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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Rachmaninow, Sergej Wassiljewit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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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Sergej Wassiljewitsch Rachmaninow, 1873-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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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노브고로드(Nowgorod) 주에 위치한 오네그(Oneg)에서 세르게이 바실리에비치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의 귀족이며 근위대의 대장이었던 부친과 교양이 높은 모친 사이에서 1873년 4월 1일(그의 생일이 3월 20일이라는 설도 있다)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에게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나이 9세 때에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그의 가족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9세 때부터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12세 때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원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1885년부터 니콜라니 츠베레프(Nikolay Zverev, 스크리아빈 역시 그의 제자이었다)에게 피아노를 사사하기 시작한다. 츠베레프는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기 때문에 라흐마니노프는 아침 6시부터 피아노 앞에 앉아야 했으며, 연습 외에도 때때로 다양한 연주회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 사이에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을 하였지만 츠베레프의 지나친 간섭과 불화로 자신의 사촌형이며 피아니스트인 알렉산더 질로티(Alexander Ziloti)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함과 동시에 타네예프(Taneyev)와 아렌스키(Arensky)에게서 작곡을 공부했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탁월한 피아니스트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1세부터 시작된 그의 창작세계는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하기 전까지인 20대 초반까지 이미 여러 곡의 노래를 비롯한 소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라흐마니노프가 이 시기에 작곡한 대부분의 소품들은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이며, 특히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해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연탄곡으로 편곡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892년에 작곡된 5곡의 환상적 소품 가운데 세 번째 곡인 "전주곡 c-sharp 단조"를 들 수 있으며, 이 작품은 후에 뉴욕에서 있었던 한 자선음악회에서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하여 백만달러를 모금하는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나이 24세 때인 1897년 발표한 교향곡 제1번이 실패하자 큰 충격을 입고 창작에서의 그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심리학자인 니콜라이 달(N. Dahl)박사의 도움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1901년 그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완성하고 같은 해 10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연주로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그는 이 협주곡을 달박사에게 헌정한다.

   제2번 협주곡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운명적으로 나타나는 잠재의식 속의 테마를 노래한다. 그는 이 작은 동기로부터 감각적인 표현을 이끌어내어 서정적 선율로 보여 주고 있는데, 이 우울한 느낌의 주제는 현악기들만으로 연주가 되고 피아노는 제2주제의 풍부한 선율을 노래하고 있다. 이 제1악장에서 그는 러시아풍의 기질을 음악적인 형상으로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여기서 그는 비애와 억눌린 분노, 격정 그리고 애수, 섬세함, 따뜻함을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손의 뛰어난 기교를 바탕으로 노래하고 있으며, 이러한 면은 제2악장에서 피아노가 목관악기군과 더불어 꿈같은 대화를 펼치고 가운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협주곡에서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주관적인 선율을 노래하고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와 더불어 한 개인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를 밑그림으로 그리게 한다. 라흐마니노프는 제2번 협주곡을 통해 현대의 인간이 느끼고 있는 고독함과 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완전한 자유와 독립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점들을 현대의 예술가들이 처한 상황을 미루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906년 그는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옮겨서 작곡과 연주에 몰두하였으며, 1909년에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작곡하였다. 그는 이 협주곡을 미국에서의 연주를 위해 작곡하였다고 말하였으며, 그 해 가을에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11월 28일 뉴욕에서 자신의 연주로 초연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피아니스트로서 전 미국을 연주여행을 하며 원숙한 피아노 연주로 호평을 받았다.

   제3번 협주곡은 그의 제2번 협주곡에서 음악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미 초연 당시부터 이 협주곡은 연주불가능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음악적으로 라흐마니노프는 앞의 제2번 협주곡에서 제시한 문제들을 여기서 더욱 강한 표현과 기능으로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다. 이 작품에서의 피아노 선율은 점점 더 전체 화성에서 멀어지고 있지만, 의심할 수 없는 창조성과 본질로서 전체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바로 그 자신이 인생의 시작점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 비슷하다. 이 협주곡의 제3악장에서 피아노의 선율은 점점 더 몰아치며 강해지고 웅장해지는 등 피아노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을 이끌어 내고 있다. 반면에 오케스트라는 짧은 응답과 더불어 선율을 모방하며 진행하는데, 이는 제2번 협주곡에서 보여 준 오케스트라의 모습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의 체류를 마치고 라흐마니노프는 잠시 모스크바에서 음악생활을 하였지만 1917년 10월혁명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떠난다. 그는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파리와 드레스덴 그리고 스위스에서 잠시동안 머물렀으며 1918년 미국에 도착한다. 이후 15년 정도 작곡에 전념하기보다는 주로 피아노 연주자로서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제외한 전유럽에서 활동하였다. 라흐마니노프가 이때에 창작보다는 연주에 전념한 이유는 창작만으로는 그가 가장 아끼는 가족의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이유로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혼신의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라흐마니노프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한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가 남긴 말년의 대표작으로 1931년에 작곡한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가 있다.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 제시된 주제는 본래 코렐리가 작곡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지역의 민속무곡에서 인용했기 때문에 라흐마니노프는 제목에 제시된 코렐리라는 이름을 나중에 빼길 원했다. 이 작품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시종일관 죽음과 이별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살아왔던 생애를 피아노를 통하여 노래하고자 하는 인상을 갖게 한다. 이 같은 죽음과 이별을 느끼게 하는 테마는 그의 말년 작품들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934년에 그는 스위스 여행을 갔다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착상하고 같은 해 8월에 완성하여 11월에 스토코프스키의 지휘아래 자신이 피아노 독주를 맡아 초연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뛰어난 기교와 아름다운 선율을 훌륭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1942년 초에 그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연주회의 일정을 계속하다가 1943년 2월 17일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병석에 눕고 곧이어 1943년 3월 28일 캘리포니아의 비버리 힐즈에서 세상을 떠났다.

   19세기 후반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양식과 더불어 피아노 연주의 거장으로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를 통해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그가 피아니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하던 20세기초반부터 전세계의 음악적 경향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자신만의 예술적인 이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20세기 음악을 이해하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고 솔직히 언급하였다. 자신만의 길을 고집했으며, 이를 통하여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피아노음악들을 작곡하고 그것들을 뛰어난 연주로 남기고 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꼼꼼함이나 리드미컬한 추진력, 유연함 그리고 작품 해석에 있어서의 명료함으로 유명했으며, 연주에 있어서의 폭넓은 구상으로 유명했다. 자신의 선과 형식을 잘 나타내주는 작품들을 연주함으로써 정통적 러시아의 낭만주의를 보여 주는 멜랑코리한 면과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하는 그의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선생들로부터 이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은 피아노협주곡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음악인 오페라, 교향곡, 교향악적 무곡 그리고 교향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세계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스크리아빈과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스크리아빈이 프랑스 인상주의 기법과 신비주의를 토대로 음악을 펼쳤다면,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서처럼 민족적인 특성과 후기 낭만적인 어법을 혼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작곡가들의 음악에서 쇼팽과 리스트의 영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스크리아빈이 그들의 어법을 수용한 채 작품을 창작하고 연주하였다면, 라흐마니노프는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을 엄격한 훈련을 통해 얻은 기교와 깊은 음악성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스크리아빈이 오직 자신의 작품만을 연주했고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반면에 연주에 있어서 놀라운 기교를 지녔던 라흐마니노프는 베토벤, 슈만, 쇼팽, 리스트, 차이코프스키 등의 작품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였으며, 특히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과거의 대작들과 자신의 작품과 편곡들을 연주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스크리아빈의 연주를 이지적이며 감각적인 터치를 들어 칭찬하였고, 라흐마니노프에게서는 노래하는 듯한 음을 좋아하였는데, 마치 피아노가 그의 손길 아래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고 평하고 있다. 그의 노래하는 듯한 연주는 특히 반주자로서의 명성도 함께 얻게 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당대의 유명한 성악가인 샬리아핀의 반주를 맡아 연주를 하였는데, 반주자로서 그는 성악가와 같이 호흡하는 방법을 익혀 음악의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그는 자신의 피아노 작품들을 연주함에 있어서 스스로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특출한 음기교와 피아니스트로서의 유연함을 요구하였으며, 그것들을 단순한 기교로서가 아니라 깊은 음악성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삼도록 하였다.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음악은 자신의 삶에서 보여준 점, 즉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노래한 것이며, 사람들이 그를 "d 단조의 작곡가"라고 부른 것처럼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단조의 조성을 가진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과 힘은 우리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하며, 정신적으로 평안함을 얻게 함과 동시에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차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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