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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
홍정수: 바하를 중심으로 본 교회음악으로서의 예술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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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를 중심으로 본 교회음악으로서의 예술음악

홍정수

[교회와 신학 제18집, 1985. 5.12. 315-339쪽].

 

1.

예술음악은 교회가 필요한것 이상을 제공한다. 이 여분은 사치로 여겨질 수도 있다. 교회에의 봉사와 상관없는 예술가의 자기과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술에 관해 아무런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에 예술은 그 의미가 수용되지 않고 공허한 것이 되는 일이 흔하다. 반면에 소수의 예술 인식가들에게 있어서는 이 예술적 음악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과 성의를 다한 음악이다. 이들에게 예술은 상당한 노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고귀한 것이다. 희랍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번역하는 téchne를 예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목공예나 직조기술과 같은 모든 생산 기술 분야에도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잘 만들어진 생산품'을 뜻했다. 희랍인들은 생산작업에 있어서 잘 만드는 능력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능력은 지적 작업과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téchne의 전제가 되는 것으로 지식을 강조 하였다.1) 이러한 원래적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예술'이란 개념속에 '잘 만들어진 지적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는 모든 예술 분야에서 공통적이다. 이를 음악에만 국한시켜 적용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음악이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로, 음악적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에 의해 작곡.연주되고,
 둘째로, 상당한 지적 작업을 포함하는 작품이어야 하고,
 셋째로, 주로 관심있는 사람들에 의해 육성되는 현상을 보인다. 

이로 인해 교회 안에서도 다수의 일반 회중과 소수의 예술 인식가 그룹이 나뉜다. 회중찬송과 예술적 교회음악은 서로 상당한 간격을 보인다. 이는 회중찬송을 바탕으로 한 예술음악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회중음악의 종교성에 관해서 보다는 예술음악의 종교성에 관한 논의가 더욱 많이 필요해 보인다. 이는 예술음악이 회중들의 공동적인 능력 안에 남아있지 않고, 작곡자의 특수한 능력을 강조하는 성격을 갖기 때문에 쉽게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문제, 즉 '교회음악으로서의 예술음악'을 여기에서 다루고자 한다. 특히 한 사람, 즉 바하의 예술적 교회음악에 관해 다루려고 한다. 바하를 택한 것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교회음악이자 잘 알려져 있고, 음악사에서의 위치가 매우 확고하며, 그를 중심한 논의가 많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다룬 것은 바하의 종교성 문제이다. 바하 음악 전체를 종교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바하의 종교성에 관해 긍정적이다. 반면에 바하의 음악을 전체적으로 교회음악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은 바하의 종교성을 거부한다. 이 양면에 관한 논의를 첫 부분에 다루었는데, 슈핏타(그리고 슈바이쳐)와 아도르노를 통해 것론된 것을 다룬다. 그 다음에는 오스카 죈겐의 음악 신학적 관점에서 본 예술음악을 거론하고, 이에 준한 바하 음악의 교회적 수용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2.

"그 '바하'의 존재는 경건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 경건성은 내적 투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타고난 자연 그대로의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그의 조상들과 같다. 그는 신학 서적과 신앙 서적을 늘 즐겨 읽었다. 그의 도서 목록은 그가 죽을 때 81권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바하의 종교적 의견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책 중에는 누구의 것 보다도 루터의 것을 들 수 있는데, 바하는 그의 작품집을 두 벌이나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슈피타).2)

"그들은 [바하 애호가] 바하 음악의 질서를 즐긴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거기에 복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때의 좁은 신학적 굴레에 정착되었으나,  이 굴레를 깨고 보편성(Universalität)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이 담길 수 없는 좁은 상자 속으로 다시 가두어진다. 그래서 바하는 이러한 절망적 소원 때문에 교회음악 작곡가로 강등된다. 그러나 이 직책을 그의 음악은 거부하고 있으며, 그는 이 직책을 충돌을 일으키면서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아도르노).3)

바하의 신앙을 이야기할 때의 배경은 그의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라이프찌히 시절의 이야기보다는 그가 20대였던 뮬하우젠 때의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된다(1707-1708). 그 이유는 당시 그곳에 루터교 정통파(Orthodoxie)와 경건주의파(Pietismus)간의 분쟁이 심하여 바하가 어느 쪽을 선택했는가를 따라 그의 신앙 태도를 알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4)

17세기 후반에 슈페너(Spener)를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은 일종의 "종교개혁의 종교개혁"(슈바이쳐)으로 경건의 생활화를 주장하여 결국에는 교권주의적인 정통파와 충돌을 일으킨다. 이 운동의 여파는 바하가 있었던 뮬하우젠에도 교회 분열을 가져온다. 바하는 여기에서 정통파 쪽을 택한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첫 아들의 대부가 정통파의 지도자였던 아일머(Eilmer)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적인 요소가 이러한 선택을 하게 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경건주의의 지도자 프로네(Frohne)는 음악의 일부를 교회에서 금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에 오페라와 같은 음악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바하가 후에 쓴 것과 같은 칸타타, 수난음악, 오라토리오 등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교회에서 부르는 아리아도 아주 작은 규모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은 바하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음에 분명하였다.

그러나 슈핏타는 바하가 신앙적으로 경건주의에 가까웠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는 바하가 선택한 가사들의 내용은 경건주의에서 흔히 볼 수있는 "내세에 대한 갈망", "신비(Mystik)" 그리고 "생동적 열정(Iebendige Inbrunst)" 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바하 음악이 경건주의의 결정체라고 말한다. "경건주의가 갖고 있는 미.선.진이 당시의 바하의 음악에 가장 순수하게 결정을 맺었다면, 이는 단지 그 음악의 창조자가 거기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만이 가능할 수 있었다." 즉 그가 당파적으로 경건주의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건주의의 참 모습을 더 잘 알 수 있었다는 말이다.

또한 슈핏타는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바하의 신앙을 그가 남긴 도서목록으로서 증명하고자 한다. 루터전집 이외에도 바하는 경건주의에 반대한 정통파파의 입장을 옹호한 책들을 가졌던 것을 볼 수 있고(Calovius/ H. Müller), 반면에 경건주의파의 도서들도 갖고 있었다(Spener, Francke). 이러한 점에서 보면 바하는 어느 한 쪽에 당파적인 참여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들을 참작하지 않고도 바하가 신앙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슈핏타의 의도인 것이 분명하다.5)

슈바이쳐도 슈핏타와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바하가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매우 절약가인 것을 언급한다. 이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은 바하가 오만하고 불손하며 구두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하의 부덕이 지적받게 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이를 뒷받침할만한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바이쳐는 바하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그를 옹호한다. 그는 바하의 신앙을 그의 인간됨처럼 흠이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는 바하가 총보에 장식한 다음의 약자를 환기시킨다: S. D. G.(Soli Deo Gloria=오직 주의 영광만을 위해), J. J.(Jesu Juva=예수여 도우소서). S. D. G.와 똑같은 의미를 가진 말은 독일어로 반복되는데 그의 "총저음(General-Bass)교본" 제 2장과 "오르간 소품집(Orgelb?chlein)에 나타난다.6)

그러나 이러한 것보다 바하의 신앙을 말하는데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가사의 음악화를 다룬 부분이 아닌가 여겨진다.7) 왜냐하면 바하처럼 가사 하나 하나의 의미를 음악적으로 부합시키려고 노력한 교회음악가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사를 숙고함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바하관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바하에 관한 지배적인 의견"에 부정적 혐의를 토로 한다. 이들은 바하의 음악에서 보는 주관을 무시하여 어떤 상상으로 이루어 놓은 구조 속에 그를 가두어 두고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바하의 음악을 신학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바하를 소인화 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덧붙여 바하의 작곡 기술적인 면만 고전으로 높이려고 하고 당시의 음악과 차이를 보이는 바하의 음악적 내용에는 무관심하다고 "바하 애호가들"을 비난한다. 이렇게 신학 내지 작곡 기술에만 얽매어 바하를 잘못 해석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가 바하를 비종교적인 인간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의 것들이다. 바하가 시대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이며, 그 당시의 시대정신을 수용하였으리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평균율"같은 데서 보듯 합리적인 인간이었다고 보고 있다8). 또한 교회음악에 세속음악을 많이 도입시킨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바하가 대립적 입장에 섰던 경건주의와 그가 사용한 경건주의적인 가사는 서로 무관하다고 본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바하가 도그마적인 질서를 이탈하여 도자적으로 여러가지의 가능한 것중에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음악적으로 또는 사상적, 종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허구적 바하를 만드는 사람이며, 이러한 바하는 이들의 "기계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하고 있다.9)

아도르노는 이러한 주장이 증명될 수 있다고 맏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바하가 교회 음악가의 "직책을 충돌을 일으키면서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 데는 바하가 발설한 말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말은 아도르노의 글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의 내용은 바하가 1730년에 친구 에르드만(Georg Erdmann)에게 쓴 편지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 곳 토마스 학교의 음악 책임자 겸 교회 음악가로 불러 주셨다. 나로서는 처음에 궁정 악장에서 교회 음악가가 되는 일은 격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 3개월간 결정을 미루었으나, 그들이 경제적 여건을 매우 좋게 하다고 하여 드디어는(내 아들들이 대학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듯 하여) 높으신 이름을 받들기로 결정했고..."10)

이 편지는 바하가 감봉 당하고 약속 받은 보수를 받지 못하자 친구에게 직장을 다시 알아 보려고 보낸 편지인데 그의 절망적 심리 상태가 잘 드러나 있는 글로서, 이것이 바하가 구두쇠였느니 인간성에 결함이 있었다느니 하는 주장의 증거로 많이 쓰인다. 위에 인용된 한 부분에서 또한 읽을 수 있는 것은 교회 음악가로 있었던 것이 그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하가 직장이었던 교회 및 학교와 충돌을 일으켰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아도르노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이러한 충돌이 그가 비신앙적이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하가 교회음악가가 된 것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이 그의 직책을 거부하고 있다"는 말은 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바하의 내면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아도르노는 바하의 음악을 예술화된 사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바하의 음악이 교회의 직책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당시의 여건, 즉 바하가 처했던 상황에서 이 글과 사건을 이해하지 않고 바하가 가졌을 법한 사상적인 면과 연결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사상 면을 고려할 때에 언급된 것을 모두 고려한 것이 아니다.

바하에게는 아도르노의 음악철학과 맞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아도르노 자신 역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즉 바하가 당시 매우 구식의 음악을 고수한 점이다. 아도르노는 각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구식인 음악을 "복고적 행위(Reaktion)"로, 새로운 "음악적 재료(Das musikalische Material)"를 사용하는 것을 "발전(Fortschritt)"으로 분류한다.11) "복고적 행위"나 "발전"은 그가 사회학이나 정치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그대로 음악에 적용시킨 것이다. 즉 음악적 재료에서 이데올로기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음악의 임무를 세상의 개혁이라고 맏는 그의 신념은 사회학과 음악을 연결시킨다. 그러나 "발전"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작곡가들이 새로운 음악적 재료만 사용해야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작곡가의 "자유"는 없어지고 음악 재료의 "강요"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아도르노의 음악철학의 기본과 배치되지만 바로 이 철학이 그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는 예술 행위가 지배적 사회 조직이나 통념과 개인적 주관이 서로 결렬을 가져오는 데서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통념은 강요적 성격을 가졌고 주관은 자유지향적이라고 말한다. 개인적 주관이 느끼느 것은 진실(Wahrheit)이며 진실은 통념으로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듯 그의 예술관은 그 출발점이 주관이다. 그러나 이 주관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역사적인 객관으로 바뀌어진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은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이루며 발전을 이루어 간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발전의 편으로 작곡가들을 몰고가 새로운 음악적 재료만 양산하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의 서양 음악의 현실인데, 이는 아도르노에 관한 이해 없이는 이 부분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이러한 지배적인 음악적 상황은 사회적 통념과 똑같이 작곡가의 진실을 억압한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이의 보완책으로 후에 타당성(Stimmigkeit)이란 말을 사용한다.12)

즉 음악적 재료가 역사적 상황에서 타당한 도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하에게서는 음악적 재료가 적당한 발전 단계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음악적 재료들과 비교하여 매우 구식이었다. 이것은 아도르노의 음악 철학과 화합될 수 없는 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면을 본 아도르노는 음악적 재료의 면에서 바하가 "중세의 완성자"처럼 보인다고 수긍하나 그의 음악에는 이것과는 또 다른 면이 있어서, 그의 음악은 같은 기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음악과는 다른 "표현(Ausdruck)"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그의 『평균율 2권』에 있는 Es-dur 푸가는 "긍정적 소리"(Der affirmative Ton)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소리는 "묵시된 진실이 확보된 종교적 집단이 가지는 확실성"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해방된 주관(emanzipiertes Subjekt)"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다시 말해 바하는 종교집단이 원하는 형식은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그의 주관은 음악만을 즐긴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바하의 음악은 그 나타나는 형태(Erscheinung)와 본질(Wesen)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13) 이러한 설명을 할 때에 아도르노는 "긍정적 소리"가 어떻게 그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체성을 띠지 않는 주장은 아도르노가 펴는 음악철학의 본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긍정적 소리"는 그의 주관이 느끼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 진실은 "자기 자신에게 깊숙이 빠져들어가(in sich versinken)" 얻은 것으로 다른 지배적인 통념과는 다를 수가 있을뿐 아니라, 이 다름의 도가 깊을수록 진실의 도가 강한 것이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긍정적 소리"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관의 강조는 여러 지엽적인 문제에서 필연적으로 상관관계를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즉 바하 음악이 놓였던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는 부분을 도외시 한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는 바하 음악에서 가사를 전혀 도외시한다. 그래서 성악곡을 도외시하고 기악곡만 언급한다. 이러한 결과로 바하 음악에서 고려해 주어야 할 18세기의 감정이론(Affektenlehre)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하 음악의 음악적 토양 중의 하나인 이 부분을 제외하고 바하 음악의 "표현"을 논하는 것은 18세기 초의 바하는 아니다. 가사의 말  하나 하나를 음악으로 표현해 내려고 했던 바하의 노력은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아도르노의 바하는 20세기의 바하이다. 그의 눈에는 바하가 "해방된 주관"이기 때문에 18세기의 배경을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것은 베토벤이나 쉔베르크에게 적합한 해석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회의 통념과 싸워 새로운 음악적 재료를 도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도르노는 이들을 해석했던 방법을 바하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가 20세기 음악, 특히 쉔베르크를 옹호하기 위해 발전시킨 그의 철학사상은 18세기의 상황을 고려했다 해도 매우 일방적인 것이다. 즉 바하가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이라고 해서 계몽적인 인간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계몽주의만 있었고 다른 것은 없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평균율'을 사용했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비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한 것도 그렇다. 바하가 세속음악을 교회음악 속에 삽입한 것도 그렇다. 독일 교회는 루터의 음악신학에 따라 세속음악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유용하면 허락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아도르노가 바하의 비종교성을 거기에서 찾고 있으나, 이는 근거로서는 아주 부적합하다. 이렇게 이유정립에서는 아도르노가 많은 약점을 보여 준다. 그의 글에서 이러한 면들을 찾기는 매우 쉽다. 그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배경을 파악하는 수고를 아끼기 때문이다.그보다는 주관이 말하는 진실에 순응한다. 위에 인용한 글을 쓴 목적은 바하를 그들의 애호가로부터 옹호하려고 쓴 것이다. 그러나 옹호된 것은  바하가 아니고 자신의 음악철학이다. 즉 아도르노는 자신을 방어한 것이다. 현대음악을 옹호 하면서 정립해온 그의 이론을 방어한 것이다. 그의 철학은 자신이 용호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방어로 나타나며 반대하는 부분에는 공격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서 객관적인 제삼자의 자리는 불가능한 위치이다. 역사에 참여하여 사회변혁을 가져오려고 한다면 오류나 모순이 있더라도 강력하게 발전의 편에 서야 한다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바하를 발전의 일부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그가 공격하는 것은 "애호가들"이다 이들을 음악의 발전을 저해하는(또는 불가능하게 하는) 사람들로 그는 보고 있다.

그러나 슈핏타나 슈바이쳐의 이유 정립은 최소한 바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에서 가져온 것이다. 도서 목록이나 경건주의와의 관계, 가사 선택의 경향, 그리고 가사와 음악의 합일을 추구한 것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점이 없지 않다. 그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음악학이 보여주는 보편적 경향으로 음악가들을 천재나 악성으로 파악하여 그들의 탁월함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하는 일이다. 심지어는 그들의 결점까지도 미화되었다. 슈핏타와 슈바이쳐도 바하를 옹호했는데, 전면적으로 옹호하였다. 이 둘은 교회음악에서 성장한 사람들로, 전자는 신학, 언어학, 음악학을 공부했고 후자는 신학, 의학, 음악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바하를 교회음악가로 옹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아직도 지배적이다. 이는 바하가 이미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둘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음악사적 위치를 차지한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바하가 인간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별로 감추어지지 않는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성악을 도외시하는 아도르노적인 해석은 바하 작품의 대부분인 성악곡들을 모두 기악곡으로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교회적 배경을 무시할 때 바하 음악의 역사적 배경이 없어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슈핏타의 해석은 또한 아도르노의 해석보다는 더 많은 관련성을 고려했다. 아도르노가 평생을 두고 다룬 작곡가는 쉔베르크, 베토벤, 말러, 바그너, 베르크 등이다. 바하에 관한 것은 위의 인용문이 나오는 18페이지 짜리의 에세이 한편이다. 이에 비해 슈핏타와 슈바이쳐는 평생을 통해 바하 연구에 힘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음악을 학문으로 다룬 반면에 아도르노의 문필활동은 에세이 류의 것들로 그의 "주관"을 수용하기 좋은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주관이 객관으로 나중에 용해되기 때문에 우선 주관에 충실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하관 보다 슈핏타의 것이 더 객관적이라고 할지라도 슈핏타가 바하의 신앙을 증명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가 남긴 기록들은 정확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에는 너무 미흡하다. 이 기록들은 청원서, 증명서, 지원서 등으로 일정한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들이어서 바하의 인간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3.

이상에서 보듯이 바하의 음악과 신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앙적인 면을 보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가사를 어떻게 음악화시켰느냐 하는 면을 본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에 선 아도르노는 주로 바하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킨다. 이로 보아 한 작곡가의 작품은 쉽게 그의 인간적.신앙적 면과 연결되어 이해도는 것을 알 수 있다. 바하가 만일 아도르노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앙가로 보였다면, 그의 바하관은 매우 달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으로 보면 한 인간의 신앙을 다른 인간이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때라서 이러한 어려운 판단에 의거하여 한 작곡가의 교회음악을 '교회적이다, 아니다'하고 판단하는데에는 인간적 주저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바하의 교회음악은 음악 자체로 해명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언어(가사)와 음악을 사양음악사에서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자.

언어와 음악을 같은 종류의 것으로 취급했던 것은 서양에서 매우 보편적 이었다. 특히 중세에는 음악이론(musica theoretica)을 수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네가지 학문 분야로 구분하여 산수, 기하, 천문학과 함께 분류되었으며, 음악이론에 대립되는 음악실제(musica pragmatica)는 언어로 규정되는 학문으로서 문법, 수사학, 변증론과 함께 분류되었다.14) 또한 16-18세기 사이에 통용된 작곡이론인 시적음악(musica poetica)은 수사학을 빌려서 고안된 것으로서, 언어의 뜻에 따라 여러가지 음형들을 만들어 이를 작곡에 사용했다.15)

바하의 음악 역시 그러한 생각과 함께 작곡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당시의 작곡이론에서 보이는 음형들과 바하의 음악을 비교하면 분명하게 드러난다.16) 특히 바하연구에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어떠한 책들에도 바하의 음형이론이 간과되는 일이 드물다. 음형이론을 바탕으로 한 음악은 어떤 내용의 음악적 상징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상징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바하의 음악은 그 바탕이 되는 찬송가(Choral) 가사의 상징인 것이다. 한편 상징은 개념처럼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자체를 넘어선 무엇을 뜻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가사를 상징하여 가사 이상의 것이 되고 싶어하는 경향도 보이며, 개념에도 참여하고, 그 이상의 상징과도 상관된다.

물론 이러한 음악의 상징성은 오늘날 작곡학에서는 배워야 할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작곡 방식에 없다고 하여 이를 무시하고 바하를 해석하는 것은 결함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바하의 교회음악은 거의 성악곡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바하의 종교성과 음악을 옹호해 주기에 용이하다. 기악곡이 교회음악인 경우는 주로 오르간 곡이며, 이것들이 대부분 찬송가 선율을 변주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옹호된다. 이제 바하의 오르간 음악은 원래 교회음악이 아닌 것도 교회음악화되어 있을 정도로 바하 음악은 교회화된 감이 없지 않다.

바하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그의 음악이 갖는 종교성 문제에 관해 큰 논란이 없었다. 당시의 음악 사상적 배경은 음악이 자체로서 평가를 받았다기 보다는 어떠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음악을 주로 쓴 그의 음악이 어느 정도의 종교성을 드러내느냐 하는 것은 질문되지 않았고, 당연히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었다. 

바하는 당시에 인정받는 음악가이기는 했으나 오늘날과 같은 높은 평가를 받지 않았다. 그를 키운 독일의 교회는 그의 음악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었고, 사후의 그는 거의 잊혀진 사람이었다. 그를 재발견한 것은 교회가 아니었고 학자와 음악가들이었다. 1802년에 쓴 포르켈의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생애, 예술, 작품』은 주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본 음악가 바하를 다루고 있다. 그는 연주자, 작곡가, 음악선생으로서의 바하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가 인간 바하를 다룬 것도 주로 가장(家長), 친구, 시민, 음악가로서의 바하였다.17)

포르켈 이후의 대표적 바하 연구가들은 슈핏타, 슈바이쳐이다. 그런데 이 들처럼 가사를 음악화시키는 데서 보인 숙고에서 바하의 신앙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같은 근거에 의해 어려움을 당한다. 바하가 많은 세속음악에 종교적 가사를 붙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바하의 『부활절 오라토리오』 (BWV 249)는 목동 칸타타(BWV 249)를, 『성탄절 오라토리오』(BWV 248)는 『근심하며 깨어있자』(BWV 213)와 『북이여 울려라, 나팔이여 소리내라』(BWV 214)의 음악을 주로 사용했다(그 외에도 BWV 45, 47, 215의 음악을 사용한 것도 있다). 『근심하며 깨어 있자』의 음악은 작센 영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음악극(dramma per musica)으로서,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바하는 『성탄절 오라토리오』를 쓰면서 성탄절 내용의 가사를 거기에 붙였던 것이다.

슈핏타는 『성탄절 오라토리오』가 원래 다른 가사를 가진 음악들을 집합 시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가사와 새로 붙여진 가사와의 유사성을 비교한다.18) 즉 "북이여울려라, 나팔이여 소리내라"는 "즐러워하라.기뻐하라 이날을"로, "나의 날개 위에 그대는 띄워지니, 나의 날개로부터 그대는 별에 태워지리"가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의 구주여 내게 힘과 용기를 주셔서, 나의 마음이 부지런히 찬양케 하옵소서"로, 비슷한 성격의 가사로 고쳐진 것을 말한다. 그러나 뱀을 묘사한 부분의 가사가 "당신의 뺨은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는 가사로 변해진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슈핏타는 말하지만, 바하에게서 가사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한 너무 지나친 해석은 좋지않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바하가 기악곡을 쓰든지 세속곡을 쓰든지 간에 교회음악적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19) 그래서 바하가 세속음악에 교회적 가사를 붙이는 것은 음악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온 것으로 해석된다. 바하가 편하게 작곡하기 위해, 또는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작곡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슈핏타는 주장한다.

슈바이쳐는 『성탄절 오라토리오』 전체를 같이 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합창과 아리아를 구분해서 평가한다. 즉 합창은 가사와 잘 부합하여 마치 음악이 그 가사를 위해서 원래부터 작곡된 듯하다는 것이다.20) 그러나 아리아에서는 가사와 음악이 잘 맞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특히 『오직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리』(Ich will nur dir zu Ehren leben), 『예비하라 시온아』(Bereite dich Zion), 『주여, 자비를』(Herr, dein Mitleid)의 노래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들은 이질적 시와 음악 때문에 청중들을 사로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는 『예배하라 시온아』의 베이스 음형이 원래 뱀이나 용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가사에 전혀 부합하지 못한다고 말한다.21) 그는 이렇게 세속음악이 교회음악과 잘 맞지 않는 것은 바하에게 흔히 보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슈핏타와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슈핏타는 바하의 세속 칸타타가 『성탄절 오라토리오』로 된 것을 행운이라고 한다. 그러나 슈바이쳐는 이것을 의심스러운 행운이라고 말하는데 그는 말과 음악이 서로 조화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후에 블루메(Friedrich Blume)는 슈핏타와 슈바이쳐의 의견들을 다음과 같이 조절한다: '당시에는 세속음악이 오늘날과 같이 뚜렷하지 않았다. 군주에게 바치는 음악은 기독교적 경배의 표현으로서도 합당 할 수가 있다.22) 블루메의 생각은 그러나 후에 달라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그는 바하가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부여된 임무를 채우기 위해 작곡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 그는 바하의 작품들이 언제 작곡되었는지를 열거한다. 바하는 바이마르(Weimar)에 있었던 1713년까지는 주로 오르간 음악을, 1714년부터는 칸타타를, 그런데 쾨텐(Cöthen)에 있을 때에는 거의 기악곡만을(오케스트라, 쳄발로, 실내악), 라이프치히(Leipzig)에서는 주로 교회음악을 썼다.

 (2)바하는 라이프치히 이전까지는 주로 궁정 악장이었으며, 이때에는 어떤 음악을 써야한다는 엄격한 요구를 받지 않았으며 교회음악가로 일했던 라이프치히 때부터 예배의 내용과 노래가사를 서로 맞추라는 요구를 받았다.

 (3)라이프치히 제2기부터는 임무와는 거리가 있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때에 그는 실용적 목적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음악을 작곡했다(B단조 미사, 연곡형식의 음악).

 (4)감정이론을 이용한 음악은 몬테베르디 이후 음악적 보편 사항이었으며 바하 특유의 것이 아니었다.

 (5)바하 음악에 들어 있는 성경 숫자의 상징은 인정된다. 동시에 이는 음악의 수학적 구조가 된다. 그러나 바하는 되다가 만 성직자도, 수학자도 아니며 음악가일 뿐이다.

 (6)바하가 필사본에 J. J.(Jesu Juva 예수에 도우소서) 또는 S. D. G(Soli Deo Gloria)라고 서명한 것은 그뿐 아니라 당시의 다른 음악가들도 거의 같거나 비슷한 서명을 보여 준다.

 (7)경건주의와 정통주의의 싸움은 신학자들의 일이었고 음악가들의 일이 아니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에 블루메의 논지는 너무 신학화된 바하를 신학으로부터 끌어내 오려고 한다. 또한 그는, 바하가 단지 음악 자체를 목표로 작곡했다는 주장이 당시에 조금은 어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바하를 있는 그대로, 한 사람의 평범한 신자로, 평범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23)

그의 관찰은 역사적 바하를 보여 주려고 노력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관찰이 실제의 바하에 가장 가까울 것으로 여겨지다. 그의 바하는 음악학자의 바하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바하는 포기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추구된다.

교회음악사가인 블랑켄부르크는 바하가 세속음악에 가사를 붙여 교회음악화 시킨 것을 문제 삼으나 당시의 음악적 생각에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예배음악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았고, 모든 참된 음악은 "창조에 부합되는 주어진 질서를 존중하기"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원래의 가사와 나중에 붙여진 가사가 잘 맞는 것을 열거한다. 그러나 슈바이쳐가 지적한 잘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24)

또 한편으로 바하의 정신적, 신앙적 면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알버트 웰렉은 슈핏타, 슈바이쳐, 블루메의 해석들이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25) '의도의 오류'라는 용어는 주로 문학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작자가 말하지 않은 의도를 해석자의 자의로 추출해 낼 때에 생기는 오류를 뜻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적품을 통해 바하의 종교성을 논하는 것은 잘못된 의도를 추출해 낸 것이 된다. 그러나 종교적 의도를 지향하지 않는 음악을 가지고는 교회음악의 테두리를 만들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없는 공허한 음향을 교회음악으로 채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 교회음악에 관한 죈겐의 의견은 이러한 교회음악의 테두리를 정하고자 한다.

 
 4.

죈겐은, 말씀과 음악은 서로 구분이 되지만 성경말씀이 음악화될 때에 이 말씀은 가장 깊고 가장 궁극적인 것이 드러난다고 본다. 그는  초대 교회의 예에 비추어 말에 성령이 함께 하듯 교회음악에도 함께 한다고 말한다. 초대 교회 때에는 케리그마와 증거가 찬송적 언어로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음악의 언어가 내용으로 분리될 수 없듯이, 반대로 케리그마 역시 예술적 음악과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26)

죈겐은 예술이 감각적인 부분에 의해 유지.지탱되는 면이 있음을 수긍한다. 그는 이로 인해 음악 예술이 하나님의 방해물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신령한 음악적 찬송의 옷을 입혀 우리에게 제공하시길 원하신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베드로후서 1장 21절을 인용하는데("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는 신령한 노래와 예언이 초대 교회 때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같이 나타났다고 본다. 따라서 찬송 역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감각적 본성을 벗어나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27)

죈겐은 작곡가가 신앙적인 순수한 마음으로 작곡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음악이 자신의 허영을 채우는 것이 주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설교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여 음악만의 일이 아님을 밝힌다. 예술가 쪽에서는 예술이 스스로가 목적이고 아무에게도 봉사하지 않아야 진정한 예술이라고 보는 풍토가 있다. 그는 이렇게 예술이 생활과 무관해지는 것을 비판적으로 본다. 그가 교회와 음악이 서로 만나야 한다고 말함은 예술이 생활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생활과 관련된 예술은 항상 더 낮은 예술을 뜻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28)

그는 교회음악의 원래 목표는 예배와 함께 묶여있음을 말한다. 믿는자들로 구성된 회중이 예배를 성대하게 치루기 위해 음악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믿는자의 신앙은 반드시 열매를 가져오는데, 이 열매에는 음악도 포함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신앙이 있는 곳에서는 음악을 만드려는 "의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해야 하는 "거룩한 의무"가 생긴다는 것이다. 신앙이 창조적 기능을 가질 때에 만들어지는 적품의 예술적 모양은 신앙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앙의 고백에는 예술적인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그는 말한다. 가장 완벽한 예술로부터 가장 강력한 증거와 말씀 선포의 힘이 나온다는 것이다.29)

죈겐은 예배에서 음악이 하는 일이 말씀선포가 아니라 회중의 응답이라고 보는 의견에 반대한다(특히 칼바르트). 즉 음악이 말씀 선포에는 원래부터 적합하지 못하여, 어떤 내용을 말하는 역할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는 의견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가 반대하는 이 입장은 예술음악의 옹호로부터 나오는데, 이는 말씀선포의 의무가 예술의 자유를 다시 앗아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은 말씀선포 이후에 따라오는 것으로서, 인간에게 자유로이 행할 수 있게 주어진 것이며, 이 자유가 예술적인 것으로 허락되었다고 본다.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유희할 수 있는 입장이 된다. 그러나 죈겐은 이러한 신학적 예술론이 교회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고 말한다. 예술에는 단순한 유희 이상의 심각함이 있으며, 특히 교회음악은 유희적인 면도 없지 않으나 이를 넘어서서 내용을 말하는 성격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언어와 음악의 관계가 밀접한 음악이 교회음악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교회음악가로 하인리히 쉿츠(Heinrich Schütz)를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의식될 수 있는 음악을 교회음악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음악이 말씀 선포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교회음악이 예술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으며, 듣는자에 따라서는 예배와 무관하게 이를 단순히 음악으로만 즐겨질 수 있는 가능성도 죈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사실이 '예술음악은 봉사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게 하지 않는다고 본다. 예술적 가치를 절대화 시키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예술적 음악은 교회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음악이 가져오는 무시간성(無時間性, Zeitlosigkeit)은 우리가 창조로 부터 멀어진 세계에 살며, 죄와 죽음의 법칙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고 죈겐은 말한다.30)

그의 의견은 음악을 통해 세상이 잊혀지기를 바라는 낭만주의적 사고와는 다른 점을 보여준다. 즉 음악을 통해 무시간성을 체함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고, 죄와 죽음의 법칙 아래 놓인 우리의 실체를 자각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파악된 것이다. 이러한 것을 깨닫게 하는 데에는 잘 다듬어진 예술적품이 가장 적합할 것으로 간주된다. 다듬어졌으면 다듬어진만큼 우리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정교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식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실체를 의식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하가 이와 같은 의식을 가졌었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가 결정적인 언급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판단해 보아도 당시의 음악적 사고로는 종교적이 아닌 다른 생각을 가지고 교회음악을 작곡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 신학화된 바하나 너무 세속화된 바하를 기피하고 당대의 지배적 생각으로 그를 이해하고자 한다. 따라서 인간 바하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양보할 수 밖에 없다.

양보하기 어려운 것은 바하의 음악에 관해서이다. 대부분의 그의 교회음악 작품은 가사를 매우 심사숙고한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렇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을 인정해도, 그것은 소수이다. 또한 당대에는 세속음악을 교회음악에 차용하여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바하의 음악이 매우 뚜렷한 하나님 찬양의 의식과 인간 실체의 의식을 보여줄 수 있는 문헌이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면 우리는 매우 분명한 바하의 교회음악관을 가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것이 우리에게 없음으로 인해 여러가지의 논란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음악을 들을 때에 작곡가가 어떠한 신앙을 가졌는가가 청중에게 상당히 중요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회음악의 청중이나 연주자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 찬양의 뚜렷한 의식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점이 우리들에게 실제적 문제가 되며, 역사적 바하는 이차적 문제가 된다. 또한 어떤 음악이 더 의식되어진 찬양이냐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예술음악이나 회중찬송은 각기 방법을 달리한 표현의 다양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회중음악과 예술음악이 서로 관련이 있을 때에, 즉 예술음악이 회중음악의 변주적 성격의 것일 때에는 이 두 종류의 음악에 긴장이 덜한 것이 되며, 예배와의 관련성이 뚜렷해 진다. 반면에 특별한 분위기 변화가 요구되는 절기에는 다른 성격의 음악이 더 적합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러한 때에는 예술음악이 요구된다. 이러한 요구는 사람들의 기분으로부터가 아니라 교회로부터 온다.

교회는 예술음악도 회중음악도 다 필요하다. 음악관에 비추어 보면 교회음악에서 예술음악적 부분을 억제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칼빈은 다성부의 음악을 예배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가정에서만 하락했다.31) 이러한 시도들은 예술음악과 음악가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어 오히려 세속음악의 발전을 돕는 결과를 초래했다. 칼빈이 회중음악만을 허용하여 예술음악을 금지하고, 오르갠을 교회에서 철거하자 오르가니스트들이 세속음악에 주력했는데, 그 결과 네델란드에서는 뜻밖에도 오르갠 음악이 교회 밖에서 연주회 음악으로 성행한다.32)

이러한 결과는 교회가 원치 않을 것이다. 또한 칼빈주의 개혁교회에서도 예술음악 금지를 더 이상 고수하지 않고 있다. 칼빈이 원래 가정이나 학교에서만 국한시키려고 했던 4성부 찬송가가 장로교의 교회 안에서도 4성부로 불리우는 것은 물론, 이것이 타교파에까지 파급되어 있다. 이렇게 예술적인 것은 그 전파력이 강한 것을 볼 수 있으며, 교회가 이의 사용을 거부할 때에 스스로 손해를 보게된다.

이러한 4성부 찬송가에 비해 바하는 보통 사람이 연주하고 듣기가 어려운 면을 지니고 있다. 또한 독일지역을 제외하고는 교회 안에서 많이 연주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더 많이 연주된다. 한국의 교회들 역시 바하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보다 손쉬운 곡들을 많이 연주한다. 바하가 어렵다고 연주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하 음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면 적절한 판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판단은 다수의 무능자가 소수의 유능자를 판단하는 것에 흡사하다.

이렇게 희귀한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설 자리를 교회 안에서 없애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이들 역시 교회와 회중들을 의식하지 않으면 교회에의 기여가 약할 수 있다. 이들이 빠지기 쉬운 생각은 '교회음악으로서의 예술음악'이 아니라, '예술음악으로서의 교회음악'이리라. 이러한 예술지상주의적 사고방식은 교회에서 적당하지 못하다고 불 수 있다. 

한편 예술가의 교회음악은 음악으로서만 판단되지 않고, 그 사람됨을 보아, '교회음악적이다, 아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바하를 통해서 보았다. 교회음악가들 중에 성자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또한 성직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 역시 드물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음악가들에게 성직자적 자세돠 삶을 요구한다. 이는 성직자의 교육을 받지 않고, 성직자로 취급받지 않는 사람에게 하는 요구이다. 음악가들은 이 점이 약간 부당하게 느껴지리라. 그러나 교회로서는 이러한 요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음악가들은 이러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한편 교회는 음악가들의 삶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필요하다. 음악가에 대한 불관용이 예술음악을 교회에서 막는 가장 큰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인간과 그 음악을 통해 우리에게 열어주는 새롭고 신비한 세계를 교회의 것으로 수용하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항상 감각의 세계에 휩쓸리기 쉬운 음악가들을 돌보는 길이며, 동시에 교회는 노고를 다한 찬양을 얻을 수 있다.

 
 5.

 (1)교회음악가들은 그들의 신앙이 확고하면 할수록 그들의 음악이 교회음악으로서의 역할을 쉬게 해낼 수 있다. 음악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불분명하게 드러내는 면이 있기 때문에 교회음악도 세속음악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따라서 작곡자의 신앙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하의 종교관이 문제되는 것을 본다.

 (2)바하는 죽은 직후 독일교회에서도 거의 잊혀졌으며, 17세기 중엽에 음악학자들과 음악가들에 의해 재발견된 것은 교회의 잘못이다. 독일교회는 자신이 기른 가장 위대한 인물을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3)바하의 음악은 일반회중이 필요한 것 이상을 제공한다. 따라서 교회는 여기에 무관심하기 쉽다. 그의 음악이 전례와 밀착되어 있고, 말씀을 적절하게 음악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실천적 어려움 때문에 경원시된다. 그래서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잘 만들어진 그의 예술적 교회음악이 거의 100여년 가까이 방치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술음악에 관한 확고한 실천적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뜻 한다.

 (4)교회가 예술음악에 무관심함으로써, 교회에서 예술음악가들의 위치확보가 어려워진다. 이것이 예술음악과 음악가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 수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바하를 교회음악가가 아니라고 보는 의견을 도와주는 결과가 된다.

 (5)교회가 평범한 인간인 음악가에게 성직자적 엄격한 삶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 이들에 대한 불관용으로 이어지기 쉽다. 교회는 음악가 감각적인 부분과 너무 밀착되어 있으리라는 선입견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교회는 이 점에서 자기극복을 실현해야 한다.

 (6)성경은 우리가 찬양해야할 의무가 있음을 말한다. 이 찬양이 매우 아름다운 것이 될 때에 그 의미는 더욱 빛날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의 봉사가 될 때에 찬양의 의미가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음악가들은 유념해야 한다.

 (7)음악가들에게는 찬양의 의식(意識)이 요구되는데, 이 의식은 인간의 내면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어럽게 하는 면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하나님 앞에 선 존재이다. 그의 의식이 자신을 사람 앞에 선 존재로 파악한다면, 그의 음악은 제 기능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각주
1)Wladyslaw Tatarkiewicz, Geschichte der Asthetik I. Basel/Stuttgart, 1979.p.47ff
2)Philipp Spitta, Johann Sebastian Bach II. Leipziig. 1930.p.747.
3)Th. Adorno, Bach gegen seine Liebhaber verteidigt.→Prismen, Frankfurt/Main 1955,p.162.ff
4)Spitta p.748f.
5)같은 책.p.749.
6)A.Schweizer. J.S.Bach (1908). Wiesbaden. 1972.p.130-147.
7)같은책.p.382-477.
8).오늘날의 음악학은 -아도르노의 시대와는 다르게- 바하의 Wohltemperiertes Klavier를 <평균율>로 보지 않고, <가온음률>로 본다. 권오연: 바하의 <평균율곡집> 과영 평균율로 조율되었나? ↗음악과 민족 제10호, 1995, 305-321.
9)Adorno: p.163ff.
10)Bach, Leben und Werken in Dokumenten. 편찬:Hans Joachim Schulze. Kassel 1975. p.13
11)Luvia Sziborsky: Adornos Musikphilosophie. M?nchen. 1979. p. 91-106.
12)같은책.p.96f.
13)Adorno. p.166.
14) Ulrich Meyer: J.S.Bach Music als theonome Kunst. Wiesbaden 1979. p.20f
15)Martin Ruhnke: Joachim Burmeister, Ein Beitrag zur Musiklehre um 1600. Kassel. 1955. p.55ff.  Joseph Müller-Biattau: Die Kompositionslehre Heinrich Sch?tzens in der Fassung seines Schüllers Cheisioph Bernhaed. Kassel. 1963(2판). p.16ff.
16)여기에 관한 구체적인 나열은 피하고, 아놀드 슈밋츠(Arnold Schmitz)의 연구서들을 소개 한다. Die Bildlichkeit der wortgebundenen Musik Bachs. Mainz. 1950. Die oratorische Kunst J. S. Bachs→Johann Sebastian Bach, Darmstadt. 1970.p.61-84.
17)Johann Nikolaus Forkel(1749-1818): 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 Augsburg. 1925.
18)Philipp Spitta: p. 404이하
19)Bachs gesammte Ausdrucksweise hat sich auf kirchlichem Grunde gebildet (바하의 전체적 표현 방식은 교회적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 p.407.
20)Albert Schweitzer: Johann Sebastian Bach. (1936) Wiesbaden. 1972. p.635ff.
21)같은 책: p.616f.
22)Ein Vortrag auf dem internationalen Bach-Fest in Mainz→ Musica 16. 1962. p.169ff.
23)MGG(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Friedlich Blume 편찬. 16권. Kassel. 1949- 1979.Johann Sebastian Bach 항목
24)Walter Blankenburg: Das Wweihnachts-Oratorium von Johann Sebastian Bach.. Kassel 1982. p.16ff.
25)Albert Wellek: Musikpaychologie und Musikästhetik, Bonn 1982(3판) 233ff.
26)Oskar Söhngen: Theologische Grundlagen der Kirchenmusik → Leiturgia IV(Karl Ferdinand Müller/Walter Blankenburg 편찬). Kassel 1961. p.170f.
27)같은 책: p.172f.
28)같은 책: p.174f.
29)같은 책: p.177f.
30)같은 책: P.178ff.
31)같은 책: p.38-62.
32)예를 들어 슈베링크(Jan Peterzoon Sweelink.1562-1621)의 오르갠 음악들은 모두 교회 밖에서 연주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책: p.40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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