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주대창
등록일자 : 초기자료
쇼팽,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Chopin, Frédéric François]
쇼팽(Chopin, Frédéric François , 1810. 3. 1 바르샤바 근처의 첼라쪼바 볼라 - 1849. 10. 17 빠리
프리데릭 쇼팽
아버지는 프랑스 출신이고, 어머니는 폴란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다. 일곱 살이 채 못되었을 때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했으며, 열 살 때에는 관악밴드를 위한 행진곡을 썼다. 열 다섯 살 때 그는 론도를 써서 출판했다. 1829년 비에나로 연주 여행을 떠났으며, 이것이 성공하면서 중·서부 유럽에서 배우고 활동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1830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에서 연주와 공부를 위해 바르샤바를 떠나는데 혁명 때문에 끝내 귀향하지 못하고 향수병을 앓았다. 1831년 러시아가 폴란드를 점령하자, 쇼팽은 이것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에서는 결코 연주하지 않았다. 그의 고국에 대한 사랑은 폴로네이즈, 마주르카 등 폴란드의 춤곡을 응용한 성격소곡들에 잘 드러난다.
1831년 이후 빠리에서 예술적 자극을 주는 시인, 문학가, 그리고 베를리오즈, 리스트, 파가니니 등 작곡가들과 교류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을 기피하였고 대신 살롱의 친숙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18년간의 파리 생활 중 19번만 대중에게 공개된 연주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높은 보수를 받는 작곡가였고 선생이었다. 1834/35년 드레스덴으로 여행하였고, 1838-39년에는 폐병 때문에 여류시인 쌍드(George Sand)와 함께 마요르카로 갔다(발데모사의 수도원). 1839-47년에는 그녀와 함께 빠리에서 살고, 여름에는 노앙에 있는 별장에서 생활하였다. 1847년부터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1848년 혁명의 여파로 그는 런던,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하게되고 연주회를 계획했으나 더 이상 무대에 설 수가 없을 정도로 쇠약했다. 그리고 빠리로 돌아와서 생을 마감했다.
쇼팽은 거의 전적으로 피아노 음악을 썼다. 이를 통해 그는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피아노의 표현가능성을 다양하고 섬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피아노가 자유자재로 노래부를 수 있게 했다. 특히 녹턴,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환상곡, 베르쇠즈(자장가), 프렐류드, 왈츠 등 피아노를 위한 성격소곡들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러한 종류의 -성격소곡 안의 작은 장르들이라고 볼 수 있는- 많은 제목들은 쇼팽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사용한 제목들 중에는 "녹턴"(John Field), "폴로네이즈"(Michail Ogin'ski), "스케르쪼"(멘델스존)처럼 이미 다른 사람이 쓰던 것을 넘겨받은 경우도 있고, "발라드"(op. 23, 38, 47, 52)처럼 그에 의해 새롭게 시도된 경우도 있다. 쇼팽에게서 스케르쪼(op. 20, 31, 39, 54)는 단순히 작품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 소나타악장형식에 쓰이는 스케르쪼(베토벤)의 형식적인 면까지 고려되었다. 발라드는 소나타 악장 형식에 준하는 큰 형식적 틀을 가지고 있어서 제목에 따른 형식을 고려한 것보다 문학 발라드(Adam Mickiewicz)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노골적인 표제음악 풍의 제목을 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렐류드"는 바하의 경우를 표방했지만 그저 제목으로 나올 뿐이며, "에튀드" 역시 '연습곡'의 의미가 더 이상 없다. "빗방울 프렐류드" 또는 "혁명 에튀드" 등의 표현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쇼팽에게서 보듯이 19세기에 성격소곡의 제목들이 통일된 의도에서 쓰이지 않고 작곡가에 따라 분위기나 형식 또는 단순한 연상이나 작곡 동기 등 다양한 방향에서 사용된 것은 그 제목들을 곧 장르로 굳어지게 하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 쇼팽의 작품들 중 여러 악장으로 된 곡들은 많지 않다.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그리고 한 개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남기고 있다. 피아노 소나타라는 전통적 장르도 그에게 와서 독주 악장 여러 개가 배열된 형태로 변한다. 그는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기고 있지만, 여기에서 오케스트라는 그의 주된 표현도구가 아니었다. 이들 작품에서 오케스트라는 반주 역할을 할뿐이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표현력에 관심을 가진 동시대의 대 작곡가들의 음악에는 -물론 배울 점이 없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겠지만- 별로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겼으며, 슈만과 멘델스존의 것에는 흥미를 못 느꼈다. 작곡가로서의 리스트를 그는 극적인 표현력의 피아니스트로 보려고 했다.
쇼팽의 작품들은 음악적 상상력과 세련미로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색채가 풍부한 영감 섞인 표현능력이 뛰어나다. 비엔나의 첫 연주회에서 이미 사람들은 그의 "탁월하고 섬세한 타건, 기계적인 정확한 숙련성, 가장 깊은 느낌까지도 그려내는 완벽한 뉴앙스"를 칭찬했다(<일반음악신문> 1828). 슈만은 쇼팽의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음악 새 신문>1837).
"수금이 마치 모든 음계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한 예술가의 손이 환상적인 모든 장식을 동원하여 타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낮은 기본음과 섬세하고 노래하는 높은 선율이 항상 들린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이 그의 연주를 어렴풋이나마 묘사한 것이다." 쇼팽의 피아노 기교는 "차분한-화려함"(stille-brillant)을 지닌 베버, 훔멜, 필드(John Field)의 것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음악적 모델은 바하와 모차르트의 것이다. 쇼팽의 서정적인 본성은 바하의 티없는 순수함을 다른 방향의 분위기로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서 그는 음향의 맑음과 표현의 깔끔함, 그리고 안정된 형식감을 높이 샀다. 이러한 음악적 지향점은 쇼팽의 서정적인 감정이 항상 외적인 사실성을 뛰어 넘게 만들었다: "장미, 카네이션, 펜, 잉크... 그리고 여느 때처럼 또 다른 이상한 저 상상적 공간에 있다."(노앙, 1845) 그의 양식은 이후 특히 프랑스의 작곡가들(프랑크, 생상, 포레 등)과 민족주의 음악가들(스메타나, 드보르샥, 발라키레프, 그리그, 알베니츠 등)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