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의사였던 아버지(Baldassare M.)의 첫 아들로 이태리 크레모나에서 태어났다. 고향 성당의 악장 인제녜리에게서 일찍부터 작곡, 성악, 비올라 등의 음악수업을 받았다. 그가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15세라는 이른 나이였다. 젊은 그의 작품들은 출판되어 세상에 잘 알려졌다. 1588년 그는 밀라노의 대성당(Duomo) 교회의 악장 자리를 위한 원서를 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590년부터 밀라노 자리보다는 더 못한 만토바의 곤차가 궁정에서 가수 겸 비올라주자로 일했다. 1601년에는 곤차가 가문의 궁정악장으로 승진했는데, 이는 궁정의 교회와 궁정에서 있는 모든 음악행사를 주관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곤차가 궁정은 예술가들을 잘 대접하지 못하여 몬테베르디는 부당한 대우에 실망했다. 그래서 그는 1608년 자신의 고향인 크레모나로 돌아갔다. 곤차가 가문의 빈첸쪼가 죽자 다시 만토바에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다른 도시(밀라노, 로마, 플로렌스)로 진출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큰 행운이 찾아왔다. 1613년 당시 음악가들에게 가장 좋은 여건을 제공하는 베니스의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그를 악장으로 초빙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십분 이용하여 활동하였고, 당대에 가장 명성 높은 음악가로 인정받게 된다. 1933에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몬테비르디의 그의 주요 장르는 단연코 오페라이다. 그는 당시 막 태어난, 하지만 아직 일반적으로 유통될 수 없었던 오페라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오페라는 플로렌스의 카메라타 그룹이 출발시켰지만, 실질적으로 정착된 것은 몬테베르디에 의한 것이었다. 오페라 이전에 그의 작곡 발전의 터가 된 것은 마드리갈이었다.
그는 마드리갈을 통해 새로운 작곡적 방법을 실험했다. 처음에 폴리포니 양식(제1작법 Prima prattica)으로 마드리갈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후에는 새로운 계속저음을 갖춘 독창곡 또는 여러 성부의 콘체르토 양식(제2작법 Seconda prattica)을 발전시켰다.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 작품집은 전부 8권이 있는데, 그 중 제4권까지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대위법적 5성부 무반주 합창곡을, 제5권부터는 계속저음 반주에 의한 콘체르토적 합창곡을 수록했다. 특히 8권에 실린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 Clorinda 1624)은 기존의 마드리갈의 범위를 넘어서는데, 극적 줄거리가 있고 각 장면들에 적합한 묘사적이고 감정격앙적인 극음악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감정격앙적인 음악을 격앙양식(Stile concitato)이라 불렀다. 이는 점점 더 세분되는 리듬분할에 의해 감정고조를 불러오는 것이다.
몬테베르디의 감정묘사는 특히 오페라에서 잘 나타난다. 오페라에서 그는 극적 전개를 위한 공연양식 또는 표현양식(Stile rappresentativo, Stile espressivo) 등으로 작품을 썼다. 이는 레치타티보가 말을 낭송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언어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곤자가 궁정에서 일할 때 작곡한 오페라 『오르페오』(Orfeo, 1607)는 당시 재공연이 요청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오페라는 화려한 팡파르의 기악곡인 토카타(Toccata)와 함께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무대장면의 변화에 신포니아(Sinfonia)라는 독립적 기악곡이 사용된다. 아리아 부분에서도 기악은 중시된다. 즉 아리아의 중간에 일종의 간주곡 격인 기악 리토르넬로(Ritornello)가 삽입된다. 또한 토카타와 리토르넬로는 어느 정도 라이트모티브적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적절한 장면에 적절한 악기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오르페오가 지옥으로 내려갈 때에는 트롬본 등의 관악기로, 오르페오가 노래로 염라대왕을 설득할 때에는 현악기로 반주된다. 이렇게 몬테베르디의 오페라에는 기악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그런 기악이 줄거리 전개나 인물의 성격을 나타나는 데에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베니스에서 『율리씨즈의 귀환』(Il ritorno d’Ulisse, 1641』, 『포페아의 대관식』(L’incronazione di Poppea, 1642) 등을 개속 작곡했다. 베니스 오페라 양식은 다양한 뉴앙스의 세코(Secco) 레치타티보와 서정적이고 극적인 반주(Accompagnato) 레치타티보, 갖가지 종류의 아리오조와 아리아로 구성된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는 몬테베르디에 의해 각 장면에 적합한 합창과 기악곡, 그리고 무용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오페라가 갖는 모든 요소를 다 갖추게 되었다..
교회음악에서 몬테베르디는 옛 양식과 새 양식을 병행 혹은 선택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유명한 『마리아의 저녁기도』(Il vespero della Maria)는 옛 양식의 시편곡(1번 곡), 새 양식의 독창 체르?3번 곡), 순수 기악곡(11번 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또한 미사, 종교적 마드리갈, 모테트, 마니피카트를 남겼다.
홍정수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몬테베르디, 클라우디오(Monteverdi, Claudio, 1567-1643)
- 1567년 5월 17일 이탈리아 크레모나(Cremona)에서 출생.
- 크레모나 성당의 음악감독이었던 인제녜리(M. A. Ingegneri)와 르네상스 작곡법을 공부함. 이러한 경험은 그가 작곡가로서 평생 살아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됨.
- 1582년 15세에 첫 작품집 ≪종교적 노래≫(Sacrae cantiunculae, 1582)를 출판함.
- 1590년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Mantua) 공작 궁정의 비올라 연주가로 임명되면서 전문 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딛게 됨.
- 1599년 궁정가수 클라우디아 카타네오(C. Cattaneo)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둠.
- 1600년 아르투지(G. M. Artusi)가 그를 비판하는 첫 번째 논쟁을 시작함.
- 1601년 만토바 공작 궁정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받음.
- 1603년 ≪마드리갈 제4권≫을 출판함.
- 1605년 ≪마드리갈 제5권≫을 출판하면서 서문에 아르투지의 비판에 대한 답글을 발표함.
- 1607년 ≪스케르치≫의 서문에 음악가였던 동생 줄리오 체자레 몬테베르디(Giulio Cesare Monteverdi)가 ≪마드리갈 제5권≫의 답글을 자세하게 설명한 제2작법 『선언문』을 게재함.
- 1607년 첫 오페라 ≪오르페오≫를 초연함.
- 1608년 두 번째 오페라 ≪아리안나≫를 초연함.
- 1609년 ≪오르페오≫의 인쇄 악보를 출판함.
- 1612년 만토바 공작의 궁정 음악감독을 사직함.
- 1613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San Marco)성당 음악감독으로 임명받음.
- 1614년 ≪마드리갈 제6권≫을 출판함.
- 1619년 ≪마드리갈 제7권≫을 출판함.
- 1638년 ≪마드리갈 제8권≫을 출판하면서, 서문에서 자신이 창안한 ‘격앙양식’(Stile concitato)에 관해 설명함.
- 1640년 베네치아 상업 오페라 극장에서 ≪아리안나≫를 재공연함.
- 1641년 ≪오디세이의 귀향≫을 초연함.
- 1641년 ≪에네아와 라비니아의 결혼≫을 초연함.
- 1643년 ≪포페아의 대관식≫을 초연함.
- 1643년 11월 29일 베네치아에서 사망.
- 1651년 사후에 ≪마드리갈 제9권≫이 출판됨.
몬테베르디는 16세기말과 17세기초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서 바로크 초기 제2작법을 확립하였으며, 서양근대음악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르네상스의 다성음악과 바로크 초기 화성음악의 빼어난 절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래 학계에서는 몬테베르디를 르네상스의 마지막 대가로 재인식하려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대표작으로 9권의 마드리갈, 3편의 오페라, 미사곡 ≪성모 마리아를 위한 저녁기도≫(Sanctissimae virgini Missa senis vocibus, 1610)가 있다. 독립적인 기악곡은 남기지 않았지만 성악곡에 삽입된 기악음악 또한 고도의 기교와 음악성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르네상스 다성음악과 바로크 초기의 화성음악을 절묘하게 결합함으로써 몬테베르디는 자신만의 고유한 음악언어를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서양근대음악이 발전할 수 있는 예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인제녜리(M. A. Ingegneri)의 제자임을 처음으로 밝힌다. 몬테베르디는 1590년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 공작 궁정의 비올라 연주가로 임명되면서 전문 음악가로서의 첫 발을 딛게 된다. 11년 뒤인 1601년에는 이곳의 궁정 음악감독으로 승진하며 이로써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힌다. 아르투지가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에 대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시점인데, 이것은 그의 명성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르네상스 최대 이론가 차를리노(G. Zarlino)의 수제자였던 아르투지는 몬테베르디가 르네상스 이론을 따르지 않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몬테베르디는 『마드리갈 제5권』(1605)의 서문에서 자신을 옹호하는 짧은 글을 실었는데, 이것은 아르투지가 1600년부터 퍼부은 공격에 대한 첫 번째 공식 반응이었다. 여기서 몬테베르디는 ‘제2작법’(Seconda practtica)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제2작법 : 근대 음악의 완전성』(Seconda Prattica: ovvero, Perfezioni della moderna musica)이라는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 논문은 평생 동안 발표되지 않았고 몬테베르디도 제2작법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막내 동생인 음악가 체자레가 몬테베르디의 『스케르치』(Scherzi, 1607) 서문에『선언문』(Dichiaratione)을 발표하면서 제2작법의 본질과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 『선언문』이 몬테베르디가 체자레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체자레가 형을 대신하여 자발적으로 완성한 것인지 현재로선 확실히 알 수 없다.
『선언문』이 발표된 같은 해 몬테베르디는 그의 첫 오페라 ≪오르페오≫(Orfeo, 1607)를 완성하였다. 최초의 서양 근대 오페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만토바에서 곤차가(Gonzaga) 가문의 후원 아래 완성되었으며, 대본은 당시 궁정의 외교관이던 스트리지오(A. Striggio)가 완성하였다. 1607년 2월 24일 사육제 동안에 궁정의 작은 방에서 이루어졌으며 초연 시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본이 인쇄되었다. 오페라는 2년 뒤인 1609년 만토바에서 재연되었으며 이때 비로소 악보가 출판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607년 인쇄 대본과 1609년 출판 악보의 결말이 서로 다른 점이다. 대본은 바커스의 여사제들이 등장하여 오르페오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내용으로 결말을 맺으나 악보는 오르페오가 아버지 아폴로와 함께 승천하는 내용으로 막을 내린다. 악보의 결말은 넓은 무대와 정교한 무대장치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초연이 이루어졌던 궁정의 작은 방은 이런 무대를 설치하기에 협소하였고 따라서 초연 시 대본에 있는 결말로 갑작스럽게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608년 몬테베르디는 그의 두 번째 오페라 ≪아리안나≫(Arianna, 1608)를 완성하였다. 이 작품에 착수하기 전 몬테베르디는 그의 아내와 사별하고 고향인 크레모나(Cremona)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과도한 업무와 병고를 이유로 만토바로 복귀하기를 꺼려했지만 ≪아리안나≫의 작곡을 계기로 다시 본래의 직무로 돌아오게 된다. 이 오페라는 곤차가의 결혼 축하 공연으로 초연되었으며 대본은 플로렌스의 리누치니(O. Rinuccini)가 완성하였다. 현재 초연 악보는 분실되었으며 음악은 여주인공이 부르는 ≪아리안나의 탄식≫(Lamento d’Arianna)만이 남아 있다. 이 곡은 당시 절대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초연을 목격한 사람이 이 곡을 듣고 울지 않은 여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증언하였으며, 당시에 하프시코드를 소유한 이탈리아의 가정은 모두 이 곡의 악보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모노디 악보는 1623년 베네치아에서 단독으로 출판된 것이며 몬테베르디는 이 곡을 5성부 마드리갈로 편곡하여 ≪마드리갈 제6권≫의 첫 작품으로 수록하였다.
만토바에서 완성한 또 하나의 걸작품은 ≪성모 마리아를 위한 저녁기도≫(Sanctissimae virgini Missa senis vocibus, 1610)이다. 이 작품은 로마에서 출판되어 교황 바오로 5세(Papa Paolo Ⅴ)에게 헌정되었으며 독창, 2중창, 3중창, 이중합창, 팔소보르도네(falsobordone) 양식, 모방기법, 시편창 등 17C초 근대 양식과 전통 양식을 총 망라한 전대미문의 대규모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만토바에서 몬테베르디는 종교음악을 작곡할 공식적인 의무는 없었지만 종교음악 작곡을 열망하였으며 실제로 만토바 궁정의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 성당을 위해서 작품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1609년 산타 바바라 성당의 음악감독이었던 가스톨디(G. G. Gastoldi)가 사망한 후에는 몬테베르디가 교회음악 작곡의 의무를 상당 부분 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성모 마리아를 위한 저녁기도≫에는 모두 14곡이 수록되었는데 음악학자들은 한동안 이 곡들을 묶어 하나의 저녁기도(Vespero) 전례음악으로 볼 수 있는지에 관해 격론을 벌였다. 이러한 논쟁은 5편의 시편창 뒤에 따라 나오는 4곡의 모테트와 1곡의 소나타 때문이었다. 이 5곡이 저녁기도 전례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많은 이견이 오고 갔는데 최종적으로는 이 곡들이 시편 다음에 안티폰 대신 불리기 위해서 삽입되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의 미사와 성무일도에서는 전례의 일부분을 모테트나 기악곡으로 대체하는 관습이 만연하였으며 몬테베르디도 이러한 당시의 관례를 따랐던 것으로 본 것이다. 또한 제목과 달리 이 곡이 성모 마리아가 아닌 만토바의 수호 성녀였던 산타 바바라를 위한 저녁기도 음악임이 밝혀졌고, 현대의 연주가들이 갖가지 차이나는 음반을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1612년 7월 31일 몬테베르디는 만토바 궁정으로부터 갑작스런 해고 통지서를 받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정치적 기류 변화에 따른 힘겨루기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후원자였던 빈센초 곤차가가 사망 한 뒤에 그의 장남 프란체스코 곤차가가 등극하면서 몬테베르디에게 불똥이 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몬테베르디는 이듬해인 1613년 당시 유럽 최고의 음악기관인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이곳에서 30년 동안 재직하였다. 만토바 궁정은 뒤늦은 후회를 하고 몬테베르디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강구하였지만 끝내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몬테베르디와 만토바의 인연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몬테베르디는 만토바 궁정에 많은 친구를 두고 있었고 특히 그중에서도 ≪오르페오≫의 대본가인 스트리지오와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또 만토바 궁정의 작곡 요청이 있을 시에 몬테베르디는 기꺼이 그에 응하였다. 서양음악사 최초의 희극 오페라로 기록되는 ≪리코리, 아민타와 사랑에 빠져 미친 척하는 여인≫(Licori finta pazza innamorata d’ Aminta, 1627)도 만토바 궁정의 요청으로 작곡에 착수했던 작품이다. 몬테베르디가 스트리지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1막을 거의 끝냈다”(ho di già fatto quasi tutto il primo atto)고 말한 것이 이 작품의 진행 과정에 관한 마지막 단서인데, 그 후로 이 미완성 오페라의 행방은 아직까지 묘연하다.
베네치아에서의 새로운 삶은 몬테베르디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완성한 작품들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실주의적 묘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런 변화에는 시인 마리노(G. B. Marino)와의 교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마리노는 사랑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보석, 광물, 동물, 악기, 전쟁 등에 거침없이 비유하였을 뿐 아니라 직접적이고 생생한 비유와 묘사를 즐겨 사용하여 ’오감의 시인’이라 불렸던 당시 이탈리아 문학계의 이단아였다. 이전까지 몬테베르디는 구아리니, 리누치니, 페트라르카 같이 내향적이고 섬세한 심리를 수사학적으로 승화시킨 시인들의 작품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그의 음악은 이러한 문학적 정서와 기저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노를 알게 되면서 몬테베르디의 음악에도 감각적이고 사실주의적인 표현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이러한 변화는 ≪마드리갈 제7권≫(1619)에서부터 뚜렷하게 감지된다. 여기서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 전통의 5성부 마드리갈에서 탈피하여 독창, 2중창, 3중창, 4중창, 6중창의 파격적인 성부구성을 시도하였으며 역동적이고 발랄한 리듬, 짧은 동기의 빠른 반복 등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생동감, 발랄함, 사실성 등을 강조하였다. 또한 1624년 베네치아에서 초연한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Combattimento di Tancredi e Clorinda)과 1638년 출판한 ≪마드리갈 제8권:전쟁과 사랑의 마드리갈≫에 사용한 격앙양식(Stile concitato)도 마리노가 즐겨 사용한 ‘전쟁=사랑’의 비유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마드리갈 제8권≫(1638)의 서문에서 몬테베르디는 격앙양식이란 1개의 긴 음표(세미브레비스)를 짧은 16개의 음표(세미크로마)로 나누어 반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탐린슨(G. Tomlinson)은 격앙양식이 몬테베르디가 ≪마드리갈 제7, 8권≫에서 사용한 짧고 경쾌하며 빠르게 반복되는 리듬 기법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고, 이러한 사실적 묘사 기법은 통틀어 ‘제3작법’으로 칭하였다. 탐린슨의 이러한 자의적 해석은 몬테베르디의 새로운 음악을 이전의 ‘제2작법’ 음악과 구별하기 위한 시도인데 탐린슨의 시각은 그 진위를 떠나서 마리노와의 교류에서 발생한 새로운 세계를 좀 더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실주의적 묘사는 몬테베르디가 베네치아에서 완성한 두 편의 상업 오페라 ≪율리시즈의 귀향≫(Il ritorno d’Ulisse in patria, 1640)과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 1642)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637년 베네치아에서 최초의 상업 오페라극장이 개관하면서 오페라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오락물로 자리 잡게 되고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온갖 수단을 강구하던 오페라 흥행주들은 당시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였던 몬테베르디에게도 손길을 뻗는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최고 종교기관의 음악감독을 힘겹게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베네치아 관중과 몬테베르디의 첫 만남은 ≪아리안나≫를 통해 이루어졌다. 1608년 만토바 궁정에서 초연되었던 ≪아리안나≫가 1640년 산 모이제(San Moise) 극장에서 재연되었는데, 이때 몬테베르디는 청중의 흥미를 높이기 위하여 합창의 수를 줄이고 일부 음악을 수정하였다. 이 공연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는데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궁정의 소수 엘리트 청중을 위하여 완성되었던 작품이 아무리 그 모습을 수정하였더라도 베네치아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산 카시아노(San Cassiano) 극장에서 초연된 ≪율리시즈의 귀향≫은 몬테베르디가 철저하게 베네치아 청중을 위해 완성한 것이며 그의 의도는 대대적인 성공으로 이어졌다. 대본은 베네치아 귀족 문필가들의 모임인 ‘익명학회’(Accademia degli Incogniti)의 바도아로(G. Badoaro)가 완성하였다. 음악은 현재 비엔나에 보관되어 있는 익명의 필사본 악보에 의해 전해지고 있으나 이 필사본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몬테베르디의 첫 상업 오페라인≪율리시즈의 귀향≫은 30여 년 전 만토바에서 작곡한 궁정 오페라와는 달리 낭송양식의 비중이 현저히 줄어 든 대신 아리아 같은 선율 위주의 음악이 눈이 띄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1막 1장에서 여주인공 페넬로페(Penelope)가 부르는 <비참한 여왕>(Di misera regina) 같은 낭송 양식의 노래는 몬테베르디의 옛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또한 등장인물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제3양식’적인 사실주의 기법도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3막 1장에서 이로(Iro)가 부르는 노래를 들 수 있다. 이 장면은 이로가 자신이 기생하여 살던 세 명의 왕이 율리시즈(오디세우스)에 의해 목숨을 잃자 앞으로 살아갈 일을 걱정하다 스스로 자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사는 이로의 급변하는 불안감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단편적이고 굴곡이 심한 선율과 리듬에 의해 생생하게 회화화되었다. 1641년에 또 한 편의 몬테베르디 오페라가 초연되었는데 이 작품은 분실되었다. ≪에네아와 라비니아의 결혼≫(Le nozze d’Enea e Lavinia)이 산 조반니와 파올로(San Giovanni e Paolo)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현재 개요와 시나리오만이 남아 있다. 몬테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인 ≪포페아의 대관식≫은 1643년 산 조반니와 파올로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1651년 나폴리에서 재연되었다. 대본은 바도아로처럼 ‘익명학회’ 회원이었던 부제넬로(F. Busenello)가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고대 로마의 황제 네로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포페아의 패륜적인 애정 행각을 미화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 로마의 부정적 이미지를 드러내어 베네치아 공화국의 우월성과 도덕적 순결함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두 개의 필사본은 모두 1651년 나폴리 공연에서 사용되었던 것인데 여기에는 삭제, 삽입, 수정, 이조 등의 표시가 수없이 포함되어 있어 이것을 초연 당시의 음악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커티스(A. Curtis)는 현재 전해지는 필사본의 일부 음악이 몬테베르디가 아닌 제2, 제3의 작곡가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포페아의 전 남편 오토(Otto)의 음악과 피날레를 장식하는 네로와 포페아의 사랑의 2중창 <당신과 마주보며>(Pur ti miro)는 몬테베르디가 아닌 다른 작곡가에 완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하였다. ≪포페아의 대관식≫이 몬테베르디가 병으로 죽기 9달 전에 초연되었고 또 당시에는 여러 작곡가의 합작품(pasticcio)이 보편적이었음을 고려하고 커티스가 제시한 여러 음악적 이유들을 감안할 때, 그의 주장을 반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커티스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일부분에만 국한된다. 특히 옥타비아가 부르는 낭송 양식의 <절망에 빠진 여왕>(Disperata regina)과 <로마여, 안녕>(A dio Roma)을 몬테베르디가 아닌 다른 작곡가가 완성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사실주의적 기법, 격앙양식 등 베네치아에서 확립한 새로운 언어도 전 작품을 통틀어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러한 모든 점은 ≪포페아의 대관식≫과 몬테베르디의 관계를 더욱 확고하게 뒷받침해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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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2010.1.22
[변혜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