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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홍정수: 대강보(大綱譜)의 절주방식(節奏方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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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수: 대강보(大綱譜)의 절주방식(節奏方式)1) 한국음악사학보,11집,1993,19-80. I.시작하면서 오늘날 정간보(井間譜)라고 불리우는 악보들은 조선시대의 세종조 이후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가지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 악보들은 바둑칸처럼 줄그어진 점에서 서로 공통되지만 많은 점들에서 서로 다르다.이 악보의 바둑판 모양은 음악의 시간적 조직을,즉 절주(節奏)를 기록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기록방식이 서로 다른 악보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모든 악보모음집들이 각각의 독특한 점들을 갖고 있다.그럼에도 초기의 악보모음집들은 대체적인 면에서 같은 기록양식을 보인다. 세종실록 악보(1447년경2)), 세조실록 악보(1464년경3)),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금합자보(琴合字譜,安王常,1572년), 양금신보(梁琴新譜,梁德壽,1610년), 대악후보(大樂後譜,徐命膺,1759년), 시용무보(時用舞譜)가 그것들이다. 물론 이 악보들도 서로 간에 차이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예외적 차이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악보모음집들은 상당한 정도의 공통성을 보인다. 그러나 속악원보(俗樂源譜)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악보모음집은 각각 仁,義,禮,智,信으로 이름지어진 다섯권의 책으로 되어있는데, 각 책에는 1892년(光緖十八年,고종29년)에 중수(重修)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수’라는 말은 흔히 건물을 개축하거나 물건을 보수하는데 쓰이지만, 여기에서는 악보를 고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마지막 信책이 이전의 악보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智책에는 다른 종류의 변질된 악보가 있다. 참조:V항‘대강보의 붕괴’).여기에서는 옛 방식으로 기록된 악보를 대강보(大綱譜)로(예:악보1), 속악원보의 信책의 방식으로 기록된 악보를 정간보(예:악보2)로 이름한다. 대강보는 많은 칸들을 사용하지 않고 비워두지만, 정간보는 매우 빽빽하게 기록한다. 이 글은 먼저 나온 대강보를 후에 나온 정간보 방식으로 하는 해석이 옳지 않은 것을 논하고, 대강보 자체에 의한 대강보 해석을 밝히려고 한다. II.대강보와 정간보의 명칭 “정간보"라는 용어는 1948년에 최초로 문헌상에 나타나는데,이혜구의 “韓國의 舊記譜法"라는 글에서이다4). 그 글에서 ‘정간보’라는 용어는 악보의 명칭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정간’은 리듬을 계산하는 기본단위,즉 박(拍)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정간보와 정간의 의미가 어느 시대의 어느 악보에서나 다 통용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거기에 어떤 예외적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정간보"와 “정간"의 이해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왜 의문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점들을 말하자면 초기의 악보와 문헌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최초의 세종실록 악보에는,이 정간을 가진 악보들이 어떻게 읽혀지는지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 악보들을 보면 가로줄과 세로줄이 얽혀서 수많은 칸(정간)들을 만들고, 그 안에 음높이를 문자로 기록하고 있어서, 앞에서 말한 ‘정간보'와 ‘정간'이해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안에 기록된 음높이를 가르키는 문자들은 후에 오는 악보처럼 아무런 질서없이 나열되지 않았다. 이런 질서는 얼핏 눈으로 보아서도 확인될 수 있는 것인데, 이 질서는 두번째 악보 모음집인 세조실록 악보에 가서야 그 적합한 ‘명칭’ 과 ‘형태’를 부여받는다. 그 명칭은 대강(大綱)이며, 그 형태는 악보상에 정간보다 더 굵은 선으로 표시된다.이 대강의 중요성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확인될 수 있다: (1)세조실록 48권 악보의 서문(1464년경) “세조대왕께서... 이 악보를 만드시며 16정(井),6대강(大綱)을 그리셨다...이는 느리고, 보통 빠르고,빠른 세 종류의 음악이 강(綱)의 사용에 따라 성기고 잦은 것과 완급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世祖大王...創作此譜 劃爲十六井 而作六大綱...其慢中數三體因用綱各異 而有疎數緩急之不同 세조실록의 악보 서문은 이 악보종류에 관한 최초의 자체 설명이다. 위의 인용문에는 ‘정간’을 뜻하는 듯한 ‘정’(井)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정간보'라는 명칭은 없다. 그런가 하면 빠르기를 가늠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정’(井)이 아니라 ‘강’(綱), 즉 ‘대강’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세조실록 악보서문은 이 악보가 전에 없었던,“절주”와 “성기고 잦음”과 “완급”의 기록이 가능한 악보라고 그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前代未有聲音節奏疎數緩急之譜). (2)양금신보(梁琴新譜)의 서문 (1610년) “세로줄은 행(行),가로줄은 강(腔)이라 한다. 강은 오늘날의 음악에서 부채 치는 것을 따름과 같다.각 강 안에는 많고 적은 글자가 나타날 수 있다.글자가 많으면 소리가 빠르고,글자가 적으면 소리가 느리다.노래하며 양(量)을 칠 때에 그 치는 점(點)과 일치하는 강(腔)은 한 자(字)일 뿐이다.모든 음악에는 느리고 빠름이 숨어있어서 너무 급하게 몰아붙이면 음악이 안 된다.이를 타량법(打量法)이라 한다.” 縱劃曰行 橫劃曰腔 腔者今隨打扇是也 各腔下字有多少 字多則聲急 字少則聲緩 以肉聲打量只點其腔下一字而已 凡樂之慢數各有法隱而急促非樂也 右打量法 여기의 腔은 세조실록의 綱과 같은 말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기의 “타량”·“완급”은 세조실록 악보의 “절주”·“완급”과 마찬가지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이 말들이 두 악보집에서 각각 綱과 腔을 설명하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많고 적은 글자”는 세조실록 악보의 “성기고 잦음”의 의미와 같다. 따라서 양금신보는 표면적으로 세조실록 악보와 다른 말을 쓰고 있지만 악보기능에 관해 같은 내용의 설명을 하고 있다.그러나 여기에서는 더 발전된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그것은 “타량”에 관한 것이다. “타량”은 부채치기 동작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는 부채치기처럼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반복됨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치는 지점을 ‘점’이라 말하고 있다.이 ‘점’은 악보상의 ‘강’에 떨어지며,이 ‘강’을 ‘자’라고도 한다.그래서 ‘점’과 ‘자’는 동일하다.원래의 악보상의 의미를 가진 ‘강’이 아래 (5)번 문헌에서 보듯이 나중에는 ‘점’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대강보를 다루는 음악문헌에서 ‘타량법’에 대해 이 정도로 자세한 설명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문헌들은 보통 느리고 빠른 것에 관한 언급으로 끝나고 마는데, 여기에서는 부채치기의 비유를 통해 음악의 시간적 계산방식을 잘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세조실록 악보 서문과 17세기 초의 양금신보 서문이 서로 부합되는 절주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3)현금동문류기(玄琴東文類記,李得胤편찬,1620년 광해군12년,10면) “세종 때에 돌을 채취하여 경(磬)을 만들었고,또 악강(樂腔)을 만들었는데,이는 강(腔)으로 악보를 만든 것이다.이로써 절주의 느리고 빠름을 알 수 있다.” 英廟取石又作樂腔 因腔作譜 以審節舒疾奏 이 부분의 제목은 ‘악강’으로 되어 있어서,이 말이 마치 악보의 이름처럼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이 책은 양금신보와 가까운 시기에 나타났지만, 절주에 관한 설명은 하지 않고 있다. (4)정조실록 54권32 (1800년,정조24년) “제조 서용보...등이 제사음악의 강보(腔譜)에 관해 물었다.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제사의 초헌 때에 하는 음악의 절주가 잘 맞았다...”提調 徐龍輔...問享樂腔譜 上曰 肄儀初獻時樂作 頗合節奏矣 여기의 악보이름 “강보”는 대강보 이외의 다른 악보종류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강’을 가진 다른 악보가 없기 때문이다.이로써 이 악보가 조선시대에 정간보가 아니라 “강보”,즉 “대강보”라고 불린 사실이 확인된다5). 악보이름 “강보”와 함께 절주라는 용어가 나타나 강과 절주가 연결되어 생각된 것을 알 수 있다. (5)순조실록 31권6 (1830년,순조30년) “요즘에 들어와서 종묘사직에서 드리는 제사음악이...강의 절주가 잘 맞지 않고, 서로 일치하지 못한다.” 近來自 廟社享樂...苟合節腔而無和 여기의 “節腔”이라는 말을 양금신보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면,‘節點’ 또는 ‘節字’라고도 풀이할 수 있다. 이 인용문은 악보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음악의 시간적 체계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음악이 서로 맞고 안 맞고를 결정하는 ‘무엇’으로서의 “절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의 문헌들은 정간보라고 하는 악보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정간보라는 말은 정간을 박의 단위로 생각한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간보라는 명칭을 이조시대에 나타난 모든 대강보에 적용함으로써 대강보에서도 정간이 박의 단위라고 하는 해석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정간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있지도 않았다. 또한 위의 인용문들에 비추어 보면 대강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III.절주의 의미 세조실록 악보는 대강보가 절주 기록이 가능한 악보라고 그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강보는 세조실록 악보 서문의 주장처럼 세조대왕이 만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강보가 이미 세종 때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이 “막대기로 땅을 쳐서 절(節)을 만들어...새로운 음악의 절주를 했다”(新樂節奏...以柱杖擊地爲節,세종실록126권9)는 기록이 나온다. 막대기로 땅을 치는 절주동작은 양금신보의 부채치기 동작과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그리고 절(節)이라는 말은 한문의 본래 뜻 그대로 ‘대나무의 일정한 마디’처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음악의 시간적 흐름에 일정한 마디를 만드는 것이 절주이다. 음악에 관한 문헌들은 이 절주의 설명을 대단히 어려워했다. 문헌에서 절주라는 말은 주로 ‘타악기’,‘무용’,‘서로 잘 맞건나 맞지 않는 연주’ 등과 관련지어 사용되지만, 개념적 설명은 거의 찾을 길이 없다. 절주에 관해 가장 잘 설명하는 책이 필자의 견해로는 양금신보의 타량법 설명이다. 물론 거기에는 절주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타량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치면서 절주를 행하는 동작까지 담고 있다. 양금신보의 점(點) 개념은 막대기나 부채로 한번 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점’들은 부채치기 동작처럼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반복되어야 음악을 셈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박’이라 불리우는 것과 같다.6) 절주는 음악의 시간적 흐름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점들을 형성시키면서 음악의 시간길이를 셈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점보다 더 큰 규칙적 시간단위도 절주라고 했을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어 춤과 관련되어 말하는 절주는 점보다 더 큰 단위의 것을 말해야 동작에서 동작을 이어가는 뜻이 살아날 수 있다. 점 하나만이 음악의 시간체계를 구성하는가? 그렇지 않다. 특히 이미 있는 음악을 시간적으로 재서 기록하는 것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선조 초기에 기록된 대강보의 노래들은 거의가 고려 때의 속요들이다. 궁중음악들은 고려 속요에 새로운 가사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고려시대의 가사는 남여상열지사라 하여, 비속한 우리말로 되어 있다 하여 조선 초기의 악보집에는 실리지 못하고, 조선 중기나 후기의 악보에 실린다. 즉 원곡이 더 나중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늦게 나왔다 하여 뒤에 기록되었으리라고 무조건 생각하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해야할 사항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미 있는 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인 세종실록 악보는 가사를 붙이기 전에 속요의 선율부터 채보했어야 하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타난 고려 속요의 악보들은 그런 종류의 것들이라고 짐작된다. 속요와 같은 음악들은 작곡된 음악들과는 다르게 그 전체 길이가 이미 확정되어 있다. 따라서 채보자들은 이미 고정된 길이를 가진 음악에 맞추어 절주를 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부르는 속요들은 일정한 길이로 반복되는 주기를 갖고 있다. 대강보의 음악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강보에서는 그 주기가 타악기 박(拍)의 삽입으로 표시된다. 박은 대강보의 6대강 첫 정간,12대강 첫 정간, 24대강 첫 정간에 나타난다. 타악기 박이 한번 6대강째에 나타나면 계속 6대강째에 나타난다. 12대강째와 24대강째에 나타나는 곡들도 각각 마찬가지이다. 이 박이 나타나는 부분은 정확하여서 이 박의 규칙성 하나로도 대강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도 있다. 타악기 박의 삽입위치는 한 주기의 장고장단이 끝나는 것을 가리킨다. 장고장단은 같은 형태로 또는 약간 변형시켜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조선조 초기에도 오늘날과 똑같은 의미로 ‘장단’이란 말이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대강보에 기록된 장고치기가 일정한 간격의 주기로 반복하여 오늘날 사용되는 장단의 말뜻에 부합하기에 쓰는 것이다. 대강보 내에서 보는 장단의 규칙성 역시 박의 규칙성처럼 뚜렷하다. 대강보에 나타난 절주의 크기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박, 장단, 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세가지가 대강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가 이 글의 관심사항이다. IV.대강보의 구성형태와 그 해석 대강보는 대강을 정간보다 더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왜냐하면 대강을 중심으로 음높이를 나타내는 문자들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대강 중심의 기록 방식에 대해 논하기 전에 대강의 형태에 관해 살펴보자. 대강은 3정간으로 이루어진 것이 있고, 2정간으로 이루어진 것이 있다. 이 두가지를 편의상 여기에서 각각 '큰대강'과 '작은 대강'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미지1> 악보의 한 행이 갖는 대강의 수는 각 악보모음집마다 다르다. 가장 적은 대강수를 보여주는 악보 모음집은 양금신보(1번)로서 3개 대강이 1행을 구성한다. 1행이 2개의 대강으로, 또는 4개의 대강으로 구성되는 일은 없다. 양금신보처럼 큰 대강 1, 작은 대강 1, 큰 대강 1로 연결된 것을 여기에서는 ‘한행 최소 단위’라고 부른다. 세조실록 악보(2번)는 ‘한행 최소 단위’ 두개가 연결되어 1행을 만든다. 굵은 대강선이 그려져 있지 않은 세종실록악보(3번)는 4개의 '한행 최소 단위'가 한 행을 구성한다.이렇게 행을 구성할 때에 배의 단위로 늘고 줄어드는 특징은 이 악보의 수학적 구조의 일부를 보여주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논의된다. 이렇게 배로 축소, 확장되는 한 행의 구조는 3·2·3으로 구성된 불규칙적 정간 구조와는 대조적이다.그런데 악보는 반드시 첫 대강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이미지2> 위의 2번 3번처럼 두번째와 세번째 대강에서도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2번은 정간의 연속이 2·3·3으로, 3번은 3·3·2로 계속 연결된다. 이 현상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간이 단독으로 사용되고 안되는 것이 아니라, 대강 단위로 사용되고 안되고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간이 1.3.2 식으로는 이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위의 2번과 3번의 끝은 각각 지워진 대강만큼 악보에 맨 끝에 그려진다. 그래서 앞의 음가가 뒤로 밀려간 형태를 보여준다(세종실록 악보에서는 2번째와 3번째 대강에서 시작하는 악보는 사용된 정간들의 위치를 보아 알 수 있다7)). <이미지3> 이렇게 대강 단위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은 대강을 중요시한 세조실록 악보와 양금신보의 서문 기록에 부합된다. 또한 대강보에서의 정간은 단독으로 어떤 독립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대강 안에서 2 또는 3으로 묶이어 나타난다. 한 정간, 두 정간으로 셈하는 정간 단위가 악보 첫머리에서 지워진 후에 지워진 정간만큼 악보의 끝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강단위로 지워지고 보충된다. 대강 단위로 기록되는 악보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기록 원칙이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물론 원칙에서 벗어나는 예외가 없지 않지만, 그 예외를 기준으로 이 악보를 해석한다는 것은 이 악보를 바로 읽는 길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제 그 원칙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각 대강은 첫 정간부터 기록된다. 한 대강의 첫 정간이 기록되지 않으면 그 이후에 오는 정간은 기록되지 않는다. (2)큰 대강은 작은 대강보다 더 자주 사용된다. 큰 대강이 사용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오는 작은 대강이 사용되지 않는다. (3)작은 대강의 첫 정간이 채워지면,세번째 큰 대강의 세번째 정간도 같이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화살표). <이미지4> (4)작은 대강의 두번째 정간은 다음 정간(셋째 대강의 첫 정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기록되지 않는다 . <이미지5> (5)첫 대강의 세번째 정간은 다음 정간(두번째 대강의 첫 정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기록되지 않는다. <이미지6> (6)세번째 대강의 두번째 정간은 다음 정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기록되지 않는다. <이미지7> (7)첫번째 대강의 두번쨰 정간은 그 다음 정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기록되지 않는다. <이미지8> 이렇게 각 정간이 채워지는 순서가 있는데,그 순서에서 대강의 첫 정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구체적 악보에서 어떻게 각 대강과 정간을 사용했는지를 시용향악보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시용향악보는 한 행이 6대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지9> 이렇게 보면 각 대강의 비중과 각 정간의 비중이 드러나는데, 여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큰 대강의 첫 정간임을 알 수 있다(화살표). 위와 같은 원칙을 지키는 악보들이 대강보이다.이것은 나중에 나타난 정간보의 구조와 다르다. 나중에 나타난 정간보와 그 이름 “정간보”는 정간이 절주를 셈하는 기본 단위이고 모든 정간이 동등한 시가(時價)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확고한 것으로 쐐기를 박는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옛 문헌의 설명과도 다르고 악보의 모양과도 다르다. 우선 이 두 종류의 악보, 즉 대강보와 정간보를 구분해두고 넘어가려 한다. 정간보는 위와 같은 원칙이 전혀 지켜지 않는데, 설혹 대강줄이 그려져 있다 해도 위의 원칙이 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대강보가 아니다. 대강보와 그 후에 오는 정간보는 위에서처럼 복잡한 설명이 없이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성기게 그려진 악보1과 빽빽하게 그려진 악보2는 똑같은 곡을(洛陽春) 기록했는데, 각각 속악원보(俗樂源譜)의 禮책과 信책에 실려있다. 악보2에는 순차적으로 채워지는 악보 기록방식이 없다. 거기에는 대강줄이 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렇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 악보를 똑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비교를 하기 위해 정간을 절주의 기본 단위로 삼고 이 두 악보를 같은 방식으로 번역했다. 악보3은 악보1과 악보2를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강보의 리듬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대강보 자체에서 찿아져야 한다. 대강보에는 자세하게 잘 기록된 타악기 장단들이 있다. 특이 장고장단은 의미있는 관찰대상이다. 오늘날도 장단이라는 말은 일정한 주기를 가진 리듬의 단위를 뜻하는데, 대강보를 살펴보면 장고를 치는 갖가지 방식들이 일정한 순서로 그룹을 이루어 시간적 주기를 형성하는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용향악보에 여러번 나타나는 鼓搖革便雙 장단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장단이 꼭 한가지 방식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두가지 방식으로 그려졌다. <이미지10> 한 정간이 한 박자라고 한다면 위의 장단은 같은 것이 아니다. 즉 장고치는 방법의 순서가 같을 뿐, 시간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관찰을 이 장고 장단과 연결시켜보면,이 장단은 다르게 그려졌을 뿐 같은 절주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추측을 강화시킨다.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한행 최소 단위'는 3 대강으로 이루어지고 이 단위들이 계속 덧붙여져서 악보를 구성하는 것을 보았다. 악보는 한행 최소 단위들이 네개가 사용되면서 鼓搖革便雙 장단이 그려졌는데,여기에서는 네 글자들이 각각 같은 대강수(또는 정간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1번에서는 '한행 최소 단위'가 두개 사용되면서 네 글자는 각각 5,3,5, 3개의 정간수룰 사용하여 불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불균형은 대강의 구조가 큰 대강과 작은 대강으로 달리 생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장고장단들도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미지11> 화살표로 표시된 革便만을 제외하고 모든 현상이 앞의 것과 똑같다. <이미지12> 여기에서도 화살표로 표시된 鼓를 제외하고는 모든 현상이 앞의 것과 똑같다. 그리고 雙鼓의 거리가 같은 거리로 추측되는데, 이는 2번에서 각각 큰 대강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앞의 1,2번에서 보는 鼓革便의 경우에서도 같은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위와같은 추측을 다음의 가설로 정리해보자. 대강보는 음가가 2분(二分)된다. 이 이분되는 현상이 ‘한행 최소 단위’까지의 큰 단위에서는 악보상 같은 거리로 나타나지만, ‘한행 최소 단위’ 이하로 나뉠 때에는 대강의 구조 때문에 같은 음가가 같지 않은 수의 정간을 차지한다. 한 장고장단이 크고 작은 방법으로 기록될 때에는 항상 배(倍)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한행 최소 단위’ 이하의 작은 음가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자리에 배정된다. 위의 장고장단에 비추어 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음가가 나뉜다. <이미지13> 이제 이 악보를 오늘날의 보편적 악보로 옮겨본다. 큰 대강을 4분음표로 생각하면 다음의 결과가 나온다. <이미지14> 여기에 맞추어 위에 소개된 세가지 장고장단을 번역해 본다. <이미지15> 위에서는 8분음표까지 정확하게 서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8분음표 번역 이하로 내려가는,크고 작게 그려진 장고장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의 절주 해석은 그 이전 단계의 것처럼 2분하는 방식을 그대로 적용시켰다(아래 도표의 e와 f).그러니까 이 부분의 이분화는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은 경우에 따라 장식음으로 처리해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아래 도표는 대강보에서 가장 흔히 보는 한줄 6대강의 번역방식이다. <이미지16> 이제 위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선율이 두 가지 방식으로, 즉 하나는 크게, 하나는 작게 그려진 악보들을 살펴보자. 대강보에는 가사만 다르고 음악이 같은 경우가 대단히 많다. 하지만 한 음악이 크고 작게 그려진 세개의 경우가 있는데, (1)시용향악보의 내당(內堂)과 대왕반(大王飯),(2)시용향악보의 청산별곡(靑山別曲)과 대국3(大國三),(3)대악후보의 정명(貞明)과 속악원보의 정명(貞明)이 바로 그것이다. (1)시용향악보의 대왕반 제목 아래에는 <이미지17> 이라고 적혀 있다.즉 평조내당이라 불리기도 하고, 음악이 같다고 일컬어 진다는 뜻이다. 이 두 악보가 보여주는 음악은 전체적으로 같지 않지만, 대부분이 같다.전체적으로 보면 대왕반은 내당을 축소하여 만들어진 음악으로 보인다.두 악보를 위에서 소개한 방식으로 번역해 보면 악보4처럼 된다. 악보4의 1번은 내당이고,2번은 대왕반이다.각 부분들마다 같은 종류의 선율들이 드러나는데, 어느 부분은 많이, 어느 부분은 조금씩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씩만 같은 부분들은(B,D,E) 리듬조차도 서로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 부분들에서는 선율이 앞으로 당겨지고 뒤로 밀쳐지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반면에 선율과 리듬이 거의 같은 부분들은(A,C) 매우 사소한 불일치를 드러낸다. x표를 한 부분의 음들만 서로 다르다. 특히 리듬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이 중요하다.왜냐하면 이 부분들이 리듬을 배로 증대시키고 축소시키는 대강보의 특징을 증명하기 때문이다.“한 정간=한 박”식으로 번역하면 같은 선율에 같은 리듬이 나타나는 부분이 전혀 없다. (2)또 다른 경우로 시용향악보의 靑山別曲과 大國三을 보자(악보5).여기에서도 두곡은 같은 선율을 사용하는데,청산별곡은 대국3보다 배나 작은 음표로 나타난다.단지 예외는 괄호 속에 있는 네 부분인데, 모두 같은 리듬이다 (♩♩ ). 이는 리듬 기록의 문제가 네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발생한 것을 뜻한다. 이 괄호부분은 다른 부분처럼 두배로 확대하여 기록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선율도 장고장단처럼 두배로 증대되고 축소되는 관계를 보여준다. 여기에서도 “한 정간=한 박자”식으로 해석하면 같은 선율에 같은 리듬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두 곡은 괄호 속의 리듬부분 하나만을 제외하면 배증(倍增)·배감(倍減)의 기록방식이 모두 일치한다. 이렇게 선율에서까지,그리고 여기에서 8분음표로 번역되는 곳까지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리듬이 배로 증대되고 축소된다는 점이다. 이 배증·배감의 특징은 악보의 외형적 구조에서 더욱 분명하다. 즉 ‘한행 최소 단위’는 양금신보에서 보는 것처럼 3대강, 6대강(세조실록 악보), 12대강(세종실록 악보)으로, 즉 배로 증가할 수 있다. 또한 타악기 박(拍)이 삽입되는 것도 6대강, 12대강, 24대강 단위로만 이루어진다. 이는 한 곡 안에서 박은 매 6대강째에 오든지, 매 12대강째에 오든지, 매 24대강째에 오든지 한다는 말이다. 박은 각 장단의 끝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단 역시 배증·배감한다는 것을 뜻한다. (1)행의 배증·배감, (2)박의 배증·배감, (3)장단의 배증·배감은 대강보에서 엄격하게 지켜진 사항이다. 이러한 배증·배감의 규칙이 커다란 리듬단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장고장단이 증명할 수 있고, 동일 선율이 증명할 수 있는 최소단위(여기에서는 8분음표)까지 그렇다는 것을 보여준다. (3)위의 두 경우는 한 곡의 일부를 취해서 다른 음악을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아래의 두개의 貞明은 같은 가사를 가진 같은 음악이다. 속악원보 智책(1권)에 실린 貞明은 그보다 먼저 발행된 대악후보의 貞明을 배감하여 축소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곡에서는 선율, 가사, 장고장단이 모두 축소된다. 아래는 선율만 기록한 것이다. 대악후보 2권: 貞明(악보6의 8-11행) <이미지18> 축소되는 부분은 위에 소개한 것에 국한되고, 그 뒷부분은 두 악보가 서로 거의 같은 리듬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뒷부분 역시 여기에 소개된 대강보 해석방식을 색다른 방식으로 증명한다. 악보9의 2번은 대악후보의 정명이고, 3번은 속악원보 智책에 실린 정명이며, 각 음표 위의 숫자는 정간의 수이다. 악보9의 처음 두 마디는 리듬이 배감된 부분이다. 특히 네모난 상자 안에 기록된 4분음표들은 그 음길이가 같지만 서로 다른 정간 수를 갖고 있다. 즉 대악후보에서 각각 5정간과 3정간을 갖는 음이 속악원보에서는 각각 3정간과 5정간을 갖는다. 이런 현상은 속악원보가 대악후보의 8정간을 모두 5 또는 3정간으로 바꾸면서(화살표) 대강들의 위치가 뒤바뀐 결과이다. 더 작은 음가에서(8분음표) 서로 달라지는 경우도 조금 나타나지만(줄선), 그것들 역시 배증·배감의 관계에 놓인다. 이 음들을 “한 정간=한 박자” 단위로 번역하면 서로 다른 음가가 되고 만다. 위에서는 악보 자체가 가진 구조에 대해서 다루었다.그런데 이러한 악보의 구조는 영조41년(1765년)에 있었던 왕과 서명응의 음악논의에서 이론적으로 확인이 된다. 즉 영조실록 106권 22-23에 기록된 논의가 그것이다. 이 논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음악논의 중 드물게 보는 길이를 가졌다. 아래의 인용문은 약간 축소된 것이다. “(1)부제학 서명응은 태묘악장 중 顯美 貞明 2개 장(章)을 합하여 1개 장으로 만들면 九成이 된다고 했으나 실은 여전히 十成이므로 이를 정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임금이 전악을 불러 이에 관한 것을 물으니 九成이라고 대답했다.명응이 말하기를, 대부분의 음악이 황종으로부터 시작하여 황종으로 끝내는 것을 一成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이 2개 장{章)은 각기 처음과 끝이 황종이니, 이는 여전히 十成이라고 했다. 임금이 묻기를, 그렇다면 四字가 一拍이 되고 六拍이 一成이 되는 것이냐 하니, 전악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임금이 다시 말하기를, 이 2개 장이 八字一拍의 영(令)으로 하면 九成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니, 명응이 이에 동의했다. (2)명응은 춤추는 법이 반드시 사방으로 네번 돌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鄭玄)은 남표(南表)에서부터 제2표까지가 一成인데, 제2표로부터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춤은 단지 나아가 서있는 곳에서 숙이고 올리고 구부리고 펴고 할 뿐이니, 결국 이는 一成에 불과하다. 음악이 九成인데 춤이 一成이 되는, 그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하고 말했다. 따라서 또 다시 고치는 것이 옳겠다 하여 고치도록 명령했다. [....] (3)대저 나라의 첫 시기에 음악을 정하면서 음악이 九成이면 반드시 노래도 9개 장으로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병자년에 환도한 후에 옛 음악들이 다 없어져 버려 고증할 길이 없다.[....] (4)선묘조(宣廟朝)의 열렬한 위업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기에,중광(重光)장을 다시 지어 노래를 첨가하니,10개의 장이 되었고, 이로써 음악 역시 十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5)계해년이 되어 임금의 독단적 뜻으로 중광과 정명을 1개의 장으로 합하여 九成으로 맞추었다.이로써 음악과 노래가 처음의 모습을 되찾았다. 노래는 비로소 정정되었지만 음악은 여전히 옛것을 따랐다.따라서 2개의 장을 하나로 합친 본뜻이 살아나지 않았다. (6)소신의 얕은 생각에 음악이란 처음과 끝이 있어야 하는데, 만약 황종을 궁으로 삼는다면 시작도 황종이고 끝도 황종이어야 비로소 하나의 강조(腔調)가 되는 것이다. 대려 이하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늘날 용광 끝부분과 정명 첫부분의 황종 하나를 빼어내고 다른 소리로 바꾸어 넣어, 연결부분의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적절하게 만들었다. (7)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중광 1개 장을 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는 하나 너무 신중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명응이 말하기를, 임금님의 가르치심대로 이 1개 장을 빼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되지만 이 일은 너무나 중대한 것이라서 중간에 집어넣었던 것을 빼지 않고 국초에 정한 제도를 회복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고 했다. (8)임금이 또 모든 음악은 四字가 一拍이고 六拍이 一成이 되는데,용광과 정명은 四字가 一拍인지 八字가 一拍인지를 그대가 다시 전악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명응이 전악에게 물어본 후, 용광 정명은 四字가 一拍이라고 임금에게 말했다. 임금은 ‘만약 그렇다면 十成이고 九成이 아니군’하고 말하면서, 용광정명은 八字를 一拍으로 하고 六拍을 一成으로 하라고 전악에게 명했다.“ (1)副提學徐命膺 以太廟樂章中 顯美貞明二章 曾 命合爲一章 作九成 而其實則依舊僞十成 不可不釐正矣 上召典樂問之對曰 九成矣 命膺曰 大凡音樂 起於黃鍾 止於黃鍾爲一成 今此二章各以黃鍾爲終始 則依舊十成矣 上曰 然矣 四字爲一拍 六拍爲一成乎 典樂對曰 然矣 上曰 此以章若 令八字一拍 則可爲九成矣 命膺曰 然矣 命自今八字一拍爲九成 (2)命膺曰 舞法必四旋四方 鄭玄以爲從南表至至第二表爲一成 自第二表亦然 而我國之舞 則但就所立處 俯仰屈身而已 此則終不過一成也 豈有樂九成而舞一成之理哉裁亦 命釐正好矣[....] (3)大抵國初制樂之時 象樂九成 作歌九章 至丙子還都後 舊樂散失 無處考據[....] (4)宣廟朝興復之烈 不可不揄揚 乃別制重光章 添入歌旣十章 則樂亦不得不爲十成矣[....] (5)當于癸亥年 斷自 宸裏 以重光貞明 合爲一章以 備九成之數 於是乎樂歌其復其初矣 但歌雖釐正 而樂猶循舊 故不見其合二章爲一章之盛意 (6)臣之淺見則凡樂 自有首尾 若黃鍾爲宮 則首黃鍾尾黃鍾 方爲一腔調 大呂以下皆然 今於龍光未 貞明章上 黃鍾一聲刪去之代 以他聲 使其聯合之間 不見彌縫之痕跡 則庶乎有以得其宜矣 (7)上曰 若拔重光一章 可謂都無事 而今則不免苟簡矣 命膺曰 誠如聖敎 拔此一章 則事皆順便 而尺以事體重大 欲不拔中間之添入 更復國初之定制 姑不得不如是矣 (8)上曰 凡樂四字一拍 六拍爲一聲 龍光貞明四字一拍乎 八字一拍乎 卿以此更問於典樂可也 命膺還奏曰 龍光貞明四字一拍云矣 上曰 如此則果是十成 而非九成矣 其令典樂 此後則龍光貞明章八字一拍 六拍一成可也 논의의 배경은 이러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조 초기에 확정된 제사음악 중 보태평(保太平)은 변(變)이라는 용어가 붙은 9개의 곡을 근간으로 한다. 1변, 2변, 3변...과 같은 말은 대악후보와 속악원보 仁책에 나오며, 이 두 악보의 원래적 전거인 세조실록 악보에는 없고, 그 보다 먼저 있었던 세종실록 악보에 있다8). 그러니까 대악후보와 속악원보 仁책은 그 용어를 세종실록 악보에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조실록악보와는 다르게 대악후보와 속악원보의 보태평에는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조대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중광’이라는 음악이 삽입되어 있다.이로써 원래 9곡이 되어야 할 부분이 10곡이 된다(4). 그러니까 여기의 一成, 九成, 十成은 각각 한 곡, 아홉 곡, 열 곡으로 이해된다9). 10개의 곡으로 늘어난 보태평은 조선초기의 것과 달라서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새로 삽입된 ‘중광’을 뺄 수 없는 상황이었다(7).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10개중 두 곡을 묶어서 다시 9곡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시도는 세번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현미’와 ‘정명’을 하나로 합했다(1). 두번째는 ‘중광’과 ‘정명’을 합했다(5). 세번째는 ‘용광’과 ‘정명’을 합했다(6). 그런데 서명응이 편찬한 대악후보10)에는 ...현미,용광,정명,중광...의 순서로 되어 있고, 용광정명은 통합되어 있다(악보6). 첫번째 현미와 정명을 묶은 것은 가운데의 용광을 빼놓은 것이라서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 되고 만다.왜 이렇게 순서를 거슬러서까지 이 두 곡을 묶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명료하지 않다. 현미는 셋째 대강에서 시작하는 악보의 형태이고, 정명은 첫번째 대강에서 시작하는 악보이다. 이 두 악보의 공통점이 있다면 넓게 그려졌다는 점인데, 이 점이 두번째 대강에서 시작하는, 좁게 기록된 용광 악보와 다르다. 두번째 묶음은 음악적으로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정명과 중광이 같은 장고장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단지 정명은 넓게, 중광은 좁게 그려졌다. 그러나 이 두 곡의 결합은 비동질적인 가사 때문에 포기된 것으로 생각된다. 정명은 태종을, 중광은 선조를 노래하는 것이라서 서로 맞지 않는다. 이렇게 두번의 통합이 내용과는 무관한 음악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까 세번째의 통합은 마지 못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사 내용이 둘 다 태종을 노래한 것이고 순서도 정상적이 되는 통합인데도, 마지막으로 선택되었다. 이 세번째 통합이 대악후보에 실려있는데 세조실록 악보대로 용광은 좁게, 정명은 넓게 그려져 있다(악보6).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四字一拍이라는 말이다.여기의 “字”자는 글자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 보다는 양금신보에서 사용된 “字”,즉 “點”과 같은 음악적 의미로 읽어야 할 것이다.왜냐하면 현미같은 곡은 네 글자가 아니라, 다섯자 단위로 한 구(句)를(음악적으로는 한 장고장단을) 이루기 때문이다11). 뿐만 아니라 위에서 논의된 보태평 음악에는 세 글자가 한 구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여기의 字는 배증되거나 배감되는 성격을 가졌다. 八字一拍이 四字一拍으로, 또는 거꾸로 변환될 수 있는 내용은 가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절주적 체계에 관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게 한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四字一拍이 八字一拍으로 되면 十成에서 九成으로 변하는 상관관계이다12). 따라서 이는 두 곡을 단순히 접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곡이 한 곡의 시간 안에 끝나야 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용강과 정명은 각각 6박으로 되어 있어서 모두 12박인데, 배로 빨리 연주하면, 즉 四字一拍을 八字一拍으로 하면 합해서 6박이 된다. 두 곡을 연주해도 한 곡의 소요시간이 걸린다. 이는 음악의 절주와 춤의 절주가 서로 맞아야 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四字一拍·八字一拍의 상관관계는 여기에 제시된, 4박의 단위가 배증·배감되는 대강보 해석과 잘 맞아떨어진다. 또한 八字一拍을 영(令)이라는 용어로 말하는데, 이는 오늘날도 “여민락 令”과 같은 명칭에 남아 있다 (오늘날은 ‘영’의 박 구조가 달라져 있다13)). 그런데 六拍爲一成이란 말은 용강과 정명에는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 않은 음악도 많기 때문에 이 부분의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혹시 남아있는 춤의 절주 一成(2)을 모든 음악에 적용시킨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일반화시키는 말은 四字一拍에도 해당된다. 즉 “모든 음악이 사자일박”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음악은 3박자”와 같은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반화시키는 어법은 엄격한 학술적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런 어법은 어떤 대표적 특성을 전체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일반언어의 특징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위의 영조실록 기록이 가진 약점은 대강보가 맨처음 나올 때의 것이 아니고, 그 시기와 300년 가량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기록은 세조실록 악보의 서문과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는 양금신보 서문이 기록된 해와도 150년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음악의 위축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는 위의 인용문이 병자호란(1936년)으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3). 거기에는 음악이 다 없어져 버렸다는 표현도 나타난다. 또다른 약점은 대강보의 붕괴가 시작되는 20정간보가 이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18세기 초)14). 그러나 이 시기는 정간보의 시대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19세기 초)15). 따라서 이는 정간보와 다른 음악적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V.대강보의 붕괴 대강보의 절주방식은 대강보 자체로 증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강보 이후의 악보들은 그 수조차 적고, 일정한 체계가 없기 때문에 절주기록이 충실하다고 보기 어렵다. 대강보는 금합자보와 양금신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악기 성부들을 망라하는 총보의 성격을 지녔다. 반면에 대강보가 아닌 것들은 거의가 관악기, 현악기, 또는 거문고나 드물게는 방향(方響,속악원보 信편의 7권)등을 위한 것들이다.이렇게 총보 성격의 대강보가 성부 악보 성격의 비대강보로 바뀐 것도 대강보의 붕괴를 용이하게 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러한 신뢰하기 어려운 악보들로 대강보를 해석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강보에 관한 어떤 암시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의 종류를 다루는데, 모두 속악원보에 있는 것들이다. (1)仁책의 절주가 달라지는 대강보, (2)智책의 20정간보, (3)信책의 정간보가 바로 그것들이다. (1)절주가 달라지는 대강보 외면적으로 대강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구조에서 대강보의 당연한 여건을 갖추지 못한 악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속악원보 仁책에 있는 용광정명(龍光貞明)이다(악보7은 원보이고,악보8,9의 3번과 2번은 번역보이다). 이 악보를 대악후보의 악보(악보6)와 비교하면 출현하는 음에서 하등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그러나 절주가 크게 달라졌다. 용광 첫부분에서 처음 ‘박’이 삽입되는 곳까지 두 악보가 같은 절주를 보이지만, 그 이후부터는 크게 달라진다. 즉 악보7은 거의 한 ‘점’으로(악보8,9의 4분음표), 또는 아주 드물게 그 절반으로(악보8,9의 8분음표) 단순화 되었다. 정간을 채우는 방식에서는 다른 대강보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장고, 박, 가사의 글자들이 대악후보의 것과 크게 다르다. 이 세 부분에서는 아무런 규칙성이나 일률성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악보는 박·장단과 같은 절주의 틀 안에서 주조(鑄造)된 다른 대강보와는 다르게, 선율을 먼저 그려넣고 타악기들과 가사의 글자들을 아무렇게나 분배해 넣은 것으로 판단된다.그래서 이 악보는 대강보이긴 하지만 대강보의 절주적 측면이 상당히 약화된, 마지막의 대강보라고 할 수 있다. 이 악보는 실질적으로 조선조 초기에 그려지지 않은 사실상의 최초의 대강보로 추측된다. 추측의 근거는 이렇다. 거의 모든 대강보들은 비록 후에 책으로 나타날지라도,그 제목들이 이미 조선조 초기의 문헌에 나타나고, 세종실록 악보 음악의 원곡들이기에 이미 조선조 초기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지 그 곡들이 속요이기 때문에 책으로 발표되는 일이 어려웠고, 속요에 대한 생각이 약화되고 나서야 책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악후보에 와서야 악보로 나타나는 井邑,眞勺 등도 조선조 초기에 기록된 것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된다. 물론 선조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 重光이 인조 때에(1625년) 새로 만들어져 보태평에 편입되었는데, 그 음악은 역성(繹成)과 같다. 대악후보의 ‘역성’은 세조실록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그러니까 ‘중광’ 역시 조선조 초에 기보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속악원보 仁책의 ‘용광정명’은 이미 있는 악보를 베끼지 않고 다시 기록한 것인데,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상의 최초의 독자적 시도에서 장단과 박이 크게 어긋나 있다. (2)20정간보 20정간보를 논하기 전에 우선 대강보의 두드러진 특징을 살펴보자. 대강보는 대강 중심으로 셈을 하지만 모든 대강이 동등한 가치를 갖지 않는다. 작은 대강은 앞에 가는 큰 대강의 부속적 성격을 갖는다16). 이러한 작은 대강은 대강보의 구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속한다. 왜 그렇게 했을까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뿐,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나 작은 대강의 부속적 성격때문에 작은 대강을 쓰지 않는 악보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20정간보라고 생각된다. 20정간보는 속악원보 智책에 나타난다. 이 악보 종류는 다음 단계의 악보, 즉 속악원보의 信책에 나타나는 정간보로 가는 과도적 악보로 추측된다. 20정간보는 큰 대강이 4정간으로, 사용되지 않는 작은 대강이 2정간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한 행이 20정간을 이룬다. <이미지19> 이러한 20정간보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작은 대강을 사용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게 있지만, 이는 예외적인 현상이지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20정간보의 작은 대강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언급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있어 왔다17). 그러니까 이런 판단은 “대강보”논의가 있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물론 20정간보의 작은 대강이 사용된 것이라는 주장이 없지 않다(VIII항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는 먼저 있었던 대강보와 관련시켜서 이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20정간보의 큰대강의 정간들만이 각각 한 ‘박’의 단위를 형성하리라고 본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20정간보와 자주 대비되는 악보가 있는데, 이는 <무대강4정간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 악보종류는 정간은 없고 4개의 대강만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20> 이 악보종류들과 20정간보와 자주 대비되는 것은, 20정간보의 작은 대강이 탈락되고 정간이 그려지지 않으면 위와 같은 모습일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20정간보와 무정간4대강보의 곡목들이 같다는 점도 그러한 추측을 유리하게 한다(보허자,영산회상). 가장 오래된 무정간4대강보는 한금신보(韓琴新譜)에 실려있다(1724년,경종4년). 이 악보 종류는 이렇게 18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비교적 오래 된 악보에 속한다.18) 무정간 4대강보의 형태는 20정간보의 작은 대강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판단을 유리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20정간보의 작은 대강이 사용되었다는 주장을 유리하게 하는 정간보가 있다. 예를 들어 동대금보(東大琴譜,1813,순조13년)와 같은 데에는 4·2·4 ·2·4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만영산(慢靈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 연대가 1813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19) 따라서 이러한 정간보들은 20정간보나 무정간4대강보보다 현격하게 뒤에 나온 악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3)정간보 다음은 정간보이다. 악보2가 속악원보 信책에 실린 정간보중의 하나이다. 대강의 표시는 있되 대강의 의미는 없다. 절주를 나타내는 박이나 장고 같은 악기의 기록이 없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소개된 두가지 낙양춘 악보를 새롭게 비교해 보자. 악보1은 위에서 밝혀진 대강보 해석 방식으로,악보2는 '한 정간 = 한 박자'의 정간보 해석 방식으로 번역되어 악보10으로 만들어졌다. 악보10은 두 악보를 모두 정간보식으로 번역한 악보3에 비하면 리듬상으로 서로 상당히 근접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대강보의 8분음표가 정간보에서 4분음표로 변한 것이 많다 (화살표). 이는 정간보 낙양춘이 한 정간에 한 음 이상 적어넣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대강보의 4분음표가 정간보의 2분음표가 된 경우도 네 곳 있다(점선). 또한 대강보의 4분음표가 정간보에서 2분음표가 된 경우도 세 곳 있다(줄선). 그 외에는 같거나, 약간 다른 점을(네모칸) 보여준다. 대강보는 뚜렷한 박절을 가진 음악을 보여 주지만, 정간보는 이 박절이 해체된 상태를 보여준다. 정간보에는 리듬의 준거가 되는 장고장단이 없어서 정확한 리듬 기록과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위의 기록은 다른 기록에 의해 재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그럴까 하는 의혹이 남는다. 세종실록 악보에는 대강의 표시가 없다고 “한 정간=한박자”의 정간보식 해석을 정당화 시키는 견해가 없지 않다. 그러나 세종실록 악보에는 대강이 명확하게 있는데, 이는 음의 자리로 보아 쉽게 확인할 수 있다(VII항을 보면 대강의 표시가 없는 세종실록 악보에서도 뚜렷하게 대강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악보는 실용적인 악보라기 보다는 실험적이고 연구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종실록 악보는 세조 때에 이르러 더 실용적인 악보로 금방 대체되고 말았다. 즉 세종조의 악보는 1447년에 많은 수의 음악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며(참조:각주2), 1464년에 세조실록의 악보로 다시 만들어진다(참조:각주3). 즉 17년 정도 밖에 지탱하지 못한 것이 세종실록 악보이다. 악보도 새로운 발명이었고, 노래말을 기록하는 한글 역시 새로운 발명이었다. 이러한 발명품들에 적응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짧은 기간 후에 폐기되고 만 것은 그 실용성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고쳐진 세조실록의 악보는 음악과 가사의 길이가 짧아졌고, 많은 음들을 덜어내어 선율을 더 단순하게 만들었다. 기보상의 변화에는 두가지가 두드러진다. 첫째는 음높이를 나타내기 위해 율명(律名) 대신에 오음약보를 새로 만들어 음높이 측정이 더 쉽도록 했다20). 물론 세종실록의 악보도 음높이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붉은 글씨로 옥타브 아래 음을 표기했으나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는 대강의 단위가 잘 보이도록 굵은 선으로 표시되었다. 대강이 없었다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대강이 잘 보이도록 조처를 취한 것이다. 바로 이런 대강 표시가 분명한 악보들이 조선조의 대부분의 시기에 실제로 사용되었다. 특히 관(官)에서 만든 악보들은 더욱 그러했다(개인적으로 만든 금보‘琴譜’종류들은 어느 정도 더 자유로운 성격을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할 때에 세종실록의 악보는 직접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악보라서 고쳐 쓸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개선은 세종실록 악보에 없던 사항을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두드러지게 하여 더 편리하고 용이하도록 한 것이다. 대강보를 단순화시킨 정간보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 속한다. 속악원보의 중수 연대 기록에 따르면 1892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관(官)에서 발간한 악보에 한한다. 개인이 만든 금보 종류를 보면,<동대금보>가 나온 1813년(순조13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따라서 정간보는 19세기 초에 개인적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궁중의 악보에까지 실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대강보와 정간보의 과도기를 형성하는 <20정간보>와 <무정간4대강보>의 발생시기는 가장 빨라야 한금신보가 나타난 1724년이라고 생각된다. VI.박의 의미변화 대강보에서의 박은 오늘날의 박과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박이라고 하면 양금신보의 점과 같은 것을 두고 말한다. 즉 일정하고 동일한 간격으로 셈하여 (또는 쳐서) 음악의 시간적 흐름을 계산한다. 대강보의 박을 큰 박이라 하고 오늘날의 박을 작은 박이라 하자. 오늘날 큰 박의 의미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흔히 듣는 소리 중에는 “한국음악은 3박(자)”라는 것이다. 이는 작은 박을 셈하여서 하는 말이다. 사실 한국민요의 대부분이 작은 박으로 3박이다. 그러나 작은 박보다 한 단위 높은 박을 보면 4박으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세마치 장단을 가진 음악도 작은 박부터 큰 박까지 나열하면 3,3,4으로도 되어 있는 경우들이 가장 일반적이다. 단지 세마치 장단은 두번째 큰 박까지도 3박이다. '세마치'의 '세'字가 3을 뜻한다면, 이 박의 이름은 두번째 큰 박 중심으로 정해진 것과 같다. 왜냐하면 세마치 장단의 작은 박과 가장 큰 박이 각각 3과 4박으로 되어있 때문에 다른 장단과 구분되는 것은 3개로 형성된 두번째 큰 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름은 우리의 장단이 아주 작은 박 중심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작은 박 이상의 논의는 거의 없다. 이것이 대강보의 사고와 크게 다른 점이다. 이렇게 변화된 사고로 옛 악보를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위험을 내포한다. 대강보의 사고는 작은 정간이 모여서 큰 단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박과 장단이라는 큰 단위가 작은 단위로 분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늘날 민요를 채보하는 사람의 입장도 크게 다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장단을 먼저 확인하고 난 다음에 작은 박들을 그 장단의 테두리 안에 분배할 것이다(물론 이는 대체적인 일반론이며 특수한 부분에서는 다를 수 있으리라). 대강보를 보면 큰 박의 지점이 너무도 확고하여, 이 일반론이 그대로 적용되었으리라고 판단된다. 대강보는 대단히 정확한 악보이다. 그러나 정간보는 대략적 흐름을 기록한 것이다. 이 두 종류 악보의 질적 차이는 너무나 크다. 이를 같은 것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퇴화되어버린 부정확한 악보로 온전하고 정확한 악보를 읽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 악보를 그런식으로 이상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대강을 4정간, 또는 2정간으로 만들었다면 아무런 오해도 있을 수 없게 분명할텐데,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여기에 대한 해답은 악보의 어디에서고 찿을 수 없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막연한 것이다. 즉 음양(陰陽)이론이 악보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4개 또는 2개의 정간으로 '한 행 최소 단위'를 만들 경우 모두 음(陰)의 숫자라서 이를 피하기 위해서 3.2.3 으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다. 그러나 그 확실한 답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VII.조나단 콘디트의 대강보 해석 대강보를 정간보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이를 대강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풀어보려고 먼저 나선 사람은 조나단 콘디트이다.21) 그 때까지 한국의 음악학자들이 각 악곡의 역사적 변화과정을 종적으로 살피는 일에 주력하고 대강보와 정간보를 부수적으로 다룬 반면에, 콘디트는 대강보 상호간의 횡적인 관계에 관심을 갖고 악보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1976년에 대강보에 관한 학위논문을 쓴 이후에, 1979년에는 학위논문의 결과를 축약한 논문을, 1984년에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 오늘날의 악보로 번역한 조선조 초기의 음악에 관한 책을 내놓고 있다(참조:참고문헌). 여기에서는 그의 학위논문을 중심으로 그의 대강보 해석의 주요 부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그는 대강보와 정간보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대강보를 정간보와는 다르게 해석해야 옳다고 본다(그가 대강보라는 용어를 쓰지 않지만, 이것을 실제적으로 정간보와 구별한다). 그가 대강보를 정간보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Condit 1976 p.16ff). 하나는 정간보식으로 번역한 대강보의 음악이, 한국음악이 느리다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지나치게 느려 음악을 감지하고 즐길 수 없거나(관악기의 경우 연주가 불가능하며), 이를 빨리 연주할 경우 리듬이 “비합리적”(irrational)이 된다. 그는 비합리성의 예로 세종실록 악보에 실린 정대업 중 진요(震耀)를 정간보식으로 번역한 것이 16,8,5,3,2박의 연결임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15세기의 악보(대강보)를 19세기의 악보(정간보)와 같은 방법으로 풀이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점이다. 대강보에서의 정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정간은 긴 지속시간을 나타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지속시간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다”22) 그는 오늘날의 한국음악이 주로 3박으로, 중국음악이 2박으로 이루어진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물론, 이것이 예전에도 그러했으리라고 추측하고, 세종실록 악보의 한국음악과 중국음악도 2박과 3박이었으리라는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을 설정한다(Condit 1976.p.22ff). 따라서 그는 2박 음악과 3박 음악의 리듬에서 어떤 시점(時點)이 얼마나 많이 쓰였는지를 보는 사용빈도수부터 추출해낸다. 그는 2박 음악의 사용빈도수를 프랑스민요 Frère Jacques23)를 통해 뽑아낸다(Condit 1976,p.25ff): <이미지21> abc...등은 시가가 분화되는 자리수를 나타내고, 숫자는 사용빈도수이다. 어떤 자리수는 많이, 어떤 자리수는 적게 사용되었다. efgh는 abcd의 반복이기 때문에 이 두 부분의 사용빈도수를 합할 수 있다: a(18),b(2),c(12),d(2). 그래서 사용빈도수가 높은데서부터 순차적으로 나열하면 a,c,b와d가 된다. 3박 음악의 사용빈도수는 Row,row,row your boat24)노래에서 추출해 낸다(Condit 1976,p.32ff): <이미지22> ghijkl은 abcdef의 반복이기 때문에 이 두 부분의 사용빈도수를 합하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a(8),b(2),c(5),d(6),e(2),f(4).이를 사용빈도수가 높은데서부터 차례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콘디트는 사용빈도수의 순서에 따라 각각 기호를 부여한다: <이미지23> 위의 기호를 3박 리듬구조 밑에 배열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미지24> 한편 2박 구조는 다음과 같다: <이미지25> 콘디트는 세종실록 악보에 어떤 것이 2박이고 어떤 것이 3박이라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한 음악을 2박과 3박으로 같이 해석할 수 있도록 두 박을 모두 통합하는 틀을 만든다. 그 틀에는 세가지가 있다: <이미지26> 이 틀에 따라 Frère Jacque와 Row,row,row your boat를 각각 2박 3박의 리듬으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미지27> 콘디트는 세종실록 악보로부터 뽑아낸 사용빈도수의 통계에 따라 정간들의 경중을 구분하고, 위의 틀을 적용시킨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통계와 리듬 틀의 적용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세종실록 악보들을 몇가지 유형별로 나누어 악보해석을 한다(Condit 1976.p.40ff). 여기에서는 모든 유형을 다 다루지 않고 대표적 다섯가지만을 다룬다. 이 유형들은 각각 같은 장고장단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악보의 기록방식 역시 흡사하다. 1)첫번째 유형(宣威,赫整,震耀) 그는 32정간으로 된 한 행을 16정간이 두개 연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밝히고, 32정간의 사용빈도수를 16정간으로 합한다.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해당되는 기호가 결정된다. <이미지28> 위의 통계는 각각 다음의 2박,3박 체계로 해석될 수 있다. <이미지29> 위의 해석방식을 악보 번역에 적용시키면 악보11의 1번처럼 된다. 2)두번째 유형은 다음과 같다(篤敬,啓宇,純佑,昌符,靈慶,神啓,顯休,禎禧,降寶,凝命,嘉瑞,和成,與民樂) <이미지30> 2박,3박 체계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미지31> 위의 해석방식을 악보번역에 적용시키면 악보11의 2번처럼된다. 위의 두가지 유형이 가진 공통점은 항상 같은 자리에 ∨ > -기호가 온다는 점이다. 또한 16정간을 8정간으로 통합해도 서로 부합되는 모습을 보여주어, 8정간이 한 단위가 되는 것도 알게 한다. <이미지32> 위의 두 유형의 사용빈도수를 8정간으로 통합시키면 다음과 같다. <이미지3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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