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카(Paul Abraham Dukas, 1865빠리-1935빠리)
뒤카는 라인강 상류에 위치한 엘자스 지역의 유태인 태생으로 1865년 10월 1일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1935년 5월 17일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파리 콘서바토리에서 지로(Ernerst Guirauds)에게 작곡을 배우면서 드뷔시와 친했다. 이러한 우정의 증거는 드뷔시의 <la demoiselle="" élue="">(1887-88)의 헌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뒤카를 무조건 드뷔시의 추종자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 외에도 뒤카의 우정은 당디(d' Indy), 그의 제자 프랑크(Franck), 『바그너 리뷰』(Révue Wagnérienne)의 편집자인 뒤쟈르당(Édouard Dujardin)과 이어졌다. 이러한 뒤카의 인간관계의 폭은 뛰어난 독창적 정신의 고전주의자 생상(Saint-Saëns)에게까지 이르렀고, 생상의 영향은 그의 C장조 교향곡(1895-96)과 유명한 오케스트라 작품 『마법사의 제자』(L'Apprenti Sorcier, 1897)에서 잘 나타난다.
뒤카는 높은 지식의 문학적,철학적 교육을 받았으며, 스스로에 대한 진지함과 엄격함의 소유자였다. 그의 학창시절의 작품들, 비공개작품들, 소실된 작품들 그리고 몇 개의 행사용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그의 창작 시기는 20년을 거의 넘지 않는다. 이 기간은 『폴뤽트 서곡』 Polyeucte, 1891)부터 무용시 『라 페리』(La Péri, 1911-12)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동안에 위에서 언급한 2개의 오케스트라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2개의 중요한 피아노작품들이 있다: 『eb 소나타』(1911-12), 『라모의 주제에 대한 변주곡』(약 1899-1902, 1907년 출판). 여기에 메테르링크(Maurice Maeterlinck)의 극에 의한 주요 오페라 『아리아느와 푸른 수염』(Ariane et Barbe-Bleue, 빠리, 파리 1907)를 들 수 있다. 이것들보다 규모가 더 작은 작품들로는 호른과 피아노를 위한 『빌라넬』(Villanelle, 1906, 이것은 콘서바토리의 호른클래스를 위한 경연대회작품임), 하이든 서거 10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HAYDN의 이름에 의한 피아노 작품 『비가적 전주곡』(Prélude élégiaque, 1908) 및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보칼리즈 연습곡』(Vocalise-étude, 1909)을 들 수 있다. 단지 2개의 작품들만이 1912년 이후에 알려졌는데, 이 작품들은 『음악 리뷰』(Revue musicale)에 실렸다. 즉, 『드뷔시의 무덤』(Tombeau de Debussy), 피아노작품 『먼 곳에서 들리는 목신의 탄식』(La Plainte, au loin, de faune, 1920), 이 작품의 제목과 음악모티브적인 측면은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L'après-midi d'un faune)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롱자르(Pierre Ronsard)의 시에 의한 『소넷트』(Sonetts, 1924)가 있다.
뒤카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작곡을 하지 않았는지는 많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뒤카의 제자 메시앙은 그의 너무 폭넓은 교육이 바로 회의, 불안, 부정주의를 낳게 한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실제로 그의 서신왕래에서 이러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특히 1893년 10월 댕디(d'Indy)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잘 엿볼 수 있다. 그 당시 뒤카는 자신의 텍스트에 의한 오페라 『호른과 린넨힐드』(Horn et Rimenhild) 작곡을 중도에 포기한 상태였고, 이것은 계속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뒤카의 침묵에 대한 또 다른 원인은 이 시점에 <신음악>(Neue Musik)이 출현하였다는 점이다. 뒤카는 당시 파리에서 초연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1913)을 경험할 수 있었으며, 이미 1912년에는 벨레즈(Egon Wellez)가 “쇤베르크와 비엔나 악파”에 대한 주제로 『음악 리뷰』에 논문을 게재했고, 이와 함께 쇤베르크의 제2현악4중주 op.10의 제3악장 『라타나이』(Litanei)도 악보로 첨부되었던 때였다.
뒤카는 수많은 비평문과 에세이를 썼는데, 거기에서 쇤베르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스트라빈스키의 경우는 단지 그의 『결혼』(Les Noces, 1923)에 대해 썼을 뿐이었다. 뒤카의 비평가 경력은 1892년 런던에서 말러의 지휘로 연주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와 함께 시작했다. 그의 비평가 경력의 절정은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Pélléas et Mélisande)의 초연에 대한 비평문과 당시 많은 프랑스 작곡가들에게 운명적인 의미를 가져다 준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에세이에서 도달했다. 동시에 뒤카는 바그너 모방과 그 이론에 반대했다. 실제로 뒤카는 상징적 음악극의 주요작품들로 간주되는 자신의 오페라에서 바그너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의 오케스트라 훌륭한 독자성이 있다고 인정되지만, 동시에 바그너와 드뷔시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등록일자: 2005-02-07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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