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타(이.camerata 뜻:"동지들")
카메라타는 1580-89년 사이에 플로렌스에서 있었던 모임으로 고대 그리스의 대화모임인 <아카데미>를 모방한 것이다. 이들의 가장 큰 업적은 오페라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의 비극을 재현시키려고 했는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오페라였다. 카메라타의 중심인물은 바르디(Giovanni de' Bardi) 백작이었으며, 음악가, 학자, 시인, 후원자로 구성되었다. 음악가로는 바르디, 카발리에리(Emilio de' Cavalieri), 갈릴레이(Vinzenzo Galilei), 스트롯찌(Pietro Strozzi), 카치니(Giulio Caccini)가, 페리(Jacopo Peri), 학자로는 메이(Girolamo Mei), 시인으로는 리누치니(Ottavio Rinuccini), 키아브레아(Gabrielo Chiabrea), 후원자로는 코르시(Jacopo Corsi)가 있었다.
카메라타 그룹에 앞서간 음악가들 중에는 그리스 음악과 관련한 저술을 남겨 고대에 관한 관심을 부추겼다. 글라레안(Glarean)의 『도데카코르돈』(Dodekachordon, 1547), 빈첸티노(Nicola Vicentino)의 『새로운 음악실제에 맞춘 고대 음악』(L'antica musica ridotta alla moderna pratica, 1557), 짜를리노의 『음악의 가르침』(Le Istitutioni Harmoniche, 1558)이 그러한 것들이다. 특히 짜를리노의 글은 카메라타의 음악적 관심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플루타크의 말을 빌어- 음악과 가사의 통일성이 음악가와 시인이 하나일 때 나오고, 음악이 가사에 복종해야 놀라운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하였다. 카메라타 그룹의 중심 이론가이자 짜를리노의 제자였던 갈릴레이는 이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갈렐레이의 『고대 음악과 새 음악의 대화』(1581)는 카메라타 회원들이 무엇을 했는지 잘 보여주는 문서이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고대의 단성부 음악을 부활시키고자 했는데, 이는 노래, 가사, 감정의 표현을 통합시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옛 음악과 같은 것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당대의 다성음악을 부정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다성음악을 옹호했던 스승 짜를리노와 새로운 음악을 옹호한 제자 갈릴레이 간에 논쟁을 불러왔다(1588-89). 갈릴레이의 새로운 음악 작품이었던 두 개의 『에레미야의 탄식』과 한 개의『우골리노의 탄식』(단테의 『신곡』 중 일부를 가사로 사용함)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지 않는다. 바르디와 스트롯지의 음악은 여러 성부들이 같은 리듬이라는 것 외에는 옛 양식으로 된 음악이었다. 단지 카치니의 『신음악』(Le nuove musiche, 1601)에 수록된 곡창곡들은 모노디 음악으로서 카메라타가 추구하던 바를 현실화한 것이었다. 카치니의 음악은 1580년대에 카메라타 회원들 앞에서 연주되었던 것이었다. 카치니는 그의 글에서 말(언어)을 산산조각 나게하는 음악에 대한 혐오를 카메라타 회원들과의 대화에서 배웠고, 말이 지배하여 영혼에 놀라운 효과를 나타내는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였다.
카발리에리(E. de' Cavalieri)는 바르디 동아리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바르디가 1592년 로마로 옮긴 이후 카메라타를 이끌던 코르시(J. Corsi)와 함께 일했다. 그는 1590-95년 플로렌스에서 세개의 목가적 이야기(favola pastorale)를 작곡했다. 이러한 음악은 노래, 무용, 레치타티보를 요구하는 극적인 음악을 가능하게 했다. 1598년 카메라타 그룹은 최초의 오페라 『라 다프네』(La Dafne)를 세상에 내어놓는다(악보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음). 음악은 페리와 코르시가, 대본은 리누치니가 썼다. 이 작품은 1594-1599년 여러 번의 공연을 거친 이후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렇게 카메라타 그룹은 오페라를 창조한 그룹으로 음악사에 기억된다.
등록일자: 2005-01-27
홍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