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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케루비니 [Cherubini, Lui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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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루비니(Luigi Cherubini, 이름 전체: Maria Luigi Carlo Zenobio Salvatore Cherubini. 피렌체 1760. 9.14., 빠리 184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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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루비니는 12남매 중 10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처음에 오케스트라의 쳄발로 연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펠리체 부자(부:Bartolomeo Felici, 자: Alessandro)에게 대위법을 배웠다. 그 후 토스카나의 대공(후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은 그를 베니스로 보내 사르티(G. Sarti)에게 팔레스트리나 식의 대위법을 배우게 했다. 그는 스승 사르티의 오페라를 위해 작은 규모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쓰기 시작하며, 자신의 미사와 오라토리오도 작곡한다. 그러니까 그는 처음에 단지 교회음악만을 작곡했다. 하지만 1780년 이후부터는 이태리의 대도시(피렌체, 리보르노, 베니스, 만투아)를 위해 오페라를 계속 작곡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1784년 영국에 초청받아 거기에서 두 개의 오페라를 작곡하면 헨델의 작품을 알게 된다. 1786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비옷티의 권유에 의해 빠리로 이주하여 주로 비옷티가 운영하는 극장을 위해 오페라를 썼다. 그는 다른 한편으로 그랑 오페라 극장을 위한 오페라 『데모퐁』(Démophon1788)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오페라는 글룩의 영향을 받아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폭넓게 활용하는 새로운 양식을 갖게된다. 그리고 끈질긴 모티브적 작업이 자주 나타난다. 그의 오페라 음악은 언어와 음악의 밀접한 관련성 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는 극적인 면을 중요시한 것과도 관계가 깊다. 이런 성향은 글룩의 오페라로 영향을 받은바 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프랑스 오페라의 기초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오페라가 가진 혁명적 소재와 오케스트라의 중요성 때문에 나온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폴레옹은 새로운 극적 양식보다는 전통적 이태리 오페라를 더 선호하여 그는 그랑 오페라 극장을 위해서는 작품을 쓸 수 없게 된다. 그는 다른 극장을 위해  『라도이스카』(Lodoiska 1791), 『엘리자』(Eliza 1794), 『메데아』(Medea 1797), 『두 여행』(Les deux Journées 1800, 독일어 제목: Der Wasserträger '물장사')을 작곡하는데, 맨 마지막 것은 이른바 "공포의 오페라"에 속하는 것으로 정치적 해방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작품은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율성이 강한 그의 오페라는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비극 오페라 『아나크레옹』(Anacréon 1803)은 식자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지만 ,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795년 새로 이제 막 설립된 빠리 음악원 "감독"(inspecteur) 직에 취임한다. 그 때 다른 감독들은 그레트리, 메윌, 고섹 레쉬외르도 있었다. 하지만 감독직은 그리 중요한 직책이 아니어서 빠리에서의 그의 위치는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1805 그는 비엔나의 초청을 받고 거기로 가서 『라도이스카』를 초연하고, 이어서 『파니스카』(Faniska 1806)를 무대에 올린다. 비엔나의 하이든과 베토벤은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베토벤은 그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라고 말했다. 그는 하이든에게 빠리 음악원의 명예 금메달을 수여하였다. 비엔나에서 그는 나폴레옹과 만나게 된다. 황제는 그에게 궁정음악회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그와 황제의 관계는 개선되지 못한다. 그는 빠리로 되돌아가서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화초를 가꾸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소일했다. 1808년 한 교회의 봉헌을 위해 미사 F 장조를 쓰게 된다. 1813년에는 오페라 『아벵세라쥐』(Les Abencérages)를 쓴다. 이 음악은 스페인의 알함브라를 배경으로 하는 낭만적 오페라이다. 하지만 다채로운 음악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 이후 그는 오페라를 멀리하고 교회음악에 더 정진하였다.

1808 이후 미사 네 곡과 두 개의 레퀴엠(d 단조와 c 단조)을 쓴다. 1815년  런던에 여행한다.  그는 거기에서 D장조 심포니와 한 개의 서곡, 그리고 한 개의 4성부 찬송가를 작곡한다. 그는 빠리에 돌아와 음악원의 교수가 되고 1822년에 교장이 되어 이 직책을 80이 넘은  나이인 1842년까지, 즉 그가 죽기 직전까지 오래동안 유지한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오베르(D.F.E. Auber)와 알레비(J.Fr.E. Halévy)와 같은 작곡가가 있다. 그는 후학들을 위해 대위법 책을 썼다(Cours de contrepoint 1835)." 1833년 오페라 『알리 바바』(Ali Baba)를 썼는데, 이는 전에 썼던 것을 다시 고쳐 쓴 것이다. 그는 베토벤과 같은 대음악가로부터 큰 평판을 받았으나 연주되는 일은 흔치 않은 작곡가이다. 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서곡의 억센 특징의 테마들이 케루비니나 기타 혁명의 오페라 작곡가들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케루비니의 교회음악도 베토벤의 『장엄미사』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간주된다. 케루비니는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그랑 오페라 장르에서 모델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케루비니의 작품 중 그래도 아직 연주되는 것은 서곡, 사중주곡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국가적 배경이 불투명한 것에도 비대중적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즉 그는 이태리에서 탄생하여 프랑스에서 활약하였으나 독일음악과 정신적으로 가까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적 국적이 불투명하기로는 모차르트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바로 같은 이유로 어디서나 통하는 음악가라고 얘기된다.

참고문헌: S. Saak: Studien zur Instrumentalmusik Cherubinis,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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