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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협주곡 1번,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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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e-단조 op.11)의 작품생성과 원전들
Michael Stegemann, 번역: 김정숙1)

 

        쇼팽(Frédéric Chopin)이 1830년 3월 17일 바샤우에서 자신의 피아노협주곡 f-단조를 초연했을 때(물론 이 작품은 1836년에야 비로서 그의 제2번협주곡 op.21로출판되었다), 그는 이미 다른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고 있었다. 쇼팽과 절친한 관계였던 보에치에코브스키(Wojciechowski Titus)는 이 작곡에 대한 소식을 처음으로 알았던 사람들중에 한 사람이었다: "내생각에는 말야  나의 두 번째 피아노협주곡 e-단조가 자네가 듣기전까지는 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믿어."2) 또한 계속적인 작곡과정에 대해서도 보에치에코브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새협주곡의 아다지오악장은 E-장조일세. 이 악장에서 어떤 힘이 담겨있는 위력을 보여주려고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조용하고 멜랑콜리적인 로망스를 나타내려고 했네. 이 로망스는 수많은 달콤한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장소를 부드러운 눈길로 자아내는 것같이 표현하며, 아름다운 달빛찬란한 어느 봄날밤에 꿈을 꾸듯이 나타내야만 하네. 그렇기 때문에 반주도 역시 약음기로 연주한다네."3)

        이렇게 서정적으로 강조되는 글표현뒤에는 어떤 전기문적인 사실이 숨겨져 있다: 여가수 콘스탄쩨 글라드코브스카(Konstanze Gladkowska 1810-1889)에 대한 쇼팽의 불행한, 말하지 않았던 사랑이 숨겨져 있다. 작곡가의 이러한 감정들은 이미 f-단조 피아노협주곡의 느린 악장에서 승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나는 이상형을 만났어,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은 채 벌써 6개월전부터 내 마음을 주고 있지. 나는 그녀에 대한 꿈을 꾸지, 그리고 그녀에 대한 인상속에서 나의 새협주곡의 아다지오악장이 탄생했지. [...] 한 사람을 압박하고 있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야. 내가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지 자네는 알고 있을 것이야. 그럴 때면 나는, 자네에게 가끔씩 얘기하기도 했지만, 피아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콘 하지."4) 비록 이러한 비극적인 얘기가 쇼팽의 op.21에 관계한다고 하더라도 e-단조 피아노협주곡에 대한 생성에 있어서도 이러한 전기문적인 뒷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또한 여기서도 - 적어도 중간악장에 있어서도 - 콘스탄쩨 글라드코브스카에 대한 음악적인 초상화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사실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심해야될 일이다. 급기야는 낭만적으로 잘못인식된 쇼팽상으로의 이러한 과장된 평가는 오랜세월동안 (심지어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한다: "쇼팽은 자신의 삶동안에 항상 자신의 음악적 분위기에 해당되는 그러한 여성적인 이상형을 필요로 했다. 이것은 - 그의 기사도적인 선천성에 상응하게 - 대부분 이러한 이상형에 대한 아름다운 외형적인 감상정도에 불과한 것이다."5)

         쇼팽은 - 더군다나 그가 베를린, 빈, 프락, 드레스덴과 브레슬라우로부터 연주여행을 마친 다음이기 때문에 - 바샤우에서 점점 더 불행하고 속박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새피아노협주곡을 위한 초연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며 그리고나서 폴란드를 떠날 생각이었다. "나의 계획은 두달동안 빈에서 보낼 생각이고 그리고 겨울을 이태리의 밀라노에서 지낼생각이네."6) 이러한 쇼팽의 계획들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나는 지난 수요일 나의 협주곡을 4중주로 연습을 해보았어. 어느정도는 충분했지만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했어. 사람들이 전체중에 피날레악장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어(또한 가장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지).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면 어떻게 들릴까? 수요일에는 연습이 있어. 그리고나서 자네에게 소식전할게. 내일은 다시한번 4중주와 전체를 연습할 꺼야. 그리고 모든 것이 다 끝난후에는 여행을 떠날꺼야 [...]  아무것도 나를 얽매이지 않는 곳이면 어디로든 향할 꺼야."7) 그러나 협주곡준비과정은 지연되고 있었다. "자네는 상상할 수 없을 꺼야, 얼마나 이 저주받을 그리고 이 피할 수 없는 기다림이 나를 삭막하게 만드는지 말야. 나의 두 번째 피아노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한 다음에야 비로서 오는 월요일로 공식적 연주날짜를 갖게 되었어. [...]   여기에 대해 한편으로는 전혀 즐겁지 않지만, 다른 편으로는 협주곡이 어떤 인상을 남길까 하는 호기심도 있긴하지. 내가 생각하기로는 론도악장이 모든 것중에서 가장 좋을 것 같아. 솔리바(Soliva)씨8)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더군: '이 협주곡은 당신의 명망을 높혀줄 것입니다'. 쿠르핀스키(Kurpinski)씨9)는 독창성을 칭찬했고 엘스너(Elsner)씨10)는 리듬에 대해 찬양했어."11)

        1830년 10월 11일에 있었던 콘서트(이 콘서트의 제2부에서는 콘스탄쩨 글라드코브스카가 로씨니의 La donna del lago에서 나오는 카바티나를 불렀다)는 폴란드에서의 쇼팽의 마지막 연주였다. "나는 조금도 떨지 않았어 그리고 마치 내가 혼자 있는 것처럼 연주를 했었지. 모든 것이 잘 진행되었어. 관중석은 꽉 찼었지. 처음에는 괴르너(Görner)의 교향곡으로 연주를 시작했어. 그리고나서 나의 고귀한 e-단조 Allegro가 연주되었어, 이 알레그로악장은 퓔뤼겔-스트라이허(Flügel-Streicher)12)의 악기들이 마치 자동적으로 움직이며 연주하는 것 같았어. 귀머거리가 될정도의 브라보외침. [...] 그리고나서 Adagio와 Rondo가 차례대로 연주되었지. [...] 만일 솔리바씨가 노력의 수고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총보를 집에 가지고 가서 열심히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솔리바씨가 내가 오케스트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지휘하지 않았더라면,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나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나 솔리바씨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그의 손아귀에 쥐고 있었어. 그렇기에 내가 오케스트라와 아무런 문제없이 연주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13)

        1830년 11월 2일에 쇼팽은 바샤우를 떠나 빈으로 향했다. 보이치에코브스키가 함께동반함으로써 쇼팽이 작별을 고하는데 있어 어느정도 그 슬픔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여행의 첫 번째 정착지는 브레스라우(Breslau)인데, 이곳의 한 작은 모임에서 쇼팽은 자신의 새협주곡중 마지막 두악장을 선보일 수 있었다. "독일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런 수고의 노력도 들이지도 않으면서 어쩌면 저렇게 가볍게 연주할 수가 있는지 하며 소곤거렸다. 티투스(보이치에코브스키)는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도 듣기까지 했는데, 즉 쇼팽이 연주에는 아주 능숙능란하지만 작곡하는데 있어서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다."14) 이 두친구의 계속되는 여행길은 드레스덴과 프락을 거쳐 빈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는중에 이들 모두는 11월 29일에 터진 바샤우의 혁명으로 인해 깜짝 놀라게 되었다. 보이치에코브스키는 이 혁명에 가담하기 위하여 폴란드로 다시 돌아갔다. 쇼팽은 혼자 남게 되었고 그리고 점점 더 어려운 일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바샤우에서 일어난 일들인데, 바샤우의 일들이 파리에서라면 나에게 큰 이익이 되었을 것이리만큼 똑같은 비중으로 빈에서는 아주 반대로 나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 주었어."15) 니데키(Thomas Nidecki)16)가 자신의 연주프로그램들중 한 곳에 쇼팽의 새피아노협주곡을 집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인해 여기에 무관심(증오라는 말 대신에)을 보이는 빈의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어려운 노력 끝에 드디어 쇼팽은 비자를 받게 되었고 그리고 1831년 7월 20일에 빈을 떠날 수 있었다. 뮌헨과 슈투트가르트을 거쳐 파리로 향했으며, 쇼팽이 파리에 도착한 때는 9월이었다.

        쇼팽이 이미 예상한대로 프랑스의 수도는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당시 유행하고 있던 예술가들의 특별한 모임에 가담했다. 상류계층적 대중들의 호의는 출판사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벌써 1833년에 모리스 쉴레징어(Maurice Schlésinger) 출판사는 e-단조 피아노협주곡의 첫 번째 프랑스악보를 인쇄하였다. 같은 해에 프리드리히 키스트너(Friedrich Kistner)가 독일악보로 출판했으며, 1834년에는 베쎌(Wessel)이 영국악보로 출판했다.

        1834년 7월에 쇼팽은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가 파리 콘져바투아르에서 주최한 콘서트에서 연주할 수 있었다. 이때 쇼팽이 연주했던 것은 op.11중에 중간악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신적 힘이 가득 담겨있으면서 고유의 독창력을 발휘하는 쇼팽씨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작곡중 아다지오를 연주했다. 이 악장은 앞서 간 그리고 앞으로 올 악장들과 조화를 이루며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적 효과를 나타낸다."17) 몇 달뒤에 - 1835년 4월 5일 - e-단조 피아노협주곡은 폴란드 피난민들을 위한 자선음악회에서 연주되었고, 여기에 쇼팽과 지휘자인 하베넥(Françios Habeneck) 이외에도 리스트(Franz Liszt), 바이올린니스트인 에른스트(Heinrich Wilhelm Ernst) 그리고 퓰륫티스트인 도루스(Louis Dorus)가 함께 음악적 영향을 끼쳤다: "쇼팽의 피아노협주곡은 아주 독창적이고 색감이 넘치는 작품이며, 내부적으로도 천재성을 발휘하고 선율적으로도 너무 신선한 음악이기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18)

        이 두가지 칭찬의 말들은 쉴레징어가 소유하고 있는 파리의 음악신문에도 주목할만한 사항으로 실린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베를리오즈-콘서트에서의 쇼팽의 출현도 이태리극장에서의 op.11의 연주도 분명한 실패작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베를리오즈는 - 사실 그리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 악기편성에 관해서 비판을 했다: "쇼팽에게는 모든 관심이 피아노파트에만 쏠려있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피아노협주곡에서 차디찬, 거의 불필요한 반주에 지나지 않는다."19) 다른 예로는 음악적 형식면에 있어서 헛점을 보이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그의  판타지와 함께하는 대담한 날렵함은 보다 엄격한 음악형식에는 적합하지 않게 되어있다. 그리고 일명 주제적 작업에는 쇼팽의 약점이 그대로 들어난다."20) "그밖에도 그의 아름다운 주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협주곡들은 소나타형식안에서 병을 앓고 있다[...]".21) "그는[쇼팽] 기악음악의 커다란 교향악적 형식들을 지배할 줄을 모르며 그리고 또한 이러한 형식에 주제들의 자연적 계속적인 발전, 엄격한 전개를 사용하여 - 필수적으로 - 음악적 내용을 부여하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다."22) 이와 같은 인용들 때문에 쇼팽음악의 반응 및 수용역사에 있어서 오늘날에도 가끔 직면할 수 있는 어떤 오해의 발산이기도 하다: 비평가들은 모차르트와 베에토벤의 고전적인 협주곡형태를 표준으로 삼고 있다(물론 이러한 관점에서는 쇼팽이 실제로 "약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쇼팽에게는 이 장르의 아주 다른 전형적인 모범들이 사용된다 - 훔멜(Hummel)과 칼크브렌너(Kalkbrenner)의 "Concertos brillants". 여기에서는 오케스트라가 - 고의적으로 그리고 전체작품에 알맞게 - 솔로파트의 자유롭고 즉흥적인 형식을 통하여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다. 리스트(Franz Liszt)는 자신의 쇼팽-전기문에서 사람들이 쇼팽의 악보텍스트를 맞지도 않는 형식틀에 억지로 집어넣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이란 수단자체를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형식자체를 위한 형식으로 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형식과 수단이 예술가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필요로되거나 또는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예술가가 사용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그의 천재적 자연성이 그가 선택한 대상의 자연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 예술가는 그것을 그만두게 된다."23) 슈만(Robert Schumann)도 역시 쇼팽의 e-단조 피아노협주곡에 대하여 자신의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작품을 모짜르트의 협주곡들과 비교한다면 잘못된 해석일 것이다. 쇼팽의 2개의 피아노협주곡들에서 "그 구조와 성격으로 볼 때  화려한 낭만적인 피아노협주곡을 전형적인 형태로 삼고 있다. [...] 이러한 장르의 모든 장-, 단점들을 포함하면서 쇼팽의 피아노협주곡들은 피아노연주의 빛나는 전성기와 그 계속적인 가치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24)

 

출판개정 보고문

원전들

A1 (현존하지 않는) 자필총보(Autographe25) Partitur): 쇼팽이 대략 1830년 3월과 4월사이에 작업한 것임.

(TA)26) 폴란드 음악학학자인 훼르디난드 호에직크 (Ferdynand Hoesick)는 쇼팽의 2개의 피아노협주곡들이 도브르췬스키 (Ignacy Feliks Dobrzynski)에 의해 악기편성되었다고 주장한다27). "여기서 부분적 자필총보(쇼팽의 피아노성부와 도브르췬스키의 오케스트라 성부들 [...])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전체 자필총보에 단지 도브르췬스키의 추가만이 들어간 것이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28) 만일 호에직크의 예상이 맞는다면 (TA)와 A1이 동일하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2개의 원전들중에 하나는 그 오케스트라성부가 쇼팽의 학창시절친구인 리노브스키(Joseph Linowski)의해 쓰여졌으며29) 그리고 솔리바(Soliva)에 의해 다시 수정작업된 것30)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것은 1830년 10월 11일에 바샤우에서 초연된 작품을 토대로 하고 있다.

A:N 1831년 1월에 쇼팽은 빈에서 e-단조협주곡의 자필총보 - A1 또는 (TA) - 를 니데키(Thomas Nidecki)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그가[쇼팽] 자신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공식적으로 연주하게끔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는 단지 아름다운 변주곡들만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의[니데키] 자필보를 요구했다."31)

(A2) 쇼팽은 1831년 7월 20일에야 비로서 빈을 떠났기 때문에 추측하건데 니데키가 협주곡의 자필보를 떠나기 훨씬 전에 돌려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이 빈에서 또 다른 제2의 자필본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A:F 1832년 봄에 - 4월 17일 이전임이 틀림없음 - 쇼팽은 e-단조 협주곡과 다른 작품들(op. 8, 13, 14, 21)의 총보를 파리의 출판업자 파랑스(Jacques-Hipolyte-Aristide Farrence)에게 보냈다. 여기서 (A2)와 A:N이 동시에 취급되었을 수 있다.

A:FS  쉴레징어(M. Schlésinger)가 쇼팽의 작품 전체를 프랑스악보로 출판하는데 관심을 보였을 때, 파랑스(Farrence)는 모든 요구들을 포기하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자필악보들을 - op. 11번도 포함 - 쉴레징어에게 위임해 버렸다. 그리고 이 일은 분명히 1832년 11월 2일 이전에 일어났으리라 본다32). 이 날 쉴레징어가 자신의 라이프치이 동료인 키스트너(Friedrich Kistner)에게 보내는 편지는 쇼팽의 자필본에 대한 마지막 확실한 증거이다.

EA:S 1833년 쉴레징어(Schlésinger)가 이 협주곡의 프랑스판 첫 번째 악보(Erstausgabe)를 선보였다. 이 악보는 쇼팽의 자필본인 A:FS를 뒷받침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출판악보를 위해 사용된 원전악보들은 다음과 같다:

Sp  오케스트라총보(Orchersterpartitur)(인쇄판 번호 3050)

Sk  피아노악보집(Klavierauszug)(인쇄판 번호 1409)

물론 위의 2가지 원전들은 부분적으로 서로 막중한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다.

EA:K  이것도 역시 1833년에 출판된 것으로서 키스트너(Freidrich Kistner)가 라이프치히에서 독일판으로 처음 인쇄한 악보(Erstausgabe)이다. 이 악보 역시 쉴레징어가 라이프치히로 보낸 자필보 A:FS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출판악보를 위해 사용된 원전악보들은 다음과 같다:

Kst  (미완성의) 성부별악보(Stimmensatz) (인쇄판 번호 1020, 1021 그리고 1022)

Kk    피아노악보집(Klavieauszug) (인쇄판 번호 2340).

이미 언급한 EA:S, Sp 그리고 EA:S, Sk와 마찬가지로 위의 두가지 원전들도 서로 굉장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EA:W 1834년에 베쎌(Christian Wessel)이 런던에서 출판한 영국판 첫인쇄본(인쇄판 번호 1086)으로서 물론 파리나 라이프치히에서부터 런던으로 보내진 자필본도 이 악보의 중요한 출처이기도 하지만, 1년전에 출판된 두 개의 프랑스판과 독일판 첫인쇄본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EA:SD "몇몇의 쇼팽의 여성- 및 남성제자들(Schülerinnen und Schüler)이 스승의 작품을 위한 인쇄본들을 모았다(대부분은 프랑스 출판악보). 이 악보들은 수업을 위한 악보예들로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여기에 어느정도 꽤 많은 추가기입 [...], 주석, 수정, 손가락위치, 변형들 그리고 헌정들이 들어가 있다."33) 여기에서 쇼팽 자신이 직접 수정한 것가운데 하나는 1844년 이래로 쇼팽의 여제자였던 뒤부아(Camille Dubois: O'Meara의 이름으로 태생)가 만든 것으로서 제1모음곡집에 수록되어 있다.

EA:SS  또 다른 - op. 11 중간악장의 솔로파트와 함께 - 악보는 약 1845년과 1849년사이에서 쇼팽으로부터 수업을 받아온 여제자 스티어링(Jane Wilhelmina Stirling)34)이 만든 제2모음곡집에 수록되어 있다.

a:F 쇼팽이 죽은후(1849) 그의 친구이자 첼리스트였던 프랑숌므(Albert Franchomme)가 - 이유는 알수 없지만 - op. 11중 제2-, 제3악장을 위한 2개의 피아노악보집을 완성했으며 그리고 이 악보는 현재 파리국립도서관(Ms 10464 Don 6853과  Ms 10465 Don 6854)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원전들이 - A:F, EA:S 또는 다른 악보들 - 프랑숌므의 자필본에 영향을 끼쳐는지는 불분명하다.

19세기 중엽이후와 20세기초에 많은 양의 새출판악보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전체적으로 기존의 3가지 첫출판악보들과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 악기편성과 솔로파트의 앞꾸밈음적 연주기법 및 손가락표시법들의 "개량들"이 그 예이다.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새출판악보들을 들 수 있다:

Kistner출판사에 의한 칼 미쿨리(Carl[Karol] Mikuli)의 새출판악보, 라이프치히(인쇄판 번호 5373과 5374),

Bote & Bock출판사에 의한 칼 클린트보르트(Karl Klindworth)의 새출판악보, 베를린 (인쇄판 번호 12263),

Peters출판사에 의한 헤르만 숄츠(Hermann Scholtz)의 새출판악보, 라이프치히 (인쇄판 번호 6210),

Durand출판사에 의한 클로드 드비시(Claude Debussy)의 새출판악보, 파리 (인쇄판 번호 9710),

Schott출판사에 의한 에밀 폰 자우어(Emil von Sauer)의 새출판악보, 마인츠(Mainz) (인쇄판 번호 30328).

NA:B&H 추측하건데 기존의 3가지 첫출판악보들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새출판악보(Neuausgabe)로서 1880년에 라이프치히에서 브라이트코프와 헤르텔(Breitkopf & Härtel) 출판사에서 인쇄되어 나온 것이다(총보 B. 442).

NA:IFC 이 새출판악보는 위의 NA:B&H를 기반으로하여 지코르스키Kazimierz Sikorski)가 1961년에 Instytut(연구소) Fryderyka Chopina가 편집한 쇼팽의 전모음곡집의 이름하에 출판된 것이다(PWM 3822). 이 총보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첫출판악보들과 다른 점을 보이는데, 특히 악기편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 이것은 오이렌부르크(Eulenburg) 출판사에서 1985년 Mainz에서 발행한 총보의 서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 서문은 원래 미하엘 스테게만(Michael Stegemann)에 의해 독일어로 쓰여진 것이다.
2) 1830년 4월 10일 보에치에코브스키(Titus Wojciechowski)에게; 재인용: Correspondance(편지) de Frédéric Chopin 1810-1849 I (L`Aube: 1816-1831), Paris 1981, 155쪽(편집자의 번역).
3) 위와 같음, 1830년 5월 15일; 위의 책, 166쪽.
4) 위와 같음, 1829, 10, 3; 위의 책, 132쪽이하.
5) Emil Naumann: Allgemeine Musikgeschichte(일반적 음악역사), Berlin 1927, 641쪽.
6) 보에치에코브스키(Titus Wojciechowski)에게, 1830. 9. 4; 위의 책, 186쪽.
7) 위와 같음, 1830.9.18; 위의 책, 190쪽.
8) Carlo Evasio Solvia (약 1797-1853), 1821-1832년까지 바샤우 콘저바토리움에서 성악교수로 지냈다.
9) Karl Kasimir Kurpinski(1785-1857), 당시 유명한 폴랜드 작곡가, 무엇보다도 음악극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10) Joseph Xaver Elsner(1769-1854), 쉴레지언 작곡가이면서 음악교육학자, 1821-1834년에 바샤우 콘저바토리움의 감독이었으며 쇼팽의 선생이기도 했다.
11) 보에치에코브스키(Titus Wojciechowski)에게, 1830. 10. 5; 위의 책, 202쪽.
12) 이것은 빈에 있는 스트라히허 회사의 악기들로서 1833년부터 스트라히허(Johann Baptist Streicher 1796-1871)라는 사람이 독점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고 1802년부터 1896년사이에 걸쳐 존재하였다. 이 악기들은 19세기의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악기들로 알려져 있다.
13) 1830년 10월 12일 보에치에코브스키(Titus Wojciechowski)에게; 위의 책, 207쪽이하.
14)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1830.11.9; 위의 책, 212쪽.
15) Joseph Xaver Elsner에게, 1831.1.29(옛날 날짜: 26); 위의 책, 251쪽.
16) Thomas Nidecki(1800-1852), 폴란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 엘스너의 제자로서 쇼팽의 학창시절 친구.
17) P.R.[= P.Richard?] in: Gazette musicale de Paris n052, 1834.12.28, 424쪽이하.
18) R.F.[= R. de Saint-Félix?] in: Gazette musicale de Paris n015, 1835.4.12, 130쪽.
19) Hector Berlioz: Mémoires, 새출판 파리 1969, II 275쪽.
20) La Mara[= Marie Lipsius]: Musikalische Studienköpfe(음악적인 연구두뇌들), 제1권: Romantiker(낭만주의자), 5번째 재편성된 출판 Leipzig 1879, 297쪽.
21) Friedrich Spiro: Geschichte der Musik(음악의 역사), Leipzig 1907, 122쪽.
22) Emil Naumann: 위의 책, 639쪽.
23)Franz Liszt: Friedrich Chopin, Leipzig 1880 [재출판 Hildesheim/New York 1978], 11쪽.
24) Arnold Schering: Geschichte des Instrumentalkonzerts(기악콘체트의 역사), Leipzig 1905, 187쪽.
25) 역주: 앞으로 계속 소개될 알파벳형태의 약기호는 유감스럽게 본문에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역자는 첫단어의 밑줄과 더불어 전체 단어와 그 뜻을 항상 함께 적어 넣었다.
26) 역주: 여기서 T는 Teil(부분)-Autograph의 약자로 생각된다.
27) Krystyna Kobzlanska와 비교해 보시오: Frédéric Chopin - Thematisch-bibliographisches Werkverzeichnis(주제적-문헌학적 작품목록), München 1979, 29쪽.
28) 위와 같음.
29) 쇼팽이 보이치에코브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와 비교해 보시오, 1830. 8. 31; [위의 주석1번 참고] 위의 책, 179쪽.
30) 주석12번을 참고하시오.
31) 엘즈너(J. X. Elsner)에게, 1831. 1. 29; [위의 주석14번을 참고]; 위의 책, 253쪽.
32) 크뤼스튀나 코뷔란스카(Krystyna Kobylanska)와 비교해 보시오: 위의 책, 29쪽.
33) 위와 같음, XV쪽.
34) Faksimile Paris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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