세기에 나타난 바흐 르네상스로 인해 이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하였는데, 텔레만은 헨델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바흐를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이와 더불어 바흐, 헨델, 텔레만의 음악 뒤에 있는 생각은 더 이상 중시되지 않는다. 텔레만이 추구하는 음악의 선율성과 가벼움은 대위법적 요소가 강한 바흐식의 작곡기법과는 정반대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나 고전주의적 이상에서 보면 텔레만의 흐름이 정당한 것이었다. 그가 당대에 많은 칭찬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그 시대의 음악이론가들은 바흐의 작곡기법을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당대의 기준에 따르면 바흐는 전통을 보존한 자로서 더 이상 기준적인 작곡가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바흐의 위상이 드높아진데 반해 텔레만의 것은 그렇지 못했는데, 이는 당대의 음악미학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러한 사상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비교는 텔레만에 대해 잘못된 인상을 만들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텔레만을 고전주의의 선구자로 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또한 텔레만의 양식이 적은 수의 선곡집에 의해 편파적으로 규정되었된 원인도 있었다. 그의 전집과 자료들이 훨씬 많이 알려진 이제 와서야 그의 음악사적 위치가 객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위법적 기법과 우아한 양식의 융합, 그리고 혼합양식의 확립이라는 측면과 함께 파악되어야 할 사항이다.
텔레만의 작품은 사회적인 상황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가 1721년부터 함부르크의 음악감독과 칸토르로서 활약했는데, 그 곳은 당시 시민적 계몽주의와 음악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그의 작품에서 음악교육에 기여하려는 경향이 계몽적인 의도 때문인 것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그의 작품을 수용하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방대한 텔레만의 작품은 모든 장르를 포괄한다.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위한 수많은 삽입곡 외에 40여개에 달하는 텔레만의 오페라가 있는데 그중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보존되어 내려온 총보는 다양한 형식과 악기배치를 보여주며, 이는 개인적인 특성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 이탈리아 뿐 아니라 프랑스적인 요소는 역사내용을 다룬 오페라에 사용하였다. 텔레만은 재미있는 장면의 구성에서 특별한 재능을 보여 준다. 그의 막간극(Intermezzo)과 우스꽝스러운 오페라 ≪인내심 많은 소크라테스≫(Der geduldige Sokrates, 1721)가 이 장르의 절정에 해당되며 동시에 초기 양식이다. 세속적 성악곡으로 다수의 세레나데, 결혼식과 생일축하를 위한 축하음악이 있는데 이들은 부분적으로 매우 방대한 곡이다(예: ≪무첸베허의 금혼식을 위한 세레나데≫[Serenade zur goldenen Hochzeit für Mutzenbecher, 1732]). 이 곡들은 세속적 칸타타와 같이 자연스러운 멜로디가 특징이다. 텔레만은 그림음악적 표현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히 유머러스한 칸타타 ≪카나리아≫(Kanarienvogel, 1759)와 C장조 음계를 바탕으로 만든 칸타타 ≪학교교사≫(Schulmeister, 1759)에서 회화적 음형기법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풍자적인 면을 과장하였다. 칸타타 작품의 절정은 1759년에 쓴 ≪하루의 시간들≫(Tageszeiten, 1759)과 칸타타 ≪이노≫(Ino, 1765, 이노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하루의 시간들≫은 하이든에게 알려져 그가 ≪사계≫라는 곡을 작곡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매우 인상 깊은 극적 감흥을 내포한 작품인 ≪이노≫는 바로크에서 전고전주의로의 음악적 전환을 정확하게 나타낸다. 이는 텔레만의 작품창작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8세기 초반 ‘단순한 작곡방식’이라 치부되던 노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극복한 것은 텔레만의 업적이었다. 그는 이미 1718년에 “노래부르기는 모든 것의 기초다”라고 선언했으며 같은 선상에서 노래부르기의 교육적 권리를 강조하였다. 그는 함부르크로 이주한 이후 이 분야에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예로서 1728년 교육적인 열의로 이루어진 노래와 연주곡집인 ≪충실한 음악교사≫(Getreue Music-Meister, 1728)가 작곡되었으며, 이것은 정기구독할 수 있었다. 이 교육작품 속에는 단지 두 개의 노래만이 있었지만, 1733/1734년경에 주간잡지 『노래연습, 연주연습, 계속저음연습』(Singe-, Spiel und General-Bass-Übungen, 1733/34)에 수록된 노래는 48곡이나 되었다. 이 기능적인 곡은 계속저음을 쉽게 배우기 위해 창작된 곡이며 계몽적인 사상을 유머적, 풍자적 방법으로 전달한다. 이 두 작품집의 노래가 이전의 지배적인 노래전통에 속한 것이었지만, 저속한 성격이 전혀 없다. 보다 수준 높은 노래전통을 연 것은 1741년에 나온 24개의 송가(Ode)이다. 이 곡들에서 그는 새로운 노래의 이상을 실제적으로 적용하였다.
세속적인 것과 교회음악적인 성악음악의 혼합형식은 이른바 ‘선장음악’(Kapitänsmusiken)에 나타나 있다. 이 선장음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며 각 부분은 종교적인 오라토리오와 세속적인 세레나데로 구성된다. 실제 연주에 관한 지시사항은 다양한 파트배치의 요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1760년의 선장음악은 현악4중주에만 국한되었으나 1763년에는 매우 다양한 음색의 악기가 배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교회칸타타의 수는 전체를 아우르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남아있다-멘케(Menke)는 텔레만의 성악작품목록집(TVWV)에서 예배를 위한 칸타타를 1750개로 기록하고 있다. 이 장르에서 텔레만은 정열적인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그 효과가 드러나는 극적 감정을 매우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경험은 텔레만의 교회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아한 양식 요소가 많이 포함된 오페라 아리아가 단순한 노래형식과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가사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우아함이 지배적인 그림음악적 음형의 멜로디는 대위법을 원치 않았던 당시 이론가들이 교회칸타타에 요구하는 사항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각 악기배치와 연주자에 대한 기술적인 요구는 행사와 연주조건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항상 칸타타의 20% 정도는 현악기와 목관, 금관악기의 추가를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텔레만은 스스로 자족할 줄 알았다. 각 칸타타가 이미 다른 행사를 위해 작곡되었거나 연주되었을 경우 텔레만은 6개의 칸타타 발행연도분에서 방대한 악기배치를 포기하거나 축소하였다. 그의 6년분칸타타들은 모두 출판되었는데, 이는 18세기에 전혀 없는 일이었다. 이 곡들은 쉽게 연주되기 위해서 연주기술적인 요구수준이 가능한 낮게 제시한다. 이리하여 칸타타로부터 두 곡의 아리아와 한곡의 레치타티보로 이루어진 ≪화성적 예배≫(Harmonische Gottes-Dienst, 1725-1726)가 나왔는데, 이는 성악가와 계속저음 연주자 외에 한명의 독주자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해의 칸타타에서도 역시 다양한 제약을 보여준다. 이렇게 각 칸타타 연곡들이 대부분 하나의 통일된 도식을 따른다. 이 도식은 해마다 다른 것을 요구한다. 악장의 순서, 악장구조, 악기배치가 한해 연도분에서는 불변한다.
텔레만은 함부르크 시절 해마다 새로운 수난곡 연주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46개의 수난곡을 작곡하였는데, 그 중 23곡만 전해져 온다. 그 밖에 6개의 수난곡 오라토리오 중에서 5곡이 보존되어 있다. 텔레만은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수난곡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초기의 수난곡은 광범위한 성경가사에 의해 작곡되었다면, 후기에는 점점 명상적면으로 변해갔다. 개별적인 성경구절은 새롭게 지어졌으며 자유로운 아리아 가사가 추가되었다. 여기서 텔레만은 연극적인 인물을 형성시키는 가능성을 얻었다. ‘복음서 낭독’과 ‘관찰의 시’가 바흐의 수난곡에서와 같이 대체로 두서없이 교대로 나타나지만, 1728년에 작곡된 ≪누가 수난곡≫(Lukaspassion, 1728)에서는 엄격하게 나뉜다. 옛 수난곡의 개별적인 부분들은 주로 관찰의 역할을 하는 구약성서의 비유를 복음서보다 앞에 나오게 한다. 레치타티보와 찬송가는 전체적으로 바흐의 수난곡에서보다 훨씬 더 단순하다. 수난곡 오라토리오는 자유롭게 지은 가사에 근거한다. 텔레만은 1728년에 연주된 오라토리오 ≪행복한 생각≫(Seliges Erwaegen)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가사를 지었다. 이 작품은 함부르크에서 처음에는 연극적인 음악으로서 반대에 부딪혔으나, 후에는 텔레만의 생애 내내 해마다 함부르크에서 연주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으며, 사망 이후에도 재공연이 19세기까지 이어졌다. 1716년의 텔레만의 ≪브로케스 수난곡≫(Brockespassion, 브로케스는 작사자의 이름)은 절박한 상황표현, 폴리포니의 합창과 큰 편성으로 그의 주요 작품에 속한다.
거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악곡들이 대부분 현재까지 그 작곡연도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 밖의 많은 작품들이 각 상황에 적합하도록 된 기능음악이어서 양식적으로 통일성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로 인해 양식의 발전을 서술하기는 불가능하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예술음악 그리고 독일과 폴란드의 민속음악의 영향은 텔레만의 자전적인 글을 통해 증명된 특징이다. 부분적으로 이 민족적 양식 요소가 개별 작품들에 혼합되었다. 민속적인 멜로디와 리듬을 사용한다는 것은 선명한 악곡구조와 대위법의 축소를 조건으로 한다. 우아한 양식과 나아가 엄격하지 않은 대위법을 연결하는 시도는 1738-1739년 사이의 ≪경쾌한 푸가≫(Fugues Légères)와 트리오소나타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보존되어 내려오는 118곡의 오케스트라 모음곡은 대부분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서곡과 춤곡 형태를 보이는, 다양하며 자유로운 악곡으로 이루어졌다. 그 외에 이 악곡들은 프로그램 음악의 특성을 갖는다. 음악적인 인물성격 형성, 상황(자연)묘사와 소리모방의 명확함을 위해 텔레만은 악곡에 적절한 제목을 부여했다. 여기서 역시 텔레만의 유머가 잘 드러난다.
전해오는 약 100여곡의 협주곡 중에는 솔로협주곡, 이중협주곡, 그룹협주곡과 콘체르토 그로소도 포함되는데, 성악적인 멜로디 형성에 대한 요구도 충족시킨다. 대위법적 작곡기법, 콘체르토적 작곡기법, 우아한 작곡기법, 다양한 민족양식의 수용과 개성적 형식의 연결은 동시대인의 갈채를 받았다. 비발디의 솔로 협주곡에 비해 제한된 솔로와 총주의 긴밀한 얽힘으로 나타나는 예술적 기교, 악기에 관용적 기법은 궁정과 시민 계급의 요구에 부합했다. 이는 다양한 기악 장르로 대표되는 식탁음악이 당시에 매우 많이 출판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곡은 식탁음악 제1권 제1번 음악인데, 이른바 우베튀르(Ouverture) 모음곡에 속한다. 이 장르의 명칭 자체가 벌써 프랑스식 음악을 가리킨다. 이 음악은 부점으로 장중한 걸음걸이 흉내를 내며 시작하는 프랑스식이다. 이 느린 부분 이후에는 빠른 부분이 나온다. 첫 곡 우베튀르 다음에는 여섯 개의 춤곡이 이어지며 모음곡을 이룬다. 텔레만의 음악은 프랑스식 뿐만 아니라, 그가 아는 모든 종류의 음악을 혼합하는 내용을 보여준다. 바흐의 음악도 그 점에서는 같은 입장이다. 다만 텔레만은 좀 더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연스러운 음악을 만들려 했다. 반대로 바흐는 실현가능한 음악을 듣는 자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성취해 보려 했다.
텔레만은 매우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긴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음악이론가로서도 노력했다. 미리 예고된 몇몇의 음악이론적인 계획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노래•연주•계속저음의 연습과 함께 실용적인 계속저음 이론을 제공했다. 음악학협회의 가입을 위해 그는 『새로운 음악적 체계』(Neues musikalisches System)라는 논문을 제출했다. 그밖에도 그는 자시늬 출판물에 수많은 서문을 썼으며, 이로써 연주와 음악미학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참고문헌
Emans, Reinmar. “Georg Philip Telemann.” Metzler Komponisten Lexikon, Stuttgart, 1992.
Ruhnke, Martin. “Georg Philip Telemann.”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Bd. 13, Kassel, 1989.
등록일자: 2010.2.12
[장은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