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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요한네스 [Brahms, Joha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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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호성

저자: 차호성

등록일자 : 초기자료


브람스, 요한네스 [Brahms, Joha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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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네스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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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자필 사인

 


낭만주의시대의 중기 이후에 절대음악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요하네스 브람스는 183357일 독일의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요한 야콥 브람스는 함부르크 시립극장의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요하네스는 어려서부터 그의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의 나이 10살 때 정식으로 코셀이라는 선생에게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서 12살 때부터 마르크스젠(E. Marxsen)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사사하였다. 그 후 그의 나이 15살이 되던 1848년에 독주회를 통하여 브람스는 피아니스트로서 음악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 당시 그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관계로 브람스는 생계를 돕기 위해 술집 같은 곳에서 오락음악을 연주하기도 하였지만, 1849년 두 번째 독주회 이후부터 편곡과 작곡으로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낭만주의 시대의 많은 문학작품과도 접하게 되었다. 브람스의 음악에서 첫 번째의 큰 전환기는 1853년에 있었던 연주여행을 하면서 맞게 되었다. 그는 이 연주여행 도중 5월에 하노버에서 요셉 요하임(Joseph Joachim)과 친분을 갖게 되었고, 같은 해 9월에 뒤셀도르프에서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과 그의 부인인 클라라(Clara Schumann)를 알게 되었다. 슈만 부부는 이후부터 브람스의 든든한 후원자들이 되었다. 슈만은 185310월에 발간된 "음악신보"에서 "새로운 길"이라는 글을 통해 브람스의 뛰어난 음악성을 세상에 소개하였으며, 그의 부인 클라라는 그 후로 브람스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회를 통하여 소개하였다. 그리고 브람스는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Op. 1Op. 5를 작곡하고 출판까지 하였다. 1854년 초에 슈만이 자살을 기도한 후로 브람스는 클라라를 보살피며 1857년까지 뒤셀도르프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이어서 함부르크로 돌아가서 함부르크와 데트몰트를 오가며 데트몰트 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브람스가 두 번째로 가진 커다란 음악적 전환기는 그가 1862년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연주여행을 떠나면서부터이다. 같은 해에 그는 함부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초빙되기도 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863년에는 빈 징아카데미의 지휘자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1868년까지 5년간 브람스는 빈과 함부르크를 오가며 창작활동을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으로 "독일 진혼곡"(Ein deutsches Requiem, Op. 45)이 있는데, 이 작품은 수년간에 걸쳐 브람스가 완성하였으며, 18684월 이 작품이 빈에서 초연된 후 그의 명성은 드높아졌다. "독일 진혼곡"의 성공 이후 빈에 거주지를 정한 브람스는 "헝가리 무곡"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정열적인 창작활동을 하며 작곡가로서 그리고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브람스의 작품활동 기간 가운데 전성기로 볼 수 있는 시기는 그가 빈에서 살고 있던 1876년부터 1890년경이며 이 시기에 그는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스위스 등 유럽 전역을 다니며 연주하였다. 연주여행과 더불어 그는 4개의 교향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Op. 78, 피아노 협주곡 내림나장조 그리고 현악오중주 Op. 88 등을 작곡하였다. 브람스의 음악이 전성기에 이르자 1870년대 중반부터 그의 음악세계를 따르는 음악가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게 되었고, 이들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추종자들과 음악적인 사고에서 대립하는 상황까지도 다다르게 되었다. 바그너의 음악을 따르던 음악가들로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등이었으며 특히 이들 가운데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은 브람스의 음악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브람스의 음악이 인간적이고 전통적이었다고 본다면 브루크너의 음악은 종교적인 성향이 다분한 작품을 보이고 있었다. 슈만이나 브람스가 추구하던 절대음악적인 입장을 옹호하고 나섰던 에두아르드 한스릭(Eduard Hanslick)과 같은 비평가는 형식미를 갖춘 절대음악을 주장하며 내용미로서 표제음악을 내세운 리스트, 바그너, 브루크너 등의 음악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바그너나 브루크너의 음악세계를 옹호하고 나선 학자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우구스트 암브로스(August Ambros)가 대표적이었다. 이 같이 당시의 브람스의 음악은 음악사의 흐름에 있어서 음악적 사고의 지주가 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브람스는 1891년 이후부터 1896년경까지 새로운 작품을 작곡하여 발표하기보다는 이전에 작곡했던 작품들을 수정하는 작업을 주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유로 학자들은 말년에 그의 창작능력이 감퇴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2년에 브람스는 피아노를 위한 작품 Op. 116부터 Op. 119까지를 작곡하여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각각 몇 개의 소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깊은 음악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1895년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화려하고 의미 깊은 해이었다. 이 해에는 빈에서 브람스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브람스는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예술과 과학에 대한 훈장'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18965월 초 브람스는 약해진 건강으로 인하여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때마침 클라라 슈만도 죽음에 임박하게 되자 그에 따른 감정에서 "성서에 의한 4 개의 엄숙한 노래 Op. 121"을 작곡하게 된다. 이 작품이 완성된 며칠 후인 520일 클라라 슈만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브람스도 같은 해 가을부터 간암으로 투병하기 시작하였으며, 병이 심해지기 직전인 봄에 11곡의 오르간을 위한 코랄 전주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가운데 "오 세상이여, 나는 너를 작별해야만 해(O, Welt, ich muss dich lassen)"라는 작품이 그가 작곡한 최후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 후 브람스는 계속해서 병석에 있다가 189743일 오전 830분경 빈에서 6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유해는 빈 중앙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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