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입이 내게 있으면(새23 통23)
O for a thousand tongues to sing
작사 :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
작곡 : 칼 골헬프 글래저(Carl Gollhelf Gläser, 1784~1829)
형 존 웨슬리와 동생 찰스 웨슬리는 둘 다 영국 국교회 목사였다(작사자 찰스 웨슬리에 대해서는 16장을 참조할 것). 형제는 옥스퍼드 대학 학생시절에 영국 국교회의 정책에 뜻을 같이 할 수 없어 신앙적인 그룹을 만들었다. 형 존 웨슬리는 이 그룹(Holy Club)의 규칙과 체계를 만들었다. 학생들은 이 그룹을 가리켜 엄격한 종교적 견해를 가지고 규칙에 치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메토디스트(Methodists)”라고 불렀다.
형 존 웨슬리와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 조지아 주의 총독으로 있던 오글토프 장군으로부터 조지아 주 사바나(Savannah)에 군목으로 청빙을 받아 대서양을 건널 때였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범선 안에는 신대륙으로 가는 26명의 독일 모라비아(Moravian:개신교의 일파; 328장 참조) 교도들이 있었다. 1736년 1월 초, 배가 사바나 강 어구 18마일쯤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한 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그때 웨슬리 형제는 폭풍 중에 우렁찬 합창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한 군데 모여 앉은 모라비아 교도들의 찬송소리였다. 폭풍우가 가라앉은 뒤 찰스는 물었다. “무섭지 않으셨소? 그렇게 태연히 찬송을 부를 수 있다니!” “무섭기는요. 그저 하나님께 감사했을 뿐이지요.” 모라비아 교도의 대답이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존 웨슬리는 런던의 앨더게이트(Eldergate)에 있는 모라비아 선교부를 방문하여 같이 예배드리는 도중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했으며 이보다 3일 전에는 동생 찰스가 같은 체험을 했다. 찰스는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웨일즈에 이르기까지 광산, 감옥을 찾아다니며 선교를 했다. 영국국교회는 이들 형제를 “더러운 감리교도”라고 칭하고 출교해 버렸다.
1739년 5월 21일, 찰스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의 지도자 페터 뵐러(Peter Böhler)와 저녁식사를 한 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뵐러가 이야기 도중 “…형제여, 내게 입이 만 개가 있다면 그 입으로 다 하나님을 찬송하겠소!(Had I a thousand tongues, I would praise Him with them all!)”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찰스에게는 불현듯 한 뜨거운 영감이 떠올랐다. 부리나케 휘갈겨 쓴 찬송시가 바로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이다. 이 찬송은 형 존 웨슬리가 1740년에 감리교도들을 위해서 찬송가집을 편찬할 때, 책의 첫 장에 실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곡조 AZMON은 칼 글래저의 곡이다. 그는 1784년 독일 베젠스펠스(Wesensfels)에서 태어났고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음악에 뛰어난 소양을 가졌던 그는 다시 음악을 공부하여 마침내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을 가르치는 음악교수가 되었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글래저의 AZMON은 메이슨(Lowell Mason)에 의해 미국으로 소개되었으며, 1839년 보스톤(Boston)에서 발행된 “현대시가집(The Modern Psalmist)”에 처음 발표되었다. 현재 독일에서는 이 찬송곡이 학교에서 가요로 애창되고 있다. 곡명 AZMON은 민수기 34: 4-5에 나오는 지명이다.
(작품분석)
찰스 웨슬리의 원래 가사는 18절까지 되어 있었으나 여기에는 4개의 절만 수록되어 있다. 찬송가 제1절은 원시 제7절을 옮겨온 것이다. 이 곡은 8마디로 이루어졌으며 거의 대칭적인 형태를 띤다. 처음 4마디에서는 선율이 대체로 상행하는 반면, 나중의 4마디에서는 대체로 하행한다. 처음 4마디는 2+2마디로 세분화되어 순차적으로 상행했다 하행하는 활 모양의 프레이즈(처음 못갖춘박의 음은 제외)를 두 번 반복하는 반면, 나중의 4마디는 같은 음을 반복한 후 3도씩 도약하며 하행하는 계단식 선율을 주로 연주한다.
등록일자: 2010. 2. 4
문영탁/나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