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음악
<대략적 설명>
중세를 구분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①476(게르만족에 의한 로마제국의 해체)-1300(새로운 국가들의 탄생).
②8, 9세기(캐롤링 왕조의 시작)-14세기(새로운 국가들의 탄생).
9-13세기의 안정기에는 교회음악과 나란히 세속음악도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부흥운동도 일어난다. 이 운동은 샤를르 마뉴 대제(742-814)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중세의 가장 강력한 구심점이었다. 중세 초기의 유럽음악으로는 교회음악만이 남아있다. 세속음악에 대한 기록은 중세 후기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기록된 초기의 다성음악(9-12세기)도 모두 교회음악이다. 이 음악은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이름 아래 정비되었는데, 이는 지중해 지역 성가를 기본으로 하여 온 유럽의 성가들이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성부 그레고리오 성가는 새롭게 가사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더 풍요로워졌으며(트로푸스, 세쿠엔치아), 그 다음에는 한 성부 뿐만 아니라 여러 성부를 동시에 부르는 원시적 형태의 다성음악으로 발전된다(오르가눔).
9세기경부터는 음높이만을 표시한 기보법이 있었고, 12세기경에 리듬을 기록할 수 있는 기보법이 나타난다. 따라서 12세기 이전 음악의 리듬 해석에 관해서는 -그레고리오 성가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다성음악의 본격적인 발전에 따라 <모드 리듬>이라는 리듬 체계도 정립된다. 모드 리듬은 6 종류의 엄격한 정형으로 되어 있고, 선율마다 그 중 하나를 적용하여 반복시키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음악에서는 리듬형이 중간중간 변형되는 정도의 융통성은 보인다. 노트르담 오르가눔의 상성부들은 정형리듬의 계속적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고, 클라우술라 부분에서는 테노르 성부도 정형의 리듬을 갖고 있다. 이러한 리듬이 허물어지는 것은 13세기 후반의 악보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즉 아르스 안티쿠아의 작곡가들인 프랑코 폰 쾰른 그리고 페트루스 데 크루체의 멘수라 악보의 발달이 리듬을 자유롭게 기록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아르스 노바(13세기), 아르스 안티쿠아(14세기)는 음악이 중세를 탈피하는 시작하는, 중세의 마지막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2세기 중엽-13세기 중엽의 노트르담 시대는 다성음악 역사의 첫 절정기이며, 그 대표적 작곡가는 레오냉(Leonin, 1180경)과 페로탱(Perotin 1200경)이었다. 레오냉은 2성부 구조의 오르가눔을, 페로탱은 3 또는 4성부 구조의 오르가눔을 작곡했는데 그 규모가 래오냉의 것보다 훨씬 컸다.
대표적인 다성음악 장르로는 노트르담 오르가눔, 콘둑투스, 모테트가 있다. 콘둑투스는 1-3성부의 단순한 비전례적 종교음악이며, 모테트와는 달리 테노르 성부를 포함한 모든 성부가 새로 창작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모테트는 13세기에 오르가눔의 클라우술라 부분이 독립되어 상성부에 가사가 붙여지면서 모테트로 발전된다. 모테트란 가사가 새로이 붙여진 상성부를 일컫던 모테투스란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의 성부에 가사가 붙여 지던 것이 점차 2-3개 성부에 붙여졌는데, 서로 다른 가사들을 동시에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모테트는 13-14세기에 가장 중요한 음악유형이 된다.
중세의 세속음악은 9세기경부터 차차 봉건제도의 실행으로 많은 지방귀족들과 기사들을 탄생시키면서 꽃피기 시작한다. 세속음악도 그들에 의해 11세기 경부터 단성음악으로 발전되기 시작한다 (트루바두르, 트루베르). 세속음악에서 다성음악 형태는 13세기에야 처음으로 나타난다.
중세의 이태리는 수많은 소도시국가들의 집합체로서 획일적인 교회중심적 문화의 기반이 미약했는데, 이런 배경이 뒤늦게나마 자유롭고 생동감 있는 세속음악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14세기: 트레첸토 음악).
등록일자: 2005-01-11
김미옥/홍정수
<자세한 설명>
1. 시대적 배경
중세는 서로마제국이 망하는 5세기(476년)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15세기까지 거의 일천년에 걸쳐 있다. 게르만족의 이동에 따른 전쟁의 ‘암흑시대’로 출발하나, 게르만족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프랑크족이 세운 프랑크왕국(지금의 프랑스)을 중심으로 8-9세기경(카롤링[Caroling] 왕조 시대: 751-888)부터 대체로 안정을 이루어 서구 문화 성장의 터전이 마련된다.
그와 같은 안정기를 주도한 카롤링 왕조는 7세기에 급속도로 유럽에 전파되던 이슬람 세력을 저지(732)한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궁정대신)이 건국 당시부터 자리를 지켜온 메로빙 왕조(Meroving: 486-751)로부터 실권을 쟁취함으로써 그의 아들인 페팽(Pepin; 또는 Pipin, 751-768 제위)에서부터 시작된다. 페팽은 정복 사업과 함께 로마에서 라벤나(Ravenna)에 이르는 지역을 교황에게 헌납하여 독립국가로서의 교황령국가를 창건시키는데도 기여하였다(756).
중세 전체를 통해 가장 큰 업적을 남긴 통치자로 불리는 카롤링 왕조의 샤를르마뉴 대제는 페팽의 아들로서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하여 기독교를 더욱 폭넓게 전파시킴으로써 교황과의 공고한 유대관계를 지속하였다. 또한 당시 봉건제도의 모양새를 갖추어 가고 있던 지방행정에는 중앙에서 파견한 순찰사(라.Missi dominici)의 감독을 받게 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정부를 수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학문과 교육의 부흥사업도 일으키고자 교사들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불러들여 수도원 학교와 왕립학교를 세우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들 학교에서는 로마 시대 이래의 7교양학과(라.Artes liverales)인 문학적 3학과(문법, 수사학, 논리학)와 수학적 4학과(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를 가르쳤다. 교육수준은 원초적이었으나, 라틴어의 부활은 이후 학문 부흥에 중요한 바탕이 된다. 왕립학교(Aix-la-Chapelle에 위치)의 책임자로 임명된 영국 출신의 알퀸(Alcuin 또는 Alcuinus, 735경-804: 신학자・저자・시인)은 음악이론에 관한 저작도 남긴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은 없다. 문화사에서는 이 당시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기독교 중심의 사회구조와 문화는 음악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중요한 음악가들은 거의 사제였다. 이들은 성당과 수천 개의 수도원들에서의 매우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던 예배 음악을 담당했고, 수도원의 부속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체계화시키거나 필사본을 제작하였으며, 소년들에게 교회음악 교육을 시켰다.
이후 10-13세기에 걸쳐서는 가톨릭교회의 위신과 교황권의 권위가 오히려 왕권보다 더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기독교 문화도 절정에 달한다. 이 때 정치적 혼란기에 접어든 프랑크 왕국은 843년 세 지역(대략 현재의 프랑스・이태리・독일에 해당)으로 분열되었다. 11세기경에는 봉건제도에 의한 지방분권화가 유럽 전체에 확립되었다. 교회 중심의 사회 체제가 순탄하게 유지되지 않았지만, 강력하고 유능한 교황들이 배출되어 세속군주들과의 분쟁에 성공적으로 대처한다.
교황권의 권위는 11-13세기(1096-1270)에 걸쳐 십자군운동을 주도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슬람교의 지배지역 중 일부가 함락되면서 오히려 그들의 이질적인 문화가 기독교 사회에 유입되기도 했다. 중세의 세속문화는 이 시기에 봉건제후와 기사들에 의해 꽃피기 시작한다. 교회는 증대하는 이단과 맞서기 위해 13세기에는 종교재판소라를 만든다. 여기에 회부된 사람이 이단을 고백하고 고해하지 않으면 고문을 받게 되고, 고문에도 말을 듣지 않는 경우에는 세속당국에 넘겨져서 화형을 당했다.
십자군운동은 또한, 인구의 자연증가와 자유민의 증가와 함께, 동방과의 통상과 공업을 가속화시켜 도시들을 급성장시키는데도 촉진제 역할을 했다. 도시민들은 하나의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게 되고, 조합(길드: Guild)들을 조성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고자 하였다. 13세기에 교회의 학교들은 자연스럽게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빠리 대학은 7교양학과 외에 전공 강의로서 신학, 의학, 그리고 법학 과목을 신설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학문적 부흥의 일환으로 스콜라 철학도 정립된다. 스콜라 철학을 대성시킨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경-1274)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의 『논리학』을 당시 새롭게 번역된 그리스 철학과 아라비아 과학에 적용하고 결과적으로는 이 전체를 기독교의 교리와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대학과 도시문화와의 발전은 합리주의의 태동을 가져온다.
십자군운동이 실패를 거듭하고 13세기 말에는 완전 실패로 돌아가자 결과적으로 교황권의 권위가 크게 쇠퇴한다. 교회의 농민에 대한 과도한 부과금과 세금도 불만의 불씨를 키웠다. 봉건 제후들의 십자군 참전은 그들의 영지관리를 소홀하게 하였고 경제력도 소모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들은 궁극적으로 봉건제도의 쇠퇴와 그에 따른 군주권의 강화를 가져온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의 군주들은 그밖에도 혼인정책 등을 통해 이미 왕령을 확장시켜온 터라 중앙집권적인 군주국가의 출현은 다시 가능하게 된다.
세속문화는 봉건제도하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이미 11세기경부터 시작된 바 있으나,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중앙집권체제를 이끄는 군주의 재출현하고, 독일과 이태리에서는 도시국가들의 부상하면서 세속문화는 더욱 성장한다. 중세 예술분야에서 가장 강하게 종교의 지배를 받았던 미술이나 조각에서조차 인간적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이 나타난다.
중앙집권적 군주의 출현, 교황권의 권위하락(‘바빌론 유수’), 가톨릭교회의 분열(1378-1417), 합리주의의 태동, 흑사병의 발발 등이 교회에 치명타를 안겨주게 됨으로써 결국 중세는 몰락한다.
2.중세 음악사 개요
중세의 시기 구분은 대체로 셋이나 넷으로 구분된다. 중세에 대한 다양한 시기 분류의 예(세기로 표시)
세계사에서의 분류의 경우는 대체로 봉건제도의 확립기인 11세기부터를 안정기로 본다. 4기로 되어 있는 세계사 분류는 안정기를 농촌경제에 기초한 전반기와 12세기 중반부터의 도시문화 시기로 다시 세분된다.
건축사에서는 9세기부터를 중기(안정기)로 본다. 이는 샤를르마뉴 대제 시대의 부흥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음악에서도 이 부흥기에 교회음악과 음악이론이 정비되기 시작한다. 음악사를 4기로 나눈 것은 세계사를 4기로 나눈 것과 같은 맥락이다. 3기로 분류되는 음악사는 도시문화 시기부터를 중기로 본 것이다.
중세음악은 근본적으로 성악이었고, 교회음악이 우선적으로 발전된다. 중세음악의 발전을 시기별로 나누어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중세음악 발전의 시기별 분류
각 시기별 음악의 발전을 세부적으로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1기
이 시기의 단성성가는 - 8~9세기부터 확립되기 시작하는 - 그레고리오 성가 이전의 것들이다. 기독교 허용 이전의 것(1-4세기 초)과 기독교가 허용 이후의 것(4-8세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4세기의 초대교회에서는 유대교에서 계승된 단순한 형태의 시편창(Psalmody)과 함께 찬가창(Hymnody)도 사용했음을 신약성서를 비롯한 몇몇 자료의 내용으로부터 짐작해 볼 수 있다. 시편창은 시편 가사를 거의 낭송식으로 부르는 것인 반면, 찬가창은 시편 외의 성서 가사나 새로 작시된 시를 노래 부르는 것으로서 상대적으로 더 음악적(세속적)일 수 있는 것인데, 이 시기의 자료는 시편창과 찬가창을 별로 구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4세기 경에 설립되는 수도원에서 시편창이 종교적인 노래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고 이후 교회들도 이를 따르면서, 시편창이 가톨릭 성가의 근본이 된다. 찬가창은 6세기부터 수도원의 기도회(성무일도)에서 허용된다. 즉, 찬가창은 원래 회중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기도회에서 사제들에 의해 불리는 노래로 전환된다. 가톨릭교회의 기도회에는 일부 시간대에만 받아들여진다.
5-8세기는 게르만족 이동에 따른 혼란기로서, 유럽 각지의 교회에서는 시편창 뿐만 아니라 찬가창도 지역의 민속적・종교적 특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발전된다. 적어도 6세기까지는 로마도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등과 마찬가지로 주교가 관할하는 큰 교구(Patriarch) 중의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서방의 대표적인 지방적 성가로는 로마 성가 외에, 밀라노의 암브로지오 성가(4세기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St. Ambrosio; 340경-397; 374-397 제위]를 상징), 프랑스의 갈리코 성가(Gallican Chant), 스페인의 모짜라비아 성가(Mozarabic Chant) 등이 있으며, 시리아 성가와 특히 비잔틴 성가 등의 동방 교회의 성가들도 이들 서방 교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전된다.
2. 제2기
1) 그레고리오 성가의 확립
그레고리오 성가는 미사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식에서 사용되는 모든 무반주 단성성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명칭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 제위)가 성가의 통일정책으로서 가창학교(라.Scola cantorum)를 세우고 성가를 여러 지역에 전파함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명칭의 주인공이 당시 성가의 확립 시기에 그레고리오 2세(715-731 제위)를 1세로 착각하여 바뀐 것이라는 견해가 강력히 제기되어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확립은 사실 로마가 아니고 카롤링 왕조 시기의 프랑크 왕국이 주도했다. 페팽과 샤를르마뉴가 영토확장정책을 기독교 포교정책과 동일시했고 교황권에 힘을 실어 주었다. 페팽은 이러한 맥락에서 가톨릭의 전례의식도 모든 지역에서 통일시키고자 하여, 그는 당시까지 전통적으로 형성되어왔던 프랑크 왕국 안의 갈리코 전례의식을 고사시키고 로마 의식으로 대치하도록 지시하였고, 이후 샤를르마뉴 대제도 부친의 정책을 이어 실천해나갔다(11세기경에 오늘날과 같은 미사 전례의식이 거의 정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목적으로 로마의 『미사 의전서』(Ordo romanus: 아직 음악기보는 되어 있지 않다)를 베끼는 과정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된다. 즉, 그 서문에 있는 “그레고리오가 성가를 작곡했다”는 문구를 프랑크 왕국의 학자들이 그레고리오 1세로 해석하여 그 이름이 성가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제기된 의문되었다. 왜냐하면 그레고리오 1세와 관련된 100통에 달하는 편지를 살펴보았을 때, 그가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제를 꾸짖었다는 기록이 음악과 관련된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 때문이다. 즉, 성가의 확립에 기여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주장이다(James McKinnon, "The Emergence of Gregorian Chant in the Carolingian Era", in Antiquity and the Middle Ages, p.106). 그리고 그와 같은 오류는 당시 프랑크 왕정학교를 이끌던 영국 출신의 학자인 알퀸에 의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그레고리오 1세가 2세기 전(597)에 영국에 기독교 전파에 힘써준 것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알퀸도 당연히 그 언급의 주인공을 그레고리오 1세로 착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 전례의식의 큰 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의식에 걸맞게 차차 확대됨에 따라 그 성가들도 변모하게 된다. 증가하는 성가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교회선법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체계에 맞지 않은 기존의 성가들은 부분적으로 수정이 되기도 했다. 또한 구전되던 성가들을 위해 음악기보법을 고안하고 여기에 맞추어 악보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갈리코 성가의 전통이 로마 성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현존하는 원초적 단계의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는 8세기 말 - 9세기 초의 것). 그 외에, 아직 이 시기까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던 동로마제국의 전례의식도 참조되었고, 알퀸 등을 통해 유입될 수 있었던 영국 성가의 영향도 근래에 제기된 바 있다.
이렇게 확립되어가는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해 로마는 옛 것을 고집했으며, 그 성가들이 기보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로마에서 구전으로 불리던 성가는 11세기에야 비로소 기보되기 시작하는데, 당시 그레고리오 성가와의 차이의 정도는 곡에 따라 다양하다. 이 성가들을 구별하기 위해 전자는 옛로마 성가(Old-Roman Chant)로도 불린다. 옛로마 성가는 그레고리오 성가 이전부터 불렸던 것으로 이 성가보다 더 오래된 특징을 보이는 동시에, 기보 시기는 훨씬 늦기 때문에 더 새로운 특징도 갖고 있다.
2) 그레고리오 성가의 수평적・수직적 확장
그레고리오 성가의 수평적・수직적 확장은 전례의식의 확대에 따른 화려한 음악의 필요성을 따른 결과이다.
수평적 확장은 기존 성가에 가사가 첨가되는 것으로 시작되나, 차차 선율 또는 가사와 선율이 함께 첨가된 것도 여기에 등장한다. 이 부분들은 사제들에 의해 불린 성가의 독창 부분에 국한되는데, 그 이유는 그런 첨가가 그들 자신의 창작이었고 또한 일반 신도들의 음악적 훈련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0-11세기경에 생 갈(St. Gall) 수도원(지금의 스위스 지역에 위치)과 남프랑스의 생 마르티알(St. Martial) 수도원(리모주[Limoges]에 위치)을 중심으로 그런 첨가들이 많은 기록된다(그러나 생 마르티알 수도원에서 그런 음악이 실제로 발전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 음악들은 12세기부터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개혁의 대상이 되기도 하나, 결과적으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수직적 확장은 다성음악으로의 발전을 말하는데, 이 발전은 서양음악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것이다. 다성음악의 최초 기록은 9세기경(프랑크 왕국)의 『무지카 엔키리아디스』(Musica enchiriadis)에서 원초적 형태라고 볼 수 있는 병행선율들의 진행(병행 오르가눔)으로 나타난다. 성가 선율에 제2의 새로운 선율선이 덧붙여진 것이다. 11세기의 이론서 『오르가눔 만들기』(Ad organum faciendum)에는 성부들이 독립적인 관계로 반진행도 되는 진행(자유 오르가눔)이 선보이며, 12세기부터는 차차 느린 하성부가 빠른 상성부를 지탱해주는 발전된 형태(멜리스마적 오르가눔)가 실제 필사본에 기록되기도 한다. 그 중심지로서 생 마르티알 수도원과 그 외에,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지방을 들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실제적 발전이 성가의 수평적 확장이 번성한 지역에서 역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3) 단성 세속노래들의 발전
기록된 최초의 중세 세속음악은 10세기경 소그룹의 떠돌이 하급 성직자(goliad)나 학생들이 불렀던 풍자적이고 반체제적인 라틴어 단성노래로 추정된다.
그러나 중세의 단성세속노래는 시인음악가였던 기사 또는 그 밖의 귀족들에 의해 11세기 경부터 꽃피기 시작한다(12세기 중반부터는 중세 프랑스 문학의 황금시대와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여 점차 시민 계급으로 퍼져간다). 기사들의 본분은 전투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식사 예절을 익히고 때로는 사냥이나 경기를 주최하며, 종교적 언어였던 라틴어 대신 자국어로 시를 짓고 여기에 선율을 붙이기도 했던 것이다. 기사도 정신은 이러한 시들을 통해 이상화되었다.
그 시와 노래들은 11세기 말경 남프랑스(루아르[Loire] 강 남쪽)의 시인음악가들인 트루바두르(troubadour)에 의해 시작되었다. 언어는 이 지방의 언어(Langue d'oc)로 되어 있다. 한 세기 정도 후 북프랑스의 시인음악가들인 트루베르(trouvère)에게 전수되고(언어는 Langue d'oil), 뒤이어 독일의 민네징거(Minnesinger)에게도 전파된다. 그들의 세속노래는 동시대의 종교적 노래와는 대조되는 것이지만, 선율적 형식적으로 서로 유사한 것도 많다. 가사의 주제는 주로 여성숭배적인 정신적 사랑이며, 그 밖에 도덕과 정치, 십자군과 영웅의 무훈에 관한 것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주제 아래, 지역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노래들이 세분화되어 발전된다. 대부분이 장절형식이나 세 부분(aab)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장절형식의 경우에는 특정한 세부적 형식(aabb... 등)이나 반복구(refrain)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트루베르의 음악에서는 다성부 노래로 발전되는 정형(프.formes fixes)의 유형들(롱도, 발라드, 비를레)과 단성 노래들이 삽입된 목가극(牧歌劇, pastourelle)의 등장도 주목할 만하다. 트루베르는 12세기에 영국에까지 세속노래들을 전파시키는데, 영국 가사의 노래는 소수에 불과하다(영국에서는 라틴 단성노래가 13세기까지 계속된다).
시인음악가들은 자신의 노래를 직접 노래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 노래를 주로 부르던 사람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던 직업적 예인들이었다. 즉, 종글뢰(프.jongleur: 마술사), 메네스트렐(프.ménestrel: 기능인), 가우클러(도.Gaukler: 유랑 광대), 그리고 슈필로이테(도.Spielleute: 유랑 예인) 등이다. 이들은 춤과 곡예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에도 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속단성음악 연주에서의 악기의 첨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많은 논란이 계속되어오고 있다).
3. 제3기
1) 다성부 교회음악의 절정기
중세 다성부 교회음악의 절정기는 빠리의 노트르담 악파와 13세기의 아르스 안티쿠아(라.Ars antiqua)로 대표된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아직 다성음악이 부재하거나 원초적인 단계로 나타난다. 단, 13세기 후반부터는 영국음악에 프랑스 양식이 접목되기도 한다.
9-10세기경부터 서서히 양식적인 발전을 이루어온 다성부 교회음악은 12세기 중엽-13세기 중엽에 레오냉(Leonin, 1180경-1201경 활동)과 페로탱(Perotin, 1190-1236경 활동)을 중심으로 한 빠리의 노트르담 악파에 이르러 대규모의 다성음악으로 발전한다. 레오냉은 2성부 구조의 멜리스마적 오르가눔을 썼지만, 페로탱은 3 -4성부 구조의 오르가눔으로 확대시킨다. 페로탱의 대표적인 다성음악 장르로는 노트르담 오르가눔(멜리스마적 오르가눔의 후기 발전 형태) 외에 콘둑투스(conductus)와 모테트(영.Motet, 라.motetus)도 있다. 콘둑투스는 전례용이 아닌 1-3성부의 단순한 종교음악으로서, 모든 성부가 새로 창작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모테트는 2성부의 구조로 출발하나 차차 3-4성부로 확대되고, 이 경우 상성부들에는 서로 다른 가사들을 동시에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성부들의 동시적・독립적 진행을 위해 필요한 리듬(모드리듬[반복적인 리듬 패턴]이 적용됨)과 그 기보법(모드리듬 기보법)도 고안되기 시작한다.
‘낡은 예술’이란 뜻의 아르스 안티쿠아라는 용어는 14세기 초의 프랑스에서 당대의 ‘새 예술’(라.Ars nova)과 그 이전 시대의 예술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그 구별은 원래 리듬기보법의 발전상태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13세기의 프랑스 음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폭넓게 쓰이며, 보통 노트르담 시대를 그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노트르담 시대 이후인 13세기 중엽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점은 노트르담 레퍼토리인 오르가눔, 콘둑투스, 모테트 중에서 모테트(2-4성부)가 가장 중요한 음악장르로 대두되고, 경직된 리듬패턴에서도 탈피하여 흐름이 유연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테트들은 종교적 내용의 라틴어 가사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프랑스어 가사도 붙여져 세속음악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량이나마 다성부 세속음악도 나타난다.
아르스 안티쿠아 모테트의 성부들은 각기 다른 가사를 갖는 경우가 많은데, 상성부가 모두 프랑스어로 되어 있기도 하다. 가사는 달라도 그것들이 내용적으로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모테트에서 기존 리듬패턴의 해체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의 새로운 기보법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 프랑코 폰 쾰른((Franco von Köln, 1260년경 활동)의 『멘수라 기보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페트루스 데 크루체(Petrus de Cruce, 1280년경 활동)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기보법으로도 표기가 불가능한 매우 빠른 상성부의 진행(프랑스 언어에 적합)을 새롭게 시도했는데, 이와 같은 진행에 대한 이론적 체계화는 14세기에야 체계화 된다.
노트르담 악파/아르스 안티쿠아의 음악과 그 이전 음악과의 비교는 종종 건축 양식에서의 로마네스크(영.Romanesque)와 초기 고딕 양식에 비유되기도 한다. 즉 농촌 경제에 기초를 두었던 장방형의 단순한 건축양식인 로마네스크가 그레고리오 성가와 초기의 다성부 교회음악에 해당된다면, 화려하게 장식된 대규모 성당건축양식인 고딕은 노트르담 악파의 다성부 음악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늘로 치솟은 첨탑이 암시하는 금욕적인 종교성, 이에 대비되는 화려하면서도 중후한 도시적인 외관, 스테인드글라스의 감각적인 색채감이 암시하는 세속성의 미묘한 조화는 중세 중후반의 프랑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회상을 대변하는 보편적 예술양식으로 보인다. 음악에서는 특히 아르스 안티쿠아의 모테트에서 유사한 양식적 특징이 드러난다(종교적・세속적 가사의 혼합, 라틴어와 자국어의 혼합 등).
2) 다성부 세속음악의 발전
중세의 다성부 세속음악은 13세기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처음 나타난다. 프랑스의 다성음악은 트루베르의 단성부 세속노래에서 발전했는데, 13세기까지의 다성부 세속음악은 최후의 트로베르로 알려져 있는 아당 드 라 알(Adam de la Halle, 1237경-1287)의 것만이 기록되어 있는 형편이다(16곡). 이 곡들은 콘둑투스와 유사한 단순한 리듬구조로 되어 있으며, 모두 정형(Formes fixes)을 이미 갖추고 있다.
아르스 안티쿠아 시대에는 영국에서도 다성부 세속음악이 기록되기 시작한다. 로타(Rota)와 론델루스(Rondellus)가 그것인데, 사실 구조상 순수 다성음악으로 보기는 어렵다. 로타는 돌림노래(Round)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부들이 같은 선율을 엇갈려 진행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론델루스는 몇 개의 악구가 성부들 간에 서로 교환되는 노래이다.
4. 제4기
14세기의 프랑스에서는 다성음악이 규모・길이가 확대된 형태로 발전하며, 세속노래가 양적으로 교회음악을 능가한다. 원초적 형태로 기보된 기악음악도 등장한다. 또한 프랑스 외에, 이태리와 영국에서도 독자적인 특징을 포함하고 있는 다성음악이 나타난다.
‘아르스 노바’란 용어는 어원적으로는 폴리포니의 발전과 발맞추어 복잡해진 리듬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기보법에서의 ‘새로운 기술’(3박자와 함께 2박자도 새로이 표기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하며, 이 새로운 기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필립 드 비트리(Phillip de Vitry, 1290경-1361)의 이론서 제목이기도 하다. 현재는 같은 시기의 프랑스 음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폭넓게 쓰인다. 1370년경 이후의 프랑스 음악은 ‘기교적 예술’(Ars subtilior) 시대의 것으로 세분화되기도 한다. 이 음악은 당시 남프랑스의 아비뇽(교황들이 1370년대까지 연금되어 있었던 곳)과 그 주위의 궁정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극단적인 예술양식, 즉 과도하게 복잡한 리듬과 박자 등으로 되어 있다.
프랑스 아르스 노바의 미사나 특히 모테트에서는 동질서리듬(영. Isorhythm, 라.isorhythmus) 기법을 사용한 기교적인 작품이 나온다. 동질서리듬은 모드리듬이 해체되면서 그것을 대체할만한 확장된 리듬패턴의 형태로서 다시 모테트 등에 도입된 것이다. 동질서리듬의 초기 형태는 13세기에 이미 선을 보이며, 그 가운데에는 리듬의 단위들이 반복될 때 리듬가가 확대 또는 축소되는 정교한 기법이 적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아르스 노바 시대에서 동질서리듬과 관련된 새로운 점은 그 단위의 상대적 확장(20마디 이상이 한 패턴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리듬적 확대・축소를 위한 다양한 비율의 적용, 그리고 그 기법의 보편화에 있다. 그와 같은 비율의 적용은 당시의 수에 근거한 이론적・지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아르스 노바의 모테트들은 대체로 전례적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3-4성부의 작품으로서 흔히 성부마다 다른 가사를 갖고 있는 점은 13세기 모테트와 다를 것이 없지만, 라틴어로 된 가사내용 조차 세속적인 사랑뿐만이 아니고 정치와 도덕적 부패에 관한 것 등으로 다양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프랑스어로만 되어 있는 것들도 등장한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비트리와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0-1377)이다.
현존하는 비트리의 작품은 모테트에 국한되어 있는 반면, 마쇼는 중세의 연곡미사로는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노트르담 미사》(Messe de Notre Dame) 뿐만 아니라 정형의 다성부 세속노래인 롱도(rondeau), 발라드(ballade), 비를레(virelai)도 다수 남겼다. 세속노래로는 그 외에 무명씨에 의한 ‘샤스’(chace 또는 chasse: '사냥'이라는 뜻)도 있다. 이 노래는 2-3성부의 돌림노래로서, 그 중 한 곡에서는 특히 사실적 음향의 묘사와 함께 사냥 장면이 음악적으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영국에서는 미사가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고, 모테트는 전통적인 콘둑투스 양식이나 론델루스 양식 외에 프랑스의 영향도 차차 보여준다(13세기 후반의 프랑스 모테트 양식과 테노르에 국한된 단순한 동질서리듬 양식 등). 그러나 3도와 6도의 울림의 중시는 대륙의 음악과는 상대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가사적인 측면에서도 프랑스보다는 훨씬 더 종교적이다.
이태리는 14세기에 다성음악의 등장과 함께 특히 세속음악이 크게 발전하고, 그 기록도 방대하다. 따라서 ‘트레첸토’(이.trecento: ‘14세기’)라는 명칭 아래 아르스 노바와는 별도로 논의되는 경우가 많다.
중세의 이태리는 수많은 소도시국가들의 집합체로서 획일적인 교회중심적 문화기반이 미약했는데, 교회음악도 약했다. 아비뇽 근처에서 활동한 이태리 작곡가들의 미사와 모테트가 소량 남아 있는데, 단순한 구조나 프랑스 음악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회음악의 원초적 발전 단계가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생동감 있는 다성부 세속노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마드리갈(madrigal), 카치아(caccia), 발라타(ballata)가 대표적인 유형으로 발전된다. 마드리갈과 카치아는 프랑스적인 정형이 없는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14세기 후반에 발전하는 발라타는 프랑스적 정형을 보여준다. 즉, 비를레와 같거나 유사하다. 그러나 이태리의 노래들은 프랑스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뚜렷한 조성감과 유려한 선율을 특징으로 한다. 주요 작곡가로는 프란체스코 란디니(Francesco Landini 또는 Landino: 1325-139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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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2007-03-31
김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