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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페리 [(Peri, Jac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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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페리, 야코포(Peri, Jacopo, 1561-1633)


- 1561년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에서 출생.

- 피렌체에서 말베치(C. Malvezzi)와 공부.

- 1570년대 말부터 피렌체의 여러 성당과 메디치 궁정에서 가수 겸 오르가니스트로 활동.

- 1580년대 바르디(Giovanni de'Bardi) 백작의 카메라타(Camerata)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

- 1590년대 카메라타 활동 중단 이후 코르시(J. Corsi)와 교류.

- 1598년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Dafne) 완성(코르시와 합작).

- 1600년 현존하는 최초의 오페라 ≪에우리디체≫(Euridice) 완성.

- 만투아의 페르디난도 곤차가(Ferdinando Gonzaga) 공작과 교류.

- 말년에 갈리아노(M. d. Galliano), 대본가 살바도리(A. Salvatori) 등과 협력하여 다수의 극음악 완성. 대표작은 ≪메도로와 안젤리카의 결혼≫(Lo sposalizio di Medoro et Angelica)과 ≪꽃≫(La Flora).

- 1633년 사망.


피렌체의 귀족 가문 출신인 페리는 17세기 초 작곡가 겸 성악가와 연주가로 활동하며 음악혁명을 주도한 혁신적인 음악가 중 한 명이다. 모노디와 극장양식의 레치타티보를 발전시켰으며 20여 편의 극음악을 완성하였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오페라 ≪다프네≫와 ≪에우리디체≫이다. 페리의 자질과 역량은 카치니(G. R. Caccini)를 위시한 동시대의 다른 진보적 작곡가들의 그것과 확연히 구별된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일차적으로 뛰어난 비르투오소 성악가였고 감미로운 선율과 화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주로 완성한 반면에 페리는 16세기 다성음악 기법을 철저히 연마한 작곡가로서 르네상스의 마드리갈 전통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페리의 보수적인 특성은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17세기초 모노디 작곡가들 중에서 페트라르카(F. Petrarca)의 시에 음악을 붙인 유일한 작곡가였다. 페리는 옛 것과 새 것의 절묘한 조화를 기반으로 17세기 모노디 음악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페리는 말베치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말베치는 16세기말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했던 다성음악 작곡가로서 페리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1586년 메디치 궁정에서 일을 시작한 말베치에게 지급된 월급 5스쿠디(scudi)에는 페리에 대한 보조금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583년 말베치가 스트리지오(A. Striggio)와 합작한 인테르메디오(막간극) ≪두 명의 페르시아인≫(Le due Persilie)의 작곡에 약관 21세의 페리가 참가했던 사실이 이러한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말베치가 1577년에 발표한 4성부 ≪리체르카레 제1권≫에는 페리가 작곡한 유일한 기악곡인 리체르카레가 포함되어 있으며 6년 뒤인 1583년에 출판한 ≪마드리갈 제1권≫에는 페리의 5성부 마드리갈 <사랑하는 나의 연인>(Caro dolce ben mio)이 수록되어 있다. <사랑하는 나의 연인>은 페리가 남긴 유일한 다성부 마드리갈이다. 이 두 작품은 각각 15세와 21세에 작곡된 습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의 전통적인 작곡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후 페리는 오페라를 위시한 극음악과 모노디 양식의 작곡에 주력한다.

페리의 『다프네』(1598)는 새로 고안된 레치타티보 양식으로 쓰인 최초의 오페라이다. 대본은 리누치니(O. Rinuccini)가 완성하였으며 페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코르시(J. Corsi)도 작곡에 가담하였다. 이 작품은 1594년부터 작곡되기 시작하여 1598년 사육제 기간에 코르시의 저택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졌으며 1599년, 1600년, 1604년 연속해서 공연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현재 대본은 1600년과 1604년에 사용된 출판본이 남아 있으나 악보는 피렌체에서 발견된 두 개의 필사본(I-Fn과 B-Bc)에 남아 있는 여섯 장면이 전부이다. 여섯 곡 중에서 두 곡은 코르시가 작곡한 것이며 한 곡만 레치타티보 양식이고 나머지 다섯 곡은 유절형식의 노래이다. 장식음은 전혀 기보되지 않았으며 불협화음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에 사용된 프롤로그는 다음 작품인 ≪에우리디체≫의 프롤로그에 다시 사용되었다.

≪에우리디체≫는 대본가 리누치니와 합작한 두 번째 작품으로 현재 전 악보가 남아 있는 최초의 오페라이다. 전작인 ≪다프네≫보다 훨씬 길고 예술성도 한층 뛰어나다.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끝에 유절형식의 독창에 합창이 곁들여지면서 앞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시 한 번 설명한다. 이 작품은 10월 6일 마리아 메디치(Maria de' Medici)와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결혼 축하 음악으로 무대에 올려졌으며 이듬해 2월 피렌체의 마레스코티(G. Marescotti)에 의해 악보로 출판되었다. 페리는 이 출판 악보를 1601년 2월 6일 마리아 메디치 여왕에게 헌정하였다. 초연은 피티 궁정(Palazzo Pitti)의 작은 방에서 약 200여명의 청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카발리에리(E. d. Cavalieri)가 초연 감독을 맡았으며 페리도 오르페오 역할로 참여하였다. 또한 페리가 전 곡을 완성하였지만 초연 시 카치니의 음악이 일부 삽입되었는데, 이는 카치니가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페리의 음악을 부르는 것에 완강히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카치니는 서둘러 ≪에우리디체≫를 완성하여 1600년 12월 페리보다 두 달 먼저 악보를 출판하였지만 공연은 2년 뒤인 1602년 12월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란은 바로크 초기 최대 발명품인 레치타티보 양식을 누가 먼저 고안했는가에 대한 공로를 독차지하려는 치열한 경쟁관계에서 발생한 것으로 카치니, 페리, 카발리에리는 서로가 최초의 발명자임을 주장하였다.

이후 페리는 만토바의 페르디난도 곤차가 공작과 친분을 쌓으며 활동 영역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몬테베르디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만토바에서 페리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1608년 결혼축하음악을 위촉받고 ≪펠레우스와 테티데의 결혼≫(Le nozze di Peleo e Tetide, 치니[F. Cini]의 대본)의 작곡에 착수하였으나 공연은 무산되었고 작품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대신 몬테베르디의 ≪아리안나≫(L' Arianna, 1608)가 공연되었다). 1620년에는 1611년 완성작인 『아도니스』(Adone, 치코니니[J. Cicognini]의 대본)를 공연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무산되었다. 말년에 페리는 갈리아노와 대본가 살바도리 등과 협력하여 ≪메도로와 안젤리카의 결혼≫(Lo sposalizio di Medoro et Angelica)과 ≪꽃≫(La Flora)을 완성하였다.

페리는 두 권의 노래 모음집을 출판하였는데, 두 권 모두 제목은 ≪다양한 음악≫(Le varie musiche)이었다. 첫 번째 곡집은 1609년 출판되었는데 여기에는 4곡의 소네트, 9곡의 마드리갈, 4곡의 아리아, 1곡의 유절 변주곡 등 총 18곡이 수록되었다. 이 곡들은 독창, 2중창, 3중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속저음(Basso continuo)이 달려 있다. 가사는 리누치니, 페트라르카, 키아브레라(G. Chiabrera), 구아리니(B. Guarini), 스트리지오(A. Striggio), 치니, 부오나로티(M. Buonarroti) 등의 시를 이용하였다. 동시대 모노디 작곡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에 음악(모노디)을 붙일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페리는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리노(G. Marino)의 시는 이용하지 않았다. 4곡의 소네트와 6곡의 독창 마드리갈에는 낭송양식과 좀 더 서정적인 선율이 잘 융화되어 있다. 나머지 3곡의 2중창과 3중창 마드리갈에는 모방기법이 나타나며 하나의 성부가 독창 성부로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 4곡의 아리아는 모두 3박자로 쓰였으며 동일한 선율과 리듬 패턴이 자주 반복되어 나타난다. 1619년 출판된 ≪다양한 음악≫ 제2권에는 제1권에 수록되었던 작품 중에서 2곡이 빠진 대신 7곡의 유절형식 아리아가 첨가되어 총 23곡이 수록되었다.

서양음악사에서 페리는 종종 카치니와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17세기초 피렌체에서 활동하면서 당시의 새로운 음악을 확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작곡가의 음악적 성향은 뚜렷이 구별된다. 카치니는 성악가로서 그리고 성악 지도자로서 새로운 창법과 기교를 개발하는데 주력하였고 또한 이러한 점이 우리가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한편 페리는 좀 더 포괄적이고 종합예술적인 작품을 완성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차이점은 페리가 20여 편의 극음악을 남긴 데 비해 카치니는 단 2편만 완성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카터(T. Carter)는 페리를 르네상스의 로레(C. d. Rore)에 비유하였다. 로레가 이탈리아 마드리갈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처럼 페리도 모노디의 예술적 깊이를 고취시키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적 성숙미 때문에 페리의 음악에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Bianconi, Lorenzo. Music in the Seventeenth Century. Translated by David Brya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Brown, H. M. “How Opera Began: an Introduction to Jacopo Peri’s Euridice (1600).” The Late Italian Renaissance, 1525–1630.

Edited by E. Cochrane, New York and London, 1970, pp. 401–443.

Carter, Tim. “Jacopo Peri (1561–1633): Aspects of his Life and Works.” Proceedings of Royal Musical Association CVI (1978–1979), pp. 50–62.

Porter, William. “Jacopo Peri.”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Edited by Stanley Sadie, London: Macmillan Publishing, 2001.

Sonneck, O. G. “‘Dafne’, the First Opera: a Chronological Study.” Sammelbände der Internationalen Musik-Gesellschaft XV (1913–1914), pp. 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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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linson, G. A. Rinuccini, Peri, Monteverdi, and the Humanist Heritage of Opera. Ph. D. dissertation, U. of California at Berkeley, 1979.


등록일자: 2010.7.31

[변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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