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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비히, 크리스티안 [Cannabich, Johann Christian Innocenz Bonavent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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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칸나비히(Johann Christian Innocenz Bonaventura Cannabich, 1731-1798)

[18세기 독일 음악사에 처음 등장한 칸나비히 가문은 마틴 프리드리히 칸나비히(Martin Friedrich Cannabich, 1700?-1773)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칸나비히(Johann Christian Innocenz Bonaventura Cannabich, 1731-1798)와 크리스티안의 아들 칼 콘라트 칸나비히(Karl Konrad Cannabich, 1771-1806)를 통해 3대에 걸쳐 선제후 칼 테오도르의 만하임 궁정과 뮌헨 궁정에서 음악가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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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칸나비히 (Johann Christian Innocenz Bonaventura Cannabich, 1731-1798)는 18세기 독일의 바이올린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칸나비히 가족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크리스티안 칸나비히는 만하임 궁정의 플루트 연주자 마틴 프리드리히 칸나비히의 둘째아들로서 1731년 12월 28일 만하임에서 세례를 받았다. 크리스티안 칸나비히는 소위 만하임악파의 설립자로 불리우는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에게 바이올린과 작곡을 수학하였으며, 13세의 어린 나이에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만하임의 선제후 칼 테오도르는 칸나비히가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후원했다. 음악학자 산드베르거(A. Sandberger)는 크리스티안 칸나비히가 로마에서 니콜로 욤멜리(Nicolo Jommelli)에게 수학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칸나비히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1757년 사망한 요한 슈타미츠의 후임으로 1758년 만하임 궁정오케스트라의 수석연주자(Konzertmeister)를 역임하였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험은 슈투트가르트에서 활동하고 있던 욤멜리와 함께 팔츠지방의 오페라 부파(Opera buffa)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칸나비히는 이탈리아의 오케스트라 기법과 선율을 사용하였으며, 또한 밀라노에서 소나타양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삼마르티니(Sammartini)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만하임의 궁정음악은 슈타미츠에 의해 기악음악이 크게 발전하고 있었으며, 슈타미츠의 사망 후 칸나비히는 만하임 궁정오케스트라 음악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칸나비히는 수석연주자로 활동하면서 700 플로린(굴덴)의 연봉을 받았으며, 1759년 마리아 엘리자베트 드 라 모트(Maria Elisabeth de la Motte)와 결혼하였다. 이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에 모차르트가 만하임에 머무를 때 모차르트에게 음악을 배운 로지나 테레지아 페트로넬라(Rosian Theresia Petronella)와 나중에 뮌헨 궁정의 음악감독이 되는 칼 콘라트(Karl Konrad)가 있다. 
1764년 칸나비히는 츠바이뷔뤼켄(Zweibrücken) 영주 크리스티안 4세 대공과 함께 빠리에 가서 자신의 작품을 출판했다. 당시 대공 크리스티안 4세는 프랑스 문화를 만하임에 소개하는 역할과 함께, 만하임의 음악가들을 데리고 빠리에 가서 작품을 소개하고, 또한 출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츠바이뷔뤼켄 영주 크리스티안 4세 대공과 함께 문화의 중심지 빠리에 가서 출판한 음악가들은 칸나비히 외에도 토에스키(K.J. Toeschi)와 벤들링(J.B. Wendling) 등이 있다.  
1766년에 다시 칸나비히는 6곡의 교향곡과 6곡의 트리오에 대한 출판 특허권을 받았으며, 여러 곡들이 빠리의 출판사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는 1760-1770년대에 만하임을 대표하는 수석연주자이자 작곡가로서 교향곡과 실내음악 분야뿐만이 아니라 발레음악 분야에서도 유럽에서 크게 명성을 얻었다. 
칸나비히는 1774년 기악음악감독(Direktor der Instrumentalmusik)으로 명명되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칸나비히의 연봉이 1800 플로린이었다고 한다. 칸나비히의 집은 만하임의 예술가와 음악애호가들, 또는 유명한 여행자들의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였다. 이 여행자들은 이후 만하임 궁정음악들, 특히 궁정 오케스트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게 된다. 칸나비히는 1777년 젊은 모차르트가 만하임에 직장을 구하러 왔을 때 다방면으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었다. 모차르트는 그 답례로 칸나비히의 딸 로자 칸나비히(Rosina Cannabich)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피아노 소나타를 헌정하기도 했다.  

1777년 뮌헨 영주의 사망으로 바이에른 지역을 상속받게 된 만하임의 영주 칼 테오도르는 1778년에 뮌헨으로 이주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가 있는 이 사건을 통해 만하임 궁정의 음악가들은 만하임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뮌헨으로 이주 할 것인지에 대한 매우 난처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비록 자유로운 선택이었지만 궁정에 소속된 수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뮌헨으로의 이주를 결정하게 되었다. 1778년 칸나비히는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뮌헨으로 이주하여 뮌헨 궁정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만하임 음악가의 3/4정도가 뮌헨으로 이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대규모 이주는 결국 만하임악파의 쇠퇴와 소멸을 초래하게 되었다.
칸나비히는 뮌헨으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1788년 실내음악감독(Kabinetts-Musikdirektor)이었던 토에스키(K.J. Toeschi)가 사망하자 뮌헨 궁정의 유일한 음악감독이 되어 그 영향력이 더욱 커졌으며, 그의 발레작품들은 뮌헨뿐만 아니라 빠리, 베를린, 카셀 등지에서 공연되었으며 그의 교향곡도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노년이 되어 당시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음악 취향에 밀려 칸나비히는 과거의 명성을 잃고,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am Main)에서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던 아들 칼 콘라트를 방문하는데, 그곳에서 1798년 1월 20일 사망하였다.

칸나비히는 바이올린연주자에서 수석연주자(Konzertmeister) 그리고 지휘자로 성장하였다.  힐러(J.A. Hiller)는 칸나비히의 바이올린 연주에 대해 민첩하면서도 유연하게 아름다운 소리를 연주했다고 평가했다. 슈바르트는 칸나비히가 새로운 현악기 활기법(Bogenlenkung)을 개발했다고 전하고 있다. 칸나비히는 또한 슈타미츠가 마련한 오케스트라 연주기법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그는 바이올린을 연주 하면서 지휘를 했는데, 고개의 움직임이나 팔꿈치의 움직임으로 오케스트라 전체의 통일성을 통제 할 정도였다고 한다. 찰스 버니는 만하임의 오케스트라를 “장군의 군대”(Armée von Generälen)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칸나비히는 슈타미츠를 통해 익힌 여러 가지 기법을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통해 표현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천둥치는 것 같은 포르테와 속삭이는 듯 한 피아노, 독특한 크레센도와 데크레센도 등이 있다. 이러한 연주는 당시로는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칸나비히는 오케스트라 악기편성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는데,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플루트를 2관으로 편성하여 오보에와 동격으로 취급하거나, 클라리넷을 선율악기로 사용하는 등 새로운 면을 선보였다.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클라리넷의 새로운 기능을 알게 되었고, 칸나비히의 가르침을 통해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기법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시대의 칸나비히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그의 인간성과 인격에 대한 평가가 한결같이 일치한다.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슈바르트(C.D. Schubart)는 칸나비히를 “독일 최고의 감성”(das "beste deutsche Herz")이라고 평가했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칸나비히를 성실하고 유능하며, 최고의 음악 감독이라고 평했다. 
칸나비히는 그 시대의 최고의 지휘자이자, 오케스트라 연주 기법을 향상시킨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현악기 연주법을 통해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오페라와 발레 음악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는 동시대의 갈루피(Galuppi), 핫세(Hasse) 그리고 욤멜리(Jommelli) 등과 같이 크게 각광 받는 작곡가였다. 18세기 독일음악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통해 다양한 발전과 변화의 초석을 쌓았으며, 만하임 궁정오케스트라를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칸나비히의 음악은 세월의 흐름과 음악사조의 변화에 의해 오랜 시간 잊혀진 음악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주요작품:
오페라:『Azakia』(1778년 만하임), 『La croisée』 (1788년 빠리)
멜로드라마: 『Elektra』 (1780년 만하임)
약 40곡의 발레음악
약 91개의 교향곡
다수의 바이올린협주곡, 오케스트라트리오, 실내악곡 등등.

새롭게 출판된 악보들:
『교향곡 Bb장조』(DTB VIII, 2, 라이프치히 1907)
『서곡 C장조』 (DTB VIII, 2, 라이프치히 1907)
『현악4중주 e단조, op. 5 Nr. 2』 (DTB XV, 라이프치히 1914)
『플루트 협주곡 D장조』 (Alte Musik, Leuckartiana XXIXb, 뮌헨 1962)
『6개의 바이올린(또는 플루트) 이중주』(함부르크 1963)
『플루트, 바이올리, 비올라 그리고 첼로를 위한 4중주』 (빌헬름스하펜 1963)
『오보에(또는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첼로(또는 바순)를 위한 4중주』 (비엔나 1970)

등록일자: 2006-01-26
이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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