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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짐머만 [Zimmermann, Bernd Al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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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머만(Bernd Alois Zimmermann). *1918. 3. 20. 블리스하임(쾰른 근처), †1970. 10. 10. 쾨니히스도르프(쾰른 근처). 

농사일을 부업으로 한 철도공무원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남. 아버지는 매우 독실한 카톨릭 신자. 장차 신학을 전공할 생각으로 11살 때부터 고향 근처의 슈타인펠트 수도원에서 공부했다. 1936년 나치에 의해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쾰른에 있는 국립 카톨릭 고등학교를 다녔다. 1937년 대입학력고사를 치른 후 약 반년간의 노동봉사를 마쳤다. 학교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본에 있는 교육대학에서 1년간 공부한 후 1939년 겨울부터 쾰른음악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동시에 쾰른대학교에서 다양한 인문과학을 배웠다. 1940년 징병되었고 2년 후 심한 피부병으로 제대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말기에 학업이 다시 중단되었다. 학교음악 전공과정은 1946/47년의 겨울학기에 졸업했다. 곧이어 계획된 음악학박사 학위논문은 끝을 보지 못했다. 

1948년-50년에 다름슈타트 하기강습에 참여하여 포르트너, 라이보비츠 등을 접한다. 1950년-52년 쾰른대학교의 음악학과 강사로서 음악이론을 잠시 가르친 것을 제외하고 1958년 쾰른음악대학의 작곡과 강사(1961년부터 교수)로 일하기까지 10여 년간 자유스런 창작에만 몰두했다. 이 기간에 서독일방송국에서 방송·영화음악을 청탁 받았으며, 이 경험은 이후 쾰른음악대학에서 방송·영화음악을 위한 세미나를 열게 했다.

짐머만의 작품세계는 "중간세대"로 특징지어진다.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Extemporale』(1939/46)과 오케스트라를 위한『Sinfonia prosodica』(1945)에 이어 1940년대에 신고전주의 경향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다름슈타트 하기강습에서 12음기법을 밀도 있게 접한 후 이 기법을 자신의 창작세계에 수용한다(예: 『바이올린과 큰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1950). 1950년대 중반에 그는 신고전주의의 틀을 벗어나 총음렬음악 쪽으로 기운다(예: 『조망들』, 1955-56).

그의 작품은 50년대 중반을 중심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칸타타 『불가타』(1957/58)와 곧이어 나타난 오페라 『군인들』(1958/64)은 이러한 변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후의 작품들은 20세기 현대음악의 제1세대1)와 제2세대2)의 특징을 수용함과 동시에 그 어디에도 전적으로 포함되지 않는 독자성을 보인다. 특히 그는 이러한 복합적 성격을 자신의 "시간철학"에 연결시키면서 꼴라쥬기법을 발전시킨다. 즉,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음악들은 과거로서의 독자적 시간에 묶여 있으며, 이것들을 현재의 작품활동에 파편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예술창작이 갖는 미래적 성격까지를 규합시키고자 한다. 창작에서의 다원적인 시간인식에 따라 그에게는 과거-현재-미래가 연속선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둥근 공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가 갖는 이러한 다원화적인 특징은 이후 그를 1970년대부터 강화되어 나타나는 통합적 작곡처방의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선구자로 평가받게 한다. 

그 외의 주요작품: 비올라와 작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안티폰들』(1961/62), 첼로협주곡(1966),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Intercommunicazione』(1967), 전자음악 『Tratto』(1966), 큰 오케스트라를 위한 『Photoptosis』(1968), 연사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Musique...』(1968),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1967/69), 오케스트라를 위한 『침묵과 회귀』(1970), 『Ekklesiastische Aktion』(1970).

1) 20세기 전반기에 현대음악을 개척하고 주도한 작곡가들: 쇤베르크를 비롯한 신비엔나악파, 바르톡, 힌데미트, 스트라빈스키 등.

2) 195/60년대의 젊은 작곡가들: 메시앙, 불레즈, P. 셰퍼, 스톡하우젠, 아이머르트, 케이지 등. 그러나 케이지는 그 이전에도 이미 파격적인 작품활동으로 아방가르드 경향을 보였다. 

[주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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