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 2. 3 함부르크, †1847. 11. 4 라이프치히.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의 손자. 아버지는 신교로 개종한 유태인이며 1811년 이후 베를린에서 은행가로 활동함. 어려서부터 천재소년으로 알려졌으며, 괴테와 친한 음악가 첼터에게서 배움. 바이마르에 있는 노년의 괴테 앞에서 소년 시절에(1821) 그리고 청년 시절에(1830) 연주함. 이 외에도 빠리(1816, 1825), 영국•스코틀랜드(1829), 이태리•빠리•런던(1830-32) 등 유럽의 여러 도시들로 연주여행을 다님. 1835년부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악장(지휘자)으로 일함. 라이프치히 콘서바토리움을 설립했으며,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연주하여 바하 발굴에 크게 기여함. 고전주의의 전통을 계승한 교향곡, 협주곡, 서곡, 현악사중주 등을 썼으며, 무대음악과 오라토리오, 가곡 등 성악 부분에서 음향이 풍부하고 형식적으로 정제된 작품들을 남김. 피아노 곡에는 48개의 무언가("가사 없는 노래"), 독특하고 진지한 변주곡(op. 54, 18, 41), 전통적 형식 틀에 낭만적 성향을 넣은 프렐류드와 푸가가 있다. 또 다수의 오르간 작품들도 있다. 그의 작품들에는 인간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이라는 새로운 흐름과, 단아한 형식성을 추구하던 고전주의의 유산, 그리고 옛 음악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복고주의가 어우러지는 19세기의 예술 사상적 흐름을 복합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다.
멘델스존은 청소년 시절부터 이미 작곡활동을 했다. 16-17세(1825-26)에 팔중주(op. 20)와 <한여름 밤의 꿈>(op. 21)을 작곡했다. 이들 작품에는 멘델스존의 개인적 작곡양식이 벌써 드러나 있다. 화려한 음색과 쉽게 들리는 동적 특성은 부분적인 예외에도 불구하고 멘델스존의 중요한 음악적 표현수단이다. 현악사중주 작품 12와 초창기의 피아노 작품들에도 그의 음악이 갖는 이러한 성격이 잘 나타난다. 주제를 다루는 솜씨는 그가 비엔나 고전주의, 특히 베토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주제의 전개에서 화음의 변화, 아티큘레이션의 처리, 또 음색의 조절 등은 고전주의적 단아함 인에서 나름의 개성을 찾고자 한 멘델스존의 노력이다.
지휘자로서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베를린에서 재연하면서 시작되었다(1829년 3월 11일).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그리고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이 아니라, 이미 100년 전이라는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작곡가의 작품을 찾아서 연주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에 과거의 성악 음악을 공공 연주회에서 발굴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멘델스존의 연주를 통해 바하의 작품은 난해함에도 그 질적 우수성으로 대중성을 얻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또 멘델스존 자신이 노력했던 것처럼, 예술음악과 교회음악의 접목이 교회 밖의 연주회장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가 듀셀도르프에서 음악감독 자리를 받았을 때, 거기서는 연주회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음악도 그의 소관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오라토리오 <바울>(op. 36, 1832-36)을 작곡하게 되는데, 이와 함께 그는 19세기 오라토리오 작곡가의 대열에 선다. 이 작품에는 옛 전통과 당대의 기법이 함께 나타나 "시대 모순의 극복"(슈만, <신 음악 잡지>이 두드러진다. 10년 후 그는 <엘리야>를 작곡했으며, 3부작의 끝작품으로 고안된 <그리스도>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의 오라토리오는 바로크적 모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그의 스승 첼터로부터 다시 발굴되는 바하의 전통을 경험했고, 헨델과 하이든한테도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외형적 구성은 특히 헨델의 것(예: <메시아>과 유사하다. 바로크적 형식과 낭만적인 표현력을 가진 선율과 화성의 결합은 그의 다른 음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장엄한 성격을 가능케 한다. 이 외에도 그의 교회관련적 작품들에는 모테트와 오르간 음악이 있다. 그의 모테트들은 비교적 쉬운 음악으로서, 부르는 자(연주자)들의 편리성이 고려된 것이다. 오르간 음악 역시 바로크적 모델을 고려한 흔적이 많다.
1830년대에 작곡된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모두 단조인데(사단조, op. 25, 1831; 라단조, op. 40, 1837), 19세기에 상당히 자주 연주되었다. 1830년대 후반에 그는 연주회용 교회음악(시편 42편, <목자가 부르듯이>, op. 42, 1837-38), 현악사중주(op. 44, 1837-38), 피아노를 위한 프렐류드(op. 35, 1832-37) 및 <무언가>들, 무반주 합창곡 <야외에서 노래함>(op. 41, 1834-37), 그리고 가곡들을 작곡하는 다양성을 보인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 그는 교향곡과 합창을 접목시키는 작업도 선보였다(<찬송>, op. 52, 1839-40). <스코틀랜드 교향곡>(op. 56, 1842)은 1829년의 스코틀랜드 여행과 관련이 있다. <종교개혁 교향곡>(op. 107, 1829-30) 및 <이탈리아 교향곡>(op. 90, 1833)을 포함하여 그의 이러한 오케스트라 작품들은 고전주의 시대의 독립적 기악이나 동시대의 "표제음악"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양쪽의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그는 또 무대음악을 여러 개 작곡한다: <안티고네>(op. 55, 1841), <외디푸스>(op. 93, 1842), <아탈리아>(op. 61, 1845), <한여름 밤의 꿈>(이미 작곡한 서곡에 이어 작곡).
1846년, 그의 마지막 작품활동 시기에 오라토리오 <엘리야>(op. 70)와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op. 64)가 탄생한다. 이 두 작품은 지금도 자주 연주되는 걸작으로 남는다.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와 함께 오페라 <로렐라이>는 미완성에 머문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현악사중주 바단조(op. 80, 1847)는 누나의 죽음으로 인해 침잠해 있다가 그해 여름에 쓴 것으로서 비극적 느낌을 준다.
"그는 19세기의 모차르트이다. 시대의 모순을 명쾌하게 조망하고 용서하는 매우 밝은 음악가이다." 이것은 슈만이 멘델스존의 피아노 트리오 작품 49의 평을 쓰면서 한 말이다. 마흔을 넘지 않은 짧은 생애 동안 그는 "천재"와 "행운"이라는 조명을 받으면서 유럽의 "대중" (통속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일반적이라는 의미) 음악문화에 큰바람을 일으켰다. 명실상부한 직업 지휘자, 훌륭한 음악 선생, 음악행사 개최자로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정돈된 형식에 거리낌없이 유연한 감정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낭만적 고전주의"라는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동요 없이 음악에 즐겁게 담아내려 했다. 멘델스존의 삶과 음악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우선 그가 당시에 크게 성공한 음악가였다는 것과, 그의 음악에 정연한 형식성과 밝은 유동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 전체를 보면 그의 음악세계를 한 가지 단순한 색으로 채색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밝다"는 것을 넘어서 훨씬 많은 음악적 뉘앙스와 깊이가 그의 음악 속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멘델스존의 음악이 "밝고, 부드럽고, 깊이가 없다"는 부정적 견해는 대개 몇몇 작품에서의 청각적 이미지에 의존한 것이며, 특히 바그너를 비롯하여 후대의 독일 사람들이 멘델스존의 음악을 유대인 음악으로 낙인찍으면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결코 그렇게 행운으로만 둘러싸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종교개혁 교향곡>은 프랑스에서 연주 "너무 많은 푸가와 너무 적은 멜로디"라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뒤에 베를린에서 연주되었지만, 그 스스로 매우 만족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뜻을 존중해서 응모한 베를린 음악협회의 감독직은 자신의 스승(첼터)이 전임자였음에도 유대인이라는 이유에서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자리를 받기 전에 듀셀도르프의 음악감독으로 일했다(1833-35).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가족의 중심이 되었던 누나의 갑작스런 죽음(1847년 5월)은 그를 충격에 쌓이게 했으며, 그해 11월에 -아마 그 여파 때문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주대창]
참고: 2곡의 오라토리오
<바울>(Paulus, 1836). 성경을 토대로 한 슈브링(Julius Schubring)의 대본에 따른 오라토리오. 제1부는 다메섹 사건까지를, 제2부는 핍박받는 바울의 행적을 다룸. 바울은 베이스, 스데반과 바나바는 테너. 성경의 설명은 소프라노•앨토•테너에 의해 분담되어 불리움. 합창은 극적, 또는 관찰적 역할. 코랄•레치타티보•아리아•푸가합창 등의 형식 사용. 서정적•선율적 면이 두드러짐.
<엘리야>(Elias, 1846). 극적이고 장엄한 오라토리오. 이는 줄거리 자체가 갖는 극적인 내용과 상관있다. 억센 성격의 선지자 엘리야는 힘있는 베이스에 의해 불려야 어울림. 제1부는 비가 오는 장면까지, 제2부는 명상적 간주곡과 함께 시작하여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표현력이 강한 아리아들과, 강력한 인상을 주는 합창음악이 많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