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악4중주(프.quatuor à cordes, 이.quartetto d'archi, 도.Streichquartett, 영.string quartet)
일반적으로 실내악 가운데 가장 완성된 유형으로 언급되는 것이 현악4중주이다. 이는 4 대의 현악기들만의 편성으로 얻어지는 조화된 음색과 표현력이 다른 편성의 실내악 장르보다 훨씬 쉽고 효율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악4중주가 본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던 하이든 시대 이후 대부분의 작곡가들에게 이 장르는 자신의 음악적 발전 및 새로운 기법이나 어법의 실험장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현악4중주 편성의 일반적인 유형은 <2대의 바이올린과 1대의 비올라, 1대의 첼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며, 간혹 악기의 특별한 구분 없이 4 대의 현악기들로 구성되어 앙상블을 이루는 유형도 찾아 볼 수 있다.
현악4중주를 중심으로 한 실내악 장르의 일반적인 형식은 교향곡의 형식과 거의 비슷하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소나타형식에 의한 4악장 구조를 가진다.
현악4중주는 16세기 이후부터 4성부에 있어서 형식적 완성도를 추구하며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각 악기들은 독자성을 가진 채 특별한 음색적 특성이나 기법적 가능성을 보이며 독주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였으며, 이어서 앙상블을 이루기 위한 공통의 표현이나 어법을 추구하였다. 4대의 악기들이 앙상블을 이루기 위해서는 ① 테마-모티브 작업을 통해 전개되거나, ② 4대의 악기가 유니즌으로 연주되거나, ③ 각 성부가 푸가기법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가진다. 또한 ④ 현악4중주 자체를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간주하고 효과적인 공통의 표현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현악4중주에 있어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으로는 악기들간의 대화의 격을 들 수 있다. 이 경우 제1바이올린이 “독주자”, 제2바이올린은 “제1바이올린의 파트너”, 비올라는 “반주자” 그리고 첼로는 “줄거리를 유지하는 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18세기 후반부터 그 전성기에 들은 현악4중주는 19세기에 4중창이나 다양한 악기들의 4중주와 구별하기 위해 18/19세기에 장르의 명칭으로 ‘콰투오 Quatour’와 ‘크바르테토 Quartetto’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2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로 구성된 현악4중주 편성은 20세기에 들어와서 1 대의 바이올린 대신에 플루트(플루트4중주) 또는 오보에(오보에4중주)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현악4중주의 역사
18세기 중엽까지의 중요한 실내음악 장르였던 트리오소나타에서 계속저음에 의한 화성과 선율진행이 사라지며 <2대의 바이올린과 베이스>에 의한 현악트리오(예, 하이든의 『현악트리오 Hob. V. 15-20』)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편성에 중간 음역을 보강하면서 4대의 현악기들을 위한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현악4중주가 구체적인 장르로서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750년대 후반부터 하이든을 중심으로 한 비엔나 지역 일대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과 1761년 보케리니(L. Boccherini)를 중심으로 한 밀라노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의 작품들에서이다. 하이든의 작품 op. 1과 op. 2로 출판되었던 『4중주 디베르티멘토 Quartett-Divertimento』에서 처음으로 고전적인 현악4중주의 유형이 나타났으며, 이것은 1780년 이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고전적인 모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보케리니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협주적(콘체르탄토식) 4중주의 발전된 유형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러한 보케리니의 현악4중주의 유형은 그 자신에게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서 계속해서 발전되지 못했다. 때문에 하이든식 현악4중주 스타일의 뛰어난 우수성은 결국 아무런 경쟁 없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전주의 현악4중주 영향이 유럽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전까지 빠리나 비엔나에서의 현악4중주 경향에 비견할 만한 독립적이며 다양한 4중주 문화는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는 없었다. 영국의 런던은 그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보다는 빠리나 비엔나의 현악4중주 경향을 수용하는 모습이었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나 독일의 중부나 북부의 큰 도시들은(함부르크, 베를린, 라이프치히) 비엔나와 빠리에서 유행하던 레퍼토리를 그대로 수용하여 연주하곤 하였다. 스페인에서는 간소한 형태의 현악4중주들이 몇몇 영주들의 궁정에서 지원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8세기에도 성악음악을 위주로 한 장르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악4중주 음악은 단편적으로만 그 모습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만하임 악파에 의해 현악4중주를 중심으로 한 실내음악이 작곡되었으며, 이들은 특히 관악기용 4중주를 많이 작곡하였다.
하이든의 『현악4중주 op. 33』 이후 현악4중주라는 장르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1780년 이후부터 비엔나 고전주의를 중심으로 점점 더 많은 젊은 작곡가들이 현악4중주 작품을 가지고 음악계에 데뷔하게 되는 경향을 이끌었다.
비엔나 고전주의의 현악4중주 유형은 19세기에 점점 더 분명하게 현악4중주라는 장르의 유럽적인 ‘규범’이 되었다. 이 사실은 단지 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을 제외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재능을 이 장르를 통해 보여주려 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19세기에 있어 현악4중주는 비엔나 전통을 바탕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슈베르트가 가졌던 현악4중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그의 다른 장르의 작품까지 영향을 끼친다. 처음엔 가정음악적인 경향의 작품을 작곡하다가 점차 발전하여 개성적인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수준 높은 작품을 작곡하게 되었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2 개의 첫 현악4중주들을 직접적으로 베토벤의 후기작품에 연결시켰다. 브람스는 2개의 『현악4중주 작품 op. 51과 op. 67』을 출판하기 전, 수많은 현악4중주곡을 작곡하고 파기시켰다. 드보르작은 슈베르트와 비슷하게 현악4중주에서 자신의 음악적인 바탕이 되는 작곡 기법을 배웠다. 슈만은 현악4중주 작품에서 폴리포니 기법이나 강력한 주제적 작업과 순환형식을 실내음악적으로 심화시키고자 시도했다. 볼프(H. Wolf)는 1879년 작곡한 『현악4중주 d-단조』에서 베토벤의 『현악4중주 op. 95』와 바그너의 음악적 영향을 연결시켰다. 레거는 2개의 『현악4중주 op. 54』(1901)에서 일반적인 연주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서 특별하고 과장된 듯한 작품을 작곡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을 거치며 현악4중주는 점점 더 독창적이며 음악적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당시에 퍼져 있던 고전주의적이거나 낭만주의적 장르유형에 치우쳤던 일반 대중들의 취향과는 점차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1900년경에 결국 현악4중주의 수준이, 어느 다른 장르에서도 없었던 매우 강렬하고 독창적인 4악장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20세기초에 들어 신음악(Neue Musik)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인 쇤베르크와 바르톡(B. Bartók), 미요(D. Milhaud)와 힌데미트(P. Hindemith), 크세넥(E. Křenek)과 쇼스타코비치(D. Schostakowitch)에게 현악4중주는 특별한 의미로 다루어졌다. 쇤베르크는 4개의 현악4중주를 통해 자신의 음악어법의 변천을 보여주고 있으며, 바르톡은 6 개의 작품을 통해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법이나 어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미국 작곡가 카우웰(H. Cowell)은 다양한 방식의 시도를 통한 현악4중주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급변하는 음악적 경향으로 실내음악에서도 그 경계가 희미해질 뿐만 아니라, 각 장르에서의 계층도 계속해서 평준화되었다. 하지만 현악4중주는 여전히 커다란 매력을 가진 채 고전-낭만주의적 레퍼토리와 새로운 매체문화가 조화를 이루었으며, 나아가 1945년 이래로 수준 높은 수많은 현악4중주 작품이 작곡되었다.
2005-01-09
차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