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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치니 [Caccini, Giu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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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카치니, 줄리오 로몰로(Caccini, Giulio Romolo , 1551-1618)


- 1551년 이탈리아 로마 출생. ‘로몰로(또는 로마노)’라는 중간이름이 그의 출생지를 나타냄. 목수였던 아버지 미켈란젤로 카치니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형과 동생은 각각 음악가와 건축가로 활동.

- 1564년부터 로마 줄리아 성가대의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하면서 음악감독 아니무치아(G. Animuccia)와 공부. - 1565년 12월 피렌체에서 거행된 프란체스코 메디치(F. Medici)와 오스트리아의 요한나(Johanna) 공주의 결혼 축하 공연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음.

- 1560년대 중반 그의 탁월한 가창력에 감명 받은 코지모 메디치 1세(Cosimo de’ Medici)와 함께 피렌체로 이주. 이후 30여 년 동안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활동하였으며 특히 프란체스코 메디치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음.

- 1560년대 후반 피렌체에서 성악가 팔레(Scipione delle Palle)로부터 ‘고귀한 창법’을 전수받으면서 비르투오소 성악가의 기초를 닦음. 그의 연주력은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으며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초연에서 타이틀 역을 맡았던 라시(F. Rasi)도 그의 제자였음.

- 1570년대 중반부터 1580년대까지 카메라타(Camsrata)에서 활동.

- 1583년, 1592년, 1594년 페라라(Ferara) 방문.

- 1584년 가수 루치아(Lucia)와 결혼하였으며 1593년 루치아 사망 후 마르게리타(Margherita)와 재혼.

- 부인 마게리타, 두 딸 프란체스카(Francesca)와 세티미아(Settimia), 아들 폼페오(Pompeo)와 함께 성악 앙상블(concerto)을 조직하여 이탈리아 전역과 빠리 등지로 연주여행. 특히 큰 딸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최초의 여성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얻음.

- 1592년 로마에서 바르디(G. d. Bardi)의 비서로 일함.

- 1592년 후반 피렌체로 귀국하여 바르디의 후계자인 코르시(J. Corsi)의 후원을 받음.

- 1600년 10월 6일 페리(J. Peri)의 ≪에우리디체≫(Euridice) 초연 시 자신의 음악을 일부 삽입.

- 1600년 10월 9일 ≪체팔로의 유괴≫(Il rapimento di Cefalo)(여러 작곡가의 합작품)가 초연.

- 1600년 12월 ≪에우리디체≫ 출판. - 1602년 7월 ≪신음악≫(Le nuove musiche) 출판.

- 1602년 12월 5일 ≪에우리디체≫ 공연. - 1605년 마리아 데 메디치 초청으로 파리에서 연주.

- 1614년 ≪신음악과 새로운 작법≫(Nuove musiche e nuova maniera di scriverle) 출 판.

- 1617년 9월 27일 유서 작성. 건강 악화로 음악 활동을 접고 정원사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

- 1618년 12월 사망.


카치니는 17세기 초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생하여 피렌체에서 활동한 작곡가 겸 성악가이다. 성악 지도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새로운 모노디 창법과 즉흥연주법을 발전시켰다. 또한 하프, 리라 다 브라치오, 테오르보, 키타로네 등 여러 악기의 연주자로 활동하였으며 정원사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서양음악사에서 카치니는 종종 페리와 함께 거론된다. 두 명 모두 피렌체에서 작곡가, 가수,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바로크 초기 낭송양식과 모노디양식을 발전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 이러한 공통점은 이 둘의 음악적 성향과 자질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페리가 좀 더 학구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의 극음악 작곡가였던 반면 카치니는 독창곡을 통해 자신의 비르투오소 성악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페리가 20여 편의 극음악을 남긴데 비해 카치니는 단지 5편의 극음악을 남겼고, 그 중 오페라는 2편에 불과하다(게다가 한 작품은 여러 명의 합작품). 질적으로도 그의 작품은 페리의 작품보다 여러 면에서 크게 못 미친다. 하지만 카치니는 두 권의 모노디 곡집을 통해 심금을 울리는 선율과 감성을 자극하는 섬세한 화성이 돋보이는 탁월한 독창곡들을 남겼다. 특히 카치니는 성악가의 즉흥연주에 맡겨졌던 장식음과 기교 등을 악보에 정확히 기보하여 이후 바로크 성악음악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첫 번째 오페라 ≪체팔로의 유괴≫(가브리엘로 키아브레라의 대본)는 1608년 마리아 데 메디치와 프랑스의 헨리 4세 왕의 결혼 축하 공연을 위해 위촉된 것으로 1600년 10월 9일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카치니 이외에 다른 작곡가의 음악도 포함하고 있다. 이 작품이 공연되기 3일 전에는 페리와 코르시의 ≪에우리디체≫가 연주되었는데, 이 때 카치니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경쟁자였던 페리의 음악을 부르는 것에 완강하게 반대하여 결국 일부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대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카치니는 ≪에우리디체≫를 서둘러 완성하여 그 해 12월 악보(최초의 출판된 오페라)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페리의 ≪에우리디체≫보다 두 달이나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카치니의 ≪에우리디체≫는 거의 2년 뒤인 1602년 12월 무대에 올려졌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외에 카치니는 두 편의 인테르메디오(intermedio) ≪하늘의 달을 떨어트리게 할 나≫(Io che dal ciel cader farei la luna, 1589)와 ≪무용극≫(Ballo, 1608) 그리고 한 편의 마스케라타(mascherata) ≪오 존엄하신 여왕이여≫(Serenissima donna, il cui gran nome, 1590)를 남겼다. 또한 카치니는 자신이 리누치니(O. Rinuccini)의 ≪다프네≫(Dafne) 대본에 음악을 붙여 오페라를 완성하였다고 간접적으로 언급하였지만 이를 증명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작곡가 카치니가 비르투오소 성악가로서 그리고 성악 지도자로서 쌓은 경험과 역량은 두 권의 모노디 곡집 ≪신음악≫(Le nuove musiche, 1602)과 ≪신음악과 새로운 작법≫(Nuove musiche e nuova maniera di scriverle, 1614)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이 두 권의 곡집은 마드리갈(통절형식)과 아리아(유절형식의 칸초네타)의 두 가지 유형의 독창곡을 주로 수록하고 있다. 1602년 곡집은 12곡의 마드리갈과 10곡의 아리아를, 1614년 곡집은 16곡의 마드리갈과 13곡의 아리아를 수록하고 있는데, 1614년 곡집에 수록된 한 곡의 마드리갈(4성부)과 두 곡의 아리아(각각 4성부와 2성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독창곡이다. 가사는 타소(T. Tasso)와 마리노(G. Marino) 같은 혁신적인 시인들보다는 리누치니, 키아브레라(G. Chiabrera) 같은 카메라타 시인들의 작품을 주로 사용하였다. 카치니의 문학적 취향도 페리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이고 서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음악≫(1602)의 서문에서 카치니는 이 곡들의 탄생배경과 미학적 목표를 설명하였다. 이 작품들은 ‘음악으로 이야기하는’(favellare in armonia) 양식으로 작곡되었으며 자신이 개발한 이 새로운 양식이 ‘영혼의 감정을 움직이게’(muovere l’affetto dell animo) 하는 것을 최고의 미학적 목표로 삼는 카메라타의 예술적 사상의 구현에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여기에 수록된 곡들은 15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꾸준히 작곡된 것이며 이 작품들이 출판되기 전에 이미 필사본으로 유통되면서 부주의한 성악가들에 의해 작품이 손상된 현실을 개탄하였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카치니는 즉흥적으로 장식음을 올바르게 부르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카스틸리오네(B. Castigliogne)가 ≪궁정인≫(Cortegian, 1528)에서 언급한 ‘스프레차투라’(una certa nobile sprezzatura di canto, 박자를 지키는데 있어서 루바토 같이 유연성을 갖는 방법)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카치니는 이론적 설명에 그치지 않고 파사지오(Passaggi, 여러 개의 짧은 음가로 나누는 것), 트릴로(Trillo, 트레몰로와 같음), 그룹포(Gruppo, 트릴과 같음) 등 여러 종류의 장식과 기교 등을 악보에 자세하게 기보하였다. 이와 같이 즉흥연주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정확하게 기보한 것은 당시 모노디 양식의 성악곡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카치니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참고문헌


Carter, Tim. “Giulio Caccini.”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Ed. Stanley Sadie. London: Macmillan Publishing, 2001.

_________. “On the Composition and Performance of Caccini’s Le nuove musiche(1602).” Early Music XII(1984), pp. 208-217.

Bianconi, Lorenzo. Music in the Seventeenth Century. Translated by David Brya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Hitchcook, H. Wiley. “Vocal Ornamentation in Caccini’s Nuove Musiche.” Musical Quarterly LVI (1970), pp. 389-404.

___________________. “A New Biographical Source for Caccini.” Journal of the American Musicological Society XXVI (1973), pp. 145-147.

Tomlinson, G. A. Rinuccini, Peri, Monteverdi, and the Humanist Heritage of Opera. Ph. D. dissertation, U. of California, Berkeley, 1979.

Towneley, Simon. “Early Italian Opera.” The New Oxford History of Music.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등록일자: 2010.7.31

[변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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