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전 한독음악학회
타르티니, 주세페(Tartini, Giuseppe, 1692-1770)
- 1692년 4월 8일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스트리아 (Istra, 현재 슬로베니아) 반도 피란에서 소금 제분소의 책임자였던 조반니 안토니오 타르티니(G. A. Tartini)의 아들로 태어남.
- 어린 타르티니는 부모님의 강한 권유로 수도원 카포디스트리아(Capodistria)에서 수도자의 교육과 함께 음악의 기본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됨.
- 1708년 수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이듬해 법률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 파도바(Padova)대학에 등록함.
- 1710년 바이올린 제자인 두 살 연상의 엘리자베타 프레마초레(E. Premazore)와 비밀리에 결혼하였으나, 엘리자베타의 보호자였던 추기경 코르나로(Cornaro)의 분노로 인해 아시지(Assisi)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로 피신함. 그곳에서 3년 동안 머무르며 바이올린을 연마하고 그 곳의 오르가니스트인 체르노호르스키(B. Černohorský)에게서 작곡을 배움.
- 1715년 추기경의 사면을 받고 부인과 재결합.
- 1716년 베네치아에서 베라치니(Veracini)의 바이올린 연주에 감동을 받아 바이올린 연주 기술 연마의 완성에 전력을 하는 계기가 됨.
- 1721년 파도바에 위치한 성 안토니오(St. Antonio) 성당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가 됨. 명연주가로 알려짐에 따라 파도바의 공기관은 타르티니에게 음악원이나 오페라하우스에서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 파르마, 볼로냐, 카메리노, 페라라, 베네치아로 자유롭게 연주여행을 다님.
- 1723-1726년까지 3년 동안 프라하에 거주하며 킨스키(Kinsky) 공작 휘하의 음악인으로 일하며 로브코비츠(Lobkowitz) 왕자와의 친분을 통해 푹스(Fux), 칼다라(Caldara)와 같은 유명음악인들과 교류하게 됨.
- 1726년 건강 문제로 파도바로 되돌아와 남은 여생동안 거주함.
- 1728년 파도바에 세운 바이올린 학교가 명문교로 명성을 얻음, 전 유럽으로부터 학생들이 모임.
- 1767년까지 성 안토니오 성당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의 자리를 지키며 1767년까지 그가 설립한 바이올린 학교에서 가르침.
- 1768년 심장마비로 모든 활동을 접음.
- 1770년 2월 26일 파도바에서 사망.
타르티니는 당대 가장 기교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가일 뿐 아니라 작곡가, 음악 이론가, 음악교육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운궁법은 다른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귀감이 되어왔다. 약 135개에 이르는 바이올린협주곡, 40여개의 트리오소나타, 30여개의 솔로 바이올린 작품 등 타르티니의 작품은 기악 작품이 다수이다. 이외 약간의 현악4중주 소나타, 그리고 헌정의 목적으로 작곡한 소수의 성악곡들이 있다.
창작에 몰두했던 그의 음악의 세계를 생전에 남긴 편지와 이론적 저작물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한때는 종교인의 삶도 고려했던 그는 음악을 통해 우주의 합일적 원칙을 인류에게 보여주려 했다. 타르티니에게 있어 진리는 자연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는 다양한 현상들을 규칙화하는 것이고 특정한 수학적 공식으로 환원된다고 여긴다. 자연은 어쨌든 이런 규칙들에 관해 매우 은밀하게 그리고 굉장히 선택적인 경우에만 그 진실을 드러낸다. 예컨대 타르티니는 자신이 발견한 음현상인 결합음(combination tone)을 진실로 간주하며 또 이런 것이 자연과 음악의 세계를 통치하는 경이롭고 신비스런 규칙을 조사하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반면 예술은 자연과 대치하는 개념이다. 만일 자연이 모든 진리의 근원이고 예술은 주어진 진리가 변화한 것이라면, 예술가가 자연과 근접하면 할수록 진리와 가까워지는 것이라 믿는다. 음악도 모든 자연현상과 같이 위계적 질서로 조직된 일련의 사건을 통해 감지되는 것이고 이런 위계체계의 가장 근본에 타르티니는 결합음을 놓는다. 타르티니는 그의 논문 『음악 에세이』(Trattato di musica, 1754)에서 왜 기악창작에만 몰두했는지 이유를 쓴다. 그는 차음 현상을 화성의 과학적 진리로 여기며 이 법칙을 실제의 음악에 적용한다. 자연의 현상인 인간의 목소리야 말로 완벽한 연주라고 주장한다.
『장식음을 위한 논문』(Traité des agréments de la musique, 1770)에서 타르티니는 장식음은 기능이나 성격에 따라 조심스럽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때문에 연주자는 모드(mode)와 장식음이 붙는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들이 타르티니로 하여금 학생들을 위해 장식음 설명을 위한 논문을 집필하도록 했다. 후에 나온 레오폴트 모차르트(L. Mozart)의 바이올린 학습에 있는 장식음에 관한 것은 타르티니의 글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유명한 ≪악마의 트릴≫(Trillo del Diavolo, 1798)은 타르티니가 꿈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작곡한 것으로 악마가 작곡자를 위해 연주한 것이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악마적 트릴은 소나타 G 단조의 마지막 악장에 나타난다.
악마의 트릴
타르티니의 작품세계는 작품의 성격 변화에 따라 대략 3기로 나뉜다. 초기에 속하는 1735년까지의 작품들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콘체르토 형식을 위주로 한 것들로 코렐리(A. Corelli)의 영향을 보인다.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타르티니 역시 코렐리를 존경했다. 유일하게 현존하는 타르티니 판화에는 코렐리의 악보가 이름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타르티니가 남긴 소나타는 코렐리의 교회 소나타를 따른 악장들을 따른다. 즉 대위법적인 알레그로 악장, 느린 칸타빌레의 2악장, 알레그로 악장으로 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알레그로에서는 다른 박자에 실내 소나타와 같은 춤곡의 리듬을 사용한다. 또 3개의 모든 악장이 일관된 한 개의 조성이며, 두 도막 형식의 구조로서 코렐리의 소나타 구성과 흡사하다. 비발디의 영향을 보이는 타르티니의 협주곡은 3개 악장 구성이며, 빠른 템포의 1악장과 3악장이 중심 역할을 하는 느린 템포의 2악장을 둘러싸는 구조이다. 빠른 악장에서 리토르넬로는 대개 4번, 그리고 독주 에피소드는 대개 3번 나타나는데 명백한 조성 체계에 의해 구분된다. 독주 제시부는 종종 리토르넬로에서 나온 요소들을 반복하거나 변화를 준다. 1악장의 주제와 조성적 체계는 대개 3악장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1악장과는 다른 박자이며 더 활기차게 진행된다.
타르티니는 코렐리의 양식을 답습하던 기간을 걸쳐 개성적 양식의 소나타와 협주곡들을 작곡한다. 이들 작품에서 시작부의 주제부 몇 마디만 들어도 개성적인 멜로디, 리듬, 화성 때문에 타르티니 작품임을 인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각 악장의 마지막 삼화음으로 3도가 생략되는 열린 화음의 사용은 매우 독특한 마침이다. 콘체르토의 에피소드에는 타르티니만의 반복적인 8분음표가 특징이다. 점차로 초기 협주곡의 기교적 음형은 사라지고, 그 대신 더욱 서정적인 멜로디가 부각되는 양식으로 변화한다. 특히 소나타의 느린 악장의 시작부분과 협주곡의 느린 2악장에서 그러하다. 이런 변화는 타르티니가 살던 시기의 성악양식에서 보이는 서정성을 악기로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다. 1740년경(타르티니의 중간 작곡시기), 타르티니는 점차로 성악에서와 같이 시적인 가사를 표현하는 멜로디를 기악에서, 특히 느린 악장에서 재현하려 한다. 서정적 표현을 극대화하는 기악 멜로디를 구성하는 방법의 하나로 장식음을 자주 사용한다. 장식음 등의 사용은 타르티니로 하여금 ‘자연과 부합하는 훌륭한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타르티니의 마지막 창작기간에는 협주곡의 빠른 악장에서 구조적 틀을 제공하던 화성과 리듬의 기능이 축소되고, 느린 악장이 멜로디가 중시되면서 3개 악장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궁극적으로 성악과 같은 서정성을 이제 기악 멜로디의 특성을 훼손하지 않고도 악기로서 표현할 수 있는 작곡기법을 구사해 실로 작곡가 고유의 창작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긴다. 이런 과정에서 베이스라인의 유용성이 축소되는 경향이 나타나자 타르티니는 ‘작은 소나타’(piccole sonate)를 작곡한다. 두 도막 형식의 여러 개의 짧은 악장으로 구성되는 작은 소나타는 바이올린으로 연주된다. 일반적으로 타르티니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오케스트라의 제시부에서 주제가 으뜸조에서 소개된 후, 변형되고, 확장되는 과정이후 독주 바이올린이 으뜸조에서 나타난다. 소나타 형식과 마찬가지로 제2주제가 딸림조로, 그리고 발전부를 거쳐 으뜸조의 재현부에 이르는 짜임을 가진다.
타르티니가 세운 바이올린 학교는 당대 유럽의 많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타르티니 자신이 1727년경부터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는데, 그가 파도바에 세운 학교에서는 바이올린 연주법 뿐 아니라 작곡법도 전수하며 대개 2년 정도의 기간을 소요하면 졸업할 수 있었다. 학생 중 알베르기(P. Alberghi), 비니(P. Bini), 그리고 특별히 나르디니(P. Nardini)가 유명하다. 또 이들 학생 중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학생, 연주가들, 베니스로부터 온 귀족들도 포함한다. 특별히 타르티니는 성악가에게 호흡 방법이 중요하듯, 올바른 운궁법의 습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타르티니의 활은 일반적으로 길이가 조금 긴데 그 이유는 타르티니가 기악 멜로디를 완벽하게 노래하려면 길이가 긴 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코렐리(Op.5) 의 가보트를 테마로 사용한 50개의 변주곡들이≪활의 예술≫(L’arte dell’arco)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타르티니는 꾸준히 예전에 썼던 작품을 끄집어내어 고치고, 새로운 부분을 덧붙이거나 혹은 아예 없애는 습관이 있었다. 작곡자가 언제 어떤 부분을 어떻게 다시 고쳤는지 알 방법은 없다. 그의 음악에서 한 개의 확정된 작품은 거의 없고 한 개의 작품에 여러 버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타르티니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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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2010.2.24
[장영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