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제명(玄濟明, 본명: 玄水石 또는 玄小乭, 호: 玄石, 일본어 이름: 玄山濟明, 영어 이름: Rody Hyun, 1903 대구-1960 서울)
성악가이자 작곡가. 일제 말기와 해방직후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일찍부터 기독교적인 가정환경과 학교환경(대구 대남국민학교, 계성중학교,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 1923)로부터 기독교 음악과 접촉하였다. 숭실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선교사였던 로드히버(A. Rodeheaver)로부터 성악적 능력을 인정받아 그의 부흥회에서 노래를 하게 된다. 1923년에 로드히버의 도움으로 미국 시카고에 소재한 무디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고, 건(Gunn) 음악학교로 옮겨 1년간 성악과 작곡을 공부한다. 그는 1936-37년 건 음악학교에서 다시 공부한다. 1937년 1월에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확인이 필요한 사항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36년 8월 15일에 그가 발행한 『아동찬송가』에는 그의 이름에 이미 "박사"라는 칭호가 붙어 있다(이 『아동찬송가』는 그가 유학 가기 전에 이미 작업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이 작업에 관해 1935년 5월.22자와 27일자 기독신보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글에서도 그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다고 하는 「자연발성법」에 대해 확인한 흔적이 없다.
현제명은 1차 미국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후, 1929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는 한편, 학교 음악반을 지도하기도 하고(음악부 주임), 개인 독창회를 열기도 한다. 1931년에는 조선음악가 협회를 창립하고 스스로 이사장이 된다. 이러한 단체의 조직은 그의 정치 성향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같은 해에 『현제명 작곡집 제1집』을 펴낸다. 『현제명 작곡집 제2집』은 1933년에 나온다. 1940년에는 일제에 의해 연희전문학교 교원의 직위를 잃게 된다. 일제 말의 어둠의 시기에 그는 일본에 기울게 된다. 군가(軍歌) 보급을 위해 열심히 뛰기도 하고, 열심히 일본을 위한 조직을 세우고 관리한다. 일제 말기였던 1944년에 그가 맡은 직책들은 명백한 친일행각을 보여준다. 국민음악보급정신대 이사, 조선음악협회 이사,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등이 그의 직함이었다. 해방 후 그는 1943년에 경성대화숙의 후원으로 세운 경성음악연구원을 재빨리 경성음악학교로 개칭하고, 이를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편입시켜 초대 부장에 취임한다(1946). 1949년에는 가극 『춘향전』을, 1954년에는 가극 『왕자호동』을 발표한다.
현제명의 성악곡들은 어느 정도 이태리 민요풍이다. <가장 단순한 베르디 음악> 정도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성악적으로 부르기 용이하고, 걱정과는 별 상관없는 듯한 선율과 이른바 "룸파파" 반주를 통해 더 가벼워지는 성격 등이 그러한 느낌을 준다. 그의 노래들은 중고등학교 교과서 등을 통해서 해방 후 널리 불려졌다. 『고향생각』, 『그 집 앞』, 『산들바람』, 『희망의 나라로』, 『나물 캐는 처녀』 등이 그러한 노래들이다. 그의 음악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아픔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 날아갈 듯이 가벼운 그의 노래는 아마 성악가였던 자신의 목소리에 맞춰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가극 역시 그의 노래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홍정수]
참고문헌:
손태룡: 현제명, 양악사의 큰 별 → 한국음악사학보 제10집 1993, 77-102쪽.
노동은: 조선음악협회는 어떤 친일단체였는가? → 음악과 민족 제14호 1997, 45-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