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발리(Francesco Cavalli, 본명: Pier Francesco Caletti-Bruni, 1602.2.14. Crema -1676.1.17. 베니스)
설명1
17세기 이태리 베니스에서 활동한 오페라 작곡가. 크레모나에서 태어났으나 생애의 대부분을 베니스에서 보냈다. 40개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오페라의 상업화와 함께 오페라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굳건히 뿌리내리는데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계승하였으며 현재 몬테베르디의 작품 다음으로 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17세기 베니스 오페라의 작곡가이다. 그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으며 일찍이 암브로스는 카발리를 죠스깽에 비유하였다(1878).
카발리는 몬테베르디가 음악감독으로 재직할 당시인 1616년에 14세의 나이로 산 마르코 성당의 성가대원으로 들어와 제2 오르간연주자와 제1 오르간연주자를 차례로 거친 뒤 1668년에 성가대장으로 취임하였다. 몬테베르디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공식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몬테베르디의 유집 Messa a 4 voci et salmi (베니스, 1650)을 편집하였을 정도로 둘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바라 스트로찌의 스승이였으며(참고 B. 스트로찌) 카발리의 작품은 대부분 베니스의 마르코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카발리는 O. Persiani, G. Cicognini, G. Faustini, G. Busenello, N. Minato, A. Aureli 등의 대본가와 협력하였으며 특히 Faustini와 카발리의 관계는 베니스 오페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1639년부터 1650년까지 최초의 상업 오페라 극장인 카씨아노 극장을 위하여 10여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며 대부분의 악보가 보관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악보가 보관된 것은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매우 예외적인 것인데 이는 카발리가 카씨아노 극장의 흥행주로 일하였기 때문이다 (참고 파우스티니, 치코니니, 부제넬로).
참고문헌
J. Glover. Cavalli, London, 1978.
E. Rosand, \"Aria in the Early Operas of Francesco Cavalli.\" Ph. D. diss., New York Univ., 1971
__________. Opera in Seventeenth-Century Venice: The Creation of a Genre. Berkeley: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변혜련
설명2
카발리는 17세기 후반 베니스에서 활약한, 당대 이태리 오페라의 중심적인 작곡가였다. 그는 몬테베르디와 함께 베니스 악파를 대표했다. 그는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모델 삼아 작곡하면서 활동지인 베니스를 뛰어넘어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나폴리 악파 음악을 세우는 스카를랏티(A.Scarlatti)가 출현할 때까지 이태리 오페라계의 중심인물로 간주되었다.
카발리는 이태리 크레마(Crema)에서 지암밧티스타 칼렛티(Giambattista Caletti)의 아들로 태어났다. 페데리코 카발리(Federigo Cavalli)라는 베니스 귀족의 보호를 받았기에 그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보호자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바꾸었다. 1617년 그는 베니스의 산 마르코 성당의 성악가로 일했다. 1636년에 발간된 한 모테트 모음집에 그는 산 지오반니와 파올로(S. Giovanni e Paolo)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기록되어 있다. 1639년 그는 산 마르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이 해에 그는 베니스의 최초 공공 오페라 극장인 산 체씨아노(S. Cessiano)를 위해 다른 작곡가들과 함께 공연물을 제공하겠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극장이 세워진지 겨우 두 시즌이 지난 때에 생긴 일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테티와 펠레오의 결혼』을 작곡했는데, 이는 아직까지 전해오는 베니스 오페라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그는 1640년대에 체씨아노 극장을 위해서 『에지스토』등 성공적인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17세기 후반 가장 널리 공연된 작품들이었다. 특히 그의 오페라 『지아소네』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장기간(1649-62) 공연이 지속되었다. 1650년대에는 『로진다』 등 모두 14개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이 시기 이태리의 대표적 작곡가가 되어 있었다. 마라친(Marazin) 추기경은 그에게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결혼식을 위해 오페라(『연인 헤라큘레스』 L’Ercole amante, 1662) 작곡을 주문했을 정도로 그는 인정받는 작곡가였다. 결혼식을 위한 작품은 프랑스에서 크게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 대신 륄리의 발레가 중심적 조명을 받았다. 그 이후 카발리는 오페라 작곡을 멀리한다. 카발리는 1665년 마르코 교회의 제1 오르가니스트로, 1668년에는 카펠마이스터가 되었다. 그의 말년에 작곡된 오페라들은 예전의 것에 못 미치는 작품들이었다.
제1기(1639-42)
실험적 시기. 여러 작가의 대본을 사용했다. 『테티와 펠레오의 결혼』은 큰 중창 장면, 합창 장면, 기악곡을 사용하는 로마 양식을 따랐다. 노래와 아리아는 종속적인 것으로서 단순하고 짧았으며, 조연들에 의해 불려졌다. 반면에 주역에게는 감상적인 레치타티보가 부여되었다.
제2기(1643-1652)
주로 파우스티니(Giovanni Faustini)의 대본을 사용했다. 자신의 오페라 양식을 굳히는 시기이다. 목가적 이야기(favola pastorale)와 신화적 이야기로부터 간계와 음모 중심의 오페라로 나아간 시기이다. 이는 동시에 궁정의 화려한 오페라로부터 사업을 고려한 검소한 오페라로 발전한 것이기도 하다. 합창, 중창, 기악곡은 많이 줄어든다. 그 대신 더 고심하여 만든 레치타티보가 발전한다. 혼자 하는 레치타티보와 둘이 하는 대화적 레치타티보가 사용된다. 후자에서는 정적이고 동적인 대립적 경향의 음악을 만들고, 거기에 맞는 화성적 틀도 형성된다.
제3기(1653 이후)
대본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진다. 감상적인 표현의 레치타티보로부터 아리아가 형성되며, 줄거리를 다루는 건조한 레치타티보로부터 세코 레치타티보가 형성된다. 지금까지 완결된 노래 형식이 조역에게 주어졌던 반면 더 많은 수의 아리아가 주역의 특권이 된다.
작품목록:
『테티와 펠레오의 결혼』Le nozze di Teti e di Peleo (1639)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Gli amori d’Apollo e di Dafne (1640)
『디도네』La Didone (1641)
『불멸의 나르시스와 에코』Narciso ed Ecco immortalati (1642)
『사랑에 빠진 사랑』Amore innamorato (1642)
『덕스러운 사랑의 여신의 화살』La virtù de’ strali d’Amore (1642)
『에지스토』L’Egisto (1643)
『데이다미아』La Deidamia (1644)
『오리몬도』L’Ormindo (1644)
『로몰로와 레모』Il Romolo e ‘l Remo (1645)
『도리클레아』La Doriclea (1645)
『티토네』Il Titone (1645)
『도재자 시저의 불행한 융성』La prosperità infelice di Giulio Cesare dittatore (1646)
『토릴다』La Torilda (1648)
『지아소네』Il Giasone (1649)
『에우리포』L’Euripo (1649)
『브라다만테』La Bradamante (1650)
『오리몬테』L’Orimonte (1650)
『오리스테오』L’Oristeo (1651)
『로진다』La Rosinda (1651)
『아르미도로』L’Armidoro (1651)
『칼리스토』La Calisto (1651)
『아라고나의 여장부 베라몬다』Veramonda, l’amazzone di Aragona (1652)
『에리트레아』L’Eritrea (1652)
『테제오에게 겁탈 당한 헬레나』L’Helena rapita da Teseo (1653)
『오리오네』L’Orione (1653)
『세르세』Serse (1654, 빠리:1660)
『치로』Il Ciro (1655)
『페르시아의 여왕 스타티라』La Statira, principessa di Persia (1655)
『에리스메나』L’Erismena (1655)
『아르테미지아』Artemisia (1656)
『안디옥』Antioco (1658)
『이페르메스트라』L’Hipermestra (Florenz 1658)
『엘레나』Elena (1659)
『연인 헤라큘레스』L’Ercole amante (Paris 1662)
『아프리카의 쉬피오네』Scipione Africano (1664)
『무티오 쉐볼라』Mutio Scevola (1665)
『폼페아 만뇨』Pompea Magno (1666)
『코리올라노』Il Coriolano (1669)
『교회음악』(Musiche sacre) 미사와 시편 1656. 3-12성부의 6개의 소나타, 8성부 저녁기도회 포함. 1675 출판.
참고문헌:
Metzler Komponistenlexikon, H. Weber(편찬), Stuttgart/Weimar, 1992.
Brockhaus-Riemann Musiklexikon Bd. 4 Mainz 1979,
등록일자: 2005-02-28
홍정수
<font color="#fefe00" size="4"><b>작곡(가)사전</b></font><font color="#fefe00" size="2"><b> 한독음악학회</b></font>
카발리, 프란체스코(Cavalli, Francesco, 1602-1676)
- 1602년 2월 14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의 크레마(Crema)에서 출생.
- 크레마 대성당의 성가대장이었던 아버지(Giovanni Battista Caletti [Bruni])에게 처음 음악을 배웠으며, 부친의 지휘 아래 대성당 성가대에서 노래함.
- 소년 카발리는 후원자, 크레마의 시장이며 베네치아 귀족인 페데리코 카발리(Federico Cavalli)의 성을 따라 이름을 고치고, 베네치아에서 음악적 훈련을 계속 받음.
- 1616년 12월 14세에 몬테베르디가 지휘하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San Marco) 대성당의 합창단에 입단함.
- 1620-1630년까지 산 지오반니와 파올로(San Giovanni e Paolo)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봉직함.
- 1638년 베네치아의 산 카시아노(San Cassiano) 극장의 오페라단을 새로 조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 극장에서 첫 번째 오페라인 ≪테티와 팔레오의 결혼≫(Le nozze di Teti e di Paleo, 1639)을 공연함.
- 1639년 이후 10년간 이 극장을 위해 8편의 오페라와 그리고, 산 모이제 극장을 위해 1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함.
- 1639년 산 마르코 대성당의 제2오르가니스트로 선발됨.
- 1659년 마자랭 추기경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간 카발리는 루이14세의 결혼식을 위한 오페라를 청탁 받을 정도로 명망이 높아짐, 이 때 자신의 오페라 ≪세르세≫(Serse)를 개작하여 공연함.
- 1662년 2월 파리의 튀를리(Tuileries) 궁전에서 파리에서 작곡한 ≪사랑에 빠진 헤라큘레스≫(L’Ercole amante, 1662)를 공연함.
- 1662년 5월 파리에서 베네치아로 돌아온 이후 1665년에 산 마르코 대성당의 제1오르가니스트로 임명받고, 1668년에는 몬테베르디의 후임자로서 음악 감독이 됨.
- 1676년 1월 14일 베네치아에서 사망.
카발리는 이탈리아의 중요한 오페라 및 교회음악 작곡가로서 ‘새 음악’ 또는 ‘모노디 양식’의 제2세대에 속한다. 또한 오페라의 상업화와 함께 오페라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굳건히 뿌리내리는데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37년 산 카시아노 극장에서 상연되었던 페라리의 오페라 성공에 자극을 받아 오페라라는 새로운 예술 형태에 관심을 갖게 된 카발리는 더 큰 극장으로 옮겨간 페라리를 대신하여 1638년부터 산 카시아노 극장의 오페라단을 새로 조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1639년 정월에는 그의 첫 오페라 ≪테티와 팔레오의 결혼≫(Le nozze di Teti e di Paleo, 1639)을 무대에 올리게 된다. 카발리는 향후 십년간 이 극장을 위한 여덟 편과 산 모이제(San Moise) 극장을 위해 한 편의 오페라들을 더 작곡한다. 그 중 두 번째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Gli amori d’Apollo e di Dafne, 1640)과 세 번째 ≪디도네≫(Didone, 1641)는 영향력 있는 아카데미 ‘익명학회’(Accademia degli Incogniti)의 일원인 부제넬로(F. Busenello)의 대본에 바탕을 두고 작곡되었으나, 1640년대의 대부분의 오페라들은 파우스티니(G. Faustini)의 대본 위에 작곡되었다. ≪사랑의 화살의 덕≫(La virtù de’strali d’Amore, 1642)과 ≪에지스토≫(Egisto, 1643)를 비롯한 카발리와 파우스티니의 협동 작업은 향후 17C의 베네치아 오페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에지스토≫는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모델로 한 순회 극단들의 성공적인 레퍼토리로 이탈리아 전역에 오페라를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1646년에는 파리에서까지 공연되었다. 치코니니(G. A. Cicognini)의 대본에 작곡된 ≪지아소네≫(Giasone, 1649)는 치코니니의 대본에 체스티(P. A. Cesti)가 작곡한 ≪오론테아≫(Orontea, 1656)와 함께 17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했던 오페라였는데, 이러한 인기의 비결은 베네치아 아카데미의 문학적 분위기에 얽매어 있었던 이전의 오페라들에서 벗어나 복잡하게 얽힌 신속히 진행되는 사건들과 희극적 유연성으로 방향을 선회했기 때문이었다.
카발리의 1650년대의 활동은 공공 오페라 발전의 여러 측면들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반영하고 있어 처음에는 대본 작가 파우스티니와 함께 산 아폴리나레 극장에서, 파우스티니가 죽은 후 미나토(N. Minato)와 함께 산 조반니와 파올로 극장에서, 그리고 다시 산 카시아노 극장에서 활약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과 병행하여 나폴리에서도 자신이 작곡했던 작품들 및 새로 작곡한 오페라 ≪베로몬다≫(Veromonda, 1652)를 공연하여 이곳에서 오페라가 지속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데 이바지하였다.
몬테베르디에 버금가는 17세기 중엽의 가장 중요한 오페라 작곡가로 평가되는 카발리는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들을 위하여만 거의 30곡에 가까운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들은 최초의 공공 오페라 극장으로 역사에 남겨진 산 카시아노 극장에서의 조심스러운 첫 시도에서 비롯하여 베네치아가 이탈리아 전역에 오페라를 파급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작품들을 통해 이십년이 넘는 기간에 걸친 베네치아 오페라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그의 음악어법들은 “발전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변화보다는 안정 쪽에 치우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관성은 오히려 추후 오페라의 극적인 전통들을 표현하는 음악적 어법을 확립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대부분의 자유로운 시구들은 레치타티보로 작곡되어 창의적이기는 하지만 폭넓은 선율적 형식을 보여주는 일은 드물다. 거의 모든 레치타티보들은 콘티누오만으로 반주되는 단순한 것들이지만, 각 오페라에 한 번 정도 있을까말까 한 유별난 극적 상황에서는 지속적인 현악 반주가 수반되는 경우도 있다.
레치타티보 시구를 서정적으로 작곡한 아리오조 악구들도 그리 흔하지는 않다. 대부분의 아리오조 악구들은 짧고 단순하지만, 멜리즈마와 가사 반복이 일상적으로 나타나며,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곳에서는 앞선 성악 부분에 바탕을 둔 기악 신포니아도 사용되었다.
레치타티보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시구들이 유절 형식으로 되어 있어 아리아들의 바탕이 되었다. 카발리의 모든 초기 오페라들에서는 각 절들의 선율이 변주되지만 베이스는 변함없는 형태로 작곡되었으나, 유절 레치타티보를 포함하여 이러한 형태는 후기 오페라에서는 오직 신들의 아리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카발리의 아리아는 몬테베르디의 아리아에 양식적 뿌리를 두고 있는데, 대부분은 세 박자로 되어 있으며, 비록 1650년 초 이후 조금씩 늘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소수만이 두 박자이다. 이들의 공통적 요소는 아리오조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지속되는 ‘걷는’(walking) 베이스이다. 카발리의 아리아들은 근본적으로 단음절적이지만 화려한 멜리즈마도 사용한다. 때로 마드리갈적인 가사 그리기도 사용되었지만 점차 아리아의 진정한 기능은 극적 표현과 성격을 묘사하는 ‘벨칸토’ 양식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의 아리아들은 비대칭적인 경향을 띠는 불규칙한 길이의 악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미리 정해진 틀에 집어넣기가 어렵다.
몬테베르디의 ≪아리안나≫(Arianna, 1608)에서 볼 수 있듯 대본작가들은 고전극 전통을 이어받아 오페라에 라멘토(Lamento, 의미: 탄식가)를 포함시켜 왔으며 이는 특히 여성 등장인물들에게 수사적인 역량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현 수단이 되었다. 카발리의 초기 오페라 중에서는 특히 디오의 독백이 두드러진 예이지만 실제로 그의 거의 모든 오페라들에는 순차적으로 하행하는 오스티나토 베이스 위에 작곡된 세 박자의 라멘토가 최소한 하나씩은 포함되어 있다. 1650년 이후로는 단순한 오스티나토는 유행에 뒤진 것이 되었으며, 카발리의 후기 작품에서는 중간 부분에서 오스티나토가 다른 조로 옮기는 방식으로 작곡되는 변화를 겪었다. 실제로 오스티나토를 사용하지 않은 라멘토들도 처음에 하행하는 베이스로 시작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특히 격렬한 정념의 분출을 화성적, 선율적, 리듬적으로 표출하는 애절한 반음계적 하행 베이스들은 카발리의 라멘토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라멘토 외의 하행 베이스의 사용은 자유분방한 기쁨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샤콘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발리는 오페라의 희극적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연극의 전통을 따라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도록 하거나, 줄거리를 전하거나, 풍자적인 언급을 하게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었다. 규칙적인 길이의 쾌활한 선율에 경쾌한 ‘걷는’ 베이스를 붙인 곡들이 희극적 맥락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아프리카의 쉬피오네≫(Scipione affricano, 1664) 같은 카발리의 후기 오페라들에서는 많은 수의 2연으로 이루어진 아리아 시가들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소수의 운율 패턴들을 따르고 있다. ABB’ 또는 ABA 형식으로 작곡된 이러한 아리아들은 카발리보다 젊은 작곡가들의 아리아에서보다는 춤곡의 성격이 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아마도 이러한 특성이 그의 마지막 두 작품이 공연되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오페라마다 그 정도는 다르지만, 2중창은 특히 파우스티니의 대본에 바탕을 둔 작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대다수의 이중창들은 세 박자의 가볍게 모방적인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부점 베이스 위에 모방을 펼쳐나가는 것이 전형적인 방식이다. 더 큰 편성의 독창 앙상블은 그 수가 더 적으며, 2중창을 작곡하는 방식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오페라에서 합창은 짧고도 지엽적이다. 다만 프랑스에서 작곡한 ≪사랑에 빠진 헤라클레스≫(L’Ercole amante, 1662)에는 4성부 콘티누오 마드리갈을 비롯하여 더 많은 합창이 포함되어 있으며, 최초의 오페라들에서는 콘체르타토 양식과 전 세기의 인테르메디오(막간극)의 춤곡 양식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있다.
카발리의 오케스트라의 역할은 주로 아리아의 각 절의 앞뒤에 리토르넬로를 연주하는 것이다. 리토르넬로 음악은 거의 언제나 아리아의 음악과 연계되어 있어, 앞에 붙을 때는 아리아의 처음, 뒤에 붙을 때는 마지막 악절의 성악 선율을 사용하고 있다. 대체로 리토르넬로는 거의 같은 길이의 두 악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악절은 모방 기점으로 시작되며 시퀀스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오페라의 처음과 각 막 앞에 나오는 서곡(sinfonia)들은 보통 2박자로 된 단악장(Grave)이지만, 후기 오페라들에는 둘 이상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3박자 서곡들도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묘사적인 기악 음악들은 극도로 단순한 리듬이 두드러진 곡들인데, 전쟁 장면이나 지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몬테베르디가 창안한 격앙양식(stile concitato)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오케스트라 자체는 주로 5성부, 또는 드물게 4성부로 기보된 현악과 콘티누오로 이루어져 있으나, 2대의 바이올린과 베이스가 그 뼈대를 구성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카발리의 교회음악은 실제로 그가 작곡한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부분은 산 마르코 대성당의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지오반니 가브리엘리, 몬테베르디의 전통에 따른 기악 반주가 붙은 대규모 교회음악들이어서 때로 몬테베르디의 작품과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주요 작품 모음집들로는 ≪거룩한 음악≫(Musiche sacre, 1656), ≪저녁기도≫(Vespri, 1675) 등이 있는데, 앞선 곡집에 수록된 여섯 곡의 ‘소나타’ 또는 ‘칸초네’ 들은 전례에 사용되기 위한 곡들로 지오반니 가브리엘리의 곡들과 양식상으로 가깝다.
참고문헌
Glover, J. Cavalli, London, 1978.
Rosand, E. “Francesco Cavalli in Modern Edition.” Current Musicology 27, 1979, pp. 73-83.
__________. Opera in Seventeenth-Century Venice: the Creation of a Genre. Berkeley, 1991.
Prunières, H. Cavalli et l’opéra vénetien au XVIIe siècle. Paris, 1931.
[이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