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과 음악
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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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단 한 번만 노래를 들었던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그 노래를 외웠을 것이다. 아마 그 노래를 생각하면 평생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그는 그 노래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행복해 했을 것이다. 그 음악이 별로 신통찮아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었을테니까. 수많은 노래들의 범람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힘들어한다. 자신이 익숙하지 못한 음악에는 짜증 섞인 반응을 나타낸다.
수많은 노래들 가운데서도 사람은 불과 몇 개의 노래를 품고 평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젊은 시기에 배웠던 소수의 노래들을 머리에 지니고 살아간다. 책 보고 부르는 노래는 더 많다. 하지만 우리 머리 속에 박힌 노래들은 정말 적은 수의 것들이다.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한 인간은 행복하다.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을 바라보라. 그들은 머리에 박힌 노래를 부르면서 낯을 붉히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그것은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추억 같기도 하지만, 행복했던 시절과의 재회이기도 하다. 그것은 반드시 젊은 시절의 노래이다. 어른들은 옛 노래를 부른다. 그들이 최근에 유행하는 노래를 부른다면, 그것은 해학적인 효과나 의외의 효과를 노리기 위한 것이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노래가 너무 낡아서 얕잡아 볼 수 있다. 한편 어른들은 요즘 노래는 노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늘날처럼 요란한 리듬의 노래가 별로 많지 않았던 80년대 이전의 음악들에서는 가사가 그래도 중요했다. 그 때는 사람들이 울먹이기를 많이 원했다. 하지만 최근의 노래들은 그렇지 않은 듯이 보인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사가 나와도 별 상관이 없는 듯이 여겨진다. 흥겨우면 된다는 것인지 빠른 리듬에의 의존성이 두드러진다. 이른바 '댄스뮤직'이라는 장르가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음악들의 배경에는 문화산업의 조종이 막강해 보인다. 이른바 스타를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하고 그 수익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열광적 청소년들도 계획되어 있다("팬클럽"). 하지만 청소년들은 그런 상업적인 작용관계를 안다고 해도 거기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당장의 지배적 열광으로부터 제외될까봐 더 걱정한다.
어른들은 말한다. 대중음악에 대해서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그들은 대중음악과 함께 청소년들이 실수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소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을 듣는 청소년은 클래식음악을 듣는 청소년들보다 마약과 접촉이 더 쉽다는 통계가 서구에서는 나와 있다. 이 사실이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우리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리듬을 극단적인 감정고조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음악 자체가 이미 이성을 마비시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행복의 원천 중 가장 큰 것은 음악이다. 음악은 청소년들의 공통성을 만들기도 한다. 같은 노래나 같은 가수를 좋아하면 청소년들은 쉽게 서로 친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은 복합적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 행복의 가장 큰 부분은 아마 음악 자체보다 일종의 "대리연인으로서의 스타"일지 모른다. 스타는 그들의 연인이다, 우상이다. 스타들의 패션은 청소년들에게 그대로 모방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방식까지도 모방된다. 그들이 마약을 하면 청소년들도 거기에 대해 관대해진다. 그들이 동성연애를 하면 청소년들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말한다. 스타는 이 시대의 가장 큰 교사이다. 그들의 잘잘못은 아주 작은 것까지도 학습된다. 스타의 머리모양, 옷차림, 취미, 출신학교, 고향, 키, 나이, 키우는 개의 종류 등등 그 모든 것이 청소년들에게 암송된다.
청소년의 음악 교육에 관해 염려하는 일은 아주 오래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플라톤의 음악론은 '염려하는 음악론'이다. 그는 사람들의 안위를 보장해 주는 국가를 튼튼히 하는 것이 인간의 아주 큰 의무라고 생각했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튼튼한 군대였고, 튼튼한 군대를 만들려면 강한 군인들이 긴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청소년들이 나약해지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음악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강한 군인을 키우려면 일정한 종류의 나약한 선법의 음악은 버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생각은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를 중요시하는 음악교육론에서 오늘날도 자주 만날 수 있다. 한국도 그러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국가를 튼튼히 한다는 생각이 다른 것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론은 매우 비민주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 이전에 이미 그들을 위한 특정의 음악이 일정한 목표에 맞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지가 미리 정해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기성의,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한다. 가장 큰 창조성의 창고인 청소년들의 생각은 물어지지 않는다.
어른들의 목표에 의해 어떤 음악을 들어야할지 정해지지 않고, 창소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오늘날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일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의 생각을 처음부터 거부하는 어른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음악은 그들 자신들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전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그 말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시청자나 청취자의 반응이 없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시시비비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끝없는 질문을 불러올 것이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생각 아닌, 대중매체의 영향을 받아 이러저러한 음악을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생각은 경청되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열광과 함께 고립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들킬 수 있는 사항이다. 하지만 그런 사항을 어른들이 공공연히 확인하여 그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많다.
청소년들의 음악에 대해 어른들은 얼마나 불행해 하는가! 그들은 자녀들의 음악이 못 마땅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들에 열광한다. 온 집안이 시끄럽다. 시끄럽다고 하면 리시버를 귀에 꽂고 흥얼거린다. 워크맨을 집안에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도 듣는다. 그냥 공부만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시끄러운 음악에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 텔레비전을 없애버리겠다. 오디오 기계를 팔아버리겠다 하고 으르렁거려 보지만 좋아질 가망이 없다.
2.
그런데 교회음악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찬송가나 착실하게 부르면 좋으련만 유행음악과 거의 구분이 안가는 성가를 부른다. 저것도 교회음악이라고 해야 하는가? 걱정이 앞선다. 저 음악이 신앙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오히려 흥미 위주의 음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부모들은 가슴을 조린다.
위와 같은 현상은 청소년을 둔 가정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현상에 대한 부모님들의 걱정은 복합적이다. 한편으로 청소년 문화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청소년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의복, 취미, 행동 등 자신의 세대와는 다른 모든 점에 관해 의심쩍어 한다. 그에 비하면 어른들은 자신들의 문화나 세상의 일반적 문화에 대해서는 덜 민감하다. 아마 자녀들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를 듣는다면 부모들의 걱정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속문화에 대한 경계심이 있다. 가사만 바뀌면 세속 음악이나 다름없는 음악을 교회의 음악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 의혹의 핵심이다. 특히 오늘날의 복음성가는 의심스러운 청소년 문화와 비난받아야 할 세속문화의 일종으로 보인다. 그런 음악을 들으면 생각이나 심성이 더욱 세속적이 되지 않겠는가 또는 세속적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부모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 록음악은 사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뭔가 알 수 없지만 어떤 걱정이 그런 음악을 들을 때에 일어난다. 매일 싸울 수 없어서 그렇지 날마다 자녀들에게 그런 음악에 대해 잔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부모들의 심정이다.
그런데 자녀에게 변화가 왔다. 여름수련회에 다녀온 자녀가 갑자기 자주 듣던 테이프를 버리는 일이 생겼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자녀는 록음악이 뉴 에이지 (New Age)라고 수련회 강사가 그랬다는 것이다. 뉴 에이지가 뭐냐고 묻는 부모에게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운동으로 미국에서 대 유행인데 영화나 록 음악같은 대중문화 속에 깊숙히 뿌리박고 있다고 자녀는 대답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부모는 그 동안에 가졌던 의구심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이제 막연한 것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자녀도 그런 음악을 듣지 말라는 충고에 더 고분고분 따른다. 부모는 그런 음악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책들을 자녀에게 사준다. 자녀들은 그 책들을 읽고는 한동안 잠잠해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건 되고 저건 안되고 하는 구분짓기에 짜증을 낸다. 어차피 영어도 알아듣지 못하여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음반을 거꾸로 들려야 들린다는 악마적 메시지는 어차피 듣지도 않는 것이니까 무슨 상관이 있으랴 싶은 생각을 자녀는 갖는다. 자녀는 부모에게 앞으로 이런 책들을 사줘서 괜히 갈등을 일으키게 하지 말라면서 사준 책은 부모 앞에 도로 던져 놓는다. 부모는 다시 덜컥 겁이 난다
부모들은 청소년 문화의 대부분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그 문화를 자세히 살피기에는 너무 분주한 생활을 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생각도 바탕에 깔려 있기에 접근 자체를 싫어한다. 부모들의 문화는 다르다. 청소년의 문화가 자신과 미래에 대해 한없는 호기심을 갖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도전의 문화> 라고 한다면 부모들의 문화는 많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일정한 생각의 틀을 갖추고 있기에 많은 기억들로 가득 찬 <회상의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자녀들의 문화는 동적(動的)이고, 부모들의 문화는 정적(靜的)인 측면이 강하다. 동적인 문화와 정적인 문화가 서로 잘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정적인 문화는 자녀들의 문화가 똑같이 정적이기를 바라고 동적인 문화는 부모들의 문화가 잘 움직이지 못한다고 답답해한다. 정적인 문화는 동적인 문화에 이것저것들은 하지 말라는 주문을 자주 내고 뭔가를 하라고 하는 것은 아주 한정되어 있어서 "공부해라", "교회 가라" 등으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이다. 어찌 됐든 동적인 문화는 정적인 문화를 너무 혼란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한다.
정적인 문화와 동적인 문화는 교회 내에서도 충돌한다. 익숙한 교회음악 이외의 것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기타아를 뜯고 드럼을 치며 노래하는 청소년들의 성가를 교회 안에서 듣게 되면 당황한다. 뿐만 아니라 분노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한편으로 청소년들은 이미 있는 찬송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자신들의 내적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적인 문화와 동적인 문화가 교회내에서 충돌하게 (또는 만나게) 될 때에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상대를 대한다. 정적인 문화는 동적인 청소년들의 음악문화 현상을 '세속적'으로 파악하며 이를 위한 충분한 근거와 확신을 갖고 있다.
반면에 동적인 문화는 이 대립을 '세속적'인 문화와 '성스러운' 문화의 차이 때문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간의 문화차이 때문으로 파악하며 이를 위한 충분한 근거와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이 두 입장이 만나게 되면 일방통행적 독백들만 왔다갔다 할 뿐, 서로간에 통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다. 이는 토론을 위한 바탕들이 각각 상이하기 때문이다. '복음 성가를 부르면 안된다'와 '복음성가를 불러도 좋다'는 한 종류의 음악적 대상을 두고 논의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입장들은 서로 통할 수 없는 바탕 위에 서 있다. 이 두 입장은 서로 대립적일 뿐만 아니라, 가끔 적대적이기도 하고 가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기도 하다.
복음성가를 옹호하는 측은 자신들의 주장을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단지 큰 소리로 노래할 뿐이다. 큰 소리를 내는 쪽은 그런 노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 세속적인 것이 들어왔다고 개탄한다. 이들의 가장 큰 걱정은 교회음악이 세속음악과 같아져서 예배의 경건성을 흐리게 하고 신자들의 신앙이 오도되는 것이다. 이들의 의도는 순수한 것이며 매우 자연스러운 반작용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복음성가와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교회의 음악이 세대별로 분리되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성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대예배 시에 비교적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다. 이들은 교회음악의 기준을 이 대예배에 두고 있으며 거기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만을 교회 음악으로 인정하려고 한다. 대예배의 음악은 다른 소예배의 (저녁예배, 수요예배, 새벽 기도회 등등) 음악과는 조금씩 다르다. 이 다른 점은 별로 의식되지 않고 있으나 사실을 살펴보면 상당히 다른 경향으로 찬송가들이 선곡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예배에서는 예배용 찬송가(현재의 통일 찬송가1-72), 송영, 봉헌찬송 등이 불리고 복음성가가 불리는 경우는 드물다. 대예배에 복음성가를 부르는 교회는 예배 폐회 직전에 부른다. 성가대도 주로 대예배를 위해 존재하며 첫 송영, 기도송, 끝 송영 등 예배에 틀을 부여하는 찬양을 빠짐없이 하며, 성경낭독과 설교 사이에 보통 부르는 찬양곡만 비교적 자유롭게 선곡한다. 대예배에 비하면 소예배는 비교적 자유로운 에배순서를 갖고 있으며 거기에 따른 음악도 상당히 자유롭게 선택된다. 예배의 틀을 주는 찬송가들이 거의 없다. 주일저녁예배는 현재 거의 모든 교회에서 "찬양예배"로 불리지만 찬양의 입장은 매우 축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으로 그 이름에 맞게 대단히 찬양을 많이 하는 경우가 있는데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거의 동등하게 불린다. 이렇게 보면 소예배의 특징이 교회마다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소예배 때는 그 교회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종류가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소예배 때는 그 교회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종류가 많이 불려서 생활과 예배가 상당히 가까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대예배가 갖는 의식성(儀式性)은 많이 약화되고 교회의 평상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소예배는 교회음악의 기준을 논할 때에 고려되는 일이 거의 없다.
예배음악은 신자들이 다같이 합당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 기준을 삼는다. 이 음악은 교회의 전통 속에서 생성되어 당연하게 예배의 음악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한국교회의 경우는 찬송가책에 수록된 것들이 그것이다. 물론 찬송가에 포함된 것들에까지 시시비비를 따지는 사람이 있으나 그 논의는 일반 신자들의 것이 아니고, 음악이나 신학전문가들의 것이다. 찬송가에 부분적으로 잘못된 것들이 없지 않으나 그것들은 일반 신자들의 생각밖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의 찬송가들은 한국교회 초창기에 형성되었으며 그 내용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당시의 영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음악은 한국교회음악의 전통이 되었고 아직까지 널리 불린다. 한국교회는 이 음악을 받아들이는 데에 거부감보다는 큰 환영을 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이때 한국인들은 자국의 노래를 세속적이라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민요의 가락을 노래하면 기생, 광대 등을 연상하며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보면 자국의 세속음악에 대립되는 비세속적인 교회의 음악으로 찬송가들이 받아들여졌기에 거기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찬송가들이 거의 100여년 동안 불리면서 교회음악의 근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대중음악적 교회음악이 60년대 말부터 서서히 한국으로 밀려들어와서 지금에 와서는 주로 도시교회의 청소년 음악문화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영미 교회의 영향이다.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의 확산은 급격한 것이었고 청소년뿐만 아니라 중년층까지 이 음악을 자주 듣고 부르게 되었다. 이른바 "복음성가", "현대 기독교음악"(CCM) 등으로 불리는 이 대중음악적 교회음악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이 되었다. 어떤 교회음악 토론 모임에서도 이 음악에 관한 논의는 빠지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이 음악은 생각해 보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논의가 급하게 느껴지고 엇갈리는 찬반 논의 때문에 잘 정리되어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이 음악에 대해서는 세대간에 서로 차이나는 반응을 보인다. 고전음악을 전공하고 나이가 50세가 넘은 분들은 음악전문가들은 단연코 이 음악에 대해 거부의 뜻을 표한다. 이들은 그 음악의 세속성과 품위 없음을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또한 성속의 구분에 대하여 대단히 예민한 분들도 이 음악에 대해 단연코 거부감을 표한다. 이들의 걱정에는 뒤에는 다음과 같은 느낌이 있다. 청소년들이 그런 음악을 하는 것을 보면 자기들 좋으라고 하지 하나님 찬양에 열중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청소년들 가운데 대단한 신앙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이들이 당장 대단한 신앙을 소유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이해를 갖고 있는 분들은 청소년들이 세상의 대중가요를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여 복음성가를 교회에서 허락한다.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별로 하지 않는 복음성가를 청소년에게 허락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의 대중음악으로 가는 길을 막는 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댐 불가피론'이 지배적인 교회에서는 이 음악에 대해 떳떳해 하지 않으면서도 허락하는 것이기에 이 음악을 이용하여 교회에 큰 유익을 끼치려는 적극적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 음악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이런 교회의 특징은 비교적 목회자들이 젊고 교회에 도움이 된다면 전통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이 음악을 청소년 선교에 좋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많은 열의를 가지고 이 음악의 육성에 노력하고 실제로 청소년 선교에 뚜렷한 성공을 거둔다. 이들의 노래가사는 일반적인 편견과는 다르게 '사람에게 향하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 아니고 거의 '하나님 찬양'으로 되어있다.
한편으로 거의 상업적 차원에서 카세트나 음반을 만드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상당히 많은 음악들이 시장에 나와 있는데, 그 중에는 전혀 교회적일 수 없거나 복음이 흐린 복음 성가들도 많다.
일부의 좋은 현상이나 '댐 불가피론'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의 어떤 점이 신자들을 걱정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음악의 형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타악기 소리, 전자기타와 같은 세속적이라 느껴지는 악기,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음악적 처리, 이 모든 것들은 대중음악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한다. 가사를 자세히 듣지 않으면 세속적 대중음악으로 들린다. 이 음악이 대중적 세속음악으로만 들리면 '댐'도 아니고 '선교의 수단'도 아니다. 실제로 다분히 그렇게만 듣는 청소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음악을 금지시킬 것인가? 금지시킨다고 안 불려질 것인가?
이 음악을 안 된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이 불려져 왔다. 금지운동을 펴면 펼수록 더 많이 불릴 수 있다. 그리고 문화는 틀어막아서 어떤 의도된 길로 이끌려고 할 경우 더 많은 부작용을 가져온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또 다른 방향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가?"하고 묻게 된다.
이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전제되는 문제들을 검토해야 한다. 우선 이 음악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 교회에서 음악을 행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음악이 없는 것보다 분명히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음악이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초대교회에는 상당수 있었다. 사실 음악이 없어도 신앙 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음악을 허용하는 사람들조차 음악에 대하여 대단한 의구심을 가지고 대했다. 그들은 음악이 사람들의 감정적 부분을 지배하는 것과 세속적인 것에 가까이 있는 것에 큰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교회에 음악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신자들의 생활과 예배에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음악의 종류가 나타나게 되면 거기에 대한 교회의 부정적 반응은 거의 빠짐 없이 있어 왔다. 새로운 음악은 일반 사회음악과 연결되어 교회음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갖는 감정성과 세속성에 대해서 교회는 대단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거기에 대해 가장 단순한 처방을 내렸다. 단순히 처방이란 '금지명령'을 말한다. 카톨릭 교회는 1965년 이전까지만 해도 모차르트와 바하의 교회음악을 세속적인 음악으로 보고 이를 금지시켰다.
그렇다면 새로운 음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특히 복음성가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 대개 교회에서 논의되는 문화는 새로운 문화에 관한 것이다. 새로운 문화는 기존의 문화에 의해서 판단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이미 있는 찬송가와 대비되어 새로운 복음성가가 비판된다. 복음성가의 감정성과 세속성에 대한 걱정은 그 음악의 근원이 교회로부터 오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될 점은 이제 교회가 새로운 음악의 발생지로는 상당히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초창기에 찬송가가 밖으로 나가 '창가'를 일부 발생시킨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한국의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생시킨 것은 없다. 또한 한국교회의 초창기에 소수의 세속선율이 교회에 들어온 경우가 없지 않다.(예를 들어 합동찬송가의 "천지가 진동하매 햇빛 흐리고"는 인도노래를, "하늘 가는 밝은 길이"는 스코트랜드 민요를 사용했다.)
또한 엄밀하게 따져서 지금의 복음성가는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에서 곧바로 우리나라의 복음성가가 된 것이 아니고, 영미에서 발생한 복음성가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이다. 그 후 이 도입된 복음성가처럼 대중음악으로 작곡된 한국인의 복음성가가 나타난다. 물론 대중음악적 성가는 외국에서도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청년층은 새로운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교회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앞에서 말한 '댐 불가피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서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 접근하려는 적극적 태도도 똑같이 대중음악적 성가를 취하게 한다.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똑같지만 그 뒤의 의도는 서로 다르다. 그래서 그런 음악을 해서 도움이 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방해가 되는 교회가 있다. 이를 보면 새로운 문화를 취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경우도 방해가 될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중음악적 성가가 전면적으로 거부되거나 전면적으로 찬송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그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부르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그 음악으로 확고하게 교회에 도움이 될 것응ㄹ 생각하면 그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게 되면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소예배와 대예배가 조금 다르듯이 청년예배와 소년예배가 조금 다른 것을 허락해야 한다. 청소년은 부모와 함께 살지만 부모가 이해할 수 없는(또는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독자적 세계가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생각과 언어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말로 번역하여 이해한다. 음악언어란 말이 가능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언어로 발언하고 싶어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에게 도달하려고 하면 이런 언어를 고려해야 한다. 마치 한국인에게 헬라어 성경이 아니라, 번역된 한국어 성경이 필요하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음악언어로 번역된 것이 필요하다. 성경을 읽히려고 헬라어를 가르치는 것은 무모하다. 헬라어 성경이 한국어 성경보다 더 확실한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원문성경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다. 문제를 더 확실히 정리해 보자. 자녀들이 복음성가를 부르는지 찬송가를 부르는지를 문제 삼지 말자. 어떤 노래를 하든지 간에 거기에 잘못이 있다면 음악을 문제의 핵으로 삼지 말고 자녀들의 신앙에 더 관심을 기울이라. 이 문제만 바로 잡히면 음악 문제는 저절로 풀리리라 생각된다. 자녀들의 신앙문제가 제대로 서 있을 경우 음악적 표현은 걱정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래도 부모들은 참기 어려운 대목이 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기다려야 한다. 음악이 바뀐다고 마음이 자동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외적인 관심보다 내적인 관심을 더 소중히 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경은 어떤 교회음악을 해야할 지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음악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부분이 있다면 대단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성경의 의미를 살려서 이런 저런 음악을 옹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제1차적 중요성을 갖지 못하고,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잘 알다시피 해석은 무엇을 위해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필자도 이런 저런 글도 써보았지만 너무 많은 부분이 해석에 의존적이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음악과 함께 열광하는 다윗도 보여주고, 다윗의 음악을 엄히 꾸짖는 아모스도 보여준다. 이렇게 상반된 견해 중 어느 것을 맞고 어느 것을 틀리다고 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음악을 사용하는 긍정한다고 하면 어떤 음악이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성경이 바라는 것은 어떤 양식성(樣式性)에 관한 것이 아니고 부르는 자의 마음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부르는 자'의 마음을 캐고 캐면 이러저러한 양식의 음악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취할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속마음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가지고 이러저러한 겉모양을 가지고 속마음을 진단하지만 이런 일은 더디게 하는 것이 합당하리라고 여겨진다. 특히 요즘의 문화는 유행적인 문화라는 특징이 있다. 문화도 그 만큼 바쁘다. 그래서 빨리빨리 지나간다. 어떤 문제는 해결을 위해 손쓰지 않아도 저절로 해결되는데 그것도 상당히 빨리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유행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앞으로 공통적 문화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교회음악의 많은 문제점들도 자체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본다. 말도 되지 않는 가사를 가진 복음성가들이 상당히 있으나 잘 불리지 않는 것도 그런 것이요, 신앙적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성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도 그런 것이다.
3
오늘날 음악문화의 영향을 받는 것은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문화적으로 좋지 않는 것은 반드시 대중음악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클래식 음악에도 있다. 단지 클래식에서는 비교적 문제가 덜 두드러질 뿐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클래식을 듣는 청소년들이 음악에 대해 더 이성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중음악을 듣는 청소년들은 음악과 함께 더욱 격정적인 일탈을 추구하는 경향과는 대조된다.
청소년들은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실수로부터 빠져나올 힘이 없는 것이다. 실수를 밝히고 분개하는 것보다는 실수할 때에도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갖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러려면:
(1) 청소년들이 음악을 듣는 행복은 보호되어야 한다(다윗의 원칙).
(2) 청소년들이 자신이 자주 듣는 음악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한다.
(3) 걱정스러운 면이 추측되면 어른들도 그 음악을 함께 듣는다.
(4) 추천할 만한 음반들을 청소년들에게 들려준다.
(5) 기타아나 피아노를 배우게하거나, 합창단과 합주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음악을 합리적으로 대면할 기회를 준다. 이는 몰아상태의 음악청취와는 전혀 다른 면을 제공할 것이다.
(6)기다리는 일에 능숙해야 한다.
①60년대 한국에서는 미국 대중가요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는 미국 대중가요의 세력이 국산 대중가요에 의해 밀려난 형국을 보여준다. 이는 미국 대중가요의 직접적 영향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미국음악의 나쁜 영향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복음성가의 경우도 비슷하다. 미국에서 불리는 복음성가 중에는 대중음악 장르로 교회와 무관한 음악들이 많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복음성가들은 교회적인 것들이 많다. 그리고 한국에서 만들어진 복음성가들은 대체적으로 교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② 사람이 나이 들면 젊을 때의 탐닉을 부끄워하게 된다. 나이와 함께 생각이 변하는 것이다.
(7) 잘못 나가는 것이 확연할 경우 엄히 꾸짖는다(아모스의 원칙)
(1)에서 (7)번까지는 여러 가지 단계를 나타낸다. (2)에서 (6)번까지는 쉽게 얘기되었지만, 대단히 실행이 어렵다. 그러나 실행된다고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