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1924 프랑크푸르트 - 1969 프랑크푸르트)
아도르노는 오페라 가수를 지낸 어머니와 성공한 유대인 주류상이었던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 1924년 21세의 나이로 훗설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에서 음악학도 배웠다. 대학 졸업 후 작곡도 배우고(선생: B. Sekles). 음악평론도 했다. {음악잡지}(Zeitschrift für Musik), {음악}(Die Musik), {지휘대와 지휘봉}(Pult und Takt Stock)과 같은 음악 잡지에 평론들을 발표했다. 또한 그는 1928-1931년 사이에 음악잡지 {새벽}(Anbruch)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1924년 초연된 베르크의 {보체크 단편들}(Wozzeck-Fragmente)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를 결심하고, 1925년 비엔나로 가서 베르크(Alban Berg)에게 작곡을 공부했다. 비엔나에 있을 때에 그는 가끔 음악학자 아들러(G. Adler)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27년 이후 작곡 수업을 중단하고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 왔고, 베를린에 자주 체류하면서 철학자 벤야민(Walter Benjamin)과 음악가 바일(Kurt Weill) 등과 교제했다. 1928년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와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이끄는 사회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 1923년 설립)와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1931년 키엘케골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자격 시험에 합격했다(지도교수: Paul Tillich).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철학과 조교수에 취임했지만 1933년 나치에 의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그 후 그는 영국 옥스포드에서 잠깐 공부한 후, 1938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는 뉴욕에서 사회학자 라자르스펠드(P. F. Lazarsfeld)가 주도하는 프린스톤 라디오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호르크하이머가 미국으로 옮겨온 사회연구소의 상임 연구원이 되었다. 그는 호르크하이머가 로스앤절레스로 옮겨 갈 때 같이 그 곳으로 이주하였고, 두 사람은 프랑크푸르트 비판학파의 중요한 문헌이 되는 {계몽의 변증법}을 1942-44년에 집필했다. 그는 미국 문화와 접하면서 대체적으로 거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2차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에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자신의 언어(독일어)와 사고의 고향인 독일로 돌아왔다. 1950년 이후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교수로 일했다. 1956년 정교수가 되었고, <사회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그는 60년대에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수많은 현대음악 강좌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다. 1968년 이후 그는 현실질곡의 혁파를 위해 그의 참여를 바라는 학생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현실과 무관해 보이는 미학 강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강의는 학생들의 시위에 의해 중단되었고, 그의 연구실의 서류들이 학생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1969년 8월 6일 스위스의 요양지(Visp)에서 사망했다.
그가 쓴 음악작품들은 비엔나 악파의 표현주의적인 초기 무조음악에 속한다. 그는 소수의 12음기법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으나 상당히 자유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가 12음기법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작곡에서 멈춘 일은 그의 저서를 통해 지속된다. 그는 철학책, 음악책을 다로 구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을 중심에 두고 쓴 책이 따로 있다. 이를 연대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음악의 철학}(Philosophie der neuen Musik 1949). {바그너에 관한 시도}(Versuch über Wagner 1952).{불협음. 관리되는 세상의 음악}(Dissonanzen. Musik in der verwalteten Welt 1956). {소리모양}(Klangfiguren. 1959). {말러. 음악적 관상}(Mahler 1960). {음악사회학 입문}(Einleitung in die Musiksoziologie.1962). {충직한 연습지휘자}(Der getreue Korreptitor. 1963). {콰지 우나 판타지아}(Quasi una fantasia 1963). {모망 뮈지코}(Moments musicaux 1964). {앙프롱튀}(Impromptus 1968). {베르크}(Berg 1968). {영화음악}(Komposition für den Film. Hanns Eisler와 공저 1969). {베토벤}(Beethoven 1995). .
하지만 그의 음악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의 철학책도 같이 참조되어야 한다:
{계몽의 변증법}(Dialetik der Aufklärung 1944),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ktik 1966), {미적이론}(Ästhetische Theorie 1973).
아도르노에게 예술은 특히 음악은 절망에 던져진 인간에게 하나의 희망이다. 그는 보들레르나 쇤베르크 이후의 모더니즘적 예술에서 희망을 본다. 왜냐하면 그는 모더니즘 예술이 18세기 이후의 계몽적 사고에 저항하는 가장 적합한 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사회가 도달한 전체주의(히틀러 체계)의 망령이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계몽주의적 사고에서 체계화 전체화 물량화 단위화의 경향이 나왔고, 야만적 정신은 이를 주도하는 것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야만에 빠진 20세기의 상황은 그에게 <부정의 철학>을 선택하게 하고, 저항을 특징으로 하는 모더니즘 예술에 희망을 걸게 한다.
이렇게 잘못된 서양의 문명사는 잘못 진행된 역사이기에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생각이다. 즉 인간과 자연은 화해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화해를 중개하는 것이 예술이다. 이 예술에는 억압과 폭력이 없는 해방의 자리로 상정된다. 20세기의 모더니즘, 또는 아방가르드 예술은 그러한 잘못된 방향에 대해 아니라고 발언하는, 즉 "진리내용"을 가진 예술로 보았다.
다음은 그의 음악철학을 잘 알려진 몇 개의 용어를 통해 설명한 것이다.
(1) 다른 것(Das Andere)
아도르노는 18세기의 계몽주의가 <신화>를 폐기하고 그 자리에 <지식>을 집어 넣었다고 본다. 그런데 <지식>은 <자연>을 지배하는 <기술>을 낳는다. <기술>은 아무에게나 효율적이 될 수 있는 도구였다. <기술>은 사물을 숫자로 만들 수 있는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 <기술>을 운용할 수 있는 지배자는 피지배자에 대해 엄청난 우월성을 갖게 된다. <기술>은 개인들에게 많은 것을 제공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개인들은 더욱 쉽게 조종된다.
계몽주의는 <전체>의 이익과 <보편성>의 이상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같은 것>은 <다른 것>에 함몰된다. 여기에는 인간이라고 하여 예외가 아니다. <다른 것>이 같아지는 것을 거부하면 억압 당한다. <다른 것>이 살아남으려면 사회를 거부해야 한다.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아도르노의 부정은, 이미 있는 사고의 틀로는 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선회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체"를 위한다는 전제가 서게 되면 같지 않고 다른 부분들은 도외시되거나 같게 만들어져 버린다. 이는 변증법에서 "통합"을 전제로 할 때에, 그 결과가 통합이 아니라 "부정"이 도태되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2)미메시스(Mimesis)
예술은 마치 주술이 신성한 힘이 작용될 장소를 주위의 다른 것과 구분시키는 것처럼 현실과 구별되는 폐쇄적 영역을 만든다. 하지만 예술이 주술과 다른 점은 영향을 끼치기를 포기함으로써 외부세계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래서 예술에서는 외부세계(자연)와의 화해가 가능하다. 이로써 예술은 "특수한 것" 속에서 전체를 드러내는데, 이 점이 전체의 일부로 몰락하고 마는 것들과는 다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에서는 주술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메시스>(Mimesis)가 활동한다. 흔히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모방>이라고 번역되어 만나는 이 말은 아도르노에게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에게서 미메시스는 신화에서 주술사들이 귀신들을 무마하거나 달래기 위해 무서운 몸짓을 하거나 달래는 행동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미메시스는 <흉내내기>이다. 즉 무섭게 하는 것이나 달래는 것을 '흉내내는'(미메시스) 것이다. 하지만 그 "흉내내기"는 표면적인 모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흉내내는 대상과 같아진다는, 좀 더 적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미메시스는 <흉내내기>를 통해 자신을 자연과 동일시(또는 동화)하는 한편, 일정한 목적을 포함하는 합리적 행동이기도 하다. 그 목적이란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면서도 대상과 화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미메시스는 나중에 오는 합리성의 대명사인 과학처럼 자연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폭력 없는 합리성을 '화해적 합리성'으로 이해한다. 예술이 주술과 분리되어 세속화의 길을 걸었지만 아직도 예술에는 미메시스가 있다는 것이다.
미메시스적으로 행동하는 예술은 대상을 대상 그대로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 때문에 예술의 미메시스적인 행위는 단순한 주관의 발설이 아니라, 사회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개념이 없지만 더 정확하게 사회를 그려내는데, 이는 미메시스가 대상을 정확하게 흉내내기(동화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예술은 사회에 만연한 사실적 부정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사한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미메시스적 예술은 고통스러운 세상과 비슷해지면서 세상을 비판한다. 이런 이유로 예술은 사회와 무관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이다.
(3)문화산업(Kulturindustrie)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의 뒤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결국 자본이라고 보았다. 그의 생각에서는 자본의 지배가 단지 물질적인 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본은 정신적인 것도 지배하면서 예술가가 자신의 본래의 보습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한다. 자본은 예술에서 <문화산업>이다. 그에게 대중문화는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에 속하지 않는 예술음악도 문화산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에서 상품성, '그것이 그것'의 성격, 생각의 장애물, 유흥적 성격, 속없는 즐김과 같을 것들을 본다. 이런 것들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생산하는 기관들은 모두 대기업에 종속적이다. 즉 텔레비전 회사, 라디오 회사, 음반회사, 영화회사, 대중매체들은 대기업의 계열회사이거나 거기에 의존적이다. "마지막으로 자아는 소유를 박탈 당한 시민들을 떠나 전체주의적인 대기업의 손에 넘어갔으며, 이들의 학문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굴복한 대중사회의 총화가 되어버렸다."
(4)재료(Material)
아도르노는 무조음악의 불협화음들이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 고통들이 침전되어 불협화음을 이루는 "재료"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해석에서는 음악을 만드는 재료들이 단순히 물리적인 요소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들이다. 정신의 침전은 일정한 주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주관에 의해 이루어진 재료는 주관적 성격을 넘어서서 <객관적> 저항의 성격을 갖는다. 이에 따르면 <재료>는 <정신>이며,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이다.
뿐만 아니라 아도르노에게서는 <재료>와 <역사>가 연결된다. 음악의 형식은 역사적 발달과정 속에 필연적으로 나온 것이며 자연처럼 저절로 생성되지 않았고 안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음악의 역사는 당대의 부정적 체험이 음악으로 집합된 것들이다. 그의 음악사 이해는 이러한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작곡가들에게 집중된다. 그는 3화성이 더 이상 쓸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단지 낡고 시대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반화되었기에, 즉 거짓이기 때문에 쓸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3화성은 소음이다. 불협음이 소음이 아니다. 아도르노는 이미 일반화된 고통의 표현은 (예: 감7도 화음)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짓된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거짓이 없는 음악이 "진정한"(authentisch) 음악이다.
[홍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