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Karl Amadeus Hartmann, 1905-1963)
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은 1905년 8월 2일 독일의 뮌헨에서 나서 1963년 12월 5일 같은 도시에서 죽었다. 그는 1924년에 뮨헨의 예술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는 작곡이 아닌 트롬본을 전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롬본 지도교수와의 불화로 인하여 하르트만은 다시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졸업할 즈음인 1928년부터 1930년까지 그의 첫 작품인 "Wachsfigurenkabinett"(모형 인물 전시실)를 완성하게 된다. 그후 하르트만은 1931년경에 헤르만 쉐르헨(Hermann Scherchen)을 만나게 되며, 이 만남은 하르트만의 음악적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때까지를 전체적으로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 하르트만의 음악세계에서의 제1기라고 볼 수 있다.
제2기는 나치의 정권이 득세한 193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까지의 기간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들은 인간성의 상실과 그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관계로 "참회의 음악"(Bekenntnismusik)이라고 지칭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나치가 주장하던 면들과 정면으로 부닥치게 되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오랫동안 공연조차 금지 당하게 된다. 1933년에 하르트만은 한 곡의 트럼펫협주곡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뒤에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인 제5번 교향곡의 모체가 된다. 그리고 1936년에 그는 "알토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라멘토"(Lamento für Altostimme und Orchester)를, 1937/38년에 "심포니 뢰브르"(Symphonie 'Loeuvre') 이어서 "소프라노와 현을 위한 심포니"(Symphonie für Streicher mit Sopransolo)를 작곡하였다. 그 뒤에 하르트만은 몇몇의 소곡들과 더불어 연속적으로 교향악 작품들을 발표하였는데, 이것들을 살펴보면 "신포니아 트라기카"(Sinfonia tragica, 1940), "신포니에 드라마티케"(Sinfoniae Dramaticae, 1941-43)이며, 특히 "신포니에 드라마티케"는 세 개의 독립적인 작품들인 교향악적 서곡 "중국은 싸우고 있다"(China kämpft), "교향악적 송가"(Symphonische Hymnen) 그리고 교향악적 조곡 "비타 노바"(Vita Nova)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신포니에 드라마티케"를 작곡하는 기간 동안에 하르트만은 자신의 작품을 독일 내에서 연주하는 것을 나치정권으로부터 금지 당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그가 이전에 작곡한 작품들이 가지는 정치적 경향 때문이며, 이로 인하여 그는 독일의 음악계에서 고립되게 되었고 단지 몇 곡의 작품만이 외국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즉 완전한 고립화를 벗어나려는 하나의 시도로 하르트만은 1941년 빈 근처에 머무르고 있던 안톤 베베른(Anton Webern)을 찾아갔으며, 그로부터 1942년 11월까지 개인교습을 받는다. 그렇지만 하르트만은 베베른으로부터 음악적으로 특기할만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44년부터 하르트만은 새로운 교향악적 작품인 "비탄의 노래"(Klagegesang)의 작곡에 임하였으며, 독일의 패전후인 1945년부터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단의 연출가로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경부터 뮨헨의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단 소속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하르트만은 "무지카-비바"(Musica-Viva)라는 명칭하의 기획연주 시리즈를 시작하였다.
하르트만 음악의 제3기로 구분되는 1945년부터 제6번 교향곡이 초연된 1953년까지에서 그는 몇 개의 실내악작품과 한 곡의 교향곡(제6번)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에 하르트만은 "무지카-비바"를 이끄는 동시에 자신이 이전에 작곡하였던 작품들을 새롭게 교향곡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교향곡들이 제6번외에도 제4번(1946년), 제3번(1947/49), 제2번(1949) 그리고 제1번과 제5번(1950년)이다. 이러한 교향곡들과 더불어 이 시기에는 나찌시대에 연주가 금지 당하였던 많은 작품들이 초연 되게 되었다.
하르트만은 1957년과 58년에 걸쳐 제7번 교향곡을 작곡하였는데, 이때부터 그가 1963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시기를 제4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제7번 교향곡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까지의 자신의 교향곡들과는 달리 수정되어 재창작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새로 작곡된 작품들이다. 그리고 1960년부터 그는 제8번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1962년에 완성하였으며, 이 교향곡이 끝나갈 무렵인 1961년에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는 "노래장면"(Gesangsszene)의 작곡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작품을 미처 다 완성치 못하고 하르트만은 심장마비로 쓰러졌으며, 그가 임종하기 직전에 이 곡의 마지막을 인성(人聲)만으로 연주하도록 요구하였다. 하르트만의 요구에 따라 이 "노래장면"은 1964년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Dietrich Fischer-Diskau) 협연으로 초연 되었으며, 마지막 부분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Es ist ein Ende der Welt! (이것은 세상에서의 한 종말이다!) Das Traurigste von allen!" (그리고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슬픈 일이다!)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하르트만은 모두 8곡의 교향곡과 마지막 작품으로 "Gesangsszene"를 작곡하였지만, 이 마지막 작품 역시 그 형식이나 성격을 미루어 볼 때 하나의 독립적인 교향곡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차호성: 20세기의 교향곡 작곡가 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과 그의 교향곡 제4번의 탄생배경 연구
차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