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Piotr Ilyich Tchaikovsky 1840. 5. 07 보트킨스크 - 1893. 11. 06 페째르부르크)
차이코프스키는 광산의 기술관리였던 아버지(Ilja Petrowitsch. 1858년 이후 페째르부르크의 기술연구소 소장)와 프랑스 혈통의 어머니(Alexandra Andrejewn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과 접했으나 꾸준하게 음악 공부를 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5세 때에 피아노를 배웠다. 하지만 피아노 교육을 계속적으로 받지는 못했다. 특히 1849년 8월 그는 페째르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학업에 충실하고 음악과는 멀어진다. 1854년 그의 어머니가 콜레라로 별세한다. 1855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실력 있는 독일인 피아노 선생(Rudolf Kündiger)을 붙여준다. 이 선생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의 음악생활을 크게 확장시킨다. 하지만 1858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차이코프스키는 이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중지된다. 1859년 차이코프스키는 법학 공부를 마치고 법무부에 취직한다. 그는 직장 일에 별 흥미를 못 느꼈다. 그래서 안톤 루빈스타인이 이끄는 음악학교(그가 들어갈 당시는 "러시아 음악협회"라 불렸음)에 진학하여 공부한다. 음악 공부를 위해 직장도 그만 두고 한편으로 레슨을 하면서 부지런히 작곡한다. 안톤 루빈스타인은 그를 자신의 동생(니콜라이)이 새로 세운 모스코바의 음악학교의 교수로 추천한다. 1866년 차이코프스키는 그 곳에 부임하여 1877년까지 일한다. 그의 작곡 활동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또한 1872-76년까지 『러시아 소식』(Russkije wedomosti)지의 음악평론가로서 일했다. 1866년 1번 심포니(『겨울꿈』)와 오페라 『지방장관』 발표.
1868년 그는 오페라 벨기에의 여가수 아르트(Désirée Artôt)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이름 있는 가수였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어머니와 그의 친구들은 그들의 결혼을 방해한다. 그는 이어서 오케스트라 판타지 『로미오와 쥴리엣』(1869)을 작곡하는데, 이 작품은 그에게 대단한 작곡가라는 평판을 얻게 한다. 이 작품은 외국에서도 공연되고, 베를린의 한 출판사는 이를 출판한다. 1871년에는 자신의 작품으로만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그는 교수로, 작곡가로,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이룬다. 1872년 2번 교향곡을 작곡하여 대단한 호응을 얻는다. 1873년 오페라 『눈 아가씨』 작곡. 그는 이제 대단한 명성을 누리는 작곡가가 되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그의 작품을 기회 닿는 대로 연주하의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인다. 1874년 공모에 응하기 위해 『대장장이 바쿨라』 작곡. 1875년 겨울 제자인 타네예프(Sergej Tanejew)와 친밀하게 되고 그에게 오케스트라 판타지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Francesca da Rimini)를 헌정한다. 1776년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 작곡.
1877년 그는 28세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jukowa)와 결혼한다. 그는 모스코바 음악원 학생이었던 이 여자와 결혼하여 자신의 동성애자라는 소문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결혼은 불행이었다. 결혼한지 몇 주 지나 그는 아내와 별거한다. 아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스위스와 이태리로 여행을 떠난다. 1778년 『오이겐 오네긴』(푸쉬킨 원작))과 4번 심포니 작곡.
이 시기에 그는 나테즈다 폰 메크(Nadesha von Meck) 부인과 편지를 교환하게 된다. 그녀는 그의 음악에 대해 찬탄하는 과부였다. 그녀는 그를 전혀 만나지 않고 그를 일방적으로 도왔다. 처음에 그녀는 그를 위해 악보 출판비를 대 주기도 했고,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1877년부터 폰 메크 부인은 그에게 1년에 6000루벨을 주어 그가 직장에 매이지 않고 작곡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1878년 바이올린 협주곡과 가곡집 작곡. 같은 해에 그의 작품은 빠리의 박람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1789 그의 오페라 『오이겐 오네긴』이 에 초연되지만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다. 반면 1880년 초연된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는 대단한 호응을 얻는다. 차이코프스키는 1년에 유럽을 두 번 여행하면서 방랑자의 삶을 산다. 그에게 돈은 항상 딸렸기에 폰 메크 부인 이외의 다른 후원자를 구하기도 한다.
1888년 여러 곳에서 지휘자로 활동한다. 그는 유럽 여행 중에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드보르샥 등과도 만난다. 그는 여행으로부터 돌아와 5번 심포니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작곡한다. 이태리에 여행하여 대성공을 거두게 되는 오페라 『카드놀이 여인』(Pique dame)을 작곡한다. 그는 큰돈을 주겠다는 미국으로 여행한다. 그가 러시아로 되돌아오자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거절하겠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녀는 표면적으로 경제 사정이 나빠진 것을 이유로 들었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하고 캠브릿지로 가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다. 1893년 그는 6번 심포니(『비창』)를 직접 지휘한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의도는 청중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그는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는다.
차이코프스키는 음악회장에서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 이름 중의 하나이다. 1번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4.5.6번 심포니는 자주 연주된다. 특히 발레 공연장에서는 그의 이름이 더욱 두드러진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인』, 『호두까기 인형』은 가장 많이 공연되는 발레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연주되지는 않지만, 그의 오페라 『오이겐 오네긴』, 『카드놀이 여인』(또는 『스페이드의 여왕』, Pique Dame)도 서양의 오페라 극장에서는 고정적인 레퍼토리이다. 또한 현악4중주 1번에 나오는 『안단테 칸타빌레』나 피아노를 위한 성격소곡 『사계』도 애청되는 음악에 속한다. 감정에 섬세하게 말하는 그의 음악적 성향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 성향과 매우 가깝다.
그의 대중성은 그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부정적인 요인이 되는 일이 많다. 그의 음악이 가진 센티멘탈한 면들과 듣기 좋게 매끄러운 점들이 대중적일 수 있는 반면에, 생각이 없고 감정만 앞선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지녔던 사람이다. 그는 작곡한 곡이 맘에 들지 않을 경우 아무리 긴 작품이라고 폐기해 버렸다. 그런 식으로 그는 두 개의 오페라를 버렸다. 그리고 어떤 작품들은 여러 번 개작하였다. 단지 그의 성격적 측면이 센티멘탈한 것과 잘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리적.내적 갈등을 예민하게 느끼며 사는 일생을 보냈는데, 심하게는 절망의 폭발이 그대로 음악화되기도 한다. 절망의 폭발이 반영된 음악은 매끄럽지 않고 생경하다.
그는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곤 했지만, 이 장르가 기악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고 판단하고 오페라 작품들을 썼다. 그러니까 그가 음악을 통해 대중에 도달하고 싶은 것은 그의 의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러시아 민요를 자신의 작품에 많이 삽입하고 그 자신 대단히 애국적인 사람이었으나, 그는 러시아적인 음악을 주장하고 그런 방면으로 작업한 5인조 작곡가들과는 다르게 서유럽적이라는 평판을 받는다. 그는 5인조의 음악에 대해 배타적이 아니었다. 단지 5인조 방식이 자신의 음악 방식이 아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슷하게 당시 유럽의 지도적 음악가였던 바그너와 브람스의 음악을 인정하였지만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가로는 모차르트, 비제, 베토벤과 같은 사람이었다. 또한 동시대의 사람으로는 드보르샥, 그리그 등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과 다른 성향의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이 전혀 없지 않다. 베를리오즈로부터는 "고정상념"을, 바그너로부터는 악기편성법을, 슈만으로부터는 성격소곡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